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명저(四大名著)"는 오늘날 중국인들에게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말이다. ‘삼국연의(三國演義)’,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홍루몽(紅樓夢; 책이 만들어진 순서)’의 이 4권의 거작은 중국백성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소설이며 방대(尨大)한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을 뿐 아니라 중국고전소설의 최고성취를 대표한다. 단 이 4부의 위대한 작품은 언제부터 "사대명저"로 통칭(統稱)되었는가? 아마도 이것은 모두 아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근원을 따져보면 명나라 때 소설가 풍몽룡(馮夢龍)이 "사대기서(四大奇書)"라는 말을 한 것이 "사대명저(四大名著)"의 남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학자들에 의하여 명나라 통속문학의 제일인이라고 불리는 풍몽룡은 고전송속소설집 "삼언(三言)"; ‘유세명언(喩世明言)’, ‘경세통언(警世通言)’, ‘성세항언(醒世恒言)’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바로 이 명 말의 문학가는 먼저 월에게 명나라 때의 "사대기서"를 언급한다. ‘삼국연의’, ‘수호전’, ‘서유기’ 및 ‘금병매’. 명말청초의 문학가 이어(李漁)는 이 견해를 이어받아 ‘삼국연의’를 "제일기서(第一奇書)"라고 불렀다. 비록 이어와 동시대의 문학비평가인 김성탄(金聖嘆)은 몇 권의 재자서(才子書)라는 말을 내놓기도 했지만 명말청초에 상대적으로 고정되고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사대기서"라는 말이다. 나중에 조설근(曹雪芹)이 건륭전기 창작한 위대한 작품 ‘홍루몽’이 ‘금병매(金甁梅)’를 대체하여 명대 "사대기서"라는 말은 "명청사대기서"로 바뀌게 된다.
우리가 오늘날 통상적으로 말하는 "사대명저(四大名著)"라는 말은 아무런 의문 없이 ‘홍루몽’이 쓰여진 후에 나온 말이다. 이 주장이 청나라 때 틀을 갖추지는 않았다. 거슬러 올라가면 아마도 민국연간의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 때 초보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더 정확히 말해서 아마도 신중국성립 이후 내지 1970년대 말 개혁개방초기에 최종적으로 확정(確定)된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사대명저"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중국고대문학작품(中國古代文學作品)을 읽고 연구하고 검토하는 기나긴 과정 속에서 점진적(漸進的)으로 컨센서스를 이룬 것이고 최종적으로 확정, 명명된 것이다.
사대명저 중 ‘홍루몽’이 가장 늦게 쓰였다. 그러나 후래거상(後來居上)이라고, 그중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공인(公認)받고 있다. 중국고전문학의 최고봉(最高峰)이다. 다만 ‘홍루몽’이 이런 지위를 획득한 것은 확실히 지나간 과정을 겪었다. 구파홍학가중에서 최초의 홍학가인 지연재(脂硯齋) 그리고 청나라 때의 왕희렴(王希廉), 장신지(張新之) 및 요섭(姚燮)등은 모두 "평점파(評點派)"라고 할 수 있다. ‘홍루몽색은(紅樓夢索隱)’을 저술한 왕몽완(王夢阮), 심병암(沈甁庵)등은 "색은파(索隱派)"의 대표이다. 건륭시대에 ‘홍루몽제사(紅樓夢題詞)’를 쓴 섭숭륜(葉崇侖)등등은 개략 "제영파(題詠派)"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홍학(紅學)"이라는 용어가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광서초기 ‘홍루몽’을 즐겨 읽던 경사의 사대부(士大夫)들 입에서이다. 반은 농담식(弄談式)으로 붙인 말이다. 민국초기에 이르러 소설을 읽기 좋아하던 주창정(朱昌鼎)이라는 사람이 ‘홍루몽’에 깊이 빠져 있었는데 친구가 어느 날 방문했을 때 그가 머리를 처박고 책을 읽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물었다. "선생은 무슨 경전(經典)을 공부하시는지요?" 주창정이 답한다. "딴 것이 아니고, 내가 전공하는 것은 '홍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에피소드가 널리 알려진 후, "홍학"이라는 단어는 점차 ‘홍루몽’을 연구하는 학문의 전용명칭(專用名稱)이 된다.
국학대가 왕국유(王國維)는 1904년에 ‘홍루몽평론(紅樓夢評論)’이라는 글을 쓰면서 철학과 미학의 측면에서 ‘홍루몽’의 예술적 성취를 분석했다. 이 소설은 "철두철미(徹頭徹尾)한 비극이다"라고 하고 "해탈을 이상으로 하는" 예술적 성취가 아주 높은 "일대저술(一代著述)"이라고 한다. 왕국유는 색은파(索隱派), 평점파(評點派)도 아니고, 제영파(題詠派), 고증류(考證類)도 아니다. 다만 그는 ‘홍루몽’을 높이 평가하여 ‘홍루몽’의 문학사적 지위(地位)를 끌어올리는데 큰 공을 세운다. 청나라조정의 은혜(恩惠)를 입은 왕국유는 "청유(淸遺, 청나라 유신)"로 자처했는데 그의 ‘홍루몽’에 대한 높은 평가는 아마도 그것과는 직접 관련이 없을 것이다.
민주혁명가로 '현대성인(現代聖人)'이라는 명예를 누리고 있는 저명한 교육가 채원배(蔡元培)는 1917년 9월에 출판한 ‘석두기색은(石頭記索隱)’이라는 책에서 이런 견해를 내놓는다. ‘홍루몽’은 은우성(隱寓性)이 아주 강한 정치소설(政治小說)이다. '작자는 민족주의 정서를 지니고 책에서 명나라가 망한 것을 애도(哀悼)하고 청나라의 잘못을 들추어 특히 한족의 명사로 청나라에서 관직(官職)을 지낸 사람들에 대하여 통석(痛惜)하는 뜻을 나타냈다" ‘홍루몽’이 쓰여질 때는 문자옥(文字獄)으로 유명한 건륭연간(乾隆年間)이었다. 그래서 작자는 아주 은회적(隱晦的)인 수수께끼식의 어법으로 그의 마음속에 있는 ‘홍루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채원배는 혁명당의 원로이다. '반청복명(反清復明)'을 정치적 선전구호로 내걸었다. 국민당의 청왕조를 전복시킴의 원로(元老)이다. 그는 민족주의의 각도에서 ‘홍루몽’을 연구하고 이해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의 운명(運命)일지 모른다. 채원배의 견해는 당시에 크게 환영받는다. 채원배(蔡元培)의 사회영향력도 거대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홍루몽’의 명성을 떨치게 만든다. 그 때 ‘홍루몽’의 작자가 도대체 누구인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었다.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조설근(曹雪芹)은 그 조상이 한족이다. 다만 명말청초 때 이미 만주족에 편입되어 건륭황제(乾隆皇帝)의 인정을 받았다. 조설근의 가족은 조부와 부친의 시대에 부귀영화를 맘껏 누린다. 그가 어렸을 때 조설근가족은 옹정제(雍正帝)의 명으로 가산몰수당하고 조씨집안은 이때부터 몰락(沒落)한다. 다만 조설근은 기적(旗籍)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평생 노동을 하지 않고도 매월 정부에서 몇 냥의 은자(銀子)를 받아서 만주족으로서 대우를 받아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만일 이 글을 쓸 때 채원배가 후세인들이 보편적으로 작자가 확실히 조설근이라고 인정할 것을 알았다면 그리고 조설근의 신분과 가족연원을 알았더라면 아마도 그는 ‘홍루몽’이 '반청복명'에 뜻을 둔 걸작이라고 말하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저명한 학자 겸 문화명인 호적(胡適)은 소위 신홍학의 창건자(創建者)이다. '정리국고(整理國故)'의 배경 하에 그는 1921년 ‘홍루몽고증(紅樓夢考證)’이라는 책을 써서 새로운 관점(觀點)을 내놓는다. 예를 들어 ‘홍루몽’의 작자가 조설근(曹雪芹)이라고 확정한다. 예를 들어 ‘홍루몽’은 조설근이 전80회를 완성하고 고악(高鶚)이 후40회를 완성했다, 다시 예를 들어 호적은 ‘홍루몽’이 조설근의 자전적 소설(自傳的小說)이다. 등등 호적의 새로운 관점 및 그의 고증식 연구법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고 심지어 혁명적(革命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철저히 이전의 홍학연구(紅學硏究)의 견강부회(牽强附會), 수수께끼풀이식의 방법을 벗어났다. 호적이 ‘홍루몽고증’을 쓴 것은 상해아동도서관(上海兒童圖書館)이 출판하는 신표점본 ‘홍루몽’의 서언으로 쓴 것이다. 다만 그의 행위는 순수 학문을 위한 학문은 아니었고 구전통을 타파(打破)하고 신문화운동에 조력(助力)하려는 동기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호적(胡適)은 이 글에 정말 많은 노력을 들인다. 그리고 이 서언의 영향력은 아주 컸다. 그래서 그는 이로써 홍학연구의 신천지를 개척(開拓)하게 된다. 그러나 호적은 ‘홍루몽’에 대한 평가를 그다지 높게 해주지 않았다. 왜 호적은 ‘홍루몽’에 대한 평가를 그다지 높지 않게 한 것일까? 이것은 호적 개인의 문학가치관(文學價値觀)이 주요한 작용을 하였다. 다만 아마도 당시의 시대배경과도 관련 있을 것이다. 어쨌든 북대교수로서의 높은 급여를 주는 중화민국은 청왕조를 전복(顚覆)시킨 것이니까. 어쨌든 ‘홍루몽’은 기인(奇人)이 쓴 청왕조의 저작이니까.
호적(胡適)의 관점은 직접적으로 홍루부회학(紅樓附會學)을 일소하는 동시에 그를 북대교수로 데려오고 그에게 큰 은혜가 있는 채원배 선생의 ‘홍루몽’에 관한 관점을 뒤흔든다. 채원배(蔡元培)는 호적의 도전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경용병포(兼容幷包)"로 호적이 고증을 중시한 연구방법을 긍정(肯定)한다. 그는 그저 1927년이 되어서야 다른 사람의 책의 서문을 쓰면서 반격(反擊)을 하였을 뿐이다. 다시 한 번 자신의 관점에 대한 변호(辯護)를 약간 한 것이다. 채원배와 호적의 논쟁(論爭)은 당시에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온다.
객관적으로 ‘홍루몽’이 '4대고전명저'의 반열(班列)에 오르는데 좋은 기반을 닦게 해준 것이다. 또한 홍학의 형성과 추가적(追加的)인 발전에 아주 좋은 기초를 닦는다. 호적의 '고증파(考證派)'와 채원배의 '색은파(索隱派)'는 이로부터 홍학에서 장기간 병존(竝存)하며 21세기의 오늘날까지 서로 연구하고 논쟁한다.
신중국의 창건자이며 일대위인 모택동(毛澤東) 홍학연구에 심득을 얻은 전문가이다. 다만 그는 실증파홍학가(實證派紅學家)는 아니고 색은파홍학가(索隱派紅學家)도 아니다. 그의 ‘홍루몽’에 관련되는 여러 가지 말고 관점을 보면 아마도 그를 "계급투쟁파홍학가(階級鬪爭派紅學家)"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모택동은 사상성과 문학성(文學性)에서 모두 높은 성취를 이룬 ‘홍루몽’은 아주 정교하게 봉건사회와 봉건사회의 쇠망사(衰亡史)를 그렸다.
독자들에게 무엇이 봉건사회인지(封建社會認知)를 인식하고 연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계급분석의 관점과 방법으로 ‘홍루몽’을 해독(解讀)하도록 주장했다. 모택동(毛澤東)은 일찌기 청년시대에 장사(長沙)에서 공부할 때 ‘홍루몽’을 읽었다. 그후 혁명전쟁연대이건 신중국성립 이후 일리만기(日理萬機)하던 연대이건 그는 이 책에 대하여 강렬한 열정(熱情)과 관심을 갖고 있었다. 여러 번 통독(通讀)했을 뿐 아니라 ‘홍루몽’을 아주 잘 알았고 자주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 그리고 각종회의에서의 말씀에서 보고서(報告書)를 만들 때도 ‘홍루몽’의 전고(典故)를 인용한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평론(評論)을 발표하고 공개적으로 이 책을 읽을 것을 추천(推薦)한다. 1954년과 같은 경우 모택동은 이희범(李希凡), 남령(藍翎)의 두 청년학자가 ‘문사철(文史哲)’잡지에 글을 빌어 유평백(兪平伯)의 홍학관점을 비판한 일로 전국적인 범위에서 ‘홍루몽’연구의 선풍(旋風)을 불러일으킨다. ‘홍루몽’작품 자체의 성취 그리고 모택동(毛澤東)과 같이 영향력이 아주 크고 말 한마디가 일언구정(一言九鼎)인 지도자의 전례 없는 숭상(崇尙)은 ‘홍루몽’으로 하여금 최대의 사회적 영향력을 얻게 만든다. 그리고 ‘홍루몽’을 중국고전문학(中國古典文學)의 최고봉으로 끌어올린다.
이상의 여러 가지 일들을 거처 당초 명조의 "사대기서(四大奇書)"는 최종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누구나 알고 있는 ‘홍루몽(紅樓夢)’을 우두머리로 하는 중국고대 "사대명저(四大名著)"로 바뀌어 갔다.
1970년대 말 80년대 초 ‘홍루몽학간(紅樓夢學刊)’ 잡지가 창간된다. 중국 ‘홍루몽’학회가 성립된다. 이렇게 하여 홍학은 심지어 체재 내에서 안정적이고 유력한 지지를 받게 된다. 홍학(紅學)의 발전은 끝이 없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홍루몽’이 받은 관심과 영광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비록 ‘홍루몽’이 정말 그렇게 대단한지 홍학이 정말 그렇게 대단하게 자랑할 만한 것인지 심지어 홍학이 정말 존재할 필요가 있는지 여부에 대하여 의문(疑問)의 목소리가 계속 있어왔지만 그러나 그런 목소리는 당랑거철(螳螂拒轍)과도 같았다. ‘홍루몽’은 여전히 동쪽하늘에 뜬 태양처럼 현란(眩亂)했다. 홍학은 여전히 도도한 장강처럼 장대하게 앞으로 밀려나갔다.
신시대 이래 특히 최근 6,7년간 일부 중량급(重量級)의 심지어 대가급의 학자, 작가, 평론가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홍루몽’에 관심을 쏟았다. 그리고 연이어 ‘홍루몽’에 대한 뛰어난 글들을 발표(發表)한다. 이들 저작과 글은 이들 작가, 학자, 평론가의 ‘홍루몽연구(紅樓夢硏究)’ 등 방면에서의 남다른 조예(造詣)와 견해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를 포함한 아직 ‘홍루몽(紅樓夢)’에 대하여 진정으로 진지하게 연구해보지 않은 일부 젊은 사람들로서는 이 같은 거작(巨作)과 여러 가지 연구저작과 연구논문(硏究論文)들의 앞에서 정말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보고 우러러 볼 수밖에 없다. 함부로 부닥치고 연구할 용기(勇氣)를 내지 못한다. 아마도 20,30년 이후 이들 젊은이들 중에서 아직 살아남은 사람이 있으면 그리고 그때 아직도 정력(精力)이 남아 있고 기연(機緣)이 있다면 필자를 포함한 이들이 아마도 이전의 선배(先輩)들이 걸었던 족적(足跡)을 뒤따라서 이 위대한 거작을 연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