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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사전 - 장비(張飛)

[삼국지 인물사전 - 장비(張飛)] 


장비(張飛, 165년 ~ 221년 6월)는 후한 말 ~ 촉한의 군인으로, 자는 익덕(益德)이며 유주(幽州) 탁군(涿郡) 사람이다.

유비(劉備), 관우(關羽)와 함께 황건적(黃巾賊) 토벌에 나서며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장판교에서 기지를 발휘해서 조조(曹操)의 대군을 막았으며 서촉정벌 시 엄안(嚴顔)을 회유하여 파촉정벌(巴蜀征伐)에 큰 공로를 세웠다. 이후 파서태수(巴西太守)의 자리에 올랐고 한중정벌 당시 위나라의 장합(張郃)과 맞서 싸워 승리하였다. 그러나 관우의 복수(復讎)를 위해 출정을 준비하던 도중 휘하 무장 범강(范疆)과 장달(張達)에게 암살당했다.

장남 장포(張苞)가 장비보다 (약간) 일찍 요절(夭折)하여 차남인 장소(張紹)가 가계를 이었다. 장비의 장녀와 차녀는 둘 다 유선(劉禪)의 황후가 되었다.

생애 초반
장비(張飛)는 용맹하고 과격한 성격이고 성격(性格)이 매우 급했으며 술을 좋아하고 싸움을 즐겼다. 본디 장비가 문무(文武)를 겸비했고 관우가 일자무식(一字無識)이었으나 이러한 장비의 성격 탓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둘의 능력이 맞바뀌어 관우가 문무를 겸비(兼備)한 것으로 묘사되고 장비가 일자무식으로 묘사(描寫)되었다. 후에 황건적 토벌에서 부장 등무(鄧茂)를 토벌하는데 유비의 스승 노식이 환관(宦官)의 참언으로 죄를 뒤집어쓰고 호송(護送)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호송병을 죽이고 노식(盧植)을 구하려고 했지만 유비에게 제지당한다.

이후 장순(張純)과 장거(張擧)를 토벌한 공으로 유비가 중산국 안휘현의 현위로 임명됨에 따라 유비(劉備)와 함께 안휘현으로 갔다. 하지만 독우가 유비를 직위해제 시키려 하자 이에 유비가 그 독우(督郵)를 중산국과 탁군의 경계지점까지 끌고 가서 곤장 200대를 때린 뒤 유비, 관우, 장비 일행은 군의 경계선을 넘어 탁군으로 도주(逃走)했다.

하지만 때마침 하진이 모병(募兵)을 실시했는데 “나의 모병에 응하면 그동안 지은 모든 죄를 다 용서해준다”라고 선언(宣言)하며 모병을 했다. 이에 유비 일행은 이 모병에 응해서 독우를 구타한 죄를 사면(赦免) 받았다.

서주에 거처할 무렵
이윽고 도겸(陶謙)이 죽자 유비가 잠시 서주를 맡게 되고 조조에게 패한 여포(呂布)가 유비를 찾아와 의지하려 들었다. 또한 조조의 군사 순욱(荀彧)이 내건 ‘두 호랑이가 서로 먹이를 다투게 하는 계략’ 즉, 이호경식지계(二虎競食之計)로 황제로부터 여포 토벌의 밀칙(密勅)을 받자 유비는 이 계략을 간파하고 장비를 제지했다. 이번에는 순욱에게 ‘호랑이를 몰아내고 이리를 잡는 계략’ 즉, 구호탄랑지계(驅虎呑狼之計)에 걸려 유비는 원술(袁術) 토벌의 조칙(詔勅)을 받는다. 연의에 따르면 유비가 출정하고 장비는 금주 서약을 하고 서주를 지키는데, 그래도 술을 끊을 수 없어 조표(曹豹)에게 술을 강요하며 매질했기 때문에 조표의 원한(怨恨)을 산다. 이에 조표는 밤중에 여포를 불러들였다. 장비는 조표를 죽이지만 유비의 처자를 구하지 못한 채 혼자 달아났다. 장비는 책임(責任)을 지고 자살하려고 했지만 유비가 제지하자 흐느끼면서 포기(抛棄)한다. 그 후 유비와 여포는 화해하지만 장비가 산적으로 변장(變裝)해 여포의 군마를 탈취하자 분노한 여포에게 공격당한다. 유비 일행은 조조에게 몸을 의지하고 조조와 공동으로 여포를 격퇴(擊退)하였다.

조표는 이미 여포(呂布)와 작당한 상태로 유비가 원술을 치러 갔을 때 빼앗은 것으로 장비의 술주정으로 인한 폭력(暴力)이 원인이 된 것은 아니다.

관도대전 당시의 장비
그러나 조조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오자 유비는 패배(敗北)하여 관우, 장비와 생이별을 하게 된다. 장비는 망탕산(芒砀山)에서 무사히 탈출해 고성현령을 쫓아내고 그 곳에 독자 세력을 구축(構築)해 눌러앉았다. 이 무렵 장비는 나무를 하러 간 어떤 아낙 한 명을 강제로 납치(拉致)하여 아내로 삼았는데 이 여자가 하후패(夏侯霸)의 여동생인 하후씨이다. 이윽고 조조 밑을 떠난 관우가 만나러오자 장비는 배신자(背信者)라고 말하며 관우에게 덤벼들었다. 관우는 자기를 추격해온 채양(蔡陽)을 토벌한 것으로 겨우 장비를 납득(納得)시켰다.

제갈량을 만난 이후
그 후 형주의 유표(劉表) 밑에서 몸을 의지할 때 유비가 삼고초려(三顧草廬)로 제갈량(諸葛亮)을 만나게 되는데 동행한 장비는 제갈량이 낮잠을 자고 있는 것에 화가 나 집에 불을 지르려고까지 했다. 유표(劉表)가 죽은 후 조조가 형주를 침공해오자 유비는 강남으로 도망쳤는데 조조는 이를 추격해 당양의 장판에서 따라잡았다. 유비는 장비에게 20기병을 지휘해 배후를 막아내도록 했다. 장비는 강 근처 숲에 말 20마리를 묶어놓은 후 말의 꼬리에 빗자루를 매달아서 먼지가 많이 일어나게 하여 복병(伏兵)이 많은 것으로 위장했다. 위나라 군대가 몰려오자 장비는 강에 있는 다리 위에 단기로 서서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장팔사모(丈八蛇矛)를 치켜들며 “내가 바로 장비이다! 덤벼라! 목숨이 아깝거든 물러나라!” 하고 호령했다. 감히 누구도 접근하지 못해 유비는 무사히 도망갈 수 있었다. 이는 경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판교(長坂橋)의 금강역사’라는 유명한 장면이다. 이때 장비의 고함소리에 하후패(夏侯霸)의 말이 놀라서 발버둥치는 바람에 하후패는 낙마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하후패가 훗날 촉한에 귀순하여 촉한을 위해 싸우다 죽었기 때문에 하후패가 낙마한 것이 아닌 하후걸(夏侯傑)이라는 가상의 장수가 낙마한 것으로 묘사했다.

삼국지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에서는 다리를 끊지 않고 말고리에 나무통을 묻은 다음 먼지가 일개하여 조조는 복병을 의심하여 추격(追擊)을 멈춘다. 허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삼국지정사 촉서 장비전에 의하면 물가에 의지(依支)한 채 다리를 끊고 이에 호통 친 것이었다.

삼국정립
그 후 적벽 전투(赤壁戰鬪)의 승리를 거쳐 유비가 강남을 평정하고 건안 15년(210년) 주유가 죽자 손권과 협의(協議)하여 남군 일대를 넘겨받았는데, 이때 장비는 의도태수(宜都太守)·정로장군(征虜將軍)에 임명되고 이후 남군태수(南郡太守)로 전임되었다. 유비가 장로(張魯) 토벌을 위해 익주로 들어갔을 때 손권(孫權)의 여동생 손부인이 유선(劉禪)을 데리고 오나라로 돌아가려 했는데, 이때 장비가 조운(趙雲)과 함께 유선을 다시 데려왔다. 곧이어 유비가 유장(劉璋)과의 사이가 벌어지고, 방통(龐統)이 전사하는 등 궁지에 빠지자 장비는 제갈량과 함께 구원에 나서서 서로 분담(分擔)하여 군현을 평정했다.

강주(江州)에 이르러 유장의 장수인 파군태수(巴郡太守) 엄안(嚴顔)을 격파하고 산 채로 붙잡았다. 장비가 엄안을 꾸짖으며 말했다, “대군이 당도(當到)했는데 어찌 항복하지 않고 감히 맞서 싸웠느냐?”

엄안이 대답했다, “경(卿) 등이 무도하게 우리 주(我州→익주)를 침탈(侵奪)했으니 우리 주에는 다만 머리를 잘리는 장군(斷頭將軍)은 있을 뿐 항복(降伏)하는 장군은 있을 수 없소.”

장비가 노하여 끌고 가서 머리를 자르라고 좌우에 명했지만 엄안(嚴顔)은 안색이 변하지 않으며 말했다, “머리를 자르면 자르는 것이지 어찌 화를 내는가!”

장비가 이를 장하게 여겨 풀어주고 그를 빈객(賓客)으로 삼았다.

조조가 한중을 평정하자 하후연(夏侯淵)과 장합을 한중에 주둔시켜 종종 파(巴)의 경계선을 침공(侵攻)했다. 장비는 유비의 명을 받아 탕거로 진군, 위나라의 장합과 50일이 넘도록 서로 대치(對峙)했다. 장비는 정예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다른 길을 따라 장합(張郃)에게 공격을 감행해 와구에서 격파하고 장합은 겨우 부하 10여 명 남짓 데리고 사잇길을 따라 달아났다.

219년(건안 24년) 유비가 한중을 평정하고 한중왕(漢中王)에 오르자 장비는 우장군 가절에 임명(任命)된다. 221년(장무 원년)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장비는 거기장군(車騎將軍) 사례교위(司隷校尉) 낭중목(閬中牧)을 겸임해 서향후(西鄕侯)에 봉해진다.

말년
그러나 관우(關羽)가 죽은 뒤에는 매일 큰소리로 울고 기분을 달래려고 술을 마시고서는 취해 난폭(亂暴)해지는데 부하들을 학대(虐待)하고 심지어 죽음까지 이르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유비는 이를 염려(念慮)하여 언제나 장비를 훈계하였다고 한다.

유비가 오나라 토벌에 나서자 장비는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강주에서 합류(合流)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장비는 부장인 범강(范疆)과 장달(張達)에게 암살당했다. 범강과 장달이 장비를 죽인 것은 장비의 가혹행위(苛酷行爲)가 원인이었다. 그 후 범강과 장달은 오나라로 도망쳤다. '삼국지연의'에선 손권(孫權)이 다시 화해를 위해 장달과 범강을 유비에게로 보내졌다. 이때 장포가 그 둘의 목을 베어 장비의 제단(祭壇)에 올렸다. 후에 장비는 환후(桓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정사에서의 장비
여타의 많은 게임이나 만화, 민간 여담(民間餘談)에서의 장비의 무도하고 과감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정사(正史)에서는 이러한 이미지나 성격이 전혀 전해지지 않아 성질이 급하고 술 때문에 실수를 저지르는 인물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연의의 단순해 보이는 장비(張飛)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제적으로 장군으로서의 자질(資質)을 보여주고 있다.

“선주가 강남을 평정(平定)하고 난 뒤 장비를 의도태수(宜都太守)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삼고 신정후(新亭侯)에 봉했으며 후에 자릴 옮겨 남군(南郡)에 있었다. 선주가 익주(益州)로 들어가 도리어 유장을 공격했는데 장비와 제갈량 등은 강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군대를) 나누어 군현을 평정하였다.”
“장비가 정예병(精銳兵)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다른 길로 나가 장합의 군대를 쳐서 전투가 벌여졌는데, 산길은 좁아서 전후가 서로 구원할 수 없게 되니 장비가 마침내 장합을 격파(擊破)하였다. 장합은 말을 버리고 산길을 따라, 오직 휘하의 10여 명과 같이 샛길을 따라 퇴각하여, 군대를 이끌고 남정(南鄭)으로 돌아가니, 파군 지역이 안정되었다. ”
“강주(江州)에 이르러 유장의 장수 파군태수(巴郡太守) 엄안(嚴顔)을 격파하고 엄안을 사로잡았다.”

위에 언급된 장합(張郃)이나 엄안(嚴顔)은 당시 상당한 무용과 지략을 가지고 명성을 떨친 장수들로 그들을 격파하고 승리(勝利)를 거두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저돌적이고 단순한 이미지의 장비(張飛)와는 거리가 상당하다.

또한 연의에서와 같이 정사에서도 관우(關羽)와 함께 그 무인으로서의 용맹함이 잘 나와 있는데, 위서 정욱(程昱)전에 “관우와 장비는 홀로 만 명을 당해낼 수 있는 무용을 가졌다”라 평하고 있다. 위나라의 인물들에 약간 편향(偏向)된 평을 내렸다던 정사서의 저자 진수(陳壽)조차 관우와 장비는 만인지적(萬人之敵)으로서의 관우와 장비의 용맹을 인정하며 위의 수많은 인물들 역시 관우와 함께 장비의 용맹(勇猛)함을 인정한다.

이런 기록들에 비해 보고자 한다면 대부분 연의에서 촉의 인물들이 더욱 포장(包裝)이 되었다고는 하나 장비만큼은 되려 연의에서 폄하(貶下)된 점이 있다.

참고로 정사에서 관우와 장비가 받은 만인지적(萬人之敵)의 호걸(豪傑) 이라는 표현은 장수의 능력을 평가(評價)함에 있어서 최고로 높게 평가하는 표현으로 삼국지 정사에서 만인지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장수(將帥)는 오로지 관우와 장비 둘 뿐이다(이외에도 유사한 급의 표현으로 호랑이와 곰 혹은 삼군을 뒤덮는 용맹이라는 표현도 즐겨 쓰이기도 한다.).

삼국지 이후 중국 역사서(정사 등) 에서 용맹한 장수나 훌륭한 장수를 일컬을 때마다 “관우와 장비 같다”라는 표현이 주로 쓰이는 것으로 보아 삼국지 시대 이후 중국에서는 관우와 장비를 용맹한 장수의 아이콘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아 관우와 장비의 용맹(勇猛)과 장수로서의 능력이 당시는 물론 후세까지 얼마나 대단했는지 간접적(間接的)으로 알 수 있다.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 정사에서 관우와 장비의 능력을 평가(評價)한 부분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주유전 : ” 관우와 장비처럼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
정욱전 : ” 관우와 장비는 모두 만 명의 적을 대적할 수 있는 자”
유엽전 : “관우와 장비는 삼군을 뒤덮을 만한 용맹으로 장군이 되고..”
장비전 : “장비의 웅장위맹은 관우에 버금갔으므로 위의 모신 정욱(程昱) 등이 모두 장비를 칭하길 만인지적이라 했다”
곽가전 : 흔히 관우 장비의 만인지적 표현을 정욱전에서만 나오는 것으로 국내에 알려졌는데, 실제 곽가전을 원문 전체를 보면 다음과 같이 곽가(郭嘉)가 언급한 내용이 나온다.
“관우와 장비는 모두 만 명의 적을 대적할 수 있다 (張飛關羽者 皆萬人之敵也 ..)
진수(정사 삼국지 저자)의 평가 : “관우와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칭해진 당대의 호랑이 같은 신하(장수)였다”. “둘 다 국사(國士-나라의 뛰어난 선비)의 풍모가 있었다.”
위나라에서 극히 경멸(輕蔑)되어 `(단신으로) 만 명을 능히 해치울 수 있는 장수들` 이라고 칭해진 것으로 간주된다. 즉 이들은 절대 호락호락한 상대들이 아니며 만약 반란을 일으키면 큰 화를 불러일으킬 종자(種字)들이라는 뜻도 함유하고 있다.

삼국지 연의에서의 장비
연의를 보면 장비 익덕(益德)은 본래 술과 고기를 파는 상인이었는데 황건적(黃巾賊)의 난 때 장각(張角)은 청주, 유주, 서주, 이주, 양주, 연주, 여주, 형주 등 중국영토를 점점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관우를 만나서 형제처럼 지내다가 몇 년 뒤 유비(劉備)를 만나게 된다. 유비는 탁현 마을이라는 곳에 물건을 팔려고 장비와 함께 배를 타고 나서는 순간 마을을 쑥대밭을 만들었다. 그때 유비, 관우, 장비가 처음 만나게 되었다. 장비는 무기로 장팔사모(丈八蛇矛) 를 썼다고 하는데 창두가 뱀처럼 구불구불했고 길이가 1장 8척(3m 60 cm)이었다 한다. 사모(蛇矛)가 처음 등장한 때가 동진(東晉) 이후이므로 장팔사모 역시 실존(實存)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또한 터무니없는 길이를 볼 때 당시 사람들의 과장(誇張)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일부 책에서 성주가 준 성주 자신의 동생 인육을 먹고 죄책감(罪責感)에 빠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황건적의 수령 장각(張角)에게 패한 동탁(董卓)을 구해주지만 유비를 경멸하자 장비는 이에 분노해 동탁을 살해하려고 했다. 이때도 유비(劉備)가 그를 제지했다. 마침내 황건적 토벌의 공로로 유비는 안희현의 현위에 임명된다.

장비는 유비가 현령(縣令)이 되자 순시하러 온 독우(督郵)가 뇌물을 요구하며 횡포를 부리자 장비가 분노하여 독우를 기둥에 묶고 매질을 하였다. 유비는 장비를 제지하고 현위를 사직하고 도망가게 된다. 그러나 “삼국지”에서는 오히려 유비가 독우를 매질했다고 되어 있다. 그 후 동탁(董卓)과의 싸움에서 장비는 여포에게 도전했다가 패한 공손찬(公孫瓚)을 돕고 여포(呂布)와 필마단기로 싸운다. 관우와 유비까지 가세하여도 승패(勝敗)는 나지 않고 여포와 유비 삼형제 모두 지쳐서 싸움을 멈췄다고 한다. 그 후에는 유비와 함께 공손찬, 공융(孔融), 도겸(陶謙) 밑을 떠돌면서 그들을 군사 면에서 돕는다. 정사에서는 배주로 인용된 영웅기에서 유비가 조조와 함께 반동탁연합군에 참여했다고 서술한 것 외에 유비 세력의 동향은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삼국지연의”에 나타난 반동탁연합군 아래에서 보여준 유·관·장 3형제의 활약은 허구(虛構)다.

또한 장비는 여포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에게 결투(決鬪)를 신청했지만 유비가 이를 말리고 관우가 장비를 데리고 나갔다고 기술(記述)되어 있다.

원술을 토벌할 때 원술 휘하의 맹장 기령(紀靈)을 토벌한다. 그 후 유비가 조조에게 반기(反旗)를 들고 조조가 파견한 유대(劉岱)와 왕충(王忠)과 대치한다. 장비는 일부러 술에 취해 한 병사에게 폭력(暴力)을 휘두르고 그 병사를 유대에게 투항하게 만들어 장비가 야습(夜習)한다는 사실을 밀고(密告)시킨다. 유대는 진지를 비우고 복병을 준비하지만 장비가 의표를 찔러 바깥쪽에서 공격, 유대를 생포했다.

장판교(長坂橋)에서 장비는 다리 위에서 말 위에 홀로 우뚝 버티고 서서 조조군을 퇴각시킨다. 또한 이때 장비에 호통소리에 낙마한 장수는 하후걸(夏侯傑)이라는 가공의 장수이다.

또 연의에서 적벽 전투(赤壁戰鬪)에서 익주 평정에 걸쳐 방통이 뇌양현령에 임명되고 매일 술에 취해 있는 것을 장비가 순시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방통의 재능을 알아보고 감복(感服)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장비는 방통(龐統)을 보러 뇌양현에 간 적이 없다고 한다. 또 유장을 구원하러 장로(張魯)가 파견한 마초(馬超)와 필마단기로 싸우는데 밤이 되도록 화톳불을 켜놓고 싸우지만 끝내 승부가 나지 않았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오나 정사에서는 마초(馬超)가 장로의 부하 양송(楊松)의 참언이 계속되며 입지에 위협을 받자 강족(羌族)들 땅으로 피신했다가 유비에게 투항의사(投降意思)를 전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파서에서 장합과 대치했을 때, 장비가 또다시 술에 빠지게 되자 유비가 이를 걱정했다. 그러나 제갈량(諸葛亮)은 이것을 책략으로 간파하고 진중 위문품(慰問品)으로 맛 좋은 술을 보냈다. 장비는 변함없이 술을 마시고 기다리다 지쳐 오금이 저린 장합(張郃)이 야습을 감행하게 된다. 그러나 본진은 이미 모든 병사가 빠져나가 아무도 없었으며 이 틈에 장비(張飛)는 장합의 세 성채를 탈취해 대승리를 거두었다.

일화
관우(關羽)가 고기를 보관하는 항아리의 뚜껑을 열고 그 속에 들은 고기를 나누어 주었는데 그 일로 관우와 싸웠다가 유비의 중재(仲裁)로 도원결의를 맺었다. 장비는 흔히 무식(無識)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무예 뿐 아니라 지모(智謀)로서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또한 영웅(英雄)을 알아보는 안목도 갖추었다. 장판교(長坂橋)에서는 흙먼지를 일으키는 계책으로서 필마단기에 호통만으로 조조의 백만 대군을 도망가게 만들었다. 유비의 명을 받고 정사를 게을리하는 방통(龐統)을 꾸짖으러 갔다가 그의 뛰어남을 알아보고 방통을 유비에게 천거(薦擧)하기도 했다. 또한 촉 쟁탈전에서는 엄안(嚴顔)을 지모로 사로잡았고 또한 그의 충절(忠節)과 기상에 감복하여 그를 극진히 대접(待接)하여 엄안을 유비에게 투항(投降)토록 하였다. 마초(馬超)와 무예로 3일 밤낮을 겨루었지만 승부를 내지 못했고 마초의 거짓 퇴각을 눈치 채고 거짓 퇴각으로 맞받아쳤다. 또한 한중 쟁탈전(爭奪戰)에서는 위의 명장 장합(張郃)에게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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