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금련(潘金蓮)은 수호지와 금병매의 등장인물로 중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다. 성문 밖 가난한 바느질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전족을 했는데 맨발이 작고 예뻐서 금련(金蓮)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집안이 어려워지자 그의 아버지는 남의 집에 어린 그녀를 팔았고 그 곳에서 화장하는 법, 악기(樂器) 다루는 법, 교태(嬌態)부리는 법을 배웠다. 그 후 장대인(張大人)이라는 어느 부잣집에 종으로 팔려가 하녀로 살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어 그 부잣집의 영감 장대인(張大人)이 예쁘게 성장한 반금련(潘金蓮)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가 어느 날은 급기야 장대인(張大人)한테 강제로 검열삭제를 당하려했다가 그만 주인아주머니 여씨(余氏)에게 들키고 말았다. 여씨는 반금련(潘金蓮)을 이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고 생각해서 영감에 대한 보복(報復)도 겸해서 키도 작고 못생긴 떡장수 무대랑(武大郞)에게 시집보내버리고 만다. 금병매(金甁梅)의 일부 판본에서는 후처라고 나온다.
무대랑은 반금련(潘金蓮)을 데리고 열심히 일하면서 잘 살려 했지만 반금련(潘金蓮)은 못생기고 별 볼일 없는 남편에게 불만이 가득했다. 그런 와중에 경양강(景陽岡)에서 호랑이를 때려잡고 그 공으로 도두 벼슬을 하게 된 무송(武松)이 집으로 돌아오자 반금련(潘金蓮)은 그만 무송(武松)에게 반해서 추파(秋波)를 던지지만 강직하고 의리를 아는 성격인 무송(武松)이 단호하게 거부하여 실패한다. 그 뒤 무대랑(武大郞)에게 무송(武松)이 자신을 희롱했다고 거짓말을 하지만 아우를 믿는 무대랑(武大郞)은 넘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무송(武松)은 형수를 피해 다시 관사로 거처를 옮긴다.
본인의 음기(淫氣)를 이기지 못한 반금련(潘金蓮)은 무송 대신에 부자 약장수인 서문경(西門慶)과 바람을 피우고 무대랑(武大郞)은 운가의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무대랑(武大郞)은 반금련(潘金蓮)과 서문경(西門慶)의 불륜 장소를 덮치지만 서문경(西門慶)은 무대랑(武大郞)의 가슴(또는 고간)을 있는 힘껏 걷어차고 달아나 버린다. 무대랑은 부상을 입은 채 병석에 눕게 되나 반금련(潘金蓮)은 남편을 돌보지 않은 채 서문경(西門慶)과의 불륜에만 신경 쓴다. 이러한 아내한테 제대로 화가 난 무대랑은 반금련(潘金蓮)에게 "나를 치료해 살려주면 죄를 묻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아우 무송에게 모두 알려 너를 죽일 것이다"라며 협박을 한다. 이에 놀란 반금련(潘金蓮)은 서문경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그의 사주를 받아 서문경(西門慶)의 약재를 이용해 무대랑(武大郞)을 독살한다. 하지만 나중에 돌아온 무송(武松)에게 걸려서 반금련(潘金蓮)은 무송이 거짓으로 무대랑(武大郞)의 장례식을 정리한다고 속아서 있다가 무송(武松)이 칼을 가져와 내장을 끄집어내어 죽게 된다. 나중에 서문경(西門慶)까지 죽어서 권선징악(勸善懲惡) 당했다.
금병매(金甁梅)에서는 무송(武松)이 한 번 복수에 실패해서 서문경(西門慶)의 첩으로 들어가 잘 먹고 잘 살지만 서문경(西門慶)이 복상사하자 서문경의 외동딸의 남편 즉 사위인 진경제(陣經濟)와 놀아나다가 도로 쫓겨나게 된다. 그때 마침 다시 돌아온 무송이 아내로 삼겠다고 유혹(誘惑)하자 얼씨구나 하고 무송의 집으로 갔으나 무송(武松)은 여전히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반금련(潘金蓮)은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만다. 반금련(潘金蓮)의 최후도 위에 서술한 것처럼 참수 당하는 결말도 있지만 다른 판본에선 독약(毒藥)을 억지로 먹여 죽이는 것도 있다.
‘서문경(西門慶)과의 정사(情事)에 이야기를 보태어 명대 사회의 상인(上人)과 관료들과 그리고 무뢰한의 어둡고 추악한 작태를 폭로한 반금련(潘金蓮)이 유명해진 것은 '수호전(水滸傳)'과 '금병매(金甁梅)' 때문이다. 그녀는 수백 년간 역사의 악녀(惡女)로 요괴(妖怪), 음탕, 독랄(毒辣)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렇다면 반금련(潘金蓮)이라는 여인이 실제 역사상 존재하였을까?
이 이슈를 따져보기 전에 먼저 그녀가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부터 수색을 시작해야할 것 같다. 바로 '수호전(水滸傳)'이다. '수호전'의 작자는 어떤 사실관계위에서 이런 소설을 창작했을까? '수호전'은 중국 명나라 때의 장편소설이고 '충의수호전(忠義水滸傳)'이라고도 한다. 통상적으로 '수호'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작자는 시내암(施耐庵)이다. '수호전'은 민간의 무명작가들이 문인작가와 집단적으로 창작한 결과물이고 이 책이 완성되기 까지는 기나긴 변화와 유전의 과정을 거쳤다. '수호전'에 묘사된 송강(宋江)을 우두머리로 하는 농민의 난은 송휘종(宋徽宗) 선화연간(1119-1126)때 발생했다. 당시 기세가 대단하였으므로 민간에는 여러 가지 소문과 전설(傳說)이 나돌았다. 거기에 무명작가들이 계속하여 가공하고 덧붙였다.
시내암(施耐庵)은 오랫동안 민간전설, 민간설화예술과 원나라 잡극의 기초위에서 가공하여 책으로 완성한다. 명나라 가정19년(1540년), 고유(高儒)의 '백천서지(百川書誌)'에 따르면 “'충의수호전(忠義水滸傳)' 100권은 전당에 사는 시내암의 책이다. 나관중(羅貫中)이 정리해서 목차를 붙였다.” 가정45년 낭영(郞瑛)은 '칠수류고(七修類稿)'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전당 시내암(施耐庵)의 책이다” 이를 보면 이 책의 창작은 역사적 사실을 계속하여 가공 변화시키고 대량의 민간전설(民間傳說)을 끼워 넣어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책안의 많은 내용은 작자의 상상에 따른 창작이다. 전체적인 기본이야기는 대체로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지만 나머지 개별적인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작가가 생활경험과 상상에 근거하여 가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반금련(潘金蓮)이라는 이 인물은 작자가 무송(武松)이라는 큰 인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창작해낸 인물인 것이다.
작가의 측면에서는 봤으니 이제 작품 자체를 보도록 하자. 반금련(潘金蓮)은 무송(武松)이라는 주요한 인물과 관계가 있다. 그렇다면 무송(武松)은 실존인물인가? '임안현지' '서호대관' '항주부지' '절강통지' 등의 사적에는 모두 북송 때 항주지부의 무송(武松)이 백성을 위하여 악당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상술한 서적에는 무송(武松)이 원래 강호를 돌아다니면서 무예를 보여주고 돈을 버는 사람인데, “용모가 기이하고 일찍이 용금문(涌金門) 밖에서 기예를 펼쳤다”고 한다. “도적이 아니었다” 항주지부 고견은 무송(武松)의 무예가 뛰어나고, 인재가 출중한 것을 보고 지부로 불러들여서 그에게 도두(都頭)를 맡긴다. 얼마 후 그는 제할(提轄)로 승진하여 지부 고권의 심복이 된다. 나중에 고권이 중앙정부의 권력자에게 밉보여 모함을 받아 파직 당한다.
무송(武松)도 이에 연루되어 아문에서 쫓겨난다. 새로온 지부는 태사 채경(蔡京)의 아들 채윤(蔡鋆)이었는데 대간신(大奸臣)이었다. 그는 부친의 권세를 믿고 항주에 부임한 후 학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사람들은 채윤을 “채호(蔡虎)”라고 불렀다. 무송(武松)은 이 간신을 뼈에 사무치게 미워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 악당을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하루는 그가 날카로운 칼을 몸에 품고 채윤(蔡鋆)의 집 앞에 숨어 있었다. 채윤이 사람들과 함께 집에서 나올 때 그에게 달려가서 칼로 몇 번을 찔렀고 채윤(蔡鋆)은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관병들이 벌떼처럼 몰려와서 무송을 에워쌌고 무송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관병에 체포된다. 나중에 감옥(監獄)에서 참혹하게 죽는다.
현지에서는 백성들이 그의 덕에 감사하여 항주의 서냉교(西冷橋) 옆에 묻어주었다. 나중에 사람들이 비를 세웠는데 “송의사무송지묘(宋義士武松之墓)”라고 썼다. 이를 보면 역사상의 무송과 '수호전(水滸傳)'에 묘사된 무송은 차이가 크다. 역사상의 무송(武松)의 의협을 작자는 인물을 창작하는데 기본으로 삼아 그가 벌인 일은 작자가 창작한 배경이 되었지만 작자는 무송을 탈태환골(奪胎換骨)시켰다. 경양강(景陽岡)에서 호랑이를 죽이고 반금련(潘金蓮)과 서문경(西門慶)을 죽이는 이야기는 모두 작자가 창작해낸 것이지 역사적인 사실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무송(武松)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드러낸 이 반금련(潘金蓮)도 역시 작가가 만들어넣은 것일 것이다.
위에서 '수호전(水滸傳)'은 여러 민간전설을 활용하였다고 하였는데 사실 민간전설도 생활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저 후인들의 상상과 재창작을 거친 것이어서 그 근원을 찾아볼 수는 있다. '수호전'의 반금련(潘金蓮)은 어려서 노비였는데 나중에 키 작고 못생긴 무대랑(武大郞)에게 상으로 주어지거나 혹은 팔려갔다. 이 혼인은 애정이 바탕이 된 것이 아니다. 봉건도덕체계의 속박 하에 반금련(潘金蓮)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저 참을 수밖에 그것만 해도 이미 불행이다. 만일 그녀가 평생 두 번째 남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무대랑(武大郞)의 부엌에서 그저 마르고 쪼그라들어서 죽었을 것이다. 그것은 중국의 대대손손 무수한 평범한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성이 억압된 거대한 비극이다. 이를 가지고 중국 사람들이 반금련(潘金蓮)에게 도덕적 금관(金冠)을 씌워주고 그 금관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역시 그 아래 청춘과 인간성을 말살한 죄악은 덮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생활은 반금련(潘金蓮)으로 하여금 이런 비극적인 길을 걷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방향을 틀어 또 다른 비극으로 향하게 한다. 반금련(潘金蓮)은 어쨌든 살아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억압을 받더라도 그녀는 애정생활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을 무대랑은 그녀에게 줄 수가 없다. 이런 상황 하에서 무이랑(武二郞)과 만난 것은 반금련(潘金蓮)으로 하여금 애정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준 것일 것이다. 그리고 마른 장작에 불이 붙은 것처럼 한번 시작되자 그만 둘 수가 없었다. 그러나 봉건도덕체계 속에서 이혼은 불가능하다. 그녀는 할 수 없이 불행한 혼인의 박해를 받는 여성들이 걸었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몰래 외간남자를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무이랑(武이郞)은 웬일인지 여색을 즐기지 않았다.
반금련(潘金蓮)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녀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다. 이때 권세와 돈을 모두 가진 서문경이 나타나서 어부지리를 취한 것이다. 사랑과 몸을 사고파는 왕파에게 손쓸 기회를 주게 된 것이다. 반금련(潘金蓮)은 무대랑(武大郞)과의 불행한 혼인의 비극을 벗어나기 위하여 또 다른 더욱 깊숙한 비극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를 가지고 노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반금련(潘金蓮)은 사회도덕의 희생양이 된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반금련(潘金蓮)은 봉건윤리도덕에 도전하였다. 비록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상황 하에서 발생하였지만 그래도 이는 하나의 돌파구이다. 사실 이는 작자 작품의 반봉건사상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 그 외에 작자는 반금련(潘金蓮)이라는 인물을 창작할 때 자신의 생각을 주입시켰다.
이상의 여러 가지 사정을 보자면 반금련(潘金蓮)이라는 인물은 실존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델은 있을 것이다. 그녀의 이미지가 이렇게 뚜렷한 것은 작자가 창작의 필요에 따라 여러 생활의 원형들 중에서 뽑아서 작자의 요구에 맞게 그녀를 창작해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