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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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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신선이 된 고운 최치원의 자취를 좇아 (1)

- 유·불·선에 두루 능했던 고운(孤雲) 최치원
신선이라 일컬어지는 생의 자취

고운(孤雲) 최치원(857~?)을 두고 옛적부터 사람들은 신선이라 일러 왔다. 아마도 죽음이 확인되지 않았기에 가능한 생각이 아닐까 싶다.
진성왕 8년(894년)에 시무 10조를 올리고 6두품으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관직인 아찬(兒飡)이 됐다. 그의 개혁안을 임금은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세상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지러운 세상이 이어지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곳곳을 떠돌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 뒤 최치원은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숨어 살다가 말년을 마쳤다. 아무런 경계도 매임도 없이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돌았던 신선과 같은 그의 자취는 전국 곳곳에서 발견된다. 정말 이렇게 많은 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신비로울 정도다. 어쩌면 후세 사람들이 그의 높은 이름을 빌려 빼어난 풍경을 덧붙이지 않았을까, 의문을 품어봄직하다. 어쨌거나 최치원이 지금조차도 그런 대접을 받고 있는 데에는 유·불·선 모두를 아우르는 그의 사상이 크게 작용했다고 봐야 맞을 것 같다.
고운은 <계원필경(桂苑筆耕)>(886년)을 비롯해 많은 시문을 남겼다. 12살에 중국 유학을가서 18살에 빈공과에 장원급제했다. 25살 되던 881년에는 당시 반란을 일으킨 지 7년만에 당나라 수도 장안까지 점령했던 황소에게 보내는 격문을 썼고 이 <격황소서(檄黃巢書)>가 명문으로 알려지면서 크게 이름을 얻었다.
고운은 우리나라 유학의 시조라고도 한다. 세상을 떠난 지 100년 정도 지나지 않았을 때인 고려 현종 시절 공자 사당에 모셔졌고(1020년) 널리 알려진 시호 문창후(文昌侯)도 1023년 내려졌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도 최치원을 일러 신라 말기 이름난 유학자(羅末名儒)라 했다.
최치원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당대 고승들의 비문을 쓰기도 했다. 최치원이 실제 지은 비문은 매우 많았겠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넷이다. 이른바 '사산비명(四山碑銘)'인데 조선 광해군 전후 철면(鐵面)노인이 최치원의 문집 <고운집(孤雲集)>에서 가려 뽑아 붙인 이름이다. 불교를 배우는 이들이 읽어서 익히는 독본 교과서가 됐을 만큼 내용이 그럴 듯하다.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 만수산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 초월산 숭복사지비,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국보 제138호) 등이다.
도교에 대해서도 깊게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는 진흥왕 37년 원화(源花)를 다루는 기사에서 최치원이 지은 난랑비 서문을 끌어쓰고 있다. <나라에 심오하고 미묘한 도가 있는데 풍류라 한다.…삼교(三敎)를 포함한 것으로 여러 백성을 교화했다. 들어가면 집안에서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함은 공자의 뜻이요, 자연 그대로 행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함은 노자가 주장한 요지며, 모든 악한 짓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함은 부처의 교화다> 풍류=화랑도의 내용을 논하면서 유불선이 합일함을 짚은 대목이다.
그가 지은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두고는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가 나오기는 한다. 신라 고유의 임금 명칭인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이사금(尼師今)·마립간(麻立干)을 쓰지 않고 '왕(王)'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김부식은 <삼국사기> 지증마립간 기사에서 스스로 묻고 답했다. "행여 말이 야비해 족히 부를 것이 못 된다는 까닭일까? <좌전>·<한서>는 중국역사 서적이지만 오히려 초나라 말과 흉노 말 등을 그대로 남겨두었으니, 이제 신라의 일을 기술함에 그 나라말을 남겨두는 것은 또한 마땅하다."

- 운암영당 고운 선생 영정 두 동자승의 존재,
고운을 신선으로 여겼던 증거


최치원을 두고 후세 사람들이 신선이라 여겼음을 알려주는 그림이 있다.
경남 하동군 양보면 운암영당 '고운 선생 영정'(경상남도유형문화재 187호)이다.

문창후최공지진영(文昌候崔公之眞影)이라 적혀 있는 이곳의 고운 영정은 문신상이다. 대체로 신선으로 그려져 있는 여느 고운 영정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오른편 문방구가 놓인 탁자와 왼편 촛대 받침을 두고 뒤로 구름 속 대나무를 배경으로 삼았다. 비단 바탕에 당채(唐彩)로 그려진 이 전신상은 관복을 입고 검은 사모를 쓰고는 두 손을 맞잡은 채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데 풍만한 느낌을 준다. 가슴의 흉배는 화려하고 허리띠는 단순하게 처리함으로써 사대부와 유학자로서 엄숙한 풍모를 그려내보였다.
그런데 이 영정의 숨은 비밀이 2009년 밝혀졌다. 아울러 만들어진 시기까지 정확하게 알 수있게 됐다. 국립진주박물관이 조사한 결과였다. 오른쪽과 왼쪽 탁자와 받침이 그려진 부분에 X선을 쬐자 아래에 다른 그림이 확인됐다. 동자승 둘이었다. 최치원을 신선으로 인식하고 그렸음을 알려주는 장면이었다. 아래쪽에는 화기(畵記)도 나타났다.

'건륭(乾隆)58년' '하동 쌍계사'. 그린 사람과 시주한 사람 이름도 나왔다. 건륭 58년이면 1793년이다. 당시까지는 1860년 제작된 청도 고운 영정(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66호)이 가장 최고(最古)였다.
이 고운 영정은 옛날 선비들이 최치원을 단순한 문인이 아닌 신선으로 여겨왔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만하다. 푸른 학이 노닌다는 지리산 청학동. 역사상 으뜸 문인으로 꼽히는 최치원이 청학동에 숨어들었다는 전설이 만들어진 이후 많은 선비들이 발걸음을 거기로 돌렸다. 그이들도 신선이 되기를 꿈꿨는지는 모르겠으나 최치원은 오래 전부터 그들의 마음 속에서 이미 신선이었던 것이다.

사람 발길이 잦지 않은 시골길 한편에 자리잡고 있는 운암영당은 고즈넉하다. 들머리에 길게 늘어서있는 나무를 따라 올라가면 금방 영당이 나온다. 고운 영정은 이 자리에 놓이기까지 여러 곳을 떠돌았다. 처음엔 쌍계사에 있다가 순조 25년(1825년) 같은하동의 화개 금천사(琴川祠)로 옮겨졌고, 고종 5년(1868년) 금천사가 없어지자 하동향교로 옮겨온 다음 1902년 횡천영당을 거쳐 1924년 운암영당으로 왔다. 현재는 부산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한평생을 떠돌며 곳곳에 자취를 남겨 놓은 고운의 생전 행적과 많이도 닮았다.
고운의 자취를 따라 가는 길에 걸음을 붙잡는 곳이 화개장터다. 경남과 전남을 이어주는 화개장터는 해방 전만 해도 우리나라 5대 시장 가운데 하나였다. 지리산 화전민들은 고사리·더덕·감자 등을 팔고, 전남 구례와 경남 함양 같은 내륙 사람들은 쌀보리를 팔았다. 전국을 떠돌던 보부상들도 생활용품을 지고 왔으며, 전남의 여수·광양이나 경남의 남해·삼천포(사천)·충무(통영)·거제 등에서는 뱃길로 미역·청각·고등어 따위 수산물을 싣고 왔다.
화개장터는 김동리 소설 <역마>의 무대이기도 하다. 체 장수 영감과 딸 계연 그리고 주모 옥화와 성기의 얽히고설킨 인연과 운명을 그려냈다. 거스르지 못하고 결국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 져야할 운명인지 스스로 극복하는 것이 운명인지를 묻는 작품이다. 고운 최치원과 그의삶은 운명에 순응한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극복한 것일까? 출처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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