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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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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신선이 된 고운 최치원의 자취를 좇아 (2)

- 쌍계사
고운이 지팡이로 썼다는 쌍계 석문(雙溪石文)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경상남도기념물 제21호)까지 이어지는 십리벚꽃길. 봄이면 넘쳐나는 벚꽃이 굉장하지만 여름에는 그 꽃 진 자리에 무성하게 내려앉는 그늘이 장관이다. 이 길 따라 쌍계사에 이르면 고운 최치원의 자취를 또 만날 수 있는데,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가 그것이다.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1년(722년)에 삼법화상이 당나라에서 혜능스님(중국 선종의 제6조, 남종선 시조)의 정상(頂相=머리)을 모시고 와서 봉안함으로써 비롯됐다고 한다. 처음에는 난야(蘭若)라고 할 만한조그맣고 한적한 수행처였으리라 짐작되는데, 진감선사(774~850)가 들어서 절간 모습을 새로 갖추고 옥천(玉泉)이라는 현판도 올렸다. 840년으로 짐작된다. 쌍계사 이름은 헌강왕 1년(886년) 왕명을 따라 바꿨다.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1632년 벽암스님이 중창했다.
쌍계사에는 푸근한 구석도 많다. 절간을 푸근하게 해 주는 것 가운데 하나는 대웅전(보물 제500호) 바로 옆 투박한 불상이다. 쌍계사 마애불(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48호)이 정식 이름인데 원래부터 여기 있었음직한 커다란 바위 한가운데를 널찍하게 파내고 거기다 새긴 불상이다. 앉아있는 모습인데, 어째 부처님 같이 보이지가 않는다. 어쩌면 이웃 아저씨 같기도 하고 어쩌면 어린아이 같기도 하다. 또 다른 푸근한 물건은 들머리 쌍계 석문(雙溪石文)이다. 바위 둘에 제각각 쌍계와 석문이라 새겼는데, 보통 사람 눈에는 그다지 잘 쓴 글씨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편하게 보이지 싶은데 어쨌거나 최치원이 여기를 지나는 길에 지팡이로 썼다고 한다. 팔영루(八泳樓,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74호)도 그럴 듯하다. 예전에는 건물 밑으로 오르내릴 수 있었지만 지금은 막아놓고 다른 용도로 쓰기에 옆으로 돌아 오르내려야 한다. 하지만 바라보는 눈맛이 좋고 제대로 다듬지않은 듯한 굵은 기둥들은 손맛을 더해준다.
팔영루와 대웅전 사이에 고운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가 살짝 비틀어진 각도로 놓여 있다. 깨어졌다 다시 맞춘 듯 얇고 가는 철판으로 둘러놓았다. 죄다 한자로 돼 있어 내용을 알기 어렵고, 안내문도 설명이 풍성하지 못해 아쉽다. 진감선사의 한살이를 적었는데, 쌍계사 관련 내용이 많다.
대공탑비 기록을 따르면 진감선사는 "평소 범패(梵唄)를 잘해 목소리가 금옥 같았다. 구슬픈 곡조에 날리는 소리는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우아해 천상의 신불(神佛)을 환희하게 하였다. 먼 데까지 흘러 전해지니 배우려는 사람이 가득 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범패를 했던 데가 팔영루라고 한다. 바로 앞 섬진강 물고기를 보고 팔음률로 불교 음악인 어산(魚山)을 지었다고 팔영루라 한다.

팔영루에서 대웅전을 바라보고 서면 오른편에는 건물이 별로 없고 왼편에 많음을 알 수 있다.
금당 영역이다. 혜능의 머리를 모셨다는 금당(육조정상탑전,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25호)에는 육조정상탑이 있고 '육조정상탑 세계일화조종육엽(六祖頂相塔 世界一花祖宗六葉)'이라 쓴 추사 김정희 친필 현판도 있다. 이밖에 팔상전(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87호)·영주당·봉래당·청학루(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45호) 등이 있다. 여기는 동안거·하안거를 하지 않는 때에만 들어가 볼 수 있다.

- 불일폭포
고운이 학을 타고 날아갔다는 환학대도 만나고

쌍계사 경내에서 불일폭포로 가는 길 가운데 최치원이 학을 불러 타고 날아갔다는 환학대(喚鶴臺)가 있는데, 여기서 진감선사대공탑비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잘 다듬어져 있는 길에서 신선이 살았다는 청학동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최치원 이후 선비들은 푸른 학이 노닌다는 청학동을 찾아 다녔고 또 기록을 남겼다.
고려 때 이인로(1152~1220)는 "지리산 속에 청학동이 있다. 길이 매우 좁아 겨우 다닐 수 있고, 몸을 구부리고 몇 리쯤 가면 넓게 확 트인 드넓은 곳이 나온다. 오직 청학만 살고 있다"고 했다.
조선 선비 김일손(1464~1498)은 불일평전을 청학동으로 전해 듣고 찾아가 봤으나 찾을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이는 16일 동안 지리산을 탐방했다.
1564년 서산대사는 <두류산 신흥사 능파각기>에서 화개동천 동쪽 드넓고 푸르른 골짜기에 청학동이 있다고 했다. 쌍계사에서 불일전대(佛日前臺)에 오른 1600년대 선비 미수 허목(1595~1682) 또한 그 남쪽 골짜기에 청학동이 있다고 여겼다.
옛 사람들은 불일평전이나 불일폭포 둘레를 청학동이라 여겼지만 몸소 들어가 보고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청학동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번뇌와 망상이 사라진 마음자리 그자체인지도 모른다.
불일폭포는 물이 풍부하게 넘쳐 흐르지는 않지만 60m 높이에서 2단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볼 만하며, 절벽 표면이 화강암 폭포의 그것처럼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하다. 남명 조식은 지리산을 둘러보고 쓴 <유두류산록(游讀流山錄)>에 불일폭포와 청학동을 읊은 '영청학동폭포''청학동'이란 시를 남겼다.
지리산에서 고운의 마지막 행적은 지팡이 꽂고 귀 씻기였다 .
사람 발길이 잦지 않은 시골길 한편에 자리잡고 있는 운암영당은 고즈넉하다. 들머리에 길게 늘어서있는 나무를 따라 올라가면 금방 영당이 나온다. 고운 영정은 이 자리에 놓이기까지 여러 곳을 떠돌았다. 처음엔 쌍계사에 있다가 순조 25년(1825년) 같은하동의 화개 금천사(琴川祠)로 옮겨졌고, 고종 5년(1868년) 금천사가 없어지자 하동향교로 옮겨온 다음 1902년 횡천영당을 거쳐 1924년 운암영당으로 왔다. 현재는 부산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한평생을 떠돌며 곳곳에 자취를 남겨 놓은 고운의 생전 행적과 많이도 닮았다.
고운의 자취를 따라 가는 길에 걸음을 붙잡는 곳이 화개장터다. 경남과 전남을 이어주는 화개장터는 해방 전만 해도 우리나라 5대 시장 가운데 하나였다. 지리산 화전민들은 고사리·더덕·감자 등을 팔고, 전남 구례와 경남 함양 같은 내륙 사람들은 쌀보리를 팔았다. 전국을 떠돌던 보부상들도 생활용품을 지고 왔으며, 전남의 여수·광양이나 경남의 남해·삼천포(사천)·충무(통영)·거제 등에서는 뱃길로 미역·청각·고등어 따위 수산물을 싣고 왔다.
화개장터는 김동리 소설 <역마>의 무대이기도 하다. 체 장수 영감과 딸 계연 그리고 주모 옥화와 성기의 얽히고설킨 인연과 운명을 그려냈다. 거스르지 못하고 결국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 져야할 운명인지 스스로 극복하는 것이 운명인지를 묻는 작품이다. 고운 최치원과 그의삶은 운명에 순응한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극복한 것일까?

- 범왕리 푸조나무
고운이 꽂아 두었던 지팡이에서 싹이 나서 자란 나무

불일폭포에서 돌아나와 범왕리 푸조나무(경상남도기념물 제123호)로 발길을 돌린다.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 앞에 있는 이 나무에는 최치원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최치원이 지리산 신흥사로 들어갈 때 꽂아 두었던 지팡이에서 싹이 나서 자랐다는 나무가 바로 이 푸조나무다.
고운 최치원은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나도 살아 있고 나무가 죽으면 나도 죽을 것이라 했다고한다. 푸조나무는 여태 살아 세월을 견디고 있다. 고운 또한 신선이 되어 어디에 살아 있는 것일까?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에 잘 견딘다는 푸조나무는 소금기 없는 산골마을에 자리를 잡고 수호신처럼 든든하게 서 있다.

푸조나무가 내려다보는 마을 앞 냇가 건너편에 세이암(洗耳岩)이 있다. 의신마을에서 내려오는 화개천이 여기서 너럭바위를 만나 넘쳐흐른다. 이 너럭바위에 한자로 세이암이라 적혀 있다. 바로 옆은 물론이고 맞은편 세워져 있는 바위에도 이런저런 글자들이 새겨져 있지만 최치원의 것 같지는 않다.
마을에서 만난 할머니 한 분은 "(최치원이) 손가락으로이래 적었다 아이가. 그만큼 신통력이 있었던 기라" 한다. 손가락으로 썼어도 바위가 움푹 파일 만큼 도력이 셌다는 얘기다. 이쯤 되면 여기 사람들에게는 최치원이 어김없는 신선이다.
최치원은 세이암에서 속세의 더러운 말을 들은 귀를 씻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됐다. 여기는 물이 맑고 바위가 많아 게가 살기 좋은 곳이다. 그런데도 게가 없다고 한다. 최치원 때문이다. 여기서 몸을 씻고 있는 최치원의 발가락을 게가 물었다. 최치원은 게를 잡아 멀리 던지며 "다시는 여기서 사람을 물지 말라"고 했다. 그 뒤로 게가 사라졌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는 경남 함양의 상림숲(천연기념물 제154호)에도 전해진다. 상림은 고운 최치원이 태수로 있던 시절 만든 마을숲이다. 어느 날 최치원의 어머니가 상림에 나갔다가 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얘기를 들은 최치원은 곧바로 숲으로 달려가 "모든 해충은 다시는 이 숲에 들지 말라" 했고 그 때부터 뱀이나 벌레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최치원은 어째서 지금까지 신선으로 남아 있게 됐을까? 그이가 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라는데에는 다른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게다가 그이의 학문은 유교에만 머물지 않고 불교와 도교에까지 이르렀다. 더욱이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남겨 놓은 자취도 엄청나게 많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신선이 되기 어려웠을 것 같다. 높은 학문을 가졌음에도 당대에 뜻을 펴지 못한 불우함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이 있지 않을까 싶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최치원을 마음에 품음으로써 최치원과 자기 또는 자기 부류를 동일시하고자 하는 백성들의 은근한 바람도 작용했을 듯 싶다.

최치원은 어느 산의 산신일까?
최치원이 지었다는 한시가 있다.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다.
제목이 '秋夜雨中(추야우중)'이다. 토종말로 옮기면 '비 내리는 가을밤에' 쯤이 되겠다.

가을 바람에 외롭게 읊으니(秋風惟孤吟)
세상에 알아주는 이가 적구나(世路少知音)
한밤중 창밖에 비가 내리고(窓外三更雨)
등불 앞 마음은 만리를 달려가네(燈前萬里心)

자기를 제대로 알아주는 이가 없는 데서 오는 쓸쓸함이랄까 씁쓸함이 짙게 깔려 있다.
실제로 그랬던 모양이다. <삼국사기>의 다음 대목은 '추야우중'의 정서와 바로 통한다.
"치원이 서쪽으로 가서 당나라에 벼슬하다가 동쪽 고국으로 돌아오니, 모두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운수가 막혀 움직이면 문득 허물을 얻게 되었으므로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함을 슬퍼하며, 다시 벼슬할 뜻을 품지 않았다. 마음대로 유유히 생활하며, 산림 아래와 강과 바닷가에 누각과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를 심고 책 속에 파묻혀 풍월을 읊었다."
이어 그가 노닌 데가 나온다. 경주 남산, 강주 빙산(剛州氷山=경북 의성군 춘산면 빙계동), 합주(경남 합천)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창원의 옛 마산 바닷가)의 별서(別墅).
그런 다음에 "가장 나중에는 가족을 거느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살았는데, 스님 현준, 정현과 도우를 맺고 한가히 지내면서 노년을 마쳤다"고 했다.
이런 최치원이 신선이 됐다는 장소로 주로 두 곳이 꼽힌다. 지리산 쌍계사와 가야산 해인사다. 합천 해인사 학사대(學士臺) 전나무(천연기념물 제541호)는 장경판전 옆에 있다. 학사대는 최치원이 해인사 대적광전 옆에 지은 정자다. 최치원이 지팡이를 꽂았는데 여기서 싹이 터서 전나무가 됐다는 전설이 있다.
가야산 해인사 홍류동 골짜기에는 농산정(籠山亭,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72호)도 있는데 이 일대를 두고 최치원이 지은 한시가 있다. "첩첩 바위 사이 미친 듯 내달려 겹겹 쌓인 산을 울리니(狂奔疊石吼重巒)/ 지척 사람 말조차 구분하기 어려워라(人語難分咫尺間)/ 시비 소리 귀 닿을까 늘 두려워(常恐是非聲到耳)/ 흐르는 물로 산을 통째 두르고 말았다네(高敎流水盡籠山)". 고운이 여기에 갓과 신발을 벗어두고 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됐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한다.
게다가 해인사에는 최치원을 신선으로 표현한 고운 영정(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66호)도 있었다. 지금 경북 청도 각남면 일곡리 경주최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다. 원래는 해인사 나한상 가운데 섞여 있었는데 일본군에게 빼앗길까 두려워 옮겨놓았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과 관련된 얘기가 있는 장소는 이밖에도 아주 많다. 부산 해운대와 마산 월영대는 물론 경남 합천 자필암, 경남 양산 임경대·경파대, 경북 문경 야유암, 경북 봉화 치원봉·고운대 등도 있다. 출처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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