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제5대 황제이다. 강희제(康熙帝)의 넷째 아들로 청의 전성기(全盛期)를 이끌었다. 중국 역사에서 제갈량(諸葛亮)과 쌍벽을 이룰법한 지독한 일 중독자(中毒者)이다. 다만 성격은 상반되는 게 함정 강희제(康熙帝)의 치세가 워낙 길었기 때문에 1722년 즉위했을 때 이미 45세였으며 그 후 13년 동안 재위했다.
강희제 17년인 1678년 12월 13일, 강희제의 4남으로 후궁 우야씨(烏雅氏)가 자금성에서 그를 낳았다. 당시 우야씨는 서비(庶妃)로 옹정제를 기를 수 없었다. 이 시기에 황귀비이자 내궁을 관리하던 동가씨(佟佳氏)의 유일한 자녀가 요절했는데 강희제는 그녀에게 옹정제를 양자로 줘 버렸다. 동가씨는 옹정제(雍正帝)를 친자식처럼 총애(寵愛)하며 길렀고 강희제가 정무를 보는 도중에 붓을 놓거나 옥새를 가져오는 등 강희제(康熙帝)의 잔시중을 들게 하여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청나라 시절 황자들의 교육은 상서방(上書房)이 맡았는데, 강희제는 직접 나라의 특급 인재들을 뽑아 황자들에게 교육을 시켰다. 옹정제(雍正帝)를 비롯한 황자들은 상서방에서 만주어, 몽골어, 한어 등 3가지의 언어를 배웠고 역사책과 여러 경사(經史)들을 익힘과 함께 말 타기, 활쏘기, 심지어 수영(水泳)까지 익히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린나이에 춘일독서(春日讀書), 하일독서(夏日讀書) 등 시가를 창작(創作)하여 부친을 기쁘게 했다.
나이가 들면서 옹정제(雍正帝)는 아버지인 강희제(康熙帝)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16세 때 공자의 고향 곡부로 가서 공자(孔子)에게 제사를 지낸 일, 19세 때 부친이 최후의 몽골 제국으로 불리는 준가르의 갈단 칸을 공격(攻擊)할 때 따라가서 정홍기의 군영을 관장한 일 등 여러 가지 일을 거들면서 자신의 입지를 키워 옹친왕(雍親王)에 올랐다.
강희제에게는 아들이 모두 35명이 있었는데 어려서 죽거나 양자로 준 아들을 제외하면 26명이 있었다. 여러 아들 가운데서 둘째 아거(阿哥) 윤잉(1674~1725)만이 효성인황후가 낳은 아들이었다. 적장자인 윤잉을 강희제는 몹시 귀여워했다. 강희제는 그렇게 예뻐한 적장자(嫡長子)인 윤잉을 빠르게 황태자로 만들고 후계자 수업을 시켰다. 윤잉은 강희 36년(1697년) 3차 준가르 원정 때 강희제 본인은 직접 원정에 참전(參戰)하였고 윤잉을 베이징에 두어 정사를 대신 처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윤잉은 이때부터 강희제의 신뢰를 잃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윤잉은 자신의 심복(心腹)들을 보내는 등으로 부친의 행동을 관찰하고 탐문하게 되었다. 결국 이에 참다못한 강희제(康熙帝)는 윤잉을 한차례 황태자 자리에서 폐하고 감금(監禁)시킨다.
윤잉이 황태자의 자리에서 쫒겨 나자 황자들은 저마다 황태자(皇太子)가 되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황태자당(윤잉의 붕당), 황8자당, 황4자당 같은 파당이 형성되었다. 강희 47년(1708년) 9월, 강희제는 황태자 폐위 사건에 연루 된 황태자, 1황자, 3황자, 4황자(雍正帝), 5황자, 8황자, 13황자를 연금하였고, 황태자와 1황자, 13황자를 제외한 황자들은 11월 석방(釋放)되었다. 황태자를 복위시킬 마음이 있었던 강희제는 11월 14일, 여러 황족과 대신을 불러서 1황자를 제외한 황자들 중에서 황태자를 추천하라 명하였고 악륜대, 규서, 왕홍서, 마제, 동국유 등 황8자당에 속한 많은 대신들이 8황자를 추천(推薦)하였다. 강희제는 이를 빌미로 8황자가 1황자와 결탁(結託)하였으며 당파를 결성했다는 이유답(폐태자 윤잉의 복귀)은 정해져 있고 작위를 박탈(剝奪)하였고 황8자당의 세력을 약화시킨 다음 이틀 뒤인 16일 황태자를 석방(釋放)하면서 황태자 복위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강희 48년(1709년) 윤잉을 다시 황태자로 책봉(冊封)하였다. 그러나 강희 51년(1712년) 윤잉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몇몇 대신들과 결탁하여 역모(逆謀)를 꾀하다 발각되어 다시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 나 함안궁(咸安宮)에 연금되고 만다.
이렇게 태자 윤잉은 다시 폐위(廢位)되었고 능력 있는 황자들이 다시금 황태자 자리를 노리고 황위 다툼을 벌인다. 특히 4황자(雍正帝), 8황자, 14황자들이 치열하게 다투었다.
하여간 황자들이 이렇게 다투는 와중에 옹정제(雍正帝)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퉁기야 롱코도(佟佳 隆科多, 동가 융과다), 연갱요(年羹堯) 등 자신의 세력은 모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견제 받을 만큼 크게 파당(派黨)을 만들지는 않고 후계자 쟁탈전(爭奪戰)에도 전면에 나서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늙고 기력이 떨어진 강희제(康熙帝)는 말년에 아들들의 이런 행각을 보고 진저리를 치던 바 옹정제(雍正帝)의 이런 태도는 강희제의 마음을 잘 공략했다. 더구나 마침 강희제는 옹정제의 아들이자 뒷날의 건륭제인 어린 손자 훙리의 귀여움과 똑똑함에 흠뻑 빠져있던 바 손자에 대한 애정은 옹정제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최후까지도 불분명(不分明)했던 후계자 자리였지만 강희제는 죽기 전에 옹정제를 후계자(後繼者)로 만들어 놓았다. 옹정제의 정적(政敵)들은 그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조서를 위조(僞造)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옹정제는 이런 논란(論難)을 마구 패서 잠재웠다.
옹정제(雍正帝)는 아버지 강희제(康熙帝)가 문무가 비교적 균형을 이루었던 데 반해 철저할 만큼 문치(文治)에 비중을 두었다. 선제인 강희제가 삼번(三藩)의 난 평정, 대만 정복, 러시아와의 분쟁, 외몽골 정복 등을 감행하고 준가르와 전쟁을 치르는 등 외정(外政)에 직접 관여하여 성과를 내면서 내치도 돌본 것에 비교하면 철저하게 평화주의나 부전(不戰)주의로 일관했는데 즉위 초기에는 연갱요가 서북에서 군사 작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지만 1731년 티베트의 갈단 체링에게 청군이 대패(大敗)한 뒤로는 군사적인 정복 활동(征服活動)을 벌이는 작업에서 거의 손을 놓았다.
그렇지만 내치에서는 선제 때 마무리가 안 된 수준의 내정 체계를 크게 정비하여 강희제와 거의 동급의 찬사를 받는다. 팔기군(八旗軍) 체제를 손보고 군기처를 설치하는 등의 개혁으로 권력을 황제에 집중시켰고 1727년 러시아와 캬흐타 조약을 맺어 국경선(國境線)을 명확히 그었다. 또한 하술(下述)되는 '본인 즉위 문제'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황태자 밀건법(皇太子密建法)도 시행했다. 다만 만주족 후비(后妃)에게서 난 소생이 본인뿐이던 건륭제(乾隆帝) 등의 사례로 실제 이 법의 효과가 있었던 때는 적다.
본래 황제 중심의 정치에서는 황제가 모든 일을 알아야 했는데, 이런저런 관리를 거쳐서 올라오는 상소문(製本)은 비밀성이 뚝 떨어지다 보니 황제가 쉽게 휘어잡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옹정제(雍正帝)는 황제에게 곧바로 바칠 수 있는 사적인 연락통인 주접을 강화(强化)시켰다.
이를 통해 옹정제(雍正帝)는 각 관리들의 생각과 행동을 알아냈는데 아무래도 황제가 모두 하기엔 일손이 모자란지라 군기처라는 주접 전담 부서(全擔府署)를 만들어 돕게 하였다. 이들은 황제의 최측근이었고 황제 집무실 근처에서 숙직(宿直)하며 필요할 때마다 바로바로 대응했다.
여담(餘談)이지만 이 주접이 유명한 까닭은 '주비 유지'란 것 때문인데 쉽게 말하면 빨간펜 선생님이었다. 다만 부정적(否定的)이라서 문제이지 황제와 사적으로 이야기하는 주접이다 보니까 당연히 황제가 직접 답장을 썼는데 그 답장이 '그래 잘 받았다'가 아니라 보낸 사람을 조목조목(條目條目) 지적하는 내용이 가득했다. '내용(內容)이 이게 뭐냐', '왜 긴 종이에다 적게 써서 종이를 낭비하냐' 등등 오죽하면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이걸 두고 '세계에서 가장 양심적(良心的)인 독재 군주'라고 평할 정도이다.
청나라 4대 강희황제(康熙皇帝)부터 아들 옹정황제(雍正皇帝)인데 손자 건륭황제(乾隆皇帝)에 이르는 134년은 중국 역사의 전성기이다. 지금 중국의 엄청난 땅덩어리는 이때 정해졌다. 6000만 명이던 인구도 이 기간에 2억 명으로 늘었다. 강희황제와 건륭황제(乾隆皇帝)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君主)”라는 명예도 함께 누렸다. 그러나 옹정황제(雍正皇帝)에게는 유독 “잔인한 독재자(獨裁者)”의 형상이 따라다녔다.
강희황제는 아들이 서른다섯이나 되였다. 강희황제(康熙皇帝)가 일찌감치 둘째아들을 황태자로 지명(指名)하자 신하들이 아들에게 줄을 서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황태자를 폐위(廢位)했다. 그러자 황자(皇子)들 간에 후계 자리를 놓고 다툼이 뜨거웠다. 서로 헐뜯고 고자질했다. 1722년에 강희황제가 죽게 되자 아들들이 모였다. 대신(大臣) 롱고도가 방에 들어가 황제의 뜻을 받아왔다. 계승자는 넷째 아들, 후날의 옹정황제(雍正皇帝)였다.
옹정황제(雍正皇帝)는 몸을 돌보지 않고 일했지만 후계지명을 둘러싼 음모설(陰謀說)에 시달렸다. 음모설은 이랬다.
“강희황제는 원래 열넷째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준다는 뜻으로 롱고도의 손바닥에 “十四(십사)”라고 썼다. 옹정황제(雍正皇帝)에게 매수된 롱고도가 방을 나오면서 “十四”에서 “十”을 혀로 핥아 지우고 “四”만 남겼다.”
강희황제가 “열넷째 아들에게 넘겨준다(传位十四皇子)”고 종이에 써둔것을 옹정황제가 훔쳐서 위조(僞造)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十四”의 “十”을 “~에게”를 뜻하는 어조사 于(우)로 바꿔 “넷째아들에게 물려준다(传位于四皇子)”가 되게 했다는 얘기이다.
옹정황제는 소문을 퍼뜨린 이복형제(異腹兄弟)들을 “개”, “돼지”라고 부르고 감옥에 가둬 죽게 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황태자를 발표하지 않았다. 후계자이름을 적은 종이를 황궁안의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고 쓰인 액자 뒤에 두고 “내가 죽으면 열어보라”고 했다. 그러고는 “한번 후계자로 마음에 뒀더라도 잘못하면 언제든 바꿀수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황자(皇子)들은 아버지 마음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황제(皇帝)가 되기 위한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옹정황제(雍正皇帝)식의 황위세습제도(皇位世襲制度)는 청나라가 끝날 때까지 계속 되였다.
최근에 요녕성(遼寧省)에서 옹정황제(雍正皇帝)의 “황위찬탈(皇位簒奪)”누명을 벗겨줄 강희황제(康熙皇帝)의 유서가 발견됐다고 한다. 유서에는 “넷째아들은 인품(人品)이 남다르고 생각이 깊어 대통(大統)을 이을 만하다”고 되어 있다. 유서는 만주어(滿洲語)와 몽골어(蒙古語)로도 씌여 있어 한자 몇 글자로 고치는 것으로는 내용을 바꾸기 어렵게 되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