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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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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중화민국 무술가인 황비홍의 무공은 얼마나 뛰어났을까?

图片信息 黄飞鸿是明末民初有代表性的洪拳大师.


황비홍(黃飛鴻)은 청나라와 중화민국의 무술가(武术家)이고 한의사(韓醫師)이며 항일 독립 운동가(抗日獨立運動家)이다. 출생 이름은 황석상(黃錫祥)이나 황비홍(黃飛鴻)으로 개명하였으며 자(字)는 달운(達雲)이다. 광동성 난하이 현 출신으로 소림 계통 남권의 일종인 홍가권(洪家拳)의 일대종사(一代宗師)이자 명의(名醫)로 활동하면서 힘없는 민중들을 구하고 흑기군(黑旗軍)의 유영복(劉永福)과 함께 항일(抗日) 독립운동을 펼쳐 중국인들의 영원한 민족 영웅이 되었다.

황비홍(黃飛鴻)의 마지막 여제자(女弟子)였다가 1915년 그의 4번째 부인이 된 막계란(莫桂蘭)은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켰고 황비홍(黃飛鴻)이 죽은 훗날에는 곽원갑(霍元甲)의 친척 조카인 곽관위(霍冠威)와도 무예 권법 교류를 도모하였다.

황비홍(黃飛鴻)은 현대 홍가권(洪家拳)의 체계를 정리한 업적으로 현대 홍가권(洪家拳)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의 일대기(一代記)를 다룬 영화만 하여도 현재까지 약 100여 편을 넘어가고 있는데다가 아직까지도 그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TV 드라마 시리즈 등이 활발히 제작되고 있어 중국인들의 황비홍(黃飛鴻)에 대한 존경심(尊敬心)과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할 수 있다.

황비홍(黃飛鴻)은 소림 계통 남파 무술의 일종인 홍가권(洪家拳)의 고수였다. 홍가권은 속칭 홍권(洪拳)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홍희관(洪熙官)이라는 소림의 제자가 창안한 소림권(少林拳)을 기초로 창안한 권법이다. 이후 홍가권(洪家拳)은 홍희관(洪熙官)의 사제인 육아채(陸阿采)에게 전수되었고, 육아채(陸阿采)는 다시 황황비홍의 할아버지인 황태(黃泰)에게, 황태는 자신의 아들 황기영(黃麒英)에게 홍가권(洪家拳)을 전수하였다. 황비홍(黃飛鴻)은 바로 자신의 아버지 황기영(黃麒英)으로부터 홍가권을 전수받았다.

황비홍(黃飛鴻)은 자신이 전수받은 기존의 전통적인 홍가권(洪家拳)을 새롭게 개량하였는데 공자복호권(工字伏虎拳), 호학쌍형권(虎鶴雙形拳) 등이 이때 크게 개량되었다고 한다. 또한 황비홍(黃飛鴻)은 소걸아(蘇乞兒), 송휘당(宋輝鏜), 임복성(林福成)으로부터 배운 새로운 권법들을 모두 홍가권(洪家拳)에 편입시켜 홍가권(洪家拳)을 영남무술 5대 문파 중 최대의 문파(門派)로 번창시켰으며 현대로 이어지는 홍가권(洪家拳)의 체계를 형성한 인물로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현대 홍가권(洪家拳)의 일대종사이자 중흥조로 추앙받고 있다.

황비홍(黃飛鴻)의 특기로는 공자복호권(工字伏虎拳), 호학쌍형권(虎鶴雙形拳), 철선권(鐵線拳), 오랑팔괘곤(五郞八卦棍), 오형권(五形拳), 십형권(十形拳), 쌍비타(雙飛鉈), 자모도(子母刀), 나한포(羅漢袍), 괴자무영각(拐子無影腳), 철선권(鐡線拳), 단쌍호조(單雙虎爪) 나한금전표(羅漢金錢鏢), 사상표룡곤(四象標龍棍), 칠성연환구(七星連環扣), 요가대파(瑤家大耙) 등이 있다. 홍가권(洪家拳)은 전형적인 남파 권법이기에 발차기보다는 교수(橋手)의 비중이 더 크지만 황비홍(黃飛鴻)은 각법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황비홍(黃飛鴻)의 2대 제자인 주우제는 자신의 저서인 '황비홍 별전(黃飛鴻別傳)'을 통해 황비홍(黃飛鴻)의 각법을 언급했는데 흔히 알려진 무영각(無影脚) 외에도 '월영귀각'이라는 비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 기술은 매우 치명적인 각법으로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방에게 중상을 입힌다고 한다. 이론에도 밝았던 황비홍(黃飛鴻)은 말년에 중용(中庸)과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남파의 권술들을 이론화하였으며 그 결과물로 십독수(十獨手)라는 비기를 창안하기에 이른다. 십독수(十獨手)는 소림 무술의 정수를 담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그 기법이 매우 위험해서 일반인에게는 전수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표 제자들로는 량관(梁寬), 임세영(林世榮), 능운제(凌雲階), 등세경(鄧世瓊), 막계란(莫桂蘭), 임가곤(林家坤) 등이 있다. 등세경(鄧世瓊)과 막계란(莫桂蘭)은 여제자였으며 이중 막계란(莫桂蘭)은 황비홍(黃飛鴻)의 마지막 아내가 되었다. 원래 황비홍(黃飛鴻)의 무술을 가장 잘 이어받은 제자는 량관(梁寬)이었으나 20대의 나이에 폐병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황비홍(黃飛鴻)은 크게 상심하였고 수제자 자리는 임세영(林世榮)에게로 돌아갔다. 임세영(林世榮)은 황비홍(黃飛鴻)을 도와 중화민국(中華民國)을 세우는데 공헌한 인물로 황비홍(黃飛鴻) 사후 홍콩으로 건너가 홍가권(洪家拳)을 전수하면서 활발한 저술 사업과 영화 제작 사업을 통해 스승인 황비홍(黃飛鴻)의 이름을 알리는데 공헌하였다. 유가량(劉家良, 류자량) 등 1970년대 홍콩 영화계를 좌지우지했던 대다수의 감독과 배우들이 바로 린스룽 계통의 홍가권(洪家拳)을 수련한 적전 제자들이었다. 흑기군 출신 임가곤(林家坤)은 황비홍(黃飛鴻)이 수군의 무예 교관이던 시절부터 그를 따라다니며 무술을 배워 후일 타이완으로 건너가 홍가권(洪家拳)을 전수하였다. 영화 속에 황비홍의 제자로 자주 등장하는 '아찰소'라는 캐릭터는 가공인물로 실존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황비홍(黃飛鴻)을 기억하는 이들은 모두 황비홍(黃飛鴻)을 엄숙하고 진지하였으나 때로는 소탈하고 온화한 모습을 보였던 매우 인간적인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무술을 가르칠 때 배울 수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가르치지 않았고 훈련을 게을리 하는 제자들도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그는 매우 용감무쌍하여 힘없는 민중이 억압을 받는 모습을 보면 절대 참지 못했으며 항상 민중들의 편에 서서 상인들과 민중들을 보호했다고 한다. 2001년 불산시(佛山市)는 광동 지역의 유명인인 황비홍(黃飛鴻)을 기리기 위해 그의 기념관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고 현재 포산 시의 조묘(祖廟) 근처에 '불산황비홍기념관(佛山黄飛鴻紀念館)'이 설립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지역 명소가 되었다. 기념관에서는 그의 사진과 기록화, 그를 다룬 소설, 무술 사료, 무기 등을 전시해두고 있으며 매일 사자춤 및 권법 공연 등을 통해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매년 그의 생일이 되면 전 세계에서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모여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현재 황비홍(黃飛鴻)이 뿌리내린 홍가권(洪家拳)의 계보는 전 세계로 퍼져 최대 문파가 되었으며 대다수 홍가권(洪家拳)의 계보가 황비홍(黃飛鴻)을 거치고 있다. 최근에는 황비홍(黃飛鴻)이 유영복 휘하의 항일 독립운동 부대에서 활약하였다는 증거가 발견되어 '광동 역사 문화의 명인 100인'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오르고 항일독립운동가(抗日獨立運動家)로서의 그의 지위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최근 광둥 역사문화 명인사진전 기획 시 뽑은 116명의 역대 향토 인물 중에서는 탈락(脫落)하였다 사유는 그의 일화가 설화적인 면이 많다는 이유이다. 역대 향토인물 중 무술인은 2명이 뽑혔으며 그중 하나가 황비홍(黃飛鴻)의 수제재인 임세영(林世榮)이다. 이 결정에 대해서는 해당 지역에서 일부 반발이 있는 편이다.

'황비홍의 영웅유몽(黃飛鴻之英雄有夢)'이 최근 영화관에서 인기리에 상영 중이다. 여기에 이전에 이연걸이 만들어낸 황비홍(黃飛鴻)의 이미지와 합쳐져서 우리는 황비홍(黃飛鴻)은 불공평한 일을 보면 참지를 못하고 길거리에서 불의한 일을 저지르는 무리가 있으면 반드시 그가 나서서 징벌을 하여 백성들의 눈에 그는 정의의 화신으로 비친다고 여긴다. 그는 제폭안량(除暴安良)의 대명사이다. 황비홍(黃飛鴻)은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무공을 지녀 자주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고 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이런 이미지를 형성했다. 역사상 진실한 황비홍(黃飛鴻)의 무공은 천하무적이다. 그러나 역사상 진실한 황비홍(黃飛鴻)은 정말로 그렇게 대단했을까? 그의 무공은 얼마나 뛰어났을까?

황비홍(黃飛鴻)을 얘기하면 불산(佛山)사람들은 자부심을 나타낸다. 그들은 황비홍(黃飛鴻)과 같은 고향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다. 확실히 이처럼 황비홍은 탁월한 인격적 매력과 뛰어난 능력으로 중국 무술계 뿐만 아니라 보통백성들 사이에서도 명성을 누린다. 그는 최근 백년이래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인물이 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황비홍기념관(黃飛鴻記念館)의 낙성식날, 황비홍시리즈영화를 찍어서 유명해진 감독 서극(徐克)이 친히 그의 제작팀을 이끌고 와서 황비홍기념관(黃飛鴻記念館)의 낙성을 축하했다고 한다. 그러나 100여 년 전에 황비홍은 그저 불산(佛山)의 길거리에서 이름 없는 매예인(賣藝人)에 불과했고 하루 종일 불산(佛山)의 술집과 차관 혹은 골목길을 돌아다녔지만 사람들의 주목을 그다지 받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그가 살아있을 때는 이렇게 적막했지만 그가 죽은 후에는 영광을 얻어 세계적인 문화명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실 진실한 황비홍(黃飛鴻)은 오늘날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위대하지도 않았고 그의 무공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일당십도 아니었다. 더더구나 스크린에서처럼 백전백승(百戰百勝)도 아니었다. 자료에 따르면 여러 번 싸움에서 황비홍(黃飛鴻)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밀렸다고 나온다.

황비홍(黃飛鴻)의 넷째부인 막계란(莫桂蘭)의 회고에 따르면 황비홍의 평생절기는 쌍비타(雙飛砣), 철선권(鐵線拳), 호학쌍형권(虎鶴雙形拳), 나한금전표(羅漢金錢鏢), 사상표룡곤(四象標龍棍), 공자복호권(工字伏虎拳)등이다. 그중 가장 뛰어난 것은 호학쌍형권과 쌍비타이다. 호학쌍형권(虎鶴雙形拳)은 황비홍(黃飛鴻)이 각 대가의 정수를 모아서 만든 것이다. 이들 무공 중에서 가장 주요한 것은 두 가지 연원이 있다. 첫째는 그의 부친인 황기영(黃麒英)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이고 둘째는 그의 부친의 친구인 철교삼(鐵橋三)의 제자인 임복성(林福成)이다. 나머지는 모두 황비홍(黃飛鴻)이 부친과 임복성의 무술을 융합하여 만든 것이다.

황비홍의 부친 황기영(黃麒英)은 불산 십대고수 중 한 명이다. 길거리에서 무술공연을 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그래서 집안은 아주 빈한했고 황비홍은 자신이 걸었던 길을 걷지 않게 하기 위하여 황기영(黃麒英)은 당초에 아들에게 무예를 전수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황비홍(黃飛鴻)이 사서오경을 익혀서 공명을 얻기 바랬다. 그래야 매일 햇볕을 쬐고 비바람을 맞으면서 동으로 서로 뛰어다니고 그렇게 하면서도 생활은 궁핍하게 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황기영(黃麒英)은 황비홍(黃飛鴻)이 4,5살 때까지 무예를 가르치지 않고 힘들게 번 돈으로 황비홍(黃飛鴻)을 학당에 보냈다. 그러나 황비홍(黃飛鴻)은 공부할 재목이 아니었다. 부친이 학당에 보내주었지만 그는 공부에는 생각이 없고 오로지 부친의 무예를 익힐 생각만 했다. 그래서 황비홍(黃飛鴻)은 학교에서 도망친다. 매일 길거리로 가서 부친의 무술공연을 구경했고 다 보고 나면 다시 학당으로 돌아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린 그가 보기에 부친은 비록 궁핍하게 살지만 당당한 대장부이고 권각쿵후이든 도창봉법이건 모두 따를 사람이 없었다. 부친은 그의 마음속의 우상이었다. 그러므로 어린 황비홍(黃飛鴻)의 마음에는 이미 원대한 꿈이 형성되어 있었다. 어른이 된 후에 부친처럼 무예를 익히는 사람이 되겠다는. 한번은 황비홍(黃飛鴻)이 이를 악물고 황기영(黃麒英)에게 부친을 따라서 무예를 배우겠다고 하자 황기영(黃麒英)은 엄청나게 화를 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보기에 아마도 이는 황씨집안에는 글을 하는 사람은 배출하지 않을 운명인가보다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때부터 황비홍(黃飛鴻)에게 무예를 전수해준다.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황비홍(黃飛鴻)에게는 무예를 익히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오랜 시간을 들여서 배웠던 초식을 나이 겨우, 4,5살인 황비홍(黃飛鴻)이 금방 익히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의 결점과 부족한 점까지도 지적해냈으며 그 기초위에서 자신의 초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리하여 황기영(黃麒英)은 안위를 한다. 2년 이후 황비홍은 부친의 무예를 다 익힌다. 그리고 그 때부터 불산(佛山)의 길거리에서 무술공연을 한다. 그후 십여 년을 이렇게 보낸다.

한번은 황기영이 평소와 같이 십여 세 된 황비홍(黃飛鴻)을 데리고 불산의 길거리에서 무술공연을 하고 있었다. 거의 끝날 때쯤 부자 두 명은 돌연 임복성(林福成)이 일군의 흑사회에게 쫓기는 것을 보게 된다. 황기영(黃麒英)은 평소에 불공평한 일을 참지 못하였고 게다가 친구가 쫓기는 것을 보자 당연히 두 말도 하지 않고 바로 도와주게 된다. 이어서 황비홍(黃飛鴻)도 싸움에 가담한다. 부친 및 임복성(林福成)과 함께 추격하던 무리들을 물리친다. 황기영의 구명지은에 보답하기 위하여 임복성(林福成)은 황비홍(黃飛鴻)에게 독문절기인 '철선권(鐵線拳)'과 '비타(飛砣)'를 전수해주겠다고 약속한다. 뛰어난 재능으로 황비홍(黃飛鴻)은 금방 이 두 가지 무예를 익힌다. 이때부터 그의 무예는 더욱 뛰어나게 된다. 부친 황기영조차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만일 황비홍(黃飛鴻)이 7,8세 때 부친의 무예를 익히고 강호에 발을 내디딘 것을 시작이라고 한다면 불산 십대고수의 한 명인 임복성(林福成)으로부터 철선권(鐵線拳)과 비타(飛砣)를 배운 것은 그를 강호의 중심으로 몰아넣었다. 나중에 부친과 임복성(林福成)의 무공을 모두 흡수한 기초 위에서 황비홍은 다시 호학쌍형권(虎鶴雙形拳)을 만들어내고 무공은 더욱 올라간다.

오늘날 민간에서 유행하는 "불산무영각(佛山無影脚)"은 기실 황비홍(黃飛鴻)이 만든 것이 아니다. 무학에는 이런 무술(武術)이 아예 없다. 아마도 후세인이 황비홍(黃飛鴻)의 무공신화를 더욱 강조하기 위하여 특별히 만든 허구의 초식일 것이다. 기실 황비홍(黃飛鴻)의 진실한 무공은 위의 정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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