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충(黃忠, ? ~ 220년)은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한승(漢升)이며 형주(荊州) 남양군(南陽郡) 사람이다.
생애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가 그를 중랑장(中郞將)으로 삼아 유반(劉磐)과 함께 유현(攸縣)을 수비하게 했다. 조조(曹操)가 형주를 점령하자 임시로 비장군(裨將軍) 직을 대행하게 하니 예전 임무에 종사(從事)하며 장사태수(長沙太守) 한현(韓玄)에 속하게 되었다.
유비(劉備)가 남쪽으로 여러 군(郡)을 평정하자 황충(黃忠)이 마침내 몸을 맡기기로 하고는 그를 수행해 촉(蜀)으로 들어갔다. 가맹(葭萌)에서 임무를 받아 군대를 돌려 유장(劉璋)을 공격하니 황충은 늘 앞장서서 적진에 올라 함락(陷落)시켰고 용맹하고 굳셈이 삼군(三軍)의 으뜸이었다. 익주(益州)가 평정된 뒤 토로장군(討虜將軍)에 임명되었다.
건안(建安) 24년(219), 정군산(定軍山)에서 하후연(夏侯淵)을 공격했다. 하후연의 군대는 매우 정예했으나 황충(黃忠)은 적의 예봉을 꺾어 어김없이 전진하며 사졸(士卒)들을 격려하여 이끌고 징과 북소리는 하늘을 울리고 환성(歡聲)은 골짜기를 뒤흔드니 한번 싸움으로 하후연을 크게 무찌르고 죽였다.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올랐다.
이해 유비(劉備)가 한중왕(漢中王)이 되어 황충(黃忠)을 후장군(後將軍)으로 임명하려 하니 제갈량(諸葛亮)이 유비를 설득하였다.
“황충의 명망은 본래 관우(關羽) · 마초(馬超)와 동등하지 않았는데 이제 곧바로 동렬(同列)에 두려 하십니다. 마초 · 장비(張飛)는 가까이에서 그의 공을 직접 보았으므로 그 뜻을 이해(理解)할 수 있으나 관우는 멀리서 이를 들으면 필시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불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 유비는 관우를 직접 타이르겠다 하고는 관우 등과 더불어 나란한 지위에 두고 관내후(關內侯)의 작위(爵位)를 내렸다.
이듬해 죽었고 시호를 강후(剛侯)라 하였다. 아들 황서(黃敘)는 일찍 죽었고 후사가 없었다.
"삼국지연의"에서의 황충 관우(關羽)가 장사를 공략할 때 그와 대적(對敵)하였다. 오랜 공방 끝에 황충(黃忠)의 말이 부상을 입어 그가 낙마(落馬)하였다. 하지만 관우는 어디까지나 정정당당하게 승부(勝負)하기로 마음먹고 그 허를 찌르려 하지 않고 말에 다시 올라타려는 황충을 도와주었다. 이것에 대해서 황충(黃忠)은 감복하였고 태수 한현에게 백발백중(百發百中)의 활 솜씨로 관우를 쏘아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고뇌(苦惱)하였다. 결국 다음 대결(對決)에서는 그의 장기인 활로 관우의 투구만을 쏘아 빚을 갚았다.
그 결과 황충은 명령위반죄(命令違反罪)로 한현에게 체포되어 처형(處刑)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동료 위연이 “장사의 공신(功臣)을 처형하는 것은 당치 않으며 오히려 태수의 학정(虐政)이야말로 그 죄를 물어야 한다”라고 민중을 선도(先導)하고 한현을 등진다. 위연(魏延)은 한현(韓玄)을 살해하고 관우에게 항복해 성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황충은 처형을 면하였다.
그 후 황충(黃忠)은 주군 한현에 대한 충성을 지켜 병을 핑계로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있었는데 유비(劉備)가 직접 찾아가 앞으로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그는 유비의 신망(信望)과 인덕을 인정해 저항한 것을 사죄(謝罪)하고 충성을 맹세하였다.
유비의 촉 공략을 수행했을 때에는 위연(魏延)이 공을 세우려고 몰래 빠져나간 결과 도리어 위기에 빠진 것을 구하여 아군이 궁지(窮地)에 빠지는 상황을 미리 막았다. 또 한중 쟁탈전(漢中爭奪戰)에서는 같은 노익장으로 불리는 엄안(嚴顔)과 짝을 이루어 활약한다.
222년 이릉 전투에서 황충(黃忠)은 유비가 “노인이 나서봤자 소용없다”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분기(憤氣)해 적은 군세에도 불구하고 오나라 진지를 공격해 사적을 죽이고 반장(潘璋)과 힘겹게 싸운다. 그리고 주위에서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무모하게 적진 깊숙이 침입(侵入)해 들어가다 어깨에 마충(馬忠)의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유비(劉備)는 “내가 그런 서운한 말을 해서 그대가 이런 일을 겪고 말았다”며 사죄하였고 황충은 유비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촉한(蜀漢)의 오호장군(五虎將軍) 중 하나인 황충(黃忠)은 전국시대의 노장 염파(廉頗)와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노익장(老益壯)으로 꼽힌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황충은 처음부터 머리가 허연 노장으로 등장한다.
적벽대전(赤壁大戰) 이후 형주를 차지한 유비(劉備)는 관우·장비·조운을 나누어 보내어 무릉·장사·계양·영릉 등 강남 4개 군을 정벌(征伐)하게 한다. 관우가 장사를 공략하자 장사태수(長沙太守) 한현(韓玄)이 완강하게 저항한다. 이때 등장하는 장수가 노장 황충(黃忠)이다. 한현의 부장 황충은 천하의 맹장(猛將)인 관우와 일대일로 맞서 대등하게 접전(接戰)을 벌인다. 심지어 화살로 관우(關羽)의 얼굴을 맞힐 수 있었음에도 황충은 일부러 투구 끈만 쏘는 여유를 보이기도 한다.
이상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사실이 아닐뿐더러 여러 가지 오류(誤謬)가 섞여 있다. 첫째 정사(正史)에는 유비가 관우·장비·조운 등을 보내 강남 4개 군의 항복을 받아내었다고 돼 있을 뿐 구체적으로 누가 어느 성을 공략했는지 나오지 않는다. 관우(關羽)가 과연 장사군을 공략했는지조차 불분명하고 황충(黃忠)과 일대일 대결을 벌인 일도 없다.
'삼국지연의'는 이때 이미 황충(黃忠)의 나이가 육순이었다고 하는데 이 또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황충이 나이 육십이 넘어 관우(關羽)와 대결을 벌였다면 그로부터 10년이 넘어 사망(死亡)할 무렵이면 나이가 무려 70을 한참 넘기게 된다. 그래서 '삼국지연의'는 황충이 75세의 나이)에 죽었다고 기술(記述)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여러 자료를 찾아보아도 황충이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에 관한 기록이 없다.
'삼국지연의'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황충(黃忠)은 서촉정벌전 당시 65세의 나이에 탁응·위연 등 젊은 소장파 장교(將校)들과 함께 유비군의 선봉에 서서 무려 3년 동안이나 맹활약을 했다. 이때 황충의 용맹의 삼군의 으뜸이었다 한다. 게다가 황충은 74세의 나이에 병사들의 선두(先頭)에서 돌격을 감행해 하후연(夏侯淵)을 참수했다. 아무리 노익장이었다지만 상식적으로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서촉과 한중 정벌전에는 당시 유비 진영의 최고 명장들인 장비와 조운·마초가 종군했다. 그런데 이런 맹장들을 다 놔두고 황충(黃忠)이 위연 등과 함께 선봉을 섰던 이유가 무엇일까. 통상적(通常的으로 돌격의 선봉은 군대 내에서 비중이 높지 않으면서도 젊고 용맹(勇猛)한 장수들이 맡는다. 이를 고려한다면 황충 역시 나이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그는 손책(孫策)이 죽기 전 즉, 건안5년(200년) 이전에 이미 장수로 활약한 바가 있다. 황충(黃忠)이 유표의 조카 유반의 휘하에 있으면서 예장군 해혼을 자주 침략(侵略)했으므로 손책이 태사자를 보내 제압(制壓)했다. 이때 황충의 나이는 20~30대를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전에 활약(活躍)했다는 어떠한 기록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황충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유비나 관우와 비슷한 또래였거나 10년 정도 아래였을 것이다.
그러면 '삼국지연의'의 저자는 어떤 이유로 황충(黃忠)을 이처럼 노장으로 묘사했을까. 실제로 전성기의 황충은 충분히 노장(老將)이었을 수도 있다. 유비·관우와 비슷한 나이였다면 황충이 서촉과 한중에서 맹위를 떨칠 당시에는 이미 오십 줄에 들어섰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주로 만년에 활약을 펼쳤기에 노장이라는 칭호(稱號)가 붙었을 것이고 여기에 재미를 더하기 위해 이야기꾼들이 과장을 덧붙이다 보니 무려 70대의 노장이라는 이미지가 생성됐을 것이다.
정사에서 황충은 전사가 아니라 자연사라고 기록 '삼국지연의'는 황충(黃忠)이 유비의 동오정벌에 종군했다가 이릉싸움에서 죽었다고 한다. 사실이 아니다. 황충은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이 된 이듬해인 건안25년(220년)에 죽었다. 반면에 이릉대전(夷陵大戰)은 장무2년(222년) 발생했다. 2년 전에 죽은 사람이 전쟁에 참전(參戰)한 셈이다. 의도적 조작의 결과이다.
'삼국지연의'의 작가는 유비(劉備)가 관우가 죽은 즉시 원수를 갚기 위해 동오를 정벌했다고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도원결의(桃園結義)의 의리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유비는 관우가 죽은 후 2년이 지나서 동오(東吳)를 정벌했다. 한중왕이 되는 일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황충(黃忠)이 동오정벌에 참전했다는 것은 유비가 즉시 관우(關羽)의 보복에 나섰다는 주장(主將)을 보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삽입(揷入)한 장치일 뿐이다. 청나라 때 황충의 무덤이 성도(成都)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그는 자연사(自然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