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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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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 년간 지속된 홍학계 논쟁이 거센 홍루몽 최초 작자는 조설근이라는 견해

图片信息 新版《红楼梦》


홍루몽(紅樓夢)의 최초작가에 대하여 홍학계(紅學界)에서는 논쟁이 매우 거세다. 청나라말기부터 논쟁(論爭)이 시작되어 지금까지 약 100여 년간 계속되는 것이다. 홍루몽의 최초작가가 조설근(曹雪芹)이 아니라는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의 이유(理由)를 들고 있다.

첫째, 제1회에서 공공도인(空空道人)이 돌에서 베끼고 그 후에 석두기(石頭記)를 정승록(情僧錄)으로 바꾸었으며 나중에 동로(東魯)의 공매계(孔梅溪)가 풍월보감(風月寶鑑)으로 개명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조설근(曹雪芹)이 10년 동안 피열(披閱)을 거쳐 5번에 걸쳐 증보 삭제(增补削除)하고 목록을 작성하며 장회를 나누고 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로 다시 개명하였다고 기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서술(敍述)을 근거로 조설근이 최초의 작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도 일견(一見)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공공도인(空空道人)으로부터 조설근까지 이어지므로 조설근(曹雪芹)은 최소한 세 번 째 작가가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십 수 년, 혹은 수십 년의 연구(硏究)를 거쳐 홍루몽(紅樓夢)의 작가가 다른 사람이라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어떤 사람은 홍루몽의 작가는 조설근의 연인인 설향옥(薛香玉)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홍루몽의 작가가 오매촌(吳梅村)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홍루몽의 작가가 황실후예인 지연재(脂硯齋)라고 한다.

둘째, 조설근(曹雪芹)은 옹정2년에 태어났는데 그가  5살 때 집안이 가산몰수(家産沒收)당하고 조씨집안은 이미 쇠락(衰落)하였으며 평생을 빈곤(貧困)하게 살아서 ‘화려한 생활’은 겪어보지를 못했고 ‘집안 기둥이 한꺼번에 와장창 무너지는 광경’도 겪지 못했다. 조설근은 궁박(窮迫)하게 살았으므로 10년의 시간을 들여서 홍루몽의 원저(原著)를 만들 수 없었다고 본다. 

홍루몽(紅樓夢) 전80회의 작가가 조설근(曹雪芹)이라는 것은 홍루몽이 세상에 나타난 후 300년 동안 연구자와 독자들이 같이 인정(認定)해온 것이다. 홍루몽의 작가가 조설근이라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점에 회의(懷疑)를 가진 기간도 짧지는 않아서 100여년이다. 그런 300년과 100년을 비교하면 역시 300년이라는 기간이 길고 특히 조설근(曹雪芹)이 홍루몽의 작가라는 것은 지금까지도 주류의 학설을 형성하고 있다. 관점을 뒤집으려면 반드시 진정하고 유력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증거와 관점이 논리적으로 맞아야 하며 논리학적(論理學的)으로 말하자면 충분하고 필요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즉 이러한 증거(證據)는 단지 1개의 결과를 나타낼 수 있고 다른 결과를 나타낼 수 없어야 한다. 그런데 홍루몽의 작가가 조설근(曹雪芹)이 아니라는 주장을 보면 대부분이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는 정도이다. 필자는 홍학가가 아니고 홍루몽(紅樓夢)을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투입해서 이를 고증(考證)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여기서는 그저 개인적인 의견(意見)을 나타낼 뿐이다.

조설근(曹雪芹)이 옹정2년에 태어나고 5세 때 가산몰수당하고 일생을 빈곤(貧困)하게 살았으며 귀족적인 생활은 누리지 못했으므로 궁중과 귀족생활(貴族生活)을 써낼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모든 작가는 반드시 스스로 체험(體驗)한 것만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작가가 강도에 대하여 쓰려면 강도짓을 해보아야 하고 기녀(妓女)에 대하여 쓰려면 반드시 매춘(賣春)을 해보거나 매음(賣淫)해야 한단 말인가? 모두 알다시피 현대작가인 조설은(曹雪垠)과 이월하(二月河)는 모두 이자성(李自成), 강희황제(康熙皇帝)라는 대작을 썼다. 조설근이 귀족생활을 누리지 못했으므로 홍루몽을 쓸 수 없었다는 논리가 얼마나 천박한 것인가?

조설근(曹雪芹)의 증조부 조새(曹璽)의 처는 강희황제의 보모였다. 강희제가 등극한 후 조새는 강녕직조(江寧織造)를 맡아서 죽을 때까지 그 직에 있었다. 강희는 그 아들인 조인(曹寅) 즉 조설근의 조부를 소주직조(蘇州織造)에 임명했고 나중에 강녕직조를 맡겼다. 조인(曹寅),이 어렸을 때 강희의 배독(陪讀)이었으니 강희제의 신하이자 어렸을 때부터의 친구였으며 강희황제(康熙皇帝)의 총애를 받았다. 조인은 일세를 풍미(風味)했으며 강희제(康熙帝)가 6차에 걸쳐 남순(南巡)했을 때 4번을 조인의 집을 행궁(行宮)으로 삼았었다. 조씨 집안은 이때가 최전성기였다. 바로 조씨집안의 선대가 청황조(靑皇朝)와 정치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점은 조설근(曹雪芹)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그가 홍루몽(紅樓夢)을 창작할 수 있는 좋은 바탕이 되었다. 조씨집안은 여러 차례에 걸친 가산몰수 등으로 나중에 집안이 쇠락하여 빈곤하게 된다. 그러나 “말라죽은 낙타도 말보다는 크다”는 말이 있듯이 끼니조차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비록 부귀하고 귀족(貴族)스러운 생활을 누릴 수는 없었지만 그의 부모 친척집안의 다른 사람들도 그에게 옛날 얘기를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도 족보(族譜)라든지 여러 가지 옛날 자료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설근(曹雪芹)이 가난했으므로 이런 대작(大作)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主張)은 아주 가소로운 주장이다. 역사상 문왕(文王)은 구속(拘束)되었을 때 주역을 썼고 공자는 어려운 상황에서 춘추를 썼으며 굴원(屈原)은 축출(逐出)되었을 때 이소(離騷)를 지었고 좌구(左丘)는 실명(失明)한 후에 국어(國語)를 썼고 손자(孫子)는 다리를 다친 후에 병법(兵法)을 완성했으며 여불위(吕不韦)는 촉(蜀)으로 도망쳐서 여람(여람(呂覽)을 지었고 한비자(韓非子)는 진나라에 갇혀 있으면서 설난(說難), 고분(孤憤), 시 3백편을 지었다. 이런 사람들은 바로 마음속에 배설(排泄)할 수 없는 고민(苦悶)을 가지고 있고 세상 사람들의 이해(理解)를 얻지 못하였을 때 글로 후세인들에게 남겨둔 것이다. 사실 역사 이래 유명(有名)한 글들은 왕왕 이렇게 생활이 궁박(窮迫)하고 억압(抑壓)받는 사람에 의하여 씌여졌다. 잘 먹고 잘살면서 후세에 널리 알려진 글을 남긴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그래서 조설근(曹雪芹)이 생활이 빈곤하여 홍루몽(紅樓夢)을 쓸 조건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성립되기 힘들다. 바로 조설근(曹雪芹)은 이렇게 생활이 힘들었으므로 피를 토하면서 글을 완성한 것이고 이런 과로로 인하여 젊어서 요절(夭折)한 것이다.

제1회에서 쓴 것처럼 공공도인(空空道人)이 큰 돌에서 석두기(石頭記를) 베껴서 정승록(情僧錄)으로 고치고 나중에 동로의 공매계(孔梅溪)가 풍월보감(風月寶鑑)으로 고쳤으며 나중에 조설근(曹雪芹)이 도홍헌(悼紅軒)에서 10년간 피열(披閱)한 후에 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로 이름하였으므로 조설근(曹雪芹)은 최초작가가 아니라 그저 편집인(編輯人)에 불과하며 공공도인(空空道人)과 공매계(孔梅溪)가 쓴 책을 기초로 편찬(編纂)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런 인식은 약간 그럴듯한 점이 있다. 정승록(情僧錄)과 풍월보감(風月寶鑑)의 기초위에서 10년간 5차에 걸쳐 증보(增補), 삭제(削除)하고 목록(目錄)을 만들고 장회(章回)를 나누었다면 이것은 오리지널(原作)은 아닌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런 주장(主張)이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실제적으로 따져보면 성립(成立)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석두기(石頭記)는 정승록(情僧錄)과 풍월보감(風月寶鑑)의 3개의 원고의 기초위에서 증보(增補), 삭제 수정(削除修訂)을 하고 목록(目錄)을 만들고 장회(章回)를 나누는데 10년의 기간이 필요한가? 석두기(石頭記), 정승록(情僧錄)과 풍월보감(風月寶鑑) 이 세 개의 원고는 모두 어느 정도 성숙(成熟)된 것일 것이다. 증보(增補), 삭제(削除), 윤색(潤色)하고 목록(目錄), 장회(章回)를 만드는 데는 조설근(曹雪芹)과 같은 문학거장(文學巨匠)이 10년씩이나 세월을 쓸 필요가 있을 것인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설근(曹雪芹)이 홍루몽의 최초 작자라면 공공도인(空空道人)은 누구란 말인가? 공매계(孔梅溪)는 또 누구인가? 돌멩이 위에 쓴 글은 누가 새긴 것인가? 혹은 석두기(石頭記)는 누가 썼는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공공도인(空空道人)과 공매계(孔梅溪)는 모두 허구(虛構)의 인물인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조설근(曹雪芹)은 홍루몽을 쓰면서 여러 가지 수법을 사용했는데 그중 은유(隱喩)를 사용한 것이 많다. “공(空)”은 바로 없다는 말이 아닌가. 공매계(孔梅溪)는 공몰희(恐沒戱) 역시 없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그저 허구의 인물이지 실재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조설근이 문자옥(文字獄)을 피하기 위하여 방패(防牌)로서 앞에 둔 것이다. 즉 나는 이 책의 작자가 아니라 그저 증보(增補), 삭제(削除)하고 목록, 장회나 만들었을 뿐이라는 이런 점에서 조설근(曹雪芹)이 홍루몽의 최초 작가이며 그는 당연히 저작권(著作權)을 누려야 한다.

1) “홍루몽”과 작자 결정론: 앞서 살펴본 색은파 저작에 따르면 '홍루몽(紅樓夢)'의 작자는 사실 해석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훗날(1921년) 후스(胡适)가 '"홍루몽"고증'을 발표한 것도 작자의 신분을 통해 '홍루몽'이 서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추적한 것이었다. 그는 그 글에서 색은파(索隱派의) 방법이 ‘수수께끼 풀이’이고 ‘견강부회(牽强附會)’라고 비판하면서 '홍루몽(紅樓夢)'에 대한 고증(考證)은 “믿을 만한 자료에 의거해서 이 책의 저자가 대체 누구이고 저자의 사적과 가계는 어떠하며 책을 지은 시대는 언제인지 고증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표현으로 보건대 후스는 색은파(索隱派에) 대해 더 중시(重視)했음을 알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후스(胡适)가 건립한 ‘신홍학(新紅學)’은 결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전략(戰略)으로서 ‘작자 결정론’을 부정(否定)하는 것이 아니라 색은파와 마찬가지로 작자의 신분에 집착(執着)하여 학설을 세우는 것이었다. 훗날 후스(胡适)의 영향을 받은 위핑보(俞平伯)나 저우루창(周汝昌) 같은 ‘신홍학가(新紅學家)’들은 더 나아가 작자의 해석 역할을 확정(確定)했다.

2) 신홍학의 ‘기인(旗人) 작자설’: 후스(胡适)가 고증(考證)을 한 본래 의도는 단지 ‘저작권’을 분명히 하려 한 것일 테지만 이후의 사태는 오히려 복잡하게 발전했다. ‘저작권(著作權)’의 위력은 아주 신속하게 해석의 영역(領域)으로 스며들어서 많은 소설 연구자들도 조설근(曹雪芹)이 '홍루몽'의 작자라고 인정했다. 예를 들어서 루쉰(魯迅, 周樹人: 1881~1936) 역시 '홍루몽'의 모델이 작자 조점(曹霑)이라고 지적하면서 차이위앤페이(蔡元培)의 관점을 불신했다. 그리하여 심지어 후스(胡适)의 논적으로서 ‘반만설(反滿說)’을 주장하는 연구자들까지 작자의 문제가 관건이라는 점을 인정(認定)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조설근(曹雪芹)’에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자가 기인(旗人) 신분이라는 것은 그 후 수십 년 동안의 역사적 해석(歷史的解釋)을 주도했다. 물론 후스(胡适)의 고증 이후 모든 비평가(批評家)들이 작자 문제를 처리하려 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사실은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적지 않은 평론가들은 ‘작품의 자율성(作品自律性)’을 강조하면서 작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홍루몽(紅樓夢)”의 작자’와 관련된 해석 영역에서 후스(胡适)는 의심할 바 없이 ‘조설근(曹雪芹)’을 ‘부활(復活)’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후로 평론가(評論家)들이 조설근(曹雪芹)을 ‘취소’하려면 상당한 힘을 쏟아야 했다.

후스의 연구와 해석의 전환: 작자의 ‘탈취(奪取)’는 곧 해석권의 탈취이다. “이 책의 저자가 대체 누구이고 저자의 사적(事績)과 가계는 어떠하며 책을 지은 시대는 언제인지 고증”하는 것이 '"홍루몽"고증(改訂版)'의 중심 내용이다. 이전의 색은파는 모두 조설근을 편찬자(編纂者)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후스의 고증에 따르면 조설근은 본래 '홍루몽'의 작자였다. 설정이 달라지자 '홍루몽'에 대한 해석에도 즉시 효과가 나타났다. 후스(胡适)는 “이런 자료들(曹雪芹 개인과 가계에 관한 자료)을 보면 아마 '홍루몽'이 조설근(曹雪芹)의 자서전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確信)했다. 그리고 ‘자서전(自敍傳)’이라는 견해를 입증하기 위해 그는 다섯 가지 증거를 들었다. 이 다섯 가지 ‘중요한 증거’는 네 번째를 제외하면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작자의 의도와 소설의 관계(關係)를 언급하고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한 가지로 귀납될 수 있다. 이 둘은 모두 소설 안의 문장을 인용(引用)하여 작자 의도의 표현으로 간주(看做)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첫 번째 증거는 제1회의 시작 부분 즉 “작자 스스로 말하기를(作者自云)……또 스스로 말하기를(自己又云)”을 인용하고 있고 두 번째 증거는 제1회에서 돌이 한 말(“자신의 일과 정리[自己的事體情理]”, “내가 이 반평생 동안 직접 보고 들은 것(我這半世親聞親見)”)을 인용하면서 그것이 모두 작자가 저작 의도(著作意圖)를 스스로 말한 것으로 아주 ‘명백(明白)’하게 쓰여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고 주장(主張)했다.

후스의 세 번째 증거는 그가 집안일에 대해 ‘스스로 서술(自敍)’한다는 작자의 의도를 어떻게 건립(建立)했는지를 더욱 잘 보여준다. '홍루몽' 제16회에는 황제의 강남 순시(江南巡視)에 대해 길게 논하는 장면이 들어 있는데 그 가운데 예전에 태조 황제가 순시한 것을 따라서 순시(巡視)하자 가씨 집안에서는 소주(蘇州)와 양주(揚州) 일대에서 한 차례 황제를 접대했고 강남의 진(甄)씨 집안에서 네 차례 접대했다는 이야기가 언급된다. 후스(胡适)는 여기서 말하는 진씨 집안과 가씨 집안이 모두 실제 역사에서 조(曹)씨 집안을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이유는 역사상 강희제(姜熙齊)가 강남을 여섯 차례 순시했고 조인(曹寅)이 네 차례 접대했는데 '홍루몽(紅樓夢)'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거의 언급(言及)하기 않다가 여기에서만 엄숙(嚴肅)하게 제기하기 때문에 작자의 의도를 이렇게 추측(推測)할 수 있다고 했다.

아마 조씨 집안에서 황제를 네 차례나 접대(接待)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고 성대한 일이기 때문에 조설근이 자기도 모르게 어쩌면 의식적(意識的)으로 자기 집안의 가장 사치스러운 이 성전(盛典)을 얘기했을 것이다.

후스(胡适)가 ‘가장 중요한 다섯 번째 증거’라고 여긴 것은 ‘조설근(曹雪芹)의 역사와 그 집안의 역사’였다. 이 ‘가장 중요한 증거’는 또 가보옥(賈寶玉)이 반드시 몰락하게 되고 가씨 집안이 반드시 쇠락(衰落)하게 된다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가보옥(賈寶玉)의 몰락에 대해서 후스(胡适)는 단지 '홍루몽' 첫 부분에서 “한 가지 일도 이루지 못했고(一事無成)” “한 가지 재주도 없이 반평생을 영락(榮樂)하여 살았다(一技無成, 半生潦倒)”와 같은 구절을 인용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당연히 작자가 ‘스스로 서술’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가정한 다음 작자의 실제 처지를 가지고 이야기의 결말(結末)을 추측한 것이다. 하지만 가씨 집안의 쇠락(衰落)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논술했다. 그의 논술 맥락은 여전히 조씨 집안의 사적(事蹟)을 앞세운 다음 '홍루몽' 안의 문장(제72회에서 태감이 돈을 요구한 일과 제53회에서 가진(賈珍)이 오진효(烏進孝)에게 집안에 수입은 적고 지출은 많다고 얘기하는 것, 제72회에서 전당포(典當鋪)에 물건을 맡기고 돈을 마련한 것)을 인용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작자의 의도(意圖)를 이렇게 추측한다.

"홍루몽"은 조설근(曹雪芹)이 ‘실제 사실을 숨긴’ 자서(自敍)이기 때문에 자잘한 일임에도 재삼재사(再三再四) 자기 집안이 부귀(富貴)했다가 가난해지는 상황을 묘사했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후스(胡适)가 채용한 분석 방법이 ‘전기적 비평(傳記的批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비평 방법은 작자의 생애에 관한 자료들에 도움을 받지 않으면 진행할 수 없다. 이전의 색은파(索隱派)는 작자를 이용하려면 작자가 ‘은어(隱語)’를 만들었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야 파자(破字)랄지 수수께끼 풀이 등등의 수단으로 방대(尨大)한 책의 문장을 해석하고 또 책 밖에서 무수한 역사적 사실들을 가져와 자신의 견해에 배합(配合)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후스(胡适)의 전기적 비평은 조씨 집안의 역사적 사실에만 한정되기 때문에 이용할 수 있는 외연(작자의 가계와 생애)이 색은파(索隱派)에 비해 좁았지만 그의 해석(解釋)과 작자 사이의 관계는 오히려 더욱 긴밀(緊密)해졌다. 이 때문에 그의 해석은 세인들의 눈에도 특별히 믿을 만한 것처럼 보였다.

'"홍루몽"고증(改訂版)'은 주로 작자의 저작 의도와 소설 자체의 관계를 강조하기 때문에 색은파(索隱派)의 ‘반만설(反滿說)’처럼 작자의 종족(宗族)을 중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후스(胡适) 역시 작자 종족의 영향(影響)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서 그는 도자들에게 조씨 집안의 쇠락 역사에 주목(注目)하라고 하면서 3가지 요점(要點)을 지적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팔기세가(八旗世家)의 부유하고 화려한 문학예술 환경이다. 그는 팔기세가의 독특한 점을 이렇게 묘사(描寫)했다.

부귀한 환경과 문학예술(文學藝術) 환경이 합치된 경우는 당시의 한족(漢族)들 가운데도 없었고 당시 팔기세가 가운데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당시의 한족들 가운데도 없었”다는 구절이 특히 주목(注目)할 만하다. 왜냐하면 이렇게 얘기하면 팔기세가(八旗世家)인 조씨 가문과 소설 속에 묘사된 가씨 집안의 관계가 더욱 강화되어 ‘자서전(自敍傳)’설의 외부 증거 가운데 하나가 됨과 동시에 색은파(索隱派)의 유민 저서설(遺民著書說)을 암중에 부인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홍루몽"고증(改訂版)'은 1921년 11월 12일에 쓴 것인데 당시까지 후스(胡适)는 아직 자신이 고증한 작자의 신분을 근거로 색은파(索隱派)를 공격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1922년 5월 10일에 쓴 '"홍루몽고증"발문'은 제2절의 제목이 “차이졔민 선생((蔡孑民先生)의 토의에 답함(答蔡孑民先生的商榷)”인데, 여기서 이렇게 썼다.

이전까지 '홍루몽(紅樓夢)'에 대해 쉽게 견강부회(牽强附會)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이전 논자들이 모두 ‘작자의 생애’라는 큰 문제를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조씨 집안이 그렇게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리는 환경에 처해 있었음을 몰랐기 때문에 모두들 조씨 집안이 황실 가정, 적어도 명주(明珠) 같은 재상 집안을 가리키지 않을까 의심(疑心)했습니다. 조씨 집안이 팔기에 속한 세가라는 걸 깊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 책이 만주족을 비난(非難)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한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구절은 작자의 가계와 종족을 토대로 색은파(索隱派)의 반만설(反滿說)에 대한 반박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 후 위핑보(俞平伯), 저우루창(周汝昌) 같은 신홍학가(新红学家)들도 이 새로운 작자 관념으로 색은파(索隱派를) 공격했다. 저우루창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후스(胡适)는 그에게 소설은 결국 소설이지 역사가 아니니까 너무 융통성(融通性) 없이 보지 말라고 권한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이 증명하듯이 후스는 다른 사람이 “조씨 집안을 통해 가씨 집안을 증명하는” 것을 막을 힘이 없었다. 최초에 후스 계열(胡适系列)의 학자들과 색은파 반만설(索隱派反滿說) 사이의 논쟁점은 ‘작자의 종족’이라는 문제에 달려 있었다. 다음에서는 위핑보(俞平伯)와 저우루창(周汝昌)의 구체적인 주장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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