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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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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루몽 저술한 조설근 마지막 거처는 어디이며 마지막 거주지에 대한 6가지 학설

图片信息 千里姻缘一牵曹雪芹 千里姻缘一线牵怎么得5分


지금까지 조설근(曹雪芹)의 마지막 거주지(居住地)에 대하여는 최소한 아래의 6가지 학설(學說)이 있다.

1. 육랑장 바깥의 소관제묘;
2. 서교 건예영;
3. 홍산구에서 온천진으로 가는 길의 상황기영 부근;
4. 남신장 행석구, 열무루와 보승사의 사이;
5. 온천진 백가동촌, 소석교 부근;
6. 정백기촌 38호, 북경식물원내, 지금의 "조설근기념관" 소재지

6가지 학설의 근거는 기본적으로 추측에 민간전설(民間傳說)을 더한 것이다. 추측은 각각 일정한 근거가 있다. 다만 이들 근거는 명확하게 구체적(具體的)인 마을이름, 지명 혹은 방위거리를 묘사한 것이 없다. 돈성(敦誠), 돈민(敦敏), 장의천 등 생전의 가까운 친구들은 조설근의 만년거주지(晩年居住地)와 관련한 싯구를 남겼다. 싯구들을 개괄(槪括)하여 보자면 가치가 있는 정보는 기껏 "서교(西郊)", "황엽촌(黃葉村)", "문대산수(門對山水)"등으로 구체적인 장소를 확정하기에는 부족하다.

이렇기 때문에 향산 정백기촌에서 "제벽시(題壁詩)"등 증거물(證據物)이 발견된 후 여러 학설 중 두드러지게 된다. 많은 홍학가(紅學家)들은 이곳을 조설근이 ‘홍루몽’을 저술한 "도홍헌(悼紅軒)"의 소재지로 본다. 그리고 관련부서를 움직여 "조설근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이곳의 제벽시중에 "원부근빈이예상교천하소(遠富近貧以禮相交天下少), 소친만우인재이산세간다(疏親慢友因財而散世間多)"등 구절과 한 쌍의 서상(조설근이 재혼할 때 친구가 보내준 선물)의 낙관 "졸필(拙筆)"에 그린 한 폭의 그림, 그림에는 완석(頑石) 하나와 난초 한 무더기가 있다. 그림의 곁에는 "제근계처사구(題芹溪處士句)"라는 글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조설근(曹雪芹)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조설근(曹雪芹)은 개략 건륭29년, 즉 1764년에 죽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이다. 이 정도의 시간간격(時間間隔)이라면 거의 10대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민간전설은 믿을 수 있는 것과 믿을 수 없는 것의 사이에 놓여 있다. 아마도 이러한 원인으로 온천진 백가동촌이 조설근(曹雪芹)의 마지막 거주지라는 전설은 믿을 만 하다. 어떤 사람은 확실하게 말한다. 건륭23년 봄(무인 1758년) 조설근이 44살 때 백가동촌으로 이주했다. 돈민의 ‘병호무재기성’에선 조설근의 거처의 상황을 묘사(描寫)하고 있다. "작은 냇물이 길을 막고 냇가를 마주보며 있고 흙으로 만든 집 4칸이 있으며 서남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돌을 쌓아서 벽을 만들고 가지를 잘라서 서까래(椽)로 삼았다. 담장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고 문도 제대로 만들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집은 깨끗하고 방석을 깔았으며 등나무가 자란다...." 어떤 사람은 고찰(考察)을 거쳐 오늘날 백가동천 서부의 소석교 부근이 조설근이 마지막 거주지라고 밝혔다. 아마도 향산식물원내의 "조설근기념관(曹雪芹記念館)"과 직접적인 경쟁이나 충돌을 막기 위하여인지 어떤 사람은 "이주" 혹은 "왕래"라는 말을 썼다. 그리고 마을의 뒤의 향산식물원(香山植物園)과 가장 가까운 골짜기에는 "조설근소도"라는 석비가 새겨져 있다.

‘홍루몽’의 독자로서 필자는 색은파(索隱派)가 아니다. 다만 필자는 조설근, ‘홍루몽’과 관련한 전설에 대하여 모두 상당히 농후한 흥미(興味)를 지니고 있다. 향산식물원에 있는 "조설근기념관" 및 그 부근의 영도구 수원에 사람들이 ‘홍루몽’의 통령보옥(通靈寶玉), 목석전맹(木石前盟)의 영감을 받은 그 원보형 암석이 있다. 백가동촌의 뒤에 있는 "조설근소도"는 필자가 여러 번 가 본 적이 있다. 최근 다시 백가동촌의 서부에 있는 소석교 일대를 가보았다.

필자는 이처럼 민간전설과 추측에 의하여 조설근(曹雪芹)의 최후거주지를 토론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본다. 학술가치(學術價値)나 예술가치(藝術價値)가 거의 없다. "홍학"에 있어서 조설근의 최후거주지가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홍루몽’ 자체의 사상내용과 예술성취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이다. 

다만 엽기(獵奇), 회고(回顧), 관광(觀光) 등을 포함한 인문적 가치는 수치로 헤아릴 수가 없다. 그날, 나와 두 친구가 이미 물이 흐르지 않고 두 조의 2미터길이의 4개의 돌이 이미 진흙 속에 반쯤 묻혀있는 소석교(小石橋) 위치에 도착했을 때 마음속으로 쓸쓸함이 밀려왔고 담담한 우상(憂傷)이라고 할 만 했다. 남녀촌민들은 외부인이 조설근고거(曹雪芹故居)를 찾아온 것을 보고 모두 우리에게 웃는 얼굴로 대했다. 확실히 자부심(自負心)을 가진 듯했다. 우상이든 자부이든 필자는 우리가 위대한 문학작품창작자에게 경의(敬意)를 표하는 좋은 감정이다. 모두 우리의 인생에서 간직할 가치(價値)가 있는 것이다.

홍루몽 작가의 수수께끼
‘홍루몽’은 중국고대 4대 명저(四大名著) 중 하나이고 중국고전소설 중 성취의 최고봉(最高峰)이며 현실주의창작의 가장 우뚝 선 기념비이다.

통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조설근(曹雪芹)이 ‘홍루몽’의 주요작가여야 한다. 그는 전체 소설의 전80회를 썼으며 고악(高鶚)이 후40편을 썼다. 다만 많은 홍학 전문가(紅學專門家)들이 ‘홍루몽’에 대한 많은 역사자료를 장기간 연구과 조사 고증한 후 ‘홍루몽’의 작가에 대하여 논쟁(論爭)이 발생했다. 여러 해동안 사람들의 주장은 각자 달랐고 통일된 정설(定說)을 구축하기 어려웠다. 이전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탄식(歎息)한 바 있다. ‘홍루몽’, 고금제일(古今第一)이라 칭하지만 안타깝게도 문헌(文獻)에 증명이 없어 그 사람을 평할 수가 없구나." 이렇게 일시에 ‘홍루몽’의 작가에 대한 주장(主張)은 분분해졌다.

가장 먼저 ‘홍루몽’의 작가가 조설근(曹雪芹)이라고 확인한 사람은 강희제의 14째 아들인 윤진(胤禛)의 손자 영충(永忠)과 건륭5년경에 태어나고 영충의 종제(從弟)이며 도통 부걸(溥傑)의 아들인 명의(明義)이다. 영충은 그가 쓴 ‘연분실집(延芬室集)’에 ‘인묵향득관홍루몽소설조설근(因墨香得觀紅樓夢小說弔雪芹)’ 절구 3수를 남긴다. 명의는 ‘제홍루몽(題紅樓夢)’ 시 2수의 소서(小序)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자설근서소찬‘홍루몽’일부(曹子雪芹書所撰‘紅樓夢’一部)". 거의 조설근과 동시대에 살았던 유명한 인물 원매(袁枚)는 ‘수원시화(隨園詩話)’에서 역시 이렇게 말한다. "강희연간(康熙年間), 조동정위강녕직조(曹棟亭爲江寧織造)....기자설근(其子雪芹), 찬‘홍루몽’일부(撰‘紅樓夢’一部), 비기풍월번화지성(備記風月繁華之盛)."

저명한 학자인 호적(胡適) 선생은 청나라 때 사람들의 필기, 저서, 지방지를 많이 연구하고 읽은 후 그의 ‘홍루몽고증(紅樓夢考證)’에서 이렇게 말한다. "‘홍루몽’은 조설근(曹雪芹)이 썼다." 노신(魯迅) 선생도 같은 의견이었다. 저명한 홍학자 유평백(兪平伯)도 이 견해에 찬동했고 ‘홍루몽변(紅樓夢辨)’이라는 책을 써서 이 책은 조설근의 자전적 성격(自傳的性格)의 소설이라는 견해를 강화시켰다. 학자 주여창(周汝昌)도 엄청난 자료를 계통적으로 연구하여 추가로 ‘홍루몽’의 작가가 조설근이라고 논증(論證)했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 머리  속에는 이미 조설근이 ‘홍루몽’의 작자라고 인식(認識)되어 있고 이는 거의 다툼의 여지가 없는 사실처럼 보인다.

다만 거의 정설처럼 된 이 견해(見解)에 대하여 여전히 사람들은 계속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들은 ‘홍루몽’이 조설근 이전에 원작자가 있었다고 한다. ‘홍루몽(紅樓夢)’ 자체에서도 ‘홍루몽’ 제1회에 '작자자운(作者自雲)'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공도인(空空道人)은 이런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한 다음 ‘석두기(石頭記)’를 다시 한 번 검열(檢閱)했다....시세(時世)에 전혀 간섭받지 않아서 비로소 처음부터 끝까지 초록을 하여 세상에 내놓는다. 이때부터 공공도인은 공(空)애서 색(色)을 보고, 색(色)에서 정(情)이 생기고 정(情)이 색(色)으로 들어가 색(色)에서 공(空)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이름을 정승(情僧)이라고 바꾸고 ‘석두기(石頭記)’를 ‘정승록(情僧錄)’으로 바꾼다." 동로(東魯) 공매계(孔梅溪)는 ‘풍월보감(風月寶鑒)’이라고 제목을 붙인다. 나중에 조설근이 도홍헌(悼紅軒)에서 10년간 비열(批閱)하고 5번 덧붙이고 빼서(增刪) 목록을 만들고 장회를 나누고 나서 ‘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라 한다. 그리고 절구를 지었다. '만지황당언(滿紙荒唐言), 일파신산루(一把辛酸淚), 도운작자치(都云作者痴), 수해기중미(誰解其中味)'. 이렇게 보면 ‘홍루몽’은 "석두기"에서 왔고 공공도인은 이를 초록한 사람이고 정승이라고도 한다. 나중에 조설근이 "비열십재(批閱十載), 증산오차(增刪五次)"를 해서 책으로 만들었다. 작자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인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하여는 또 다른 근거(根據)도 있다. 그것은 바로 조설근과 동시대의 인물인 지연재(脂硯齋)이 경신본(庚辰本) 제13회에 남긴 미비(眉批)이다. "다섯 가지 사건을 다 읽기도 전에 나는 실성대곡(失性大哭)했다. 30년 전에 책을 쓴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조설근은 임오년(1762년) 제석(除夕)에 세상을 떠났다. 경신본은 건륭25년(1760년) 가을에 만들었다. "삼십년전"이라면 조설근은 겨우 5살에 불과하다. 통상적(通常的)인 이치대로라면 십여 세의 소년이 이 같은 거작(巨作)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 근거로 추측해보면 첫째, ‘홍루몽’의 원작자는 조설근(曹雪芹)보다 10살가량 많을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조씨 집안의 번성했던 생활을 이해하고 소설에 이를 나타낼 수 있다. 그는 분명 조설근의 윗사람일 것이다. 그래야 "자전'성격의 인물배분관계에 부합한다. 둘째, 그 평서자는 ‘홍루몽’의 작자를 얘기할 때 대부분 휘막여심(諱莫如深)했다. 직접 그 이름을 쓰지 못했다. 그리고 ‘홍루몽’의 '작자자운(作者自雲)'에서도 그저 '공공도인(空空道人)'이라고만 했다. 이렇게 보면 아마도 ‘홍루몽’의 원작자는 죄를 지은 관리의 신분일 수 있을 것이다. 삭탈관직(削奪官職) 된 후 민간에 은거하고 불문에 들어간 것이다.

또 다른 일부학자들은 작자가 "석형(石兄)"이라고 본다. 그는 바로 조인(曹寅)의 둘째아들이며 조설근(曹雪芹)의 숙부인 조죽촌(曹竹村)이다. 가장 먼저 쓴 것은 ‘풍월보감(風月寶鑒)’이며 많은 남경말과 양주말이 들어 있다. 나중에 조설근은 이를 가공하여 북경말로 바꾸었다. 이렇게 보면 제1회와 서로 부합한다. 즉 '석형' 원저(原著), 공공도인 초록(抄錄), 공매계(孔梅溪) 제명(提名), 조설근 비열증산. 단 이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의문을 제기한 사람중에는 채원배(蔡元培), 왕몽완(王夢阮) 등도 있다. 채원배는 그가 쓴 ‘석두기색은(石頭記索隱)’ 6판의 자서(自序)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체 소설이 조씨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왕몽완은 ‘홍루몽색(紅樓夢索隱)’의 제요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책은 조설근을 거쳤지만 처음에 만든 사람은 다른 사람이다."

‘홍루몽’의 작자의 진상은 무엇인가. 반세기동안 이는 계속하여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문사연구자들에게 논쟁의 초점(焦點)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 ‘홍루몽’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과 홍학애호자(紅學愛好者)들은 '작자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회피(回避)하고 있다. 연구대상을 순수히 문본(文本)에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에 홍학독본 ‘풍어홍루(風語紅樓)’를 출판한 작자 "풍지자(風之子)"가 그러하다. 이것이 아마도 새로운 그리고 가능한 연구방법(硏究方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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