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년동안 중국의 고전가구는 시종 사회의 젗이, 문화 및 사람들의 풍속, 신앙, 생활방식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예를 들어, 중국 고대의 의자는 중국예의와 등급 명분을 상징했다.
고대에, 남자만 의자에 앉을 권리가 있고, 여자는 앉을 수 없었을까? 고대의 의자는 도대체 어떠했을까?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중국고대의자와 등급문화
일찌기 사람들은 모두 "석지이좌(席地而坐,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다)"했다. 민간에서 사용하는 가구는 존비, 장유, 남녀를 따졌다.
한(漢)나라때의 예속은 기본적으로 주(周)나라를 계승했다. 한나라때 사용한 석(席)은 장단을 구분했다. 긴 것은 3-4명이 앉을 수 있고, 짧은 것은 2명이 앉을 수 있었다. 더 짧은 것은 한명만이 앉는다. 등급으로 보면 1인용이 2인용보다 높고, 2인석이 3-4인석보다 높다.
"의자"라는 말은 당나라때부터 나타난다. 당나라때 초기의 의자가 나온다. 왜상(矮床)과 호상(胡床)을 합치고 융합해서 나타난 것이다. 의등(椅凳)의 사용도 점점 많아졌다.
송(宋)나라때는 의자가 더 보편화된다. 모양과 구조도 더욱 합리적이 되었다. 현대와 아주 비슷해 진다. 송,원시대에 일반적으로 집안의 남자주인이나 귀빈이 왔을 때 비로소 의자를 사용했다. 부녀자와 하인은 원등(圓凳, 등받이가 없는 것을 등이라 함) 혹은 마찰(馬扎)에 앉았다.
마찰
명나라때에 이르러 의자의 형식이 다양해 진다. 예를 들어, 교의(交椅), 권의(圈椅), 관모의(官帽椅), 태사의(太史椅)등등이 있다. 명청시기, 여인도 의자를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남녀유별의 제한은 있었다.
명나라때 일종의 크기가 비교적 작고, 조형이 아름다운 매괴의(玫瑰椅)가 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규방에 놓아두고 대갓집의 아가씨들이 앉았다고 한다.
매괴의
중국의 고전가구는 일종의 장중하고 전아한 문화를 체현했다. 이들 앉는 가구의 설계에서 고려한 것은 사람들이 앉았을 때의 예의이다.
교의
교의는 아주 오래된 의자이다. 원시 고대 북방소수민족은 접이식 좌구(坐具)를 썼는데, 호상(胡床)이라고 불렀고, '교상(交床)', '교의' '승상(繩床)'이라고도 불렀다. 의자의 다리가 교차형으로 접을 수 있게 되어 있어, 휴대하기 편했다. 그래서 이름을 '교의'라 한 것이다.
교의는 당나라때 나오고, 송나라때 유행했다. 교의는 등받이부분은 곧은 것도 있고, 둥근 것도 있다. 교접부위는 일반적으로 금속장식을 박았다. 명나라때 교의는 둥근 등받이가 많았다.
교의
북송시기, 의자는 아주 오랫동안 남존여비, 존비유별의 기준을 적용받았다. 교의는 송,원시기에 관료귀족이나 명망이 있는 집안에만 놓아둘 수 있었다.
교의는 청당(廳堂)에 놓아두고, 지위의 두드러짐을 나타낸다. 속어에 '제일파교의(第一把交椅)'라는 말이 있다. 이는 바로 교의의 존귀함과 숭고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만일 내방객의 지위가 자신과 비슷하면, 교의로 접대하는 것이다.
권의
권의는 속칭 나권의(羅圈椅)라고 한다. 등받이와 손잡이를 연결시켜서 둘러싸는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교의에서 개선된 것이다.
명나라때는 권의가 인기를 끈다. 권의는 등받이부분이 널찍하다. 여기에 정교한 장식을 덧붙이거나 호랑이가죽등을 쓰고, 관복까지 입게 도면 더욱 신비하고 존귀해 보인다.
권의는 신분이 비교적 고귀하고 일정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앉을 수 있었다. 권의는 명나라때 '태사의'라고 불리기도 했다.
권의
등받이와 손잡이부분을 연결시킨 부수의(扶手椅)는 등받이에서 손잡이까지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럽게 내려와 앉았을 때 사람이 팔을 손잡이에 놓으면 아주 편안하다.
조형이 원완우미(圓婉優美)하고, 모양은 풍만하고 힘이 있다. 중국에서 가장 민족적인 특색을 지닌 의자양식중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정옥(正屋)의 팔선탁(八仙卓)의 좌우양측에 놓는다.
보좌(寶座)
보좌는 당나라 황궁에서 나왔다. 그후 송, 원 두 왕조때 형태를 완성하고, 명나라때 전성기를 이룬다.
고대에 황제전용으로 만들었고, 중국봉건사회제도하의 산물이다. 최고통치자의 지고무상, 유일무이한 권력과 지위를 상징한다.
황궁의 정전에 보좌는 한가운데 놓아둔다. 황제는 보좌에 앉아, 창생을 내려다 보고, 백관의 조배를 받는다. 가구의 실용적 의미는 이미 완전히 등급이 삼엄한 궁중예의에 묻혀버렸다.
보좌는 비교적 크고, 앉은 자리 아래의 방식은 상탑(床榻)의 방식을 쓴다. 많은 경우 호퇴팽아(弧腿膨牙), 내번마제(內飜馬蹄)의 형식을 채용한다. 온중대방(穩重大方)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보좌
뒤에는 비교적 큰 병풍을 놓아두고, 양쪽에는 향궤(香几), 궁선(宮扇), 향통(香筒)같은 류의 기물을 놓아두어, 장중하고 위엄있게 보인다.
설사 배전이나 객청에 놓아두더라도 실내의 중심 혹은 중요한 위치에 놓아둔다. 이런 류의 의자는 대부분 단독으로 배치한다.
보좌는 대부분 자단으로 만들어 목재가 무겁고 조형이 장중하며, 조각이 정교하여 사용자의 위엄을 드높인다.
청나라때의 보좌는 크기가 크고, 구조가 복잡하며, 재료사용에 규칙이 있고, 정교하며, 장식이 화려했다. 보좌의 상하내외에 각종 길상을 의미하는 장식을 조각했고, 황가의 존귀함과 호화로움을 드러냈다.
태사의(太史椅)
태사의는 송나라때 나타난다. 최초의 형식은 일종의 교의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유일하게 관직으로 명명된 의자이다.
태사는 송나라때 1인지하 만인지상의 관직이다. 이를 보면 태사의의 등급은 보좌에 바로 다음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나라때, 윗부분을 둥글게 한 권의를 태사의라 불렀다. 청나라때의 태사의는 일반적으로 한쌍으로 해서 청당의 정중앙에 두어 비교적 아치있고, 장중했다.
태사의
나중에는 중국고전원림과 정원의 전형적인 청당가구가 된다. 배치에서는 쌍으로 놓아야 했다. 혹은 공탁의 양쪽에 둔다. 혹은 청당의 동,서 양쪽에 둔다.
청나라에 이르러, 태사의는 손잡이 있는 의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된다. 이 부수의의 등받이, 손잡이와 의자면이 직각을 이루는 경우를 속칭 병배식(屛背式)이라고 불렀는데, 모습이 장중하고 엄격하고, 사용하는 목재는 두텁고, 장식이 번잡했다.
이들 특징은 모두 주인의 지위와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미 편안함을 넘어서 존엄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바뀐 것이다.
관모의(官帽椅)
관모의는 의자의 모양이 송나라때 관모인 '오시모(烏翅帽)'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관모의는 고대 관리들이 사용했다. 관모의는 송나라때의 전형적인 의자이다. 명청시대에는 민간에서 비교적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청당이건 아니면 화원바깥이건 관모의는 편안하고 아름다워 사람들이 편안하게 앉을 수 있었다. 실외의 아름다운 환경과도 잘 융합되었다. 중국전통의자중에서 설계를 가장 성공한 것중 하나이다.
관모의
천년이래, "예"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은 사회행위규범을 마련했다. 거기에는 가구사용의 규범도 포함된다. 이들 규범은 어떤 것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사라지고, 어떤 것은 중화민족 특히 한민족의 습관과 풍속으로 현재까지 전해진다.
고대가구는 하나의 백과사전이고 역사의 증인이다. 고대인들의 심미적 취향과 과학기술, 생활습관과 음양지도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