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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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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북성 무당산 무당파의 시조는 태극권의 창시자 장삼풍(張三豊)

图片信息 令人感到奇怪的是,他从来没有见过张三豊本人


'북에는 소림이 숭상(崇尙) 받고 남에는 무당이 존중(尊重)받는다(北崇少林, 南尊武當)'는 말이 전해진다.

소림사(少林寺)는 중국 허난성(河南省)의 정저우(鄭州) 숭산(嵩山)에 있는 사찰이다. “위서(魏書)” 제114 권 ‘석노지(釋老志)’를 보면 태화 20년인 496년에 북위 효문제(孝文帝)가 464년에 중국으로 와서 인도 불교(佛敎)를 전파하기 시작한 인도 승려 발타(跋陀)를 주지로 하여 소실산음에 소림사(少林寺)를 창건하였다. 그리고 북주시대(北周時代)에 파괴되었으나 수 시대(隋時代)에 문제(文帝)에 의해 재건되었다.

태화 20년인 496년에 북위 효문제의 명으로 인도 승려 발타(跋陀)를 주지로 하여 창건되었을 당시 소림사(少林寺)의 구조는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였지만 혁세(革世)할 때마다 거듭하여 덧붙여 늘려 지어서 으리으리해진 현재 소림사(少林寺)의 복잡하고 간단하지 않은 구조는 주로 명대와 청대의 산물이다.

소림사(少林寺)에서는 솜씨가 빈틈없이 꼼꼼하고 교묘한 벽화를 이용해 매만져 꾸미고 맵시를 곱게 낸 전리(殿裏)가 오늘날까지도 잘 보존된 천불전(千佛澱)이 인상 깊고 소림사(少林寺) 인근에 있는 중국 건축 역사상 위대한 사업 일종인 탑림(塔林)에서는 경이로울 만큼 다양한 탑이 묘소 이백 사십 륙 개를 수호하듯이 소림사(少林寺)는 구조상 다양성에 선종(禅宗)이 발생한 곳이라는 중요성까지 더해져 중국에서 불교 상 중요한 유적(遺蹟)이다. 2010년 8월 2일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에 등재되었다.

무당파(武當派)는 중국 고대의 하나의 중요한 무학문파(無學門派)이고 유명한 소림사(少林寺)와 더불어 이름을 떨치고 있다. 양파는 합쳐서 중화무술(中華武術)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 운다. 무당파(武當派)의 무공의 특색은 "이정제동"(以靜制動,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움직이는 것을 제압한다), "이유극강"(以柔克剛, 부드러움으로 굳셈을 이긴다)이다. 무당파(武當派)의 원류는 아주 복잡하여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다투어지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무당파(武當派)에는 크게 4개의 파가 있다고 한다. 즉 정을파(正乙派), 전진파(全眞派), 현무파(玄武派), 삼풍파(三豊派)가 그것이다.

무당 정을파(正乙派)는 일반적으로 외부에 전해지지 아니하고 무당산 본궁의 용문내부에서만 이어지는 일파이다. 정을파(正乙派)의 "무당태극유박이십삼식(武當太極柔撲二十三式)"은 일찌기 김자기선생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김선생은 그의 사부인 이합림 도장에게 외부에 전하지 아니하겠다는 것을 서약하고서야 이 권법을 배울 수 있었다. 이합림 도장은 명나라 홍치연간(서기 1488-1504년)에 본궁용문 및 도가문파중의 토납술(吐納術), 도인술(導引術), 기격술(技擊術) 등을 합쳐서 "무당태을유박이십삼식(武當太乙柔撲二十三式)"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파에서는 "마음과 호흡이 서로 맞으며, 허리는 다리가 도는데 따르며 운행은 느릿하고 움직이고 멈춤이 자유자재이어야 한다" "움직일 때는 뱀이 가는 것과 같고 발경(發勁)은 누에가 꼬치를 짓는 것과 같다" "자리를 잡음에 있어서는 분촌호리(分寸毫釐)를 따지고 적을 제압함에는 잡고 밀고가두고 막는다." 기술의 면에서 보면 폭이 비교적 작고 행동은 비교적 느리다. 비록 후대에서 이 무공을 계속 새롭게 고쳤지만 여전히 강한 고전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다.

무당전진파와 현무파(玄武派)는 모두 많은 권법과 검법을 가지고 있다. 많이 알고 있는 팔괘장(八卦掌), 태극권(太極拳), 형의권(形意拳) 및 어문권(魚門拳), 원유복지권(猿猱伏地拳), 육보산수(六步散手) 등 민간의 진귀한 권법이 모두 포함된다. 검법으로는 무당검(武當劍), 백홍검(白虹劍)등이 있다. 이 일파의 전수자는 매우 많다. 현존하는 의문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태극권은 진가구(陳家溝)에서 발원한 것인지 동해천(董海川)이 팔괘장을 창립하였는지 등등이다.

역대로 무당파(武當派)의 비조는 무당삼풍파로 인정된다. ‘무당권법비결(武當拳法秘訣)’은 "본 무당삼풍의 요결은 무당의 정종이다"라고 하고 있다. 1928년 가을, 만뢰성 선생이 저술한 ‘무술회종(武術匯宗)’에서는 "무당종동현진인 장삼풍조사"라고 하고 있다. 배석영(裵錫英), 이춘생(李春生)이 주편한 ‘무당무공(武當武功)’이라는 책에서는 명나라 때의 장삼풍(張三丰)이 무당무술을 창립하였다고 적고 있다. 수백 년의 변화를 거쳐 무당무술은 가장 간단한 "팔문오수(八門五手)"의 13세(勢) 권법에서 오늘날까지 발전해오면서 많은 유파의 무술을 흡수하였다. 태극권(太極拳), 팔괘장(八卦掌), 형의권(形意拳), 무당태극권(武當太極拳), 무당팔극권(武當八極拳), 무당검(武當劍,) 현무곤(玄武棍), 삼합도(三合道)와 용문십삼창(龍門十三槍) 등이다.

어떤 사람은 사료에 나타나는 장삼풍(張三丰)에 대하여만 고증하여 연구한 후 무당의 조사는 명나라 때의 도인 장삼풍(張三丰)이 아니라 소림파(少林派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무당권법연구회(武當拳法硏究會)와 일부 전문가들은 1999년 초부터 개시한 발굴정리(發掘整理)를 통하여 100여개의 무당권법문파와 500여종의 권보를 기본적으로 확인하였다. 몇 해 동안 무당권법연구회와 무한체육대학의 일단의 전문가들은 민간에서 고찰(考察)하고 탐방하며 무술명인좌담회를 개최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자료를 수집하였고 많은 사료를 열람하고 수 백 건의 비석탁본(碑石拓本)과 기록을 열람하였다. 정리한 자료는 모두 1000만 여자에 이른다. 그들은 이상의 사실자료에서 무당조사인 장삼풍(張三丰)은 역사상 확실히 존재하였고 또한 그가 제기한 "수내(守內), 숭실(崇實), 수성(修性), 건신(健身)"(내공을 닦으며, 실질을 숭상하고, 본성을 수양하며, 몸을 튼튼하게 한다)의 원칙 하에서 무당권(武當拳)은 "태극설(太極說)", "음양설(陰陽說)", "오행설(五行說)"등을 운용하여 더욱 발전하였고 "자연에 따라서 고요함으로 움직임을 제압하고 기술이 도의 경지에 이르도록 한다"는 특색을 형성하였으며 무당파의 독특한 이론과 기술체계를 완비하였다.

도교 양대 교파를 융합하는 데 일조
동한(東漢)때부터 교단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도교는 금나라, 원나라에 이르러 크게 정일교(正一敎)와 전진교(全眞敎), 양대 교파로 나누어진다. 지역적으로 대체로 양자강과 회수(淮水) 남북지역을 경계로 한다.

남쪽은 정일교(正一敎) 위주였고 북쪽은 전진교 위주였다. 정일교는 주로 도가전적, 단약(丹藥)을 만들어 복용하거나 부적 등을 채용하였다. 전진교(全眞道)는 자신의 도덕수양이나 수련을 중요시하였다. 원나라 말기나 명나라 초기에는 이들 양대 교파가 교류하고 융합(融合)하는 추세가 일어났는데 그때 상당한 역할을 한 대표적 인물이 바로 장삼풍(張三丰) 진인이다.

태극권의 창시자
한편 몇 년 전 중국 영화배우 이연걸(李連杰)이 주연한 ‘태극권(太極拳)’이라는 영화가 전 세계에 인기리에 상영된 적이 있다. 이 태극권(太極拳)의 창시자가 장삼풍(張三丰) 도인이다. 무협지에는 중원 팔대문파 중, 무당파의 개파 조사로 그 이름이 무수히 등장하여 보통사람들 귀에 익숙할 것이다.

장삼풍(張三丰)의 이름은 ‘전일’(全一), 호는 ‘삼풍’(三豊)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이 ‘군보(君寶)’이고 ‘전일(全一)’은 그의 자라고도 한다. 또 이름이 ‘통(通)’, ‘금(金)’, ‘현일(玄一)’이라고도 하는데 하나뿐 아니라 상당히 많다.

낡은 장삼과 풀로 만든 모자를 쓰고
민간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장삼풍(張三丰)은 외관을 꾸미지 않았으며 추위와 더위를 불문하고 늘 한 벌의 다 찢어져가는 장삼과 풀로 엮어서 만든 낡은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시간이 오래되자 낀 때가 반들반들 하게 되어 광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장납탑’(張邋遢 : 불결하고 지저분하다는 의미)이라는 이름을 하나 얻었다고 한다.

장삼풍(張三丰)의 본적이 요주(遼州), 의주(懿州), 보계(寶鷄) 등이라는 주장이 있고 심지어 사천(四川), 호북(湖北), 산서(山西) 등도 그의 고향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정확히 고증하기는 어렵다. 장삼풍(張三丰)이 득도한 시기조차도 송나라, 금나라, 원나라 때라는 각기 다른 주장이 있다. 이러한 불명확한 주장들은 오히려 그의 신비한 면을 나타내기도 하면서 그가 천하를 널리 주유(周遊)했다는 것을 반영한다. 종적(蹤迹)도 또한 일정하지 않다.

한 번 먹으면 수개월을 먹지 않다
흔히 신선들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면 기이한 행적과 술법들이 등장하는데 장삼풍(張三丰)도 자연히 예외가 아니다. 밥을 먹으면 한 자리에서 잠깐 동안 솥단지 채로 먹어치웠는데 몇 달 동안은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에 천리를 갈 수 있었고 각처에 분신(分身)이 동시에 나타났다. 무슨 약을 쓰던지 병을 낫게 할 수 있었고 늙음을 되돌릴 수 있는 회춘(回春)의 묘술이 있었다. 죽어가는 병자를 소생시켜 걸어갈 수 있게 하였는데 이러한 불가사의한 일화들이 많이 전해져 온다.

명나라가 세워지고 촉(蜀) 헌왕(獻王)으로 봉해진 주춘(朱椿)은 명태조 주원장의 열한 번째 아들인데 여러 왕자 중에서 비교적 취미가 고상하고 손님을 잘 대접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주원장(朱元璋)은 헌왕(獻王) 주춘(朱椿)을 ‘독수재(獨秀才)’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이 독수재(獨秀才) 주춘(朱椿)이 촉 땅 사천에 있을 때 장삼풍(張三丰)을 손님으로 초청해서 환영의 자리를 성대히 마련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진기한 물건들을 선물로 내놓았는데 모두 그 진귀함에 찬탄할 뿐이었다. 이에 대한 답례로 장삼풍(張三丰)이 자리에서 일어나 “빈도(貧道) 또한 변변치 못한 선물을 준비하였사온데 원컨대 전하께서는 웃음으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대기원 땅에 묻은 이빨에서 연꽃잎이 솟아나다
촉헌왕(蜀獻王) 주춘(朱椿)의 예물에 대한 답례로 장삼풍(張三丰)은 품속에서 한 손 가득 대추를 꺼냈다. 그 대추들은 반쪽이 붉고 반쪽은 푸른데 모두들 한 나무에서 자란 것들이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손님들은 비록 뜻밖이라고 느꼈으나 장삼풍이 사전에 몸에 감추고 있었다고 여겼으므로 그리 신기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했다. 이때 장삼풍(張三丰)은 연회석에서 황금 잔 하나를 들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마당의 흙이 있는 곳으로 나가도록 하였다.

장삼풍(張三丰)은 입안에 손을 넣어 이 하나를 뽑아내어 흙속에 묻었다. 이를 흙속에 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에서 푸른색 싹이 트더니 자라기 시작하여 연잎이 되었다. 그 연잎에서 꽃대가 하나 쑤욱 올라오더니 연꽃 한 송이가 피었다. 연꽃 송이는 큰 쟁반만 하였다.

연꽃의 꽃 판은 매 판마다 가지각색의 반점이 있으며 꽃 판이 점점 많아지더니 거의 천개에 육박하였다. 연꽃의 휘황찬란한 빛깔이 집안에 가득하며 맑은 향기가 퍼져 나왔다. 그 자리에 참석한 많은 손님들은 이때서야 비로소 충심으로 기뻐하면서 심복하였다. 촉헌왕(蜀獻王) 주춘(朱椿) 또한 몸소 붓을 들고 시를 지어 장삼풍(張三丰) 진인에게 선물하고 이 날의 성대한 광경을 기록했다.

죽은 장삼풍의 관속에는 시체가 온데간데없고
장삼풍(張三丰)이 사천성(四川省)에서 이러한 도술을 펼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올 때 장삼풍(張三丰)은 이미 한 번 죽었다고 한다. 이때가 명나라 홍무(洪武) 24년 (1391) 9월이었다. 장삼풍(張三丰)은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게송(偈頌)까지 남겼다. 죽은 후 제자 양궤산(楊軌算) 등이 염을 하고 입관했다고 한다. 사천에서 들려오는 장삼풍(張三丰)의 기이한 소문을 듣자 제자들은 감히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음을 크게 먹고 제자들은 사부 장삼풍(張三丰)의 관을 열어 보았다. 그런데 관속은 텅텅 비어 있었다. 이러한 소식이 경성에 전해지자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사람을 시켜서 장삼풍(張三丰)을 찾았으나 이때부터 장삼풍의 행방이 묘연(渺然)했다고 한다.

장삼풍(張三丰) 진인은 명나라 초기에 호북성(湖北省) 무당산(武當山)에서 도교 사업을 부흥시켰으며 그 곳에서 전국최대의 도관을 세웠다. 장삼풍(張三丰)이 일찍이 무당산(武當山)을 방문했을 때 도관이 전쟁으로 피폐(疲弊)해져 잡초만 무성했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이곳을 떠나지 말라, 이곳은 앞으로 크게 흥성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삼풍 진인 기념관을 무당산에 짓다
명나라 영락제 때 사람을 보내 장삼풍(張三丰) 진인을 다시 찾았으나 종적이 묘연하여 무당산(武當山)에 ‘태화궁관’(太和宮觀)을 지어 진인의 뜻을 받들었다. 이때부터 무당산은 도교활동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명 영종 때에는 장삼풍(張三丰) 진인을 기리는 제사를 지냈으며 그리고 ‘통휘현화진인’(通徽顯化眞人)이라는 법호를 내렸다.

최근에 중국을 시작으로 하여 전 세계에 “법륜대법”(法輪大法: 파룬궁)을 전하고 있는 이홍지(李洪志) 선생은 장삼풍(張三丰) 진인의 태극권과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시 한편을 지었는데 한 번 음미(吟味)해 보시기 바란다.

태극(太極)
진인개세장삼풍(眞人蓋世張三豊)
대도무적천지행(大道無敵天地行)
후세위명난권법(後世爲名亂拳法)
개오태극괴오명(改吾太極壞吾名)
진인 장삼풍의 명성, 세상을 뒤덮었는데
큰 도를 천하에 펼칠 때 적이 없었다
후세 사람들, 명예를 위해 권법을 어지럽히는데
나의 태극권을 고치고 내 이름을 무너뜨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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