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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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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사전 - 육항(陸抗)

[삼국지 인물사전 - 육항(陸抗)] 

육항(陸抗, 226년 ~ 274년)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수(將帥)로 자는 유절(幼節)이며 육손(陸遜)의 둘째 아들이고 손책(孫策)의 외손자다. 쓰러져 가던 오나라 말기에 최후의 명장이라 칭송(稱頌)받는다.

생애
초기 행적 : 적오 8년(245년), 육손이 죽었을 때 20살이었으며 형 육연(陸延)은 요절(夭折)했으므로 건무교위(建武校尉)에 임명되며 아버지 육손이 남긴 병사 5천 명을 통솔(統率)하게 된다. 

손권(孫權)은 양축(楊竺)이 육손을 모함한 20가지 일을 육항(陸抗)에게 힐문하고 빈객을 금했다. 그러나 육항은 일마다 조리 있게 대답하여 손권은 점차 의혹(疑惑)을 떨쳐내었다. 동 9년(246년), 입절중랑장이 되어 제갈각(諸葛恪)과 함께 시상에 주둔(駐屯)했다. 태원 원년(251년), 서울로 가 병을 치료하고 돌아가는데 손권은 이별(離別)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옛날 자신이 육손을 참언(讒言)을 믿고 의심한 것을 후회했다. 건흥 원년(252년) 분위장군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당시 촉을 삼켜 더욱 커진 사마씨의 위(魏)가 빈번하게 전투를 걸어온 형주를 수비하는 중책(重責)을 맡게 된다. 그의 인물 됨됨이로는 공을 세워도 교만(驕慢)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으며 이는 백성들에게 큰 지지를 얻게 되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 그러다 태평 2년(257년), 위나라의 제갈탄(諸葛誕)이 권신 사마소(司馬昭)에 반기를 들며 막내아들 제갈정(諸葛靚)을 오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구원군을 요청했다. 사마소는 종회(鍾會)와 자신이 직접 몸소 대군을 이끌고 수춘을 공략하려 들었다. 육항은 시상독이 되어 수춘에 이르러 위군을 격파(擊破)하고 정북장군으로 옮겼다. 

형주를 통독하기까지
영안 2년(259년), 진군장군·서릉도독이 되었고 동 3년(260년) 가절을 받았다. 영안 7년(264년) 2월, 촉한이 멸망한 틈을 타 촉으로 들어가서 보협(步協)이 파동을 공격했다가 촉한(蜀漢)의 옛 파동태수 나헌(羅憲)에게 격파당하자 분노한 경제의 명령으로 3만 군사를 이끌고 보협, 정서장군 유평(留平), 건평태수 성만(盛曼)과 함께 나헌을 공격(攻擊)했다. 육항은 6달 동안 나헌을 포위하여 궁지로 몰았으나, 진나라에서 형주자사 호열을 파견하여 서릉을 엿보자 물러났다. 원흥 원년(264년), 손호(孫皓)가 즉위하자 진군대장군이 더해지고 익주목(翼州牧)을 겸했다. 건형 2년(270년), 시적(施積)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신릉·서릉·이도·악향·공안의 제군사를 도독했고, 치소를 악향에 두었다.

서릉 싸움
당시 오나라 수도에서는 정령이 이지러졌다는 말을 듣고 육항(陸抗)은 깊이 염려하여 상소를 올렸다. 또 당시 하정이 권세를 농락(籠絡)하고 환관들이 정사에 간여해 육항은 상소를 올려 이러한 자들을 쓰지 말기를 구했다. 사마소(司馬昭)는 황제 조모(曹髦)를 시해하고 조환(曹奐)을 세우고 진왕(晉王)이 되었지만 병사하고 그의 아들 사마염(司馬炎)이 위를 결국에 무너뜨리고 진(晋)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강해진 군세(軍勢)에도 불구하고 사마염은 쉬이 형주를 치지 못하였다.

봉황 원년(272년), 서릉독 보천(步闡)이 중앙에서 소환(召還) 명령을 받고 의심하던 끝에 진나라에 투항(投降)하자 육항은 장군 좌혁(左奕), 오언(吾彦), 채공 등에게 지름길로 서릉으로 가도록 명령하고 서릉을 엄중히 포위(包圍)했다. 제장들은 서릉성을 공격할 것을 권했으나 육항(陸抗)은 오랫동안 서릉에 주둔했기에 그 견고함을 알고 있었으므로 함부로 공격(攻擊)하지 않았다. 의도태수 뇌담(雷譚)이 간곡히 청했으므로 한번 시험 삼아 치게 했는데 불리했으므로 아무도 이의(異議)를 달지 않았다.

진나라에서는 거기장군 양호(羊祜)를 파견하여 강릉을 공격하여 서릉을 공격하던 오나라 군대를 물리고자 했다. 그러나 육항(陸抗)은 강릉성은 쉬이 함락되지도 않을 성이고, 설령 그곳을 빼앗긴다고 하더라도 서릉을 되찾는 것이 더 중요했으므로 군대를 물리지 않았다. 양호는 육항이 예전에 쌓은 제방(堤坊)을 통해 배로 군량을 운송했는데 육항이 제방을 부수자 양호는 배 대신 수레로 군량을 운송(運送)하여 공력을 크게 소비했다. 진나라의 형주자사 양조(楊肇)와 파동감군 서윤이 진격해 오자 장군 주교(朱喬)와 영도독 유찬(兪贊)이 투항했다. 

육항(陸抗)은 유찬이 기밀(機密)을 흘릴 것을 우려하여 이민족 병사가 있는 곳이 가장 약하므로 진나라가 여기를 칠 것을 대비해 군대의 배치(排置)를 바꾸었다. 과연 양조는 육항의 예상대로 행동하였으나 육항의 대비를 뚫지 못하고 많은 병사를 잃었다. 달이 지나자 양조는 계책(計策)이 궁해져 도망하려 했다. 육항은 양조를 추격하고 싶었으나 성 안에 있는 보천에게 틈을 보일 우려가 있고 병사는 충분하지 못하므로 북을 치며 쫓는 시늉만을 했다. 양조는 이를 보고 매우 두려워하여 모두 갑옷을 벗고 도망치니 육항(陸抗)은 경병으로 이를 뒤쫓아 양조를 대패(大敗)시켰다. 양호 등은 양조가 지자 물러났으며 마침내 서릉성은 함락되었다. 보천의 3족과 대장들을 주멸(誅滅)하고 그 이하는 수만 명은 죄를 용서했다. 돌아와 악향에 주둔했는데 얼굴에는 자랑하는 빛이 없었고 평소와 같이 겸손하여 장졸들의 환심(歡心)을 샀다.

진양추(晉陽秋): 육항은 양호와의 사이에는, 고대에 자산의 예전에 자산(子産)과 계찰(季札)처럼 서로 사귀었다(僑札之好). 한번은 육항(陸抗)이 양호에게 술을 보내왔고 양호는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지 않았다. 육항이 병이 들자 양호는 약을 보내왔고 육항도 독살(毒殺)의 의심도 없이 그것을 먹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화원(華元: 송나라 정치가: 대략 BC 580년경)과 초의 장수 사마자반(司馬子反)이 오늘날 다시 나탔다고 여겼다. 

한진춘추(漢晉春秋): 양호는 전투에서 되돌아오자 이전보다 더 덕과 신의(德信)로써 행동하며 오나라 사람들을 감화시키려 했다. 육항(陸抗)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경 경비(國境警備)를 하는 병사들에게 "상대가 덕으로써 행동하고 있는데 우리가 폭정(暴政)을 한다면 우리 병사들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降伏)해 버릴 것이다. 각자 맡은 바를 올바르게 지키며 작은 이득(利得) 같은 것에 연연하지 마라". 

이 당시 진나라와 오나라 사이의 관계는 만약에 남은 쌀가마가 농지(農地)에 그대로 놓여 있어도 서로 빼앗아 가지 않았고 소나 말이 경계를 넘어 와도 상대국(相對國)에 그것을 알린 다음에야 그것을 포획(捕獲)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면(沔)수에서 오나라 사람들이 사냥을 할 때는 진나라 사람들이 먼저 맞혀서 잡은 사냥감을 얻은 경우엔 모두 다시 다되려 보내주었다. 한번은 육항(陸抗)이 병이 들었는데 영조에게 좋은 약을 요청(要請)했고 양호는 약을 조제하면서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특효약(特效藥)으로 최근 내가 먹으라고 만들었던 것인데 아직 못 먹은 약입니다. 당신의 병이 급하다고 하여 이렇게 보냅니다." 육항은 이내 그 심부름꾼이 보낸 약을 그대로마셨다. 부하들이 먹지 말라고 충고(忠告)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육항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손호(孫皓)는 이 둘의 이야기를 듣고 육항(陸抗)을 꾸짖었는데 육항이 대답했다. "작은 마을, 작은 촌 동네에서도 신의(信義)를 소중히 하는 인물이 있지 않으면 안 되는데 하물며 큰 오나라에서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만약에 제가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양호의 덕을 선명(鮮明)하게 드러낼 뿐 그에게 아무 상처를 입힐 수가 없습니다.”

습착치(習鑿齒)가 말하길 : 이(理)에 편승해 승리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신의(信義)에 의해서 행동하는 사람은 만인들이 우러러본다. 지금 대도를 이미 잃었고 신의도 오래토록 소멸(消滅)했는데 간사한 사람이 대권을 장악하고 요직에 거해 권모술수(權謀術數)로 급박한 사무를 처리하면서 자기 힘을 믿고 종횡(縱橫)하기도 하며 노비와 목동의 지혜를 가지고 있으니 이에 의지하여 공업을 이루지 않은 사람이 없고 이를 버리면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진 문공이 군대를 물렸는데도 원성이 항복(降伏)을 청했고 목자는 고성을 포위하고서도 힘서 싸울 것을 가르쳤으며 야부가 책략을 올리니 비 지방의 사람들이 귀순(歸順)하였고 악의가 공격을 늦췄으나 공훈이 널리 이어졌다. 그 사물을 복종(服從)시키고 승리를 하게 된 이유를 본다면 어찌 다만 위력과 서로를 속이는 것뿐이었겠는가! 지금 세 집안이 정족(鼎族)의 형세를 이룬지 40여년인데 오나라는 회, 면을 넘어 중국에 나아가 취하지 못하고 중국은 장강(長江)을 넘어 이익을 다투지 못하는 것은 힘이 균등(均等)하고 지혜가 비슷하며 도리는 서로를 기울게 하기 부족하기 때문이다. 무릇 저쪽을 잔혹하게 대하고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은 나를 이롭게 하고 잔혹(殘酷)한 짓을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며 무력(武力)을 떨쳐 사물을 두렵게 하는 것은 덕을 널리 하여 백성들이 그 은덕(恩德)을 마음에 품게 만드는 것만 못하다. 필부(匹夫)도 힘으로 복종시킬 수 없거늘 하물며 하나의 나라이겠는가? 힘으로 복종시킬 수 있다하더라도 덕으로 오게 하는 것만 못한데 하물며 제압(制壓)할 수 없는 상대임에랴? 이로써 양호는 대동의 책략(策略)을 품고 5병의 법칙을 생각해 백성들의 마음을 다스려 혜택(惠澤)을 고르게 하면서 정의의 그물을 떨쳐 오나라 영토를 덮고 겸애를 밝혀 흉폭(凶暴)한 풍속을 바로잡으며 백성들의 관점을 바꾸어 싸우지 않고 강표를 치달렸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소문이 널리 퍼져 백성들이 운집(雲集)하였으니 다른 나라를 국경으로 하고도 서로 널리 교통하였다. 오나라가 적을 만난 것으로부터 이런 적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육항(陸抗)이 보길 나라가 작고 군주가 포학(暴虐)하며 진나라의 덕이 날로 창성해지니 상대방은 쌍방의 장점을 쌓고 있는데 자기는 근본을 두터이 하는 규칙(規則)도 없으므로 백성은 엄한 적의 덕을 품고 경내는 군주(君主)를 버릴 수 있다는 걱정이 있었다. 민심을 진정시키고 내외를 평안히 하며 약한 것을 떨쳐 일어나게 하여 상국과 항형(抗衡)하고자 한다면 친히 이 도리를 행하여 이기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쪽의 덕이 우리에게 가해지지 못하게 하고 (우리의) 이 선량한 소문이 흘러 돌아와 방국(邦國)을 무겁게 하고 멀리 있는 풍속을 널리 밝힌다면 이부자리 위에서도 적을 공격해 막을 수 있고 장막 안에서도 적에게 이길 수 있다. 적을 기울게 하는데 갑병의 힘을 이용하지 않고 나라를 보전(保全)하는데 성지의 견고함으로 하지 않는 것은 신의가 적을 감동(感動)시키고 진심을 전날에 체감했기 때문이다. 어찌 속임수를 펼쳐 현명함을 위태롭게 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명성을 좇으며 바깥의 사물이 나를 무겁게 하는 것을 탐내 어리석게 이에 복종하여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않는 부류와 같겠는가! 이로부터 논하건대 국부(國府)를 수비하고 강토를 보전하는 것은 한 명의 병졸이 능히 할 수 있는바 이고 술수(術手)를 부려 상대방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소인이 하는 일이며 거짓말을 쌓아 상대방을 방비(防備)하는 것은 노복의 방식이고 무위에 의지해 안정을 구하는 것은 명철한 사람이 천시(天時)하는 바이다. 현인군자가 세상을 구하고 법도를 드리울 수 있는 이유는 이를 버리고 저를 취하는데 있으니 그 도리(道理)가 진실로 드넓기 때문이다.

죽음
이 공적(功績)으로 도호 벼슬이 더해졌다. 무창좌부독 설영이 투옥되자 상소를 올려 용서(容恕)해 주기를 구했다. 봉황 2년(273년) 봄, 육항(陸抗)은 대사마가 되고 형주목을 겸임(兼任)했으나 이듬해 여름 병이 들었다. 임종(臨終) 때까지도 손호에게 글을 올렸다고 한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서릉과 건평은 국가의 변방 장벽인데 이곳은 장강 하류에 위치(位置)하여 적국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만일 적군이 배를 띄워 물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며 천리를 걸쳐 배를 이어 걸쳐 번쩍이는 유성(流星)처럼 신속하게 도달한다면 다른 곳의 구원병이 와서 위급한 상황(狀況)을 풀어주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겁니다.”

결국 그는 274년 죽게 되고 기둥이 무너진 걸 안 진의 익주자사 왕준(王濬)이 오를 치자고 권해 오는 결국 멸망(滅亡)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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