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해가 고루과문(孤陋寡問)해서인지 몰라도 중국(中國)에서 '작자'는 중국예술연구원(中國藝術硏究員) 홍루몽연구소(紅樓夢硏究所) 및 중국홍루몽학회(中國紅樓夢學會)와 같은 이 두개의 기구보다 더욱 부끄럽고 가소롭고 슬프고 가련(可恥, 可笑, 可悲, 可憐)한 소위 "학술단체(學術團體)"는 본 적이 없다.
이 두개의 소위 "학술단체(學術團體)"는 "홍루몽연구(紅樓夢硏究)"를 둘러싸고 즉 통상 말하는 "홍학(紅學)"을 위하여 설립된 것이다. 만일 왕국유(王國維)가 1904년에 발표한 '홍루몽평론(紅樓夢評論)'을 현대 홍학 내지 현대학술(現代學術)의 시작으로 본다면 현대 "홍학(紅學)"은 이미 꼭 1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중국예술연구원 중국문화연구소장 겸 저명한 홍학자인 유몽계(劉夢溪) 선생이 말한 바와 같이 "현대중국사상문화(現代中國思想文化)의 무대에서 많은 제1류의 인물이 서로 다른 정도로 홍학(紅學)에 발을 디뎠다. 예를 들어 왕국유(王國維), 채원배(蔡元培), 호적(胡适), 노신(鲁迅), 진독수(陈独秀), 고힐강(顾颉刚), 유평백(愈平伯), 오복(吳宓), 진인각(陳寅恪), 심종문(沈從文), 곽말약(郭抹若), 왕력(王力), 파금(巴金), 모순(茅盾), 빙심(氷心), 장애령(張愛玲)과 임어당(林語堂) 등이 그들이다. 이외에 백년홍학은 또한 학자들 간에 싸움이 가장 많았던 영역이기도 하다"
소위 홍학자(紅學者)들은 지금까지도 싸우고 있다. 그리고 이 싸움은 끝날 조짐(兆朕)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소위 홍학자(紅學者)들은 100년을 싸웠는데 제대로 된 것을 내놓았는가? 정말 슬프고 정말 부끄럽고 정말 가소롭고 정말 가련하게도 그들은 "홍학(紅學)"이라는 이 학과의 가장 기본적(基本的)인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여영시(余英時)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홍루몽(紅樓夢)'의 작가는 조설근(曹雪芹)인가 아닌가? 전80회와 후40회의 관계는 도대체 어떠한가? 지연재(脂硯齋)는 또 누구인가? 그(혹은 그녀)와 원작자는 어떤 특수한 연원(淵源)이 있는가? 이런 유형의 기본문제는 지금 홍학고증(紅學考證) 중에 여러 가지 해답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자료부족(資料不足)으로 정설(定說)로 굳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문제(問題)조차도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것이 그저 "자료부족" 때문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전 문화부장(文化部長), 저명작가(著名作家), 문학이론가(文學理論家), 홍루몽연구자(紅樓夢硏究者)인 왕몽 선생(王蒙先生)은 2005년 7월에 출판한 최신대작 '왕몽화설홍루몽(王蒙話說紅樓夢)'에서 이렇게 썼다.
"홍학(紅學)은 아주 특수한 학문(學問)이다. 그것은 우리가 신학(神學)을 받아들인 이후에 인용된 라틴어명사(拉丁语名词)를 본원으로 하는 많은 개념 예를 들어 지리학(地理學), 물리학(物理學), 철학(哲學) 등과 전혀 다르다. 그것은 아주 중국화(中國化)된 하나의 학문이다. 하나의 엄격한 과학(科學)은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엄격한 논리적(論理的)인 추리방법(推理方法) 즉 귀납(歸納) 혹은 연역적 방법(演繹的方法)을 사용할 수 없다. 검증(檢證)의 방법으로 완전히 연구할 수도 없다. 더 많은 경우에는 일종의 감오(感悟), 일종의 취미(趣味), 일종의 직관(直觀), 연상(聯想), 추측(推測) 혹은 상상(想像)이고 이런 것들을 사용하고 이것들은 모두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다"
제발 "가장 기본적인 문제도 해결(解決)하지 못하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홍학가(紅學家)들이 사용하는 방법이 '그다지 과학적(科學的)이지 않다'는데 있다. 실사구시(實事求是)도 안 되고 학술규범(學術規範)도 따지지 않으면서 아무렇게나 말하고 지껄이는 것이다.
얼마나 부끄럽고 얼마나 가소롭고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가련한가? 바로 그 두 개의 부끄럽고 가소롭고, 슬프고 가련한 "학술단체(學術團體)" 및 그 대표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학술규범(學術規範)"을 크게 하늘이 진동하게 떠들고 있다. 내가 말하건대 풍기용(馮其庸), 장경선(張慶善)등의 불학무술(不學無術)의 황당한 이론(理論)을 내놓는 학술사기꾼은 차라리 집안에 앉아서 자기나 속이는 것이라면 모르되 바깥으로 나와서 다른 사람을 속이려고 하다니 누구를 속일 수 있단 말인가?
풍기용(馮其庸)과 같은 불학무술(不學無術)의 사기꾼을 어떤 아부꾼들은 "당대의 지연재(脂硯齋)"로까지 띄워주고 있지 않은가. 너무 가소롭다. 이런 불학무술의 작자가 감히 '홍루몽대사전(紅樓夢大辭典)'에 "제석조하(除夕朝賀)"라는 단어부분에 감히 공공연하게 추악(醜惡)하고 괴이한 가짜문화재인 "조설근기석(曹雪芹奇石)"을 싣지를 않나 감히 조정(朝廷)의 흉례는 관료(官僚)만 관리하고 백성은 관리하지 않았다고 하지를 않나 감히 현존하는 후40회가 홍루몽의 속작(續作)이라고 단언하여 거작(巨作)의 허리를 잘라버리지를 않나.
비록 백년홍학(百年紅學)은 개소리보다 못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은 사기꾼들이 승진(昇進)하고 이익을 얻어가는 도구가 되고 있다. '재경시보(财经时报)' 2005년 11월 25일에 간행한 "'홍학(紅學)'의 재산가치통계(기자 황진위)"에 의하면 "홍루몽연구소 부소장 손옥명(孙玉明)은 기자에게 말했다. 보수적으로 추산하더라도 매년 '홍학자적(紅學字迹)‘은 200-300본이 된다. 논문은 통계를 잡을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기자(記者)가 왜 매년 이렇게 많은 논문이 나오는지를 물어보고 개인평정 및 다른 이익(利益)과 관련이 있느냐고 묻자 손옥명은 정면으로 기자에게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원인은 여러 가지라고 기자가 북경대학도서관(北京大學圖書館)에서 한 조사를 보니 2003년에 홍학논문(紅學論文)은 338편이었고 2004년에는 홍학논문이 391편이었다. 2005년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미 발표한 홍학논문이 256편이었다. 이 조사는 단지 북경대학도서관에 한정(限定)된 것이었다. 만일 전국의 모든 도서관과 대학학보(大學學報)의 논문에 대하여 철저히 통계(統計)를 낸다면 얻는 숫자는 아마도 천문학적(天文學的)인 숫자일 것이다"
이런 천문학적 숫자의 글 중에 도대체 어느 한 편이라고 홍학(紅學)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解決)했는가? 이런 무서운 학술쓰레기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후안무치한 학술벌레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가?
청나라 때 경학(經學)을 연구한 학자는 "한가지 의(義)를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증거(證據)가 있어야 한다. 증거가 없이 마음대로 추측(推測)하는 자는 반드시 배척(排斥)해야 한다" 그들의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인 정신으로 인하여 우리는 읽어도 알아보기 어려운 고서(古書)들에 대하여 가짜를 가리고 진짜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전의 학문을 승계(承繼)할 수 있었다. 미안하지만 소위 홍학가(紅學家)들이 어느 단계에서 많은 홍루몽(紅樓夢)의 독자들에게 진정으로 작품에 깊이 빠져들게 하였는가? 당신들이 흐릿한 것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이 헷갈리게 된 것이 아닌가?
홍학가(紅學家)들의 존재, 홍학연구소(紅學硏究所)와 홍학회(紅學會)의 존재는 백년중국에 일련의 가장 부끄럽고 가장 가소롭고 가장 슬프고 가장 가련(可憐)한 결과를 가져왔다. 거작(巨作)의 허리를 자르고 학술(學術)을 망쳤으며 자제들을 잘못된 곳으로 이끌고 사람의 마음을 망치고 국가에 손해(損害)를 끼쳤다. 우리는 그들을 역사(歷史)의 쓰레기더미로 철저히 쓸어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홍학(紅學)은 20세기 최대의 학문스캔들인가? 1979년 예일대학교수인 여영시(余英時)는 홍콩 ’중문대학학보‘ 제2기에 발표한 "근대 홍학의 발전과 홍학혁명(紅學革命)"이라는 논문에서 "홍학(紅學)"을 "갑골학(甲骨學)" 및 "돈황학(敦煌學)"과 함께 20세기 중국의 "현학(顯學, 인기학문)"이라고 불렀다.
그에 의하면 홍학(紅學)은 "호적(胡适)의 제창에 따라 ’홍루몽(紅樓夢)‘의 고증업무는 이미 근대중국학술의 주류인 건륭가경시대의 고증학과 융합(融合)되었다. 이로 인하여 학술사(學術史)의 관점에서 보면 홍학은 당대의 현학(顯學)인 갑골학(甲骨學), 돈황학(敦煌學)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 전혀 부끄럼이 없게 되었다"
중국예술연구원 중국문화연구소소장이면서 저명한 홍학가인 유몽계(劉夢溪) 선생은 2005년 6월에 출판한 ’홍루몽과 백년중국‘이라는 책에서 중국의 현대학술은 홍루몽연구로부터 시작했다고 적었다. 왕국유(王國維)가 1904년에 발표한 ’홍루몽평론(紅樓夢評論)‘은 현대학술사상과 학술규범을 비교적 집중적으로 나타내고 있고 현대중국사상문화무대에서 많은 일류급 인물들이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홍학(紅學)에 발을 내디뎠다. 예를 들어 왕국유(王國維), 채원배(蔡元培), 호적(胡适), 노신(鲁迅), 진독수(陈独秀), 고힐강(顾颉刚), 유평백(愈平伯), 오복(吳宓), 진인각(陳寅恪), 심종문(沈從文), 곽말약(郭抹若), 왕력(王力), 파금(巴金), 모순(茅盾), 빙심(氷心), 장애령(張愛玲)과 임어당(林語堂) 등이 그들이다. 이외에 홍학(紅學)은 학자들끼리 싸움을 가장 많이 벌인 영역이었다.
그러나 "홍학(紅學)"이 인기 있는 것은 단지 연구인원이 많고 기간이 길며 투입한 규모가 많다는 것이고 논문(論文)과 글을 많이 썼다는 측면이지 학술의 방법론상으로는 그다지 건륭가경 때의 고증학(考證學)을 제대로 승계하여 발전시켰다고 할 수 없다. 의문(疑問)을 풀고 해결하는 실적에서도 홍학은 학문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문제(門題)조차 해결하지 못했다.
여교수(余敎授)에 따르면 색은파(索隱派)가 다시 나타날 수 있었던 주요한 원인의 하나는 고증학이 이 몇 가지의 기본문제에 대하여 전혀 확실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홍루몽(紅樓夢)의 작가가 조설근(曹雪芹)인가 아닌가? 전80회와 후40회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지연재(脂硯齋)는 또 누구인가, 그(또는 그녀)와 원작자는 어떤 특수한 관계가 있는가? 이런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대하여도 고증파(考證派)들은 여러 가지 답안을 제시했지만 자료의 부족으로 정설이 나오지 못했다. 이뿐이 아니다. 조설근(曹雪芹)의 생몰년대 조설근이 조옹(曹顒) 혹은 조부(曹頫), 누구의 아들인가의 문제 등에 대하여 학술계(學術界)는 아직도 서로 다른 의견을 고집(固執)하고 있다.
유몽계(劉夢溪)가 자신의 책에서 "지연재(脂硯齋)는 누구인가" "조설근(曹雪芹)이 누구의 아들인가" "속서의 작가는 누구인가"는 홍학의 3대 풀리지 않는 매듭이라고 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지연재(脂硯齋)가 어떤 사람인가? 조설근의 숙부(叔父)래도 좋고 백부(伯父)래도 좋고 조우래도 좋고 당촌이래도 좋고 조설근 자신이래도 좋고 사상운(史湘雲)이래도 좋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추측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증거가 불충분한 추측(推測)에 불과하다. 연구자(硏究者)들 간에도 의견일치가 이루어져있지 않을 뿐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주장(主張)들마다 이를 뒷받침한 실증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자료에서 보면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자료를 어떻게 분석하더라도 지연재(脂硯齋)가 누구인지 조설근(曹雪芹)이 누구의 아들인지 속서(俗書)의 작가가 누구인지에 대한 세 개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 세 가지 풀리지 않는 매듭은 계속 내려갈 것이고 아무도 풀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