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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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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말문인 홍학계(紅學界)는 설보채보다 임대옥을 왜 좋게 보는가?

图片信息 林黛玉从单身女青年活生生北漂成了空巢女汉子


청말문인의 "채대지쟁(釵黛之爭)"
홍학계(紅學界)의 임대옥(林黛玉)과 설보채(薛寶釵)에 관한 평가문제를 되돌아보면 혹은 높이고 혹은 낮춘다. 기실 이것은 서로 다른 시대의 사회문화심리(社會文化心理)와 관련이 있다. 청나라 때 "채대지쟁(釵黛之爭)"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설보채를 높이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나중에는 임대옥의 지지율(支持率)이 점점 올라가서 청말 민초가 되면 임대옥이 압도적(壓倒的)인 우세를 보인다. 그 동안 문인의 논쟁(論爭)은 상당히 격렬(激烈)했다. 심지어 추도(鄒弢)와 허백겸(許伯謙)은 '채대지쟁(釵黛之爭)'으로 인하여 주먹질까지 하는 일이 벌어진다.

추도(鄒弢)와 허백겸은 모두 촉의 홍학연구자(紅學硏究者)이고 원래는 아주 좋은 친구 간이었다. 추도는 일찌기 허백겸(許伯謙)을 "친구를 목숨처럼 아낀다(愛友如命)"고 칭찬한 바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임대옥(林黛玉)과 설보채(薛寶釵)에 대한 견해에서 심각한 이견을 보이게 된다. 추도는 임대옥파이고 허백겸은 설보채파이다. 그들의 견해는 첨예(尖銳)하게 대립했고 논쟁은 아주 거칠어진다. 추도의 ‘삼차로필담(三借廬筆談)’ 권11에 기재된 내용을 보면 "기묘춘(己卯春), 나는 허백겸(許伯謙)과 이 책을 논한다. 의견이 맞지 않아 서로 저어하다가 주먹을 몇 번 교환(交換)한다. 그런데 육선(毓仙)이 말렸다."

왜 청말문인(淸末文人)들은 임대옥(林黛玉)을 좋게 보았을까? 필자의 생각에 이는 당시의 사회문화심리와 관련(關聯)이 있다. 논쟁을 벌이다가 주먹질까지 하게 된 추도(鄒弢)와 허백겸을 보면 허백겸(許伯謙)의 평생사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가 '누관(樓館)'에 글을 썼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봐서는 정통(正統)을 고수하는 문사(文士)로 보인다.

추도(鄒弢)는 완전히 이미 새로운 사고(思考)를 하게 된 문인이다. 자료를 보면 이 추도는 강소성(江蘇省) 무석시(無锡市) 사람이다. 1850년에 태어나서 1931년에 사망한다. 그의 자는 한비(翰飛)이고, 호는 주개(酒丐), 수학사인(瘦鶴詞人), 소상관시자(蕭湘館侍者), 사향구위(司香舊尉)이다. 그의 저작으로는 기녀 소운란(蘇韻蘭)의 사적을 쓴 소설 ‘단장비(斷腸碑; 일명 해상진천영(海上塵天影)이다)’, 그리고 ’삼차로총고(三借廬總庫)‘ 및 ’삼차로필담(三借廬筆談)‘ 십이권이 있다. ’요수집(澆愁集) 8권‘도 세상에 내놓았다. 추도는 일찍이 ’소보(蘇報)‘의 주필을 맡기도 했다. 말년에는 상해계명여학교(上海啓明女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다.

추도(鄒弢)는 초기 홍학연구자중 아주 두드러진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가 처음 홍루몽(紅樓夢)을 접한 것은 14살 때라고 한다. 책을 손에서 떼지 못하다가 폐병(肺病)에 걸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조소(嘲笑)를 받았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소설 ’단장비(斷腸碑)‘는 바로 ’홍루몽‘의 필법을 모방하여 쓴 것이다. 책이 남주인공 한추학(韓秋鶴)은 바로 추도 본인이다. 여주인공은 천진명기 왕원(王瑗, 예명은 소운란)이다. 

내용은 추도(鄒弢)가 1892년 상해에서 왕원(王瑗)을 만나서 사랑에 빠진다. 왕원(王瑗)은 일심으로 추도를 따라 기적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추도는 가난하여 그녀를 맞이할 힘이 없었다. 돈을 모으기 위하여 그는 호남(湖南)으로 가서 친구 강표(江標)의 집에서 일을 한다. 그러면서 상해를 11개월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추도가 상해에 돌아와서 왕원을 취하려 할 때는 왕원(王瑗)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변심(變心)하여 다른 남자에게 시집갔다고 여긴다. 

추도(鄒弢)는 텅빈 집을 보고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 책에서 앞에 쓴 것은 그와 왕원(王瑗) 간의 불꽃같은 애정(愛情)이고 후반부는 꿈이 깨진 후의 비참한 심경(心境)을 그렸다. 

추도(鄒弢)는 홍루몽에 빠진다. 그리고 이런 경력도 있다. 그의 친구인 유달(兪達)이 홍루몽을 모방(模倣)하여 쓴 소설 ’청루몽(靑樓夢)‘에 비주(批注)를 다는데 수준이 상당하다. 어떤 연구자의 통계에 따르면 추도의 비어 2803개 중에서 갑술본 ’홍루몽‘의 지연재(脂硯齋)의 비어와 동일, 유사(類似)한 것이 100여개이다. 비록 갑술본 ’홍루몽‘의 비어는 단지 1105개(어떤 사람의 통계에 따르면 1587개)로 추도가 ’청루몽‘에 단 비주의 38%밖에 되지 않는데 두 책에 동일하고 유사한 비어가 100개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추도(鄒弢)가 지연지의 비어를 베꼈단 말인가 아니면 ‘홍루몽(紅樓夢)’ ‘청루몽(靑樓夢)’의 비어를 모두 추도가 쓴 것이란 말인가. 이 문제는 아무도 연구하지 않았다. 다만 최소한 추도가 ‘홍루몽’에 대하여 상당히 연구(硏究)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추도(鄒弢)와 같은 문인 이런 사상 감정과 인생태도(人生態度)를 가진 사람이 ‘홍루몽’을 연구하니 임대옥(林黛玉)을 옹호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임대옥이라는 인물이 지니는 애정과 생명자유(生命自由)를 추구하나 억압받는 병태미인(病態美人)이다. 특히 감성적인 문인이 그녀를 좋아하는 것은 필연적(必然的)이다. 관념이 비교적 정통적인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도 당연하다. 

임대옥(林黛玉)의 성격과 운명 그리고 문인의 찬미(讚美)는 확실히 진보된 인문의식과 문화가치판단(文化價値判斷)을 포한한다. 그래서 추도(鄒弢)와 허백겸(許伯謙)이 논쟁하다가 주먹질까지 하게 된 것은 기실 임대옥(林黛玉)과 설보채(薛寶釵) 때문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사상관념(思想觀念), 인생태도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관념으로 보면 사회문화 관념으로 인하여 임대옥(林黛玉)을 치켜세우고 설보채(薛寶釵)를 깎아내리는 것은 기실 편파적이다. "채대대립론(釵黛對立論)"도 ‘홍루몽’ 문본 및 조설근(曺雪芹)의 원뜻과 들어맞지 않는다. 채대는 모두 귀족천금(貴族千金)이고 비록 경우는 다르고 성격을 다르지만 모두 봉건전통(封建傳統)의 희생자들이다. 마찬가지로 비극적인 운명(運命)이다. 

1950년대 초의 이희범(李希凡), 남령(藍翎)은 ‘홍루몽간론 및 기타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임대옥(林黛玉)은 봉건귀족가정의 반역자이고 설보채(薛寶釵)는 과거제도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봉건예교의 경건한 신도(信徒)라고 하였다. 옛날 사람이건 현대 사람이건 채대지쟁(釵黛之爭)의 논쟁으로 주먹질까지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사상관념이 편파적(偏頗的)이고 과격한 것일 뿐이다.

만일 순수한 심미적 각도에서 본다면 임대옥(林黛玉)과 설보채(薛寶釵)를 대립시킬 필요가 없다. 심미주체(審美主體)와 심미대상(審美對象)은 모두 주관성,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다만 아름다움의 공통특성, 객관성(客觀性)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심미경험(審美經驗)이 장기적으로 축적되면 서로 다른 주관적 색채(主觀的色彩)와 사회성의 객체는 모두 공동특성(共同特性)을 지니는 심미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모두 보름달을 아름답다고 여긴다. 그러나 모두 초승달이나 그믐달도 아름답다고 여긴다. 

설보채(薛寶釵)는 보름달에 비유할 수 있고 임대옥(林黛玉)은 초승달이나 그믐달에 비유(比喩)할 수 있다. 모두 아름답고 각자에게 각자의 아름다움이 있다. 당연히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좋은 것을 좋아하면 된다. 논쟁(論爭)을 벌일 수도 있다. 그러나 피아를 구분(區分)할 필요까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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