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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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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이 끊이지 않은 조설근이 홍루몽을 썼다는 것을 의심 받는 6가지 이유

图片信息 装点红楼梦


왜 '홍루몽(紅樓夢)'과 같은 위대한 작품의 작가(作家)가 누구인지를 문제(問題)로 삼을까?

첫째, 후세의 독자(讀者)들의 "믿기 어렵다"는 심리이다. 하루살이는 계절을 모른다. 범인은 천재(天才)의 재능과 학식을 이해할 수 없다. 특별히 위대한 작품의 앞에서 후세의 독자들은 쉽게 이런 의문(疑問)을 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정말 그(그녀)가 쓴 작품이란 말인가? 그(그녀)가 어찌 이렇게 위대한 작품을 써낼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유(類)의 의문은 중국의 특유한 것이 아니다. 

외국에도 있다. 예를 들어 세익스피어의 이름으로 수많은 유명한 희극작품(喜劇作品)이 있다. 이것도 의심을 받는다. 그들은 말한다. 강호의 연극단 주인이 어찌 궁정생활(宮廷生活)과 귀족생활(貴族生活)을 잘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기실 진정한 작자는 바로 프란시스 베이컨이라고 말한다. 그는 유명한 철학가, 과학자, 사상가이고, 귀족가정(貴族家庭)에서 태어났으며 그 본인이 나중에 대법관이 된다. 동시에 그는 책을 좋아했고 지식이 박학(博學)했던 학자이다. 생활경력이나 학식수양(學識修養)이나 모두 이런 백과전서적(百科全書的)인 희극작품을 써낼만하다는 것이다.

둘째, 고대인들이 소설(小說)을 무시하는 태도이다. 조비는 말한다. "문장이라는 것은 경국(傾國)의 대업이요, 불후의 성사(成事)이다. "('전론.논문)'. 여기서 '문장'이라는 것은 산문과 시가를 가리킨다. 소설은 포함(包含)하지 않는다. 소설가의 지위는 계속하여 미천했다. "소설가와 같은 유(類)는 대부분 패관(稗官)출신이고 항간(巷間)의 이야기나 길거리에서 들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관념이 중국역대문인의 머리속에서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근현대에 이르러 서방의 영향을 받아 소설의 지위가 제고되고 문인들은 소설을 씀으로써 명리(名利)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명과 저작권(著作權)은 아주 중요한 일이 된다. 이전에 소설을 쓰는 것이 원고료(原稿料)나 인세 등의 이익을 얻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내용이 경전적(經典的)이지 않아서 악명(惡名)을 얻을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약간의 정통사상(精通思想)을 지닌 문인이라면 모두 소설가로 이름을 떨치는 것은 멸시(蔑視)하게 된다. 

중국문학사상 첫 번 째로 한 작가가 독립(獨立)하여 완성한 장편소설 '금병매(金甁梅)'의 작자는 자신의 진실한 성명을 남기지 않았다. 그저 "난릉소소생(蘭陵笑笑生)"이라는 서명만 남겼다. 그 결과 "난릉소소생"이 누구인지는 중국문학사상 골드바흐의 추측'이 되었다. 지금까지 연구자(硏究者)들이 내놓은 사람만 60여명이다. 

영향이 비교적 큰 주장(主張)으로는 왕세정(王世貞), 도륭(屠隆), 서위(徐渭), 이개선(李開先), 가삼근(賈三近), 왕치등(王穉登), 채영명, 조남성, 이어(李漁), 노남(盧楠), 풍몽룡(馮夢龍), 정순부자, 설응기(薛應旂), 가몽룡, 왕도곤(汪道昆), 이선방, 심덕부(沈德符), 풍유민, 사진, 장진숙, 김성탄(金聖歎), 전예형, 왕채, 당인, 이반룡(李攀龍), 소명봉, 호충, 유수정, 이탁오(李卓吾), 도망령(陶望龄), 정요항(丁燿亢), 구지충, 원굉도 형제(袁宏道兄弟) 등등이 각양각색의 설이 있어 결정하기 어렵다. 청나라 강희연간에 장편소설가(長篇小說家)는 비록 자신의 진실한 성명을 쓰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무시당했다. 

오늘날의 소설가들처럼 자신의 작품(作品)을 아끼지도 않았다. 오늘날의 소설가들처럼 각종 방법을 통하여 성명하고 주석(注釋)을 달아서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으려 하지 않았다. 조설근(曹雪芹)이 백거이(白居易)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작품을 아꼈고 동시에 자신의 시문을 간행(刊行)할 능력이 있으며 자신이 죽은 후에 작품이 흩어져버릴 것을 우려하고 이름이 인멸(湮滅)될까 우려하여 약간의 책을 가행하여 각 명찰(名刹)에 보존시켜두었더라면 아마도 그의 시문의 보존상황은 많이 나아졌을 것이다. 저작권 귀속 분쟁(著作權歸屬紛爭)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셋째, 작자의 생전생후의 처지가 달랐다. '홍루몽(紅樓夢)'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비록 지연재(脂硯齋) 등 작자의 생전친구들이 비주, 평점을 하였고 아주 열정적이었지만 나중에 이름을 국내외에 떨치고 세계적인 거대한 영향(影響)을 일으키며 중국장편소설 사대명저 중 하나가 되어 중국역사상 첫 손꼽히는 장편소설이 되는 것은 아마도 작가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일 것이다. 작자 조설근(曹雪芹)은 18세 때 집안이 몰락(沒落)하여 북경의 서부교외 '황엽촌(黃葉村)' 도홍헌(悼紅軒)에서 거주하며 홍루몽을 썼다. 그때 생활은 이미 곤란해졌고 집안에 먹을 것이 거의 없었고 아파도 의원에게 보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조설근의 생전에 비록 "비열십재(批閱十載), 증산오차(增刪五次)"하였지만 나중에 세상에 알려진 것은 여전히 잔본(殘本)이다. 이를 가지고 추측해보면 조씨는 생전에 전체 소설의 창작을 완료(完了)하지 못했다. 사후의 천고명저(千古名著)의 작자는 생전에 그저 '만지황당언(滿紙荒唐言)', '만파신산루(滿把辛酸淚)'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조설근은 우리의 오늘날처럼 자신의 노동성과(勞動成果)를 그렇게 아끼지 않은 것이다.

넷째, 전파과정에서 필요한 작자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지금의 저작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방법은 서문(序文)이나 표지안쪽에 작자를 소개하고 있다. 옛날 특히 소설의 경우 이런 방식이 사용되지 않았다. 소설애호가(小說愛好家), 서적간행상은 스토리에만 관심이 있고 이윤(利潤)만 추구했지 작자를 설명하는 것과 같은 일은 하지 않았다.

다섯째, 사귄 친구들이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다. 조설근(曹雪芹)의 생전친구는 돈성(敦誠), 돈민(敦敏) 형제 등이다. 비록 시문이 후세에 남아있기는 해도, 그다지 저명한 문인(文人)이 아니었다. 그들은 조설근이 '홍루몽'을 썼다거나 조설근의 평생사적을 묘사(描寫)함에 있어서 말이 모호(模糊)했고 믿을만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여섯째, 통치자(統治者)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고대에 일부 문인의 저작은 그들의 사후에 통치자들이 중시하여 수집, 정리되어 세상에 나오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나라 때의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부(賦)는 바로 한무제(漢武帝)가 사람을 보내어 사마상여의 집에서 수집(蒐集)한 것이다. 조설근(曹雪芹)의 '홍루몽'은 통치자의 중시를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오랜 기간 동안 '회음(誨淫)'의 서적으로 규정(糾正)되어 엄격히 금서로 취급되었다.

일거에 여섯 가지 원인을 이야기 하였지만 문제가 분명하게 해결(解決)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저 포전인옥(抛塼引玉)하기 위한 것이다.

홍루몽에 나오는 가사(賈赦)의 우스개에 숨은 배경
홍루몽 제75회를 보면 가부(賈府)의 중추절(仲秋節)날 밤에 온 집안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고 그 때 가사는 우스개소리를 하나 한다. 가사는 그저 술을 마시고 우스개소리를 했다. "한 집안에 아들 하나가 아주 효성(孝誠)스러웠다. 그런데 모친이 병이 났다. 여러 곳에 의사(醫師)를 찾아다녔으나 찾지를 못했다. 그래서 침과 뜸을 놓는 할머니를 부른다. 할머니는 원래 맥의 이치(理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어서 그저 심화(心火)라고 얘기하면서 지금 침구(침과 뜸)로 치료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아들은 이해(理解)가 되지 않아서 물었다. '심장에 쇠가 닿으면 죽지 않느냐. 침을 어떻게 놓는단 말이냐?' 그러자 할머니는 말했다. '침을 심장에 놓을 필요는 없다. 그저 늑조(肋條)에 놓으면 된다.' 그러자 아들이 말했다. '늑조는 심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렇게 해서 어떻게 치료(治療)하느냐?' 그러자 할머니가 말한다. '걱정할 것 없다. 넌 모르느냐 천하의 부모마음은 치우쳐(偏)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웃기 시작했다. 가사(賈赦), 가정(賈政)의 모친도 그저 반잔 술만 마시고 한참을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 할머니 침(針)을 하나 맞으면 좋겠다." 가사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이 말을 실수해서 모친이 의심(疑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급히 몸을 일으켜 웃으며 모친(母親)에게 잔을 올렸다.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시지 말라고 한다. 가사의 모친도 그 얘기를 더 언급하기 뭣해서 행령(行令)을 시작했다.

가사(賈赦)의 이 우스개는 아주 재미있다.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는 것처럼 가사의 모친이 편애(偏愛)한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라는 정도로 간단하지만은 않다. 기실 거기에는 자신의 상황(狀況)을 빗댄 측면이 있다.

첫째, 천하의 부모들이 '편애'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조롱(嘲弄)했다.
둘째, 부모가 편애한다고 직언(直言)을 해도 안 되면 심하게 찔러주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침구(침과 뜸)'이다.
셋째, 부모가 편애한다고 한탄(恨歎)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것이다.

여기서 주의하여야 할 것은 "늑조(肋條)"이다. 기실 이것은 늑골(肋骨)을 얘기한다. 이 단어를 쓴 데는 속뜻이 있다. 우리는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양수(楊修)와 조조의 "계륵(鷄肋)"사건을 기억한다. 소위 '계륵'은 닭의 늑돌이다. 역시 '늑조'에 속한다. 계륵이라는 것은 양수의 말에 따르면 먹기는 맛이 없고 버리기는 아까운 것이다. 이것은 바로 가사(賈赦)가 자신을 늑조에 비유한 속뜻이다.

가사(賈赦)의 지위는 확실히 난감(難堪)하다. 장유로 보면 그는 장남으로 큰집이다. 지위로 보면 그는 영국공(榮國公)의 작위를 승계하였다. 그러나 실제상황을 보면 확실히 동생 즉 둘째인 가정(賈政)보다 못하다.

1. 가정(賈政)은 비록 세습작위는 없지만 실직(實職)을 가진 관리이다.
2. 가정은 형인 가사(賈赦)보다 부모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다.
3. 가정은 부인이건 자녀이건 모두 가사보다 낫다. 

가정(賈赦)의 장녀 가원춘(賈元春)은 황귀비(皇貴妃)이다. 가정의 아들 가보옥은 가모가 가장 아끼는 손자이다. 가정의 부인은 4대가족 중 왕씨집안의 딸이고 그녀의 오빠인 왕자등은 구성도통제이다. 가사의 그럭저럭 괜찮은 아들인 가련(賈璉)은 또한 가정을 따라다닌다. 가사의 며느리조차 가정집안의 사람이다. 즉 왕부인의 조카딸이다. 그 차이는 너무나 크다

그래서 가사(賈赦)의 이 우스개는 모친의 편애하는 마음을 암시(暗示)하는 외에 자신의 신세가 계륵(鷄肋)이라는 것도 말해준다. 가사의 영국부(榮國府)에서의 지위가 여러 사람들이 보기에 먹기는 맛이 없고 버리기는 아까운 계륵 수준인 것이다.

그래서 가사는 나중에 가보옥(賈寶玉), 가환(賈環), 가란(賈蘭)의 시가대회 때 유독 가환을 칭찬하면서 "장래 세습(世襲)은 네가 할 것 같구나"라고 말한다.

가사가 작위를 가환(賈環)에게 넘겨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1. 장유적서(長幼直書)의 순서로 보자면 가련(賈璉)도 있고, 가보옥도 있고, 가란도 있다. 가환(賈環)에게까지 순서가 돌아갈 리가 없다.
2. 총애(寵愛)하는 정도를 보더라도 가환은 어림이 없다.

그래서 가사의 이 말을 헛소리이다. 이것은 그가 이전에 한 우스개와 연결(連結)해서 볼 수 있다.

가사(賈赦)가 왜 가환(賈璉)을 유독 칭찬했을까. 아주 간단하다 가환의 처지가 다음 대에서는 가사와 가장 비슷하기 때문이다. 즉 먹기는 맛이 없고 버리기는 아까워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네 처지가 나와 같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 자신의 불만(不滿)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가사(賈赦)를 우습게보면 안 된다. 이 우스개만 보더라도 그는 비유(比喩)는 생생하게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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