여포(呂布)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자는 봉선(奉先)이며 병주(幷州) 오원군(五原郡) 구원현(九原縣) 사람이다. ‘마중적토 인중여포(馬中赤兎 人中呂布)’라는 말로 표상되듯 신기에 가까운 무예로 천하의 명성(名聲)을 얻었다. 동탁(董卓)의 부하였으나 왕윤(王允)과 공모하고 동탁을 죽여 왕윤 정권의 군사적 중추(中樞)에 있었으며 이각(李傕) · 곽사(郭汜) · 장제(張濟) · 번조(樊稠)와 싸워 져 왕윤 정권을 몰락(沒落)시켰다. 이후 각지를 떠돌다 서주(徐州)를 근거지로 조조(曹操)와 맞섰으나 패망(敗亡)하고 처형되었다.
여포의 생애 힘이 세고 궁마술(弓馬術)에 능숙하여 전한 무제 때의 명장(名將)인 이광(李廣)에 비유되며 비장(飛將)이라 일컬어졌다. 병주자사(幷州刺史) 정원(丁原)이 특별히 중용해 주부에 임명되었으나 이숙(李肅)의 꾐에 넘어가 정원을 죽이고 동탁을 섬겼다.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정원은 여포의 의부(義父)였으며 동탁이 선물한 적토마(赤兎馬)의 유혹에 넘어가 정원을 죽였다고 묘사(描寫)한다.
동탁의 수하 시절 동탁(董卓)은 여포(呂布)를 자신의 수하로 넣자 암살(暗殺)을 두려워해 여포로 자신을 곁에서 호위(護衛)하게 했다. 하지만 동탁의 포악(暴惡)스러운 성격은 결국 여포와의 갈등(葛藤)을 불렀다. 동탁이 술에 취해 길길이 날뛰며 여포의 얼굴을 향해 수극(手戟)을 내던진 일로 인해 여포의 마음속에는 동탁에 대한 원망(怨望)의 마음이 싹텄다. 또한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사통(私通)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동탁에게 발각될까 두려워하였다. 당시 사도 왕윤(王允)은 황제의 권위를 무시하고 폭정(暴政)을 일삼고 있던 동탁을 죽일 계획(計劃)을 꾸미고 있었다. 동탁과 여포의 사이가 벌어진 것을 기회로 여포를 동탁 주살(誅殺) 계획에 끌어들인다. 천자가 미앙궁(未央宮)으로 신하를 소집했을 때 동탁을 불려들여 여포는 동탁을 죽이고 그의 삼족(三族)을 멸했다. 이때가 192년(초평 3년) 4월이었다.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동탁을 섬기게 된 여포는 동탁과 부자의 서약(誓約)을 맺었으나 왕윤의 이간책(離間策)에 의해 동탁과 여포 사이가 벌어졌는데 그 원인을 왕윤의 양녀인 초선(貂蟬)을 둘러싼 다툼으로 묘사(描寫)한다.
동탁 사후 동탁(董卓)을 죽인 후 여포(呂布)는 분무장군(奮武將軍)에 임명되고 온후(溫侯)에 봉해졌고 조정의 정사를 담당(擔當)했으나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동탁의 무리였던 이각(李傕)·곽사(郭汜) 등에게 패하여 장안(長安)을 빼앗겼다. 여포는 원술(袁術)에게 몸을 맡겼다. 원술은 처음에는 그를 무척 후대(厚待)했으나 여포는 자신이 동탁을 죽였으므로 원씨의 복수(復讎)를 한 공이 있다고 믿어 마음대로 군사들을 풀어 노략질을 일삼으니 원술은 여포를 근심거리로 여겼다. 여포는 이를 두려워하여 달아나 하내(河內)의 장양(張楊)을 따랐는데 이각 등이 여포에게 현상금(懸賞金)을 걸어 여포를 찾자 장양 휘하의 제장(諸將)들은 모두 여포를 도모(圖謀)하려고 했다. 여포는 장양에게 자신을 죽이기보다는 산 채로 넘기는 것이 더 공이 크게 않겠냐며 시간을 끌다가 곧 달아나 원소(袁紹)에게 항복(降伏)한다.
원소(袁紹)는 상산에서 장연(張燕)을 공격할 때 여포를 부장으로 종군(從軍)시켰는데 이때 여포는 명마인 적토마(赤兎馬)를 타고 전장을 질주하며 맹활약(猛活躍)했다. 후한서 여포전에 의하면 여포는 적토를 타고 능히 적의 해자(垓子)를 뛰어넘으며 성렴(成廉), 위월(魏越) 등 수십 기(騎)와 함께 말을 달려 장연의 진(陣)에 부딪치며 하루에 때로 3-4번에 이르기까지 맹렬히 싸워 적들을 모두 참수하고 빠져나왔다고 한다. 이때의 활약상으로 사람들이 여포를 일컬어 “사람 중에 여포요, 말 중에 적토가 있다(人中呂布 馬中赤兎)”라고 했을 정도였으나 여포는 이 공을 믿고 다시 교만(驕慢)하며 영내에서 마음대로 군사를 늘린 데다가 원소의 수하들은 대개 원소가 임의로 관직(官職)을 임명한 반면 여포는 천자에게서 직접 관직을 임명받았다 하여 여포는 항상 원소의 제장들을 업신여겼다. 또한 원소의 영토(領土)에서 노략질을 일삼았으므로 원소 역시 여포를 골칫거리로 여기게 되었다. 여포는 이를 두려워하여 낙양(洛陽)으로 가겠다고 말하며 스스로 떠나기를 청했다.
원소(袁紹)는 이를 승낙해 임의로 자신이 칭하고 있던 사례교위(司隷校尉)의 관직을 여포(呂布)에게 주며 장사들을 보내 여포를 전송하게 하는 한편 그들에게 여포를 암살하라는 지령(指令)을 내렸으나 이를 눈치챈 여포는 다른 사람을 시켜 군막 안에서 쟁(箏)을 켜게 하며 자신은 몰래 달아났다. 암살(暗殺)이 실패한 것을 안 원소는 군사를 보내 여포를 뒤쫓았으나 추격병(追擊兵)들 중 여포의 무용(武勇)을 두려워하여 가까이 접근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여포(呂布)는 다시 장양(張楊)에게 의탁했지만 장양은 원소(袁紹)의 미움을 살 것을 두려워했으므로 여포는 장양 밑에서도 오래 있지 못해 장막(張邈)에게 의탁했다. 장막은 조조(曹操)가 서주의 도겸(陶謙)을 치러 본거지를 비웠을 때 여포 등과 합세하여 복양(濮陽)을 점거하고 조조를 위기로 몰아넣었지만 결국엔 조조(曹操)에게 패배해 장막은 원술에게 구원을 요청하러 가던 도중 살해당했고 여포는 장막의 부하들을 이끌고 유비(劉備)에게 몸을 의탁한다.
유비(劉備)가 원술(袁術)과 싸우는 틈을 타 여포(呂布)는 배신하여 하비(下邳)를 점거하고 서주(徐州)를 취하고 서주자사(徐州刺史)라고 칭하였다. 원술은 이를 기뻐하며 여포와 우호관계(友好關係)를 맺었다. 유비는 원술에게 패하고 갈 곳이 없게 되자 여포에게 귀의(歸依)했는데 원술이 기령(紀靈)을 보내 유비를 토벌하려 하자 여포는 화극(畵戟)에 화살을 맞추는 무용을 선보이며 기령을 돌려보냈다. 원술은 이후 한윤(韓胤)을 사자로 보내 황제를 참칭(僭稱)할 생각을 여포에게 알리고 사돈을 맺으며 결속을 굳건히 할 것을 권했는데 여포는 이 혼담(婚談)을 승낙하고 딸을 원술에게 보냈지만 진규(陳珪)의 설득에 넘어가 군사를 보내 이를 뒤쫓으며 혼담을 파기(破棄)했다. 또한 한윤을 붙잡아 형틀에 묶은 채로 조조에게 보냈다. 한윤은 허도(許都)의 저자거리에서 참수(斬首)되어 목이 내걸렸고 조조는 여포를 좌장군에 제수(除授)했다.
원술(袁術)은 대노하여 그의 대장 장훈(張勳), 교유(橋蕤)에게 수만 명을 지휘하게 하고 한섬(韓暹), 양봉(楊奉)과 세력을 연결하며 일곱 갈래 길로 여포(呂布)를 공격했다. 여포는 이에 크게 두려워하며 진등(陳登)을 힐책했으나 진등은 한섬과 양봉은 원술과 막 합세(合勢)했으므로 그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진언(進言)했으므로 마침내 편지를 보내 원술군을 격파(擊破)하면 그 노략한 군수물자를 모두 그들에게 주기로 약속(約束)했다. 한섬과 양봉은 이에 계획을 바꿔 여포를 따르기로 결심했고 여포가 진군(進軍)하여 원술군의 둔영(屯營)과 불과 1백 보가량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한섬과 양봉의 군사들이 동시에 이들을 공격하자 원술의 장군 10명이 죽었고 전사자(戰死者)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뒤 여포(呂布)는 또 한섬(韓暹), 양봉(楊奉)의 2군과 함께 수춘(壽春)으로 향하며 지나는 곳마다 노략(擄掠)했다. 종리(鍾離)에 이르러 크게 노획(鹵獲)하고 되돌아갔는데 회수(淮水)를 건너 그 북쪽에 도달(到達)한 뒤 원술(袁術)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귀하는 군(軍)이 강성한 것을 믿고 늘 호언(豪言)하기를 휘하의 맹장과 난폭(亂暴)한 무사들이 서로 죽이고자 하여 늘 이를 억제(抑制)한다고 하셨소. 내가 비록 용맹하지 못하지만 회수(淮水) 남쪽에서 한때의 시간 동안 범처럼 거닐었는데 족하는 수춘(壽春)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고 고개를 내미는 자조차 없으니 맹장(猛將), 무사들은 모두 어디에 있단 말이오? 족하(足下)는 큰 소리 쳐서 천하를 속이는 것을 좋아하지만 어찌 천하인들을 모두 속일 수 있겠소? 옛날 군사들이 교전(交戰)할 때에도 그 사이에 사신은 오갔고 책략(策略)을 꾸미는 것도 나 여포(呂布)가 먼저 주창(主唱)한 일이 아니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니 다시 소식 전할 수 있을 것이오.”
이에 원술(袁術)이 대노하여 친히 보기 5천을 이끌고 회수(淮水)가에 이르렀으나 여포군은 이미 모두 회수를 건넌 뒤였다. 여포(呂布)와 그의 기병(騎兵)들은 모두 회수 북쪽에서 크게 비웃은 뒤 되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원술은 세력을 만회하고자 진(陳)국을 점령하고 진왕 유총(劉寵)을 죽였으나 이 직후 조조(曹操)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완전히 몰락(沒落)하고 만다.
198년 여포(呂布)는 다시 원술(袁術)과 연합하여 조조(曹操)에게 맞섰다. 조조가 친정(親征)에 나서 여포를 포위(包圍)하자 여포는 항복하고자 했으나 진궁(陳宮) 등은 그 계책을 저지(沮止)했다. 한편 원술은 기병 1천기를 이끌고 직접 여포를 구원(救援)했으나 조조의 반격에 패퇴(敗退)하여 도망쳤으며 간신히 성을 지킬 뿐 다시는 여포를 구원할 수 없었다. 진궁은 여포를 설득(說得)하여 자신은 성을 지키고 여포가 병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조조의 군량(軍糧)을 끊으며 서로 협공(挾攻)한다면 조조를 물리칠 수 있다고 진언했으나 여포의 처가 이를 말리자 여포는 결국 진궁의 진언(進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삼국지(三國志)에 의하면 여포(呂布)는 꾀가 없고 시기심(猜忌心)이 많아 무리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제장(諸將)들은 뜻이 달라 서로 의심(疑心)했으므로 번번이 패했다고 한다. 조조(曹操)가 여포를 포위하고 3개월이 지났을 무렵 여포의 부장 후성(侯成)은 사소한 일로 여포에게 크게 책망(責望)을 받았는데 이 일로 인해 송헌(宋憲)·위속(魏續)과 함께 진궁(陳宮)을 사로잡은 뒤 군을 이끌고 조조에게 투항(投降)했다.
여포는 남은 부하들과 함께 백문루(白門樓)에 올라가 저항했지만 송헌(宋憲)·위속(魏續),후성(侯成)이 그를 묶어서 바쳤으므로 잡혔고 하비(下邳)는 함락 되었다.
여포의 최후 여포(呂布)는 조조(曹操)를 만나자 “묶은 것이 너무 조이니 조금 느슨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懇請)했으나 조조는 “범을 묶는데 꽉 조이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며 거절(拒絶)했다. 또 여포가 조조에게 말하길 “내가 제장(諸將)들을 후대했으나 제장들은 위급해지자 모두 나를 배반(背叛)했소”라고 했으나 조조는 이를 비웃으며 “경은 처를 저버리고 제장들의 부인(夫人)을 사랑했으면서 어찌 후대(厚待)했다 하시오?”라고 반문(反問)했고 여포는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여포(呂布)는 “명공(名公)께서 보병을 거느리고 나 여포에게는 기병을 거느리게 하면 천하의 평정(平定)이 실로 쉬울 것입니다”라고 하며 목숨을 구걸(求乞)했다. 조조가 이에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띄자 유비(劉備)가 조조에게 진언하길 “공께서는 여포가 정건양(丁建陽=정원)과 동태사(董太師=동탁)를 섬기던 일을 보지 못하셨습니까?”라 하자 조조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에 여포는 유비를 손가락질하며 “저 귀 큰 아이가 가장 믿지 못할 놈이다!”라고 외쳤다.
조조(曹操)는 곧바로 여포(呂布)의 목을 매어 죽였고 머리는 잘라서 허도(許都)로 보내 효수(梟首)하고 장사지내 주었다.
자기가 섬기던 사람을 둘이나 죽인 여포(呂布)는 ‘이리의 야심(野心)’을 가졌던것이다. 이익(利益)이 되면 의리(義理)도 돌아보지 않고 심지어 자기를 키워주고 후원(後援)해 준 은인(恩人)조차도 해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예부터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둬주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짐승은 길러준 공을 아는데 사람은 길러준 공(功)을 모를 뿐아니라 도리어 배신(背信)하기까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