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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사전 - 관우(關羽)

[삼국지 인물사전 - 관우(關羽)] 


관우(關羽, 162년? ~ 219년 음력 12월)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자(字)는 운장(雲長)이며 본래의 자는 장생(長生)이다. 사례(司隷) 하동군(河東郡) 해현(解縣) 사람이다.

동생 장비(張飛)와 더불어 유비(劉備)를 오랫동안 섬기며 촉한(蜀漢) 건국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충성심(忠誠心)과 의리, 당당한 성품으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수(將帥)로 손꼽히며 한대(漢代) 이후로 남송(南宋)의 악비(岳飛)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각 중국사서(中國史書)에 등장하는 후세사람들은 ‘용맹한 자’ 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관우(關羽), 장비(張飛)의 경우를 들어 말하였다고 한다.

의리(義理)의 화신(化身)으로 중국의 민담(民譚)이나 민간전승(民間傳承), 민간전설(民間傳說)에서 널리 이야기되었고 나중에는 신격화(神格化)되어 관제묘(關帝墓)가 세워졌다. 오늘날에도 관우(關羽)는 중국인들이 숭배(崇拜)하는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

생애 초반
정사 삼국지(正史 三國志)에는 관우의 탄생과 관련된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전장군관장목후조묘비명(前將軍關壯穆侯祖墓碑銘)”과 “사전비기(祀田碑記)”·“관공연보(關公年譜)”·“관제지(關帝志)” 등의 기록들과 민간(民間)에 전하는 여러 가지 설(說)들을 종합하자면 그는 대체로 환제(桓帝) 연희(延熹) 3년(162년 음력 6월 24일)에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다음 내용은 “성제세계고증(聖帝世系考证)”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관우(關公)의 가정 구성원에 대한 기록은 정사(正史)에는 거의 기재(記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중국 지방지(地方志), 민간전설(民間傳說)에 근거해서 그 내용을 살펴보자면 관우의 조부(할아버지)는 관심(關審)이며 자는 문지(問之), 호는 반석(磐石)이다. 90년(후한 화제 영원 2년 경인년) 생으로 해주 보지리 상평촌(解州 寶池里 常平村)에 거주했으며 항상 “역(易)”, “춘추(春秋)” 등의 책을 자식에게 가르쳤다. 157년(후한 환제 영수 2년 정유년)에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관우의 부친은 관의(關毅) 자는 도원(道遠)이며 아버지 관심이 세상을 떠나자 부친의 묘소에서 3년 상을 치렀다. 관의의 3년 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60년(후한 환제 연희 3년 경자년) 음력 6월 24일에 드디어 그의 아들 관우(關羽)가 태어났다.

관우는 성장하여 호씨(胡氏)와 혼인하였고 178년(영제 광화 원년 무오년) 음력 5월 13일에 그의 첫 아들 관평(關平)을 얻었다. 관평은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와는 달리 본래 관우의 친아들이자 그의 장남(長男)이다.

관우(關羽)가 탁군으로 이주하고 있을 때 유비(劉備)가 도당을 모집하는 것을 보고 장비(張飛)와 함께 찾아가 그의 호위를 맡았다. 유비는 언제나 관우(關羽)와 장비(張飛)와 함께 한 방에서 같이 지냈으며 그 정이 형제(兄弟)와도 같았다. 그러나 공적인 장소에서 관우는 하루 종일 유비 곁에서 호위(護衛)를 맡고 유비를 따라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게다가 키가 9척(약 2m7cm), 수염 길이가 2자(약 46cm)이며, 얼굴이 홍시처럼 붉고, 기름을 바른 듯한 입술, 붉은 봉황의 눈, 누에가 누운 듯한 눈썹 등의 풍모(風貌)로 묘사된다. 여기에 대장간에서 특수 제작한 무게 82근(한나라 때 1근 = 223g, 82근 = 18kg 286g)이 나가는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가 추가되어 오늘날의 관우상이 완성된다. 다만 청룡언월도는 한나라 때의 무기는 아니고(한나라 때에는 언월도가 아예 없었으며, 또한 (언)월도는 북방 민족의 무기이다), 삼국지연의에서 나관중(羅貫中)이 관우의 무기로서 꾸며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삼국지 관련 대중매체(大衆媒體)에서 항상 관우의 무기로 등장하는 ‘청룡언월도 (靑龍偃月刀)’ 의 근원(根源)은 그가 익양 대치 당시 노숙(魯肅)과의 회담에서 ‘한 자루의 칼 (대도)’ 만을 차고 회장에 나갔다고 하는 단도부회(單刀赴會)라는 고사에서 유래한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때 관우가 차고 있던 대도(大刀)가 후세에 점점 과장되어 송대(宋代)에 와서 청룡언월도라는 무기로 변하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정사 삼국지(正史三國志)와 중국 남북조 양나라 때 쓰여진 고금도검록(古今刀劍錄)이라는 서적 등을 참고하자면 관우의 무기는 언월도가 아닌 그냥 일반 칼, 대도, 삭, 모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우는 유비에게 총애(寵愛)를 받아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몸소 도산(陶山, 오나라 회계군 지역의 명산)의 철(鐵)을 캐서 칼 두 자루(쌍도)를 만들고 (거기에) ‘만인적 (萬人敵)’ 이라는 이름을 새겼다. 그러나 전투에서 패하자 그는 칼을 아끼는 마음에 물 속에 던졌다. — 도홍경(陶弘景), 고금도검록(古今刀劍錄)

실제로 관우 자전에서는 그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간결하다. 유비가 공손찬(公孫瓚) 밑에서 평원의 상(相)이 되었을 때 장비와 함께 별부사마(別府司馬)로 임명되어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는 기록 뿐, 그 후 이야기는 200년까지 건너뛰고 만다. 유비가 서주(徐州)를 차지하고 있을 때는 하비 태수(下邳太守)의 직무를 대행하기도 하였다. 다만 야사(野史)에서 관우는 콩을 팔면서 삶을 연명(延命)한 적이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백마 전투
200년 유비가 조조(曹操)에게 반기를 들어,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죽이자 관우는 하비성을 수비했다. 그러나 유비(劉備)는 조조에게 패해 하북의 원소(袁紹) 밑으로 도주하고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항복(降伏)했다. 조조는 관우를 후하게 대접하고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지만 관우는 조조 밑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조조가 장료(張遼)를 파견해 그의 의중을 떠보았을 때도, 관우는 “조조의 뜻은 알겠지만 나는 유비에게서 많은 은혜(恩惠)를 입어 함께 죽기로 맹세한 사이로 절대 배반(背叛)할 수 없다. 나는 결코 이곳에 머무르지 않을 터이지만 반드시 수훈을 세워 조조에게 은혜를 갚고 나서 떠날 생각이다”라고 대답한다.

원소는 “안량(顔良)은 편협해서 폭넓은 지휘권(指揮權)과 재량권을 줘서는 안 된다.”라는 저수(沮授)의 만류를 무시하고 안량에게 곽도(郭圖)와 순우경(淳于瓊)를 딸려 조조 휘하의 동군 태수 유연(劉延)이 지키는 백마진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조조는 장료와 관우에게 공격을 명했다. 관우가 멀리서 안량의 군기와 덮개를 보고는 말을 채찍질해 나아가 수만의 군졸(軍卒) 속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머릴 베어 돌아오니 원소(袁紹)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 능히 당해낼 자가 없었다.

삼국지에 따르면 조조(曹操)는 천자의 이름으로 관우에게 편장군이라는 관직을 내렸고 이는 관우가 천자(皇帝)에서 받은 첫 관직이었다. 그러나 관우의 마음에는 언제나 유비(劉備)가 있었다. 원소가 진군하여 양무(陽武)를 지키자, 관우는 원소군에 있는 유비를 찾아 떠났다(삼국지 위서 무제기). 떠날 때 하사품(下賜品)에 봉인을 하고 편지를 보내 이별을 고한 다음 조조의 곁을 떠나 유비에게로 향했고 조조의 측근이 추적(追跡)하려고 했지만 조조는 “사람에게는 각기 주인이 있으니 뒤쫒지 말거라” 라고 타이르며 그(關羽)를 조용히 보내주었다.

관우가 조조를 떠나면서 탄식(歎息)하며 말하기를 “조조 공께서 저를 후하게 대해 주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유비 장군에게 깊은 은혜를 받았기에 그를 배신(背信)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관우는 여포(呂布)가 소지하고 있던 적토마(赤兎馬)를 조조에게서 물려받았다. 하지만 말(馬)의 평균수명을 감안한다면 이것 역시 허구(虛構)이다. 만약 관우가 적토마를 타고 다녔다면 여포가 타고 다닌 적토마의 2세 ~ 3세에 해당되며 그 적토의 본마(本馬)는 아닌 것이다.

원소(袁紹)와의 전투에서는 안량(顔良)을 토벌하고 유비(劉備)의 편지를 받자 조조(曹操) 밑을 떠나 유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유비와의 재회
관우는 유비와 다시 만나 신야(新野)에 주둔하게 된다. 그런데 조조의 침공(侵攻)으로 유비가 도주하게 되었다. 이에 관우는 형주로 건너가서 유표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유표는 이를 수락(受諾)하였다. 유비가 조조에게 잡히기 직전 관우는 유표가 빌려준 배를 갖고 유비에게 와서 유비 일행은 그 배를 타고 도주에 성공했다. 그 이후 형주의 유표(劉表)에게 몸을 의지한다. 유표가 죽은 후 조조가 형주 평정(荊州平定)에 착수하자 관우는 수백 척의 군선을 모아 하구로 향해 오나라의 손권(孫權)과 연합해 조조의 대군을 격파(擊破)한다. 정사에서는 제갈량과 마찬가지로 촉한의 인물들이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적벽대전에서 용맹을 떨친 장수 역시 황개(黃蓋)와 한당(韓當)이며 관우와 장비 등은 아니다.

조조가 적벽에서 패주(敗走)할 당시 조조가 잃은 병선은 모두 형주의 병선이었으며 조조가 잃은 병사도 항복한 유종의 수 만 병력이었다. 즉, 지나치게 거대해진 조조의 세력에게 결정적인 타격(打擊)을 입히려면 패주하는 조조의 육군을 포착해 섬멸(殲滅)해야 했으나 퇴각로로 사용된 화용도(華容道)를 적벽대전이 발발하기 바로 직전에 조비가 길을 닦아놓았기 때문에 조조의 청주병은 거의 피해를 받지 않고 양양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이 때 관우는 조조를 화용도에서 추격하고 있었는데 관우는 추격을 저지(沮止)하기 위해 혼자 뛰어든 악진에게 패하고 추격을 멈췄다. 관우는 조조를 추격하였으나 홀로 나온 악진(樂進)에게 패했다.  — “삼국지”, ‘위서 악진전’

적벽대전 종결 이후 주유는 강릉으로 쳐들어가 강릉을 함락시키게 되고, 강릉을 수비하던 조인은 양양으로 퇴각하고 만다. 세상의 원칙상으로는 2만의 병력을 동원한 손권(孫權)보다 3만의 병력을 동원했던 유비쪽에 형주의 소유권(所有權)이 넘어가야 했지만, 주유가 강릉을 차고 들어앉아 그의 머릿속에 구상하고 있던 ‘양주, 형주, 교주, 익주, 서량을 병합한 천하이분지계’를 실행시키려 한다. 즉, 애초에 주유는 머릿속에 유비(劉備)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었다. 적벽대전 후의 상황에 대해 유비와 손권사이의 확실한 논의가 없었던 탓이다. 주유(周瑜)의 이러한 행동에 의해 갈등(葛藤)이 생기게 되었으며 상심한 유비는 마량의 헌책(獻策)을 받아들여 대신 형주 남부의 4군을 점령하여 수중에 넣게 된다. 때마침 병이 깊어진 주유가 병사(病死)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반유비파의 수장이었던 주유가 죽을 때 후일을 맡긴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친유비파의 거두인 노숙이었다. 이는 주유가 자신의 살아생전에는 반유비정책이 이롭다고 판단하였고, 병이 깊어져서 사망한 후에는 자신만큼 전술(戰術)을 운용하는 인물이 없다는 판단 하에 내실을 확고히 다지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친유비파의 노숙(魯肅)을 후임자로 택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노숙은 주유의 후임으로 선택되어 형주병을 그대로 넘겨받았으며 오나라의 부족한 인구로는 형주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 손권에게 형주를 유비에게 맡기고 장강 이남의 내실을 다지는 쪽으로 정책을 변경(變更)한다.

적벽 대전 이후
적벽 대전에서의 승리 후 유비가 강남의 여러 군을 지배하자, 관우는 양양태수와 탕구장군에 임명되어 양자강 북쪽에 주둔, 마침내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러 나서자 관우는 제갈량과 함께 형주의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도중에 유비의 군사 방통(龐統)이 전사하고, 익주에서 유비가 궁지에 빠지자 제갈량도 익주로 구원하러 나가 관우 혼자 형주에 남게 된다. 익주 평정 후 관우는 형주 군사총독에 임명되고, 3만의 군사로만 형주를 지키겠다고 하였다.

215년 손권은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것을 이유로 형주 반환(荊州返還)을 요구하며 남쪽 3개 군(장사, 영릉, 계양)에 관리를 파견하는데 관우가 이들을 쫓아냈다. 그래서 손권은 여몽(呂蒙)에게 명령해 3군을 공략하고, 익양에서 관우와 대치한다. 이 때 감녕(甘寧)이 단 1,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 건너에서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있는 관우를 도발(挑發)하며 싸움을 시도했으나 관우는 감녕을 두려워하여 감녕을 대적(對敵)하지 못하고 자재를 모아 진영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관우뢰(關羽瀨)라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우와 노숙(魯肅)에 의한 담판이 이루어지고 결국 유비는 조조(曹操)의 공격에 대비해 3군을 반환했다.

노숙이 장수들과 상의할 때 감녕은 당시 3백 명의 병사만 있었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시 저에게 5백 명을 증원시켜 줄 수 있다면, 제가 가서 그에게 대항하겠습니다. 관우는 제가 기침하며 가래침을 뱉는 것을 듣고 감히 물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물을 건너면 저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노숙은 곧바로 병사 1천 명을 선발하여 감녕(甘寧)에게 더해 주었다. 감녕은 그날 밤에 갔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건너지 못한 채 머물러 있으면서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 오늘날 이것을 관우뢰(關羽瀨)라고 부른다. 손권은 감녕의 공로를 칭찬하고 서릉태수로 제수했으며, 양신(陽新)ㆍ하이(下雉) 두 현을 통솔하도록 했다.— 《삼국지》, 〈오서 감녕전〉

서량의 마초(馬超)가 유비에게 항복했을 때는 제갈량(諸葛亮)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재능을 물어보았다. 제갈량은 관우의 성품을 잘 알고 답신하길 “마초(馬超)는 문무를 겸비한 당대의 걸물이나 미염공(美髥公)인 당신께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관우는 이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빈객(賓客)들에게 보여줬다. 또한 삼국지에는 이 시기 다음과 같은 일화(逸話)를 전하고 있다. 관우는 왼쪽 팔꿈치에 화살을 맞은 적이 있어 상처가 치료된 후에도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욱신욱신 뼈가 쑤셨다. 의원에게 진찰(診察)을 받아보니 “화살촉에 묻어 있던 독이 스며들고 있으므로 뼈를 깎아 독을 제거(除去)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판명되어 절개 수술을 행한다. 관우는 수술 중에도 연회를 즐기고 피가 가득 쏟아져 나와도 태연하게 담소(談笑)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관우가 악진(樂進)에게 패했을 때 일이다.

말년
219년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에 올랐을 때 관우는 전장군에 임명되었다. 관우는 번성을 공격하여 우금(于禁)을 생포하고 방덕(龐德)을 참수했다. 조조는 관우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허도를 떠나서 낙양(落陽)으로 천도할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지만 사마의(司馬懿)와 장제(蔣濟) 등이 손권의 군사를 이용하자는 건의를 듣고 실행하지 않았다. 한편 손권은 아들을 관우의 딸과 혼인시키려 해서 사신으로 제갈량의 친형인 제갈근(諸葛瑾)을 관우에게 보냈지만 관우는 허락하지 않았고 사신으로 온 제갈근(諸葛瑾)에게 범의 딸을 어찌 개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겠느냐는 욕설과 협박(脅迫)을 하는 등의 무례함을 범하였다.

관우의 번성(樊城) 포위 작전 때 손권의 지원군의 도착이 늦자, 손권을 오소리에 비유하며 모욕하였기에 손권은 관우를 탐탁찮게 여기고 있었다. 손권은 관우의 행동으로 인해 분개했지만 촉오가 동맹국(同盟國)인 관계로 참았다. 이후에 관우가 우금(文則)과 그의 휘하병력 3만 명을 포박한 이후 번성과 양양을 포위하자 식량이 빠른 속도로 고갈되었는데 관우는 식량 공급을 위해 오나라가 상관에 저축하고 있던 군량을 노략질했다. 이 사건이 손권으로 하여금 형주를 탈취할 결심을 하게 만든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였다. 위나라는 우금을 시켜 번성을 구하도록 했지만(219년 7월), 관우가 우금(于禁) 등 인마 수만 명을 모조리 포로로 잡았는데, 이로 인해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손권의 영지인) 상관(湘關)의 쌀을 마음대로 탈취하였다. 손권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행동을 시작하여 먼저 여몽(呂蒙)을 보내 앞에 가도록 했다.— “삼국지”, ‘오서 여몽전’

정사 오서 여몽전(呂蒙傳)에 의하면 관우는 손권의 군량고(軍糧庫)를 노략질하면서 다시 노략질하러 오기 위해 그 주변에 관측소(觀測所)를 설치했는데 이를 알아낸 여몽이 관우가 설치한 관측소들을 모두 찾아내어 철거(撤去)했다. 안 그래도 관우에게 무시를 당하고 있던 손권(孫權)이였는데 이 사건은 손권의 분노에 대한 도화선(導火線)이 되었으며 결국 참는 데에 한계를 느낀 손권은 결국 관우토벌령(關羽討伐令)을 내렸다.

손권은 당시 관우의 수하로 강릉(江陵)을 지키고 있던 미방(麋芳) 등을 회유하고 관우를 기습하여 남군을 점령하였다. 이때 관우(關羽)는 번성(樊城)과 양양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조인을 지원하기 위해 온 서황(徐晃)에게 패배하고 번성의 포위를 풀었다. 이때 남군이 손권의 손에 넘어갔다는 말을 들은 관우는 양양의 포위도 풀고 손권과 싸웠으나 여몽(呂蒙)의 계략으로 병사들이 전의를 잃어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맥성으로 달아났다. 포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손권에게 거짓 항복도 시도해 보았으나 간파(看破) 당했고 몰래 달아나려 했으나 주연(朱然) · 반장(潘璋) 등의 포위에 걸려 그의 아들 관평(關平), 사마 조루와 함께 반장의 부장 마충(馬忠)에게 사로잡혀서 거의 즉시 참수 당했다. 관우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이릉 전투(夷陵戰鬪)를 야기(惹起)시켰으며 유비와 장비의 죽음에 직,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유비는 관우를 장무후(張繆候)로 봉하고 그 아들인 관흥(關興)이 관우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 이후 촉한의 황제 유선(劉禪)이 등애(鄧艾)에게 항복하자마자, 관이(關彛) 등 관흥의 후손들은 이때 방덕의 아들로서 종회(鍾會)의 부장으로 참전한 방회(龐會)에게 전원 잡혀가서 한 명도 남김없이 멸문(滅門)되었다. 이 때문에 관우의 후손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 관우의 67대손인 관중진(關忠金, 관충금)을 찾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관중진은 한국 전쟁에서 인민군의 편이 되어 참전(參戰)했다. 사실 관평(關平)의 후손들이 관우와 관평이 포로로 잡힌 후 참수된 이후에도 형주지역(杭州地域)에서 계속 살아있었고 그들의 후손이 관중진이였던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의 관우
나관중(羅貫中) 저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162년에 태어났다고 설정되어 있으며, 유비, 관우, 장비 3인이 도원결의(桃園結義)로서 의형제를 맺었다고 묘사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는 태사자가 유비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자 유비와 같이 태사자의 요청에 따라 공융을 구출하러 가서 관해와 90여 합의 일기토 끝에 관해(管亥)를 사살하고 공융(孔融)을 구출한다고 묘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유비가 직접 출동한 것은 아니고 유비가 태사자(太史慈)에게 정병 3천명을 빌려줘서 보내자 이 소식을 들은 관해가 포위를 풀고 도망친 것이다.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관우는 공손찬(公孫瓚) 휘하의 병졸로 참전해 조조(曹操)의 허락을 받아 화웅(華雄)을 죽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고 실제로 화웅은 전력을 추스리고 양인으로 출진한 손견(孫堅)에게 죽임을 당했다.

또한 관도 대전(官渡大戰)에서 관우는 안량(顔良)과 함께 원소군의 맹장으로 유명한 문추(文醜)도 죽였다고 하나 실제로 관우는 안량만 주살(誅殺)했을 뿐 문추의 경우 치중대를 미끼로 한 순유(荀攸)의 책략에 빠진 문추를 서황(徐晃) 등이 습격(襲擊)하여 없앤 것으로 나와 있다. 이 공로로 조조(曹操)는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하고 많은 상을 내렸지만 결국 관우는 유비(劉備)에게로 돌아갔다고 쓰여 있다.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할 때 ‘조조가 아니라 한나라 황실의 천자(天子)에게 항복한다’, ‘유비의 부인 등을 보호한다’, ‘유비가 있는 곳을 아는 대로 다시 떠난다’는 3가지 조건을 내놓는다. 이 항복(降伏)을 권유하는 사람으로 나선 자가 장료인데, 여포(呂布)를 처형할 때 그 부하였던 그를 구해준 것도 관우였다. 그는 삼국지에서도 관우와 행동을 함께 하고 있으며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적대 관계에 있으면서도 깊은 유대가 있는 듯이 묘사되고 있다.

관우는 조조의 밑에서 유비(劉備)에게로 떠나는 도중 도중에 5개의 관문을 돌파하고 6명의 장수를 참살한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의 설화가 전해지며 이것은 나중에 적벽(赤壁)에서 패주한 조조를 놔주는 이유가 된다. 관우가 조조를 떠나 유비를 찾아간 것은 사실이나, 오관참육장의 설화(說話)는 허구이다.

삼국지연의에서 관우는 적벽 대전(赤壁大戰)에서 대패한 후 화용도로 도망가는 조조를 정에 얽매여 그냥 놓아주고 만다. 제갈량(諸葛亮)은 이를 미리 예측하고 있었지만 “조조의 운명(運命)이 아직 다하지 않으므로 관우에게 의리를 갚게 해도 좋다”라고 말하여 관우를 출진(出陣)하도록 한다. 그리고 관우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채 귀환하자 규율상 제갈량(諸葛亮)은 “서약에 따라 목을 치겠다.”라고 명령하는데, 유비가 이를 가로막았다. 이후 자존심이 센 관우는 제갈량에게 머리를 들지 못하게 된다고 하나 정사엔 화용도(華容道)에 관한 내용이 없다.

연의에서의 제갈량이 취한 강릉과 양양을 공격할 때 사용한 ‘공성의 계’는 허구로써 주유(周瑜)가 차지한 강릉을 유비가 임대받은 것과 같다. 관우는 방덕과의 대결에서 팔을 크게 다쳐 부상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뼈를 긁어내며 치료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고기를 먹으며 바둑을 두었는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이것을 각색(脚色)한 내용이 나온다. 관우가 방덕(龐德)과의 싸움에서 이 상처를 입었는데, 명의 화타(華陀)가 그의 상처를 살핀다. 그리고 수술 중에는 마량(馬良)과 바둑을 계속 두면서 먹고 마셔 화타를 감탄(感歎)하게 만든다. 관우가 실제로 이런 치료를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견딘 것은 사실이지만 연의에서는 그 의원을 화타로 묘사(描寫)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화타가 아닌 다른 의원이 치료를 해준 것이다.

반면 우금(于禁) 문칙 등을 포로로 잡아놓고 있으면서 군량 부족에 시달리게 되자 관우는 손권의 군량고를 급습(急襲), 약탈했는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사실을 누락했다. 관우를 존경하는 나관중은 자신이 존경(尊敬)하는 관우의 잘못을 기록한 사실을 임의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관우를 의리의 화신으로 포장해야 하는데 노략질과 의리(義理)는 거리가 매우 멀기 때문이다.

관우 사망 후 손권의 축하를 받던 여몽에게 관우(關羽)의 혼이 씌어 여몽이 몸의 일곱 구멍으로 피를 흘리며 죽었다고 하나 여몽(呂蒙)은 본래 병으로 사망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몽은 자신이 전반적으로 임무(任務)를 수행하지 못하고 자신의 임무 중에 일부를 육손(陸遜)과 공동으로 수행했다. 이 무렵 여몽 뿐만 아니라 장흠과 감녕 역시 여몽과 비슷한 이유로 사망했다. 또한 손권이 이를 보고 관우를 벤 것에 대한 후환(後患)을 두려워하여 머리를 조조에게 보내었다. 연의에서 조조는 관우의 머리를 보며 인사를 하다, 갑작스레 눈을 뜬 관우를 보고 크게 놀란다. 이에 조조는 나무를 깎아 관우의 머리를 정성스레 붙여주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관우의 평가
삼국지정사 저자 진수(陳壽) 평은 다음과 같다.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칭해진 당세의 호신(虎臣-범 같은 신하)이었다. “관우는 조공(曹公)에게 보효(報效-힘써 보답함)하고 장비는 의(義)로써 엄안(嚴顔)을 놓아주었으니 “아울러 국사(國士)의 풍모가 있었다. “그러나 관우는 강이자긍(剛而自矜-굳세고 자부심이 강함)하고 장비는 폭이무은(暴而無恩-난폭하고 은혜롭지 않음)하여 “자신의 단점으로써 패망하게 되었으니 이수(理數-도리,이치)의 상례로다.”

정욱(程昱)은 관우를 “만인지적”이다라 하였다. 주유(周瑜)는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라 하였다. 유엽(劉曄)은 촉나라에 관우, 장비만 있을 뿐이라 말하며 “그들이 유비를 도우니 무엇을 못 이루겠습니까?”라 평한다. 곽가(郭嘉) 또한 관우를 만 명을 당해낼 수 있는 자다라며 평을 한다. 이는 관우가 용맹(勇猛)함에 있어선 단연 최고라 볼 수 있다. 허나 삼국지정사 촉서 관우전을 보면 그 행적이 간략하고 유비가 도겸(陶謙)을 구원하여 서주에 갔을 때 관우의행적은 나오지 않고 200년으로 지나가 버리고 만다. 이는 촉의 사료(史料)가 부족하다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중요한 대목이 없었더라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유론 삼국지정사 저자 진수(陳壽)는 부족한 기록은 그 본전에 자신의 말을 전하는데 악진전(樂進傳)에 나온다.

― 조조가 이와 같은 위대한 무공(武功)을 세웠지만 당시의 훌륭한 장수중에서는 이 다섯 사람(장료ㆍ악진ㆍ우금ㆍ장합ㆍ서황)이 가장 우수했다. 우금(于禁)은 가장 강인하고 위엄이 있었지만 그가 죽을 때까지 지킬 수 없었다. 장합(張郃)은 변화에 교묘하게 대처하여 이름을 날렸고 악진(樂進)은 용감성과 과단성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그들의 사적을 살펴보면 전해들은 것과 부합되지 않는다. 간혹 설명이나 기록이 누락된 곳이 있어서 장료(張遼)와 서황(徐晃)처럼 상세하게 갖추어지지 못했다. –악진전– 진수평-

이와 같이 관우의 사료가 부족(不足)하다라는 것은 부합되지 않는다. 또한 관우의 전투 행적(行蹟)은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1.원소가 대장(大將) 안량(顔良)을 보내 동군(東郡)태수 유연(劉延)을 백마(白馬)에서 공격하자, 조공은 장료(張遼)와 관우를 선봉(先鋒)으로 삼아 이를 공격하게 했다. 관우는 안량의 휘개(麾蓋-병거에 달린 대장기 덮개)를 멀리서 보고 말을 채찍질해서 달려가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刺) 그 수급을 베어 돌아왔다. 원소의 제장(諸將)들 중 당해 낼 자가 없었고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관우전–

2.악진을 남겨 양양(襄陽)에 주둔시켰다. 관우, 소비(蘇非) 등을 모두 패주시켰고, 남군(南郡) 일대 산과 계곡에서 거주하던 만이(蠻夷)들이 악진에게로 와서 투항했다. 또한 유비를 쳐서 임저장(臨沮長) 두보(杜普), 정양장(旌陽長) 양대(梁大)를 모두 대파했다.–악진전–

3.유비와 주유는 강릉에서 조인을 포위하여 공격(攻擊)하고 따로 관우를 보내 북쪽길을 끊어 놓았다. 이통은 부대를 인솔(引率)하여 관우를 공격하고 말에서 내려 방책을 걷어내고 포위권으로 진입(進入)하여 싸우면서 앞으로 나가 조인의 군사를 구출(救出)했는데 무용이 여러 장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이통전–

4.심구에서 관우를 격퇴(擊退)하고 전공을 올려 연수정후에 올랐고 봉역장군의 관위가 더하여졌다. 또한 관우의 치중을 한수에서 공격, 관우는 패주(貝州)에 달아났고 관우의 배를 형성에서 불태웠다. –문빙전–

5.서황은 만총(滿寵)과 함께 한진(漢津)에서 관우(關羽)를 치고 격파하였다.–서황전–

6.방덕은 직접 관우와 교전(交戰)하여 관우를 노리고 화살을 날려 그 이마에 적중(的中)시켰다. 그 무렵 방덕(龐德)은 항상 백마를 타고 다녔으니 관우의 군중에서는 그를 백마장군(白馬將軍)이라 부르며 모두 두려워하였다.

7.가을, 큰 비가 내려 한수(漢水)가 범람하고 우금이 이끌던 7군(七軍)이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방덕을 붙잡고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降伏)했고 관우는 또 장군 방덕(龐德)을 참수했다.

8.서황을 보내 조인을 도와 관우를 치게 하여 완(宛) 에 주둔했다. 때마침 한수(漢水)가 크게 범람하여 우금 등이 물에 잠겼다. 서황(徐晃)이 이끌던 병사들은 다수가 신졸(新卒-신병)이었기에 관우와 쟁봉(爭鋒)하기 어렵다고 여겨 양릉피(陽陵陂)로 나아가 주둔했다. 적(관우군)은 언성(偃城-번성 북쪽)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서황이 도착하여 궤도(詭道-속임수)로 참호를 파며 적의 배후를 끊으려 하는 것처럼 과시하자 적이 둔영을 불사르고 달아났다. 서황이 언성(偃城)을 점령하고 양면으로 진영(陣營)을 연결하며 점차 전진해 적의 포위망으로부터 3장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다. 적은 위두(圍頭)에 둔(屯)이 있고 또한 별도로 사총(四塚)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황은 위두의 둔영을 공격하는 것처럼 양성(揚聲-널리 소문을 퍼뜨림)하고는 은밀히 사총을 공격했다. 관우는 사총이 곧 무너지려 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보기 5천을 이끌고 출전(出戰)하였다. 서황이 크게 외치길, “운장(雲長)의 머리를 얻으면 천금을 상으로 주리라.” 관우가 놀라고 두려워, 서황에게 이르길; “대형 이 무슨 말이오!” 서황이 이르길 “이는 나라의 일이오!” 서황이 이를 들이쳐 패주시키고 포위망(包圍網) 안까지 깊숙이 추격하여 격파하니 (적군들은) 스스로 면수(沔水)에 투신해 죽기도 했다.–서황전–

9.관우는 형주로 돌아와 서쪽으로 맥성을 지켰다. 손권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勸誘)했다. 관우는 거짓으로 항복하고,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달아났다. 병사들은 모두 와해(瓦解)되어 흩어졌으며 단지 10여 명의 기병만이 그를 따랐다. 손권은 우선 주연과 반장을 시켜 그가 지나갈 지름길을 끊어 놓았다. 반장의 사마 마충이 장향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 도독 조루를 붙잡았다. 그래서 형주는 평정(平定)됐다. –손권전–

이것이 삼국지정사 에서 나오는 관우의 전투의 행적(行蹟)이다. 확실히 관우는 “만인지적” 이라는 모습은 안량을 참살한 것 외엔 없다. 당시 안량을 참살한 전공은 지휘가 아닌 단신으로 활약하는 것이기에 “돌격대장”의 임무는 적절하다보지만 지휘관으로의 관우는 그 누구에게도 이기지도 못했으며 우금을 잡을 때는 “천운(天運)”이 따라 한수가 범람(汎濫)하여 물에 잠긴 것일 뿐 관우의 지휘관으로써의 활약이 아니다.

이는 관우가 한심한 필부(평범한 사람의 용맹)인 것 보단 그저 맹장으로 보는 것이 맞다. 즉, “명장(名將)”이라는 수식어는 관우에게 부족함이 사실이다.

숭배의 대상이 된 관우
도교에서는 관우를 신격화(神格化)하여 전쟁의 신인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 부른다. 공자의 사당을 문묘(文廟)라고 하듯이 관우의 사당을 무묘(武廟)라 하여 관우는 무의 화신으로 추앙(推仰)받는다. 관우가 황제(관성대제)를 넘어서 신으로 추대된 이후에 중국 후대 왕조의 황제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관우와 겹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피휘(避諱)를 하였다. 중국인들이 관우를 차라리 운장(雲長)이라고 부르거나 굳이 관공(關公)이라고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관제묘가 사당 형식으로 처음 세워진 것은 명나라 말기인 1594년 으로, 명나라가 자신들의 임진왜란(壬辰倭亂) 출정 때 이긴 것을 관장군의 덕이라고 여겨서 세워져 중국 대륙 각지, 나아가 대만, 홍콩, 한국, 일본 등지에도 관제묘가 세워졌다. 우리나라에는 관왕묘(關王廟)나 혹은 관제묘(關帝廟라고 하며 주로 충청도, 경상도 지방에 몇몇 있다. 서울시 종로구(鐘路區)에 숭인동에 위치한 “동묘”가 바로 이 관왕묘 중 하나이다. 이 관왕묘에는 관우를 죽인 여몽의 성과 같은 여(呂)씨와 육손의 성과 같은 육(陸)씨가 들어오면 아무 이유 없이 죽는다고 하는 전설(傳說)이 있다. 하지만 관우의 유해(遺骸)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현재까지 아무도 모르며 기록(記錄)조차 남아있지 않다. 즉 관우의 묘는 묘(墓)가 아니고 관우의 위패를 모신 묘(廟)이다.

관우와 적토마
삼국지연의에는 조조가 여포(呂布)로부터 몰수한 적토마(赤兎馬)를 관우에게 주었으며 관우가 패하여 생포 당하자 적토마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다가 관우와 같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사료에는 적토마의 행방(行方)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며, 실제로 조조(曹操)가 관우에게 주었다고 해도 말의 수명을 고려(考慮)했을 때 오래 살았다고 보기 힘들다.

기타
대한민국의 보물 제 142호인 동묘(東廟)는 관우에게 제사를 지내는 묘로서 원래 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라 하며 선조 34년인 1601년에 건립돼 1963년 보물로 지정됐다. 이전에는 조선에서 관우(關羽)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관우 숭배 사상(崇拜思想)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조선에 출병 온 명나라 군사들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관우(關羽)가 신(神)으로 추대(推戴)된 이후 중국 후대 왕조의 황제(皇帝)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관우와 겹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피휘(避諱)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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