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岳岩漢字屋

甲辰年 새해 하시는 일들이 日就月將하시고 乘勝長驅.하시고 萬事亨通 하세요!!!

반응형

경북 안동의 기자바위 아녀자들 바위에 올라타며 아들기원

민속으로 본 性이야기를 연재하는 동안 안동에 거주하는 독자에게서 전자우편을 받았다. 자신이 어릴 적에 살던 고향에도 남근석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동구란 분인데, 도산면 의촌리가 고향이라고 한다.
이곳은 도산서원 맞은편에 자리잡은 마을로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지구가 됐다. 이동구(55)씨는 주말 약속도 모두 없애고 안동에 산재한 남근석을 안내해 주었다.
나에게는 너무나도 고마운 일이었으나, 떠나올 때 제대로 인사를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이 지면으로 대신 고맙다는 말씀을 전한다.

안동에도 기자바위, 특히 아들을 낳아달라고 치성을 드리는 바위가 존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안동의 많은 양반집 며느리들이 가계를 계승하기 위해서 얼마나 아들을 낳기 위해서 마음을 졸였을까 하는 생각은 비단 나만의 상상력은 아닐 것이다.

안동에는 현재도 자식을 낳아달라고 치성을 드리는 바위가 있다. 물론 과거에는 더욱 많았을 것이다. 이 중에서도 현재 황산사 입구에 있는 아버지바위나 신석리의 돌삐, 그리고 도산면 의촌리의 남근석이 그런 흔적의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이들 바위에 대한 치성 방식이 모두 동일한 것은 아니다.

안동민속박물관의 박장영 연구실장에 의하면 황산사는 기자바위로 유명한 절이었다. 절 입구에는 아버지바위와 엄마바위가 있어 이 바위에 치성을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도로 공사를 하면서 아버지바위는 반쯤 묻히고, 엄마바위는 아예 과수원에 묻혀 버렸다는 것이다. 특히 엄마바위는 가운데가 약간 옴폭 들어갔는데, 아버지바위에서 돌을 던져 이곳에 얹혀지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와 달리 안동민속박물관에도 남근석이 하나 있다. 이 바위는 신기하게도 앉을 수 있는 형태라서 눕혀 전시하고 있다. 이 바위는 황산사 근처 사과 과수원에서 박장영 실장이 우연히 발견해서 주인의 허락을 받고 옮겼다고 한다. 박 실장의 말에 따르면 과수원에서 물구덩이를 파다가 발견해서 캐냈다는 것이다.

황산사 근처라는 제보에 따르면 아마 기자(祈子)바위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 바위는 멋들어진 남근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가운데가 패인 것으로 보아 아낙네들이 올라타고 모의 성행위를 했을 가능성도 높다.

아들을 낳기 위해서 단순히 치성만을 드린 것이 아니라, 치성과 함께 모의 성행위를 통해서 그 주술성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신석리의 선돌은 남근석 형상이 아니라 마치 머리에 족두리를 얹은 여자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진주 명석의 여근석과 유사한 모습이다. 높이는 47㎝에 불과하기에 이 마을에서는 그냥 ‘돌삐’라고 부른다. 특히 이 돌삐의 효험이 유명한지 몰라도 바닥을 시멘트로 고정시켰다. 내가 이 돌삐를 찾았을 때에도 누군가가 다녀갔는지 막걸리 2통이 양 옆에 세워져 있었다.

마침 밭에서 고구마를 캐가던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올해 72세인 김대의 할머니는 고구마를 리어카에 싣고 가는 모습이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요즘 시골에 젊은이가 없기는 하지만, 평생 일을 하셨기 때문인지 그토록 건강하신 것인지 모르겠다. 할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이 돌삐에는 안동 등에서 부부가 찾아와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새벽 6시쯤에 돼지머리와 삼실과 등을 갖고 와서 절을 한다는 것이다.

돌삐의 뒤편에는 회나무가 있는데, 중간에 마치 남근과 같은 삐져나온 옹이가 있다. 돌삐가 여자를 상징한다면 이것이 남자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회나무도 아이들이 불을 질러 탄 적이 있다고 한다. 현재 나무는 새로 심은 것인데, 약 10년 이상은 지난 것처럼 보인다.

도산면 의촌리의 경우 타지 사람들을 위한 남근석이 아니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의촌리는 경북 민속자료 7호로 지정된 99간 집인 번남댁이 있다. 이 외에도 교리댁과 진보댁 등 큰 집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제시대를 거쳐 점차 마을 세가 약해졌다. 더욱이 안동댐이 건설된 1974년부터 76년 사이에 이주가 시작돼 마을 자체가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는 약 20여 가구가 새로 들어와 살고 있다.

양반들이 이 깊은 골짜기까지 들어와 살게 된 것은 분명 지세가 명당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을 건너편에는 도산서원이 위치하는 것도 그 점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의촌리 뒤편에는 일월산의 한 자락을 끼고 내려온 ‘시스무골’이란 골짜기가 있다. 동행을 했던 이동구씨는 시스무골을 ‘신이 숨은 골’이란 뜻을 담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 골짜기에 요상스럽게도 남근석이 있다.

쉽게 찾을 것으로 생각한 남근석은 의외로 찾기가 어려웠다. 소나무가 쓰러져 그 돌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 남근석의 앞에는 옻나무가 자라고 있어 외부인의 접근을 막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게다가 이 남근석은 세워져 있지 않고 비스듬히 눕혀 있는 특징이 있다. 길이는 약 124㎝ 정도인데, 귀두부가 확연히 구분된다. 그 끝에는 약간 도톰하게 올라와 있어 흥미롭다.

이처럼 마을 뒷산에 남근석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마을 사람 이외에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 마을 부녀자들만의 치성 대상이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동구씨에 따르면 60년대까지 치성을 드리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릴 적 나무하러 오다가 우연히 여자가 옷을 벗고 남근석에 올라탄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아들을 낳아야만 했던 절박한 심정의 부녀자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행동의 결과라고 하겠다. 특히 양반들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안동이라는 점은 이런 풍속이 더욱 강하게 작용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제 안동에서도 과거와 다른 바람이 불고 있다. 아들을 못 낳는다고 소박 받았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 과연 남근석에 치성을 드린다고 아들을 낳을 수 있는가 반문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과거와 같은 믿음, 특히 굳건하고 강인한 힘의 원천으로 바위를 믿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시대가 흐르면서 과거의 문화도 과거로 묻혀가는 것은 아닐까. /  : 김종대 (문학박사·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

반응형
반응형

공유하기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