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대외진출에 커다란 역할을 했던 인물 장건(張騫)과 반초(班超)는 실크로드 교역로를 연 비단길의 개척자들
글: 역사대학사 오늘날 중국의 거대한 제국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인의 꾸준한 대외팽창 노력 때문이다. 또한 일찍부터 동양과 서양은 서로 교류하여 마침내 비단길, 즉 「실크로드」(Silk Road)라는 교역로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장건과 반초야말로 중국의 대외진출과 비단길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장건(張騫)은 자는 자문(子文)이며 지금의 산시 성 성고현(城固縣) 사람으로 기원 전 2세기 중국 한나라 때 여행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 탁월한 탐험로 실크로드의 개척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한나라 때 서역으로 가는 남북의 도로를 개척하였으며, 서역의 한혈마(馬), 포도, 석류, 복숭아 등의 물품을 가져오기도 했다. 언제 출생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단지 사망년도가 기원전 114년임은 확실하다.
안으로 통일제국의 기반을 공고히 하고 밖으로 영토확장에 주력했던 한나라의 무제는 기원전 138년에 장건을 西域(서역)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서역이란 한 대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된 개념으로 玉門關(옥문관) 서쪽 지방, 즉 지금은 新疆(신강)과 중앙아시아 일부를 가리켰다.
당시 중국제국은 북방의 흉노족에 의해 항상 위협받고 있었다. 흉노족은 유목민족으로서 항상 풀을 찾아 이동했으며, 중국 북서부의 광대한 지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다른 북방 유목민족들과 마찬가지로 흉노는 중원을 향해 남쪽으로 진출하는 것 이외에는 생존을 위한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들 유목민족이 거주하는 초원지대의 이북에는 동토의 시베리아가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격적인 흉노에 항상 불안을 느끼던 한제국은 한편으로는 화친을, 다른 한편으로는 무력을 각각 사용하여 이들을 다스렸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정책도 종종 한계를 드러내 흉노가 수도 長安(장안)까지 내려오는 경우가 있었다. 마침내 무제는 흉노를 대상으로 세 차례의 정복전을 전개했다.
장건이 띤 사명은 북방 유목민족인 大月氏(대월씨)족과 연합하여 흉노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대월씨족은 인도-유럽어족으로서, 늘 흉노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을 향해 서쪽으로 이동하여 인도를 침략하고, 그곳에 쿠샤나왕조를 세웠다. 장건이 대월씨족을 접촉할 수 있었던 때는 그들이 이미 서쪽으로 움직인 후였다.
장건은 1백여명을 이끌고 서역으로 향했으나, 중도에 甘潚(감숙) 서부에서 흉노에게 구금됐다.
그는 억류후 10년만에 탈출에 성공하여 大宛(대완)에 도달했다. 대완은 구소련의 우즈벡공화국으로서, 장건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대월씨족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대월씨족에는 이미 많은 변화가 발생하여 흉노와 대립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장건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그곳에서 1년 동안 체류한 후 기원전 126년에야 귀국할 수 있다. 당초 1백여명이었던 일행은 장건 본인과 수행원 한 사람만이 생존했을 뿐이다. 한무제는 그를 博望(박망) 候(후)에 봉했다.
장건은 기원전 119년 다시 서역으로 파견됐다. 이번에도 흉노에 대한 반격을 목표로 유목민족인 烏孫(오손)과 동맹, 그들로 하여금 돈황일대를 장악케 하라는 외교사명을 띠었다. 이때 상당 양의 재물과 함께 3백여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떠난 장건은 오손국 외에도 다른 서역의 유목민족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비롯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서역 각국과 漢(한)이 서로 교류할 기회를 마련했던 셈이다.
비단길 개척의 또 다른 공로자인 반초(班超)는 서기 33년에 태어나 102년에 사망했다. 前漢(전한)의 맥을 이은 後漢(후한) 때 사람으로, 그의 형은 다름아닌 역사서 『漢書(한서)』를 저술한 班固(반고)(32-92)였다. 이들 형제는 陝西(섬서)에서 수대에 걸쳐 벼슬을 지낸 선비집안의 후예들이었다.
장건 등의 노력에 의해 활발해진 서역교류는 新(신)의 王莽(왕망: BC 45~AD 23)에 의해 일시 중단됐다. 한은 기원전 60년 서역 각국을 통괄하는 기관인 서역도호부를 설치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으나 한을 무너뜨리고 신을 세운 왕망은 북방보다는 남방을 영토확장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정책변화를 틈타, 흉노는 다시 서역일대를 장악했고 자연 서역 각국과 중국과의 교역은 뜸해졌다. 그러나 왕망정권을 무너뜨리고 한왕조를 회복시킨 중국은 다시 흉노에 대한 견제와 서역 진출을 서둘렀다. 이러한 작업에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한 사람이 반초였다.
AD 73년 반초는 36명을 이끌고 사신 자격으로 서역을 행했다. 그의 주요 사명은 서역의 한나라인 宣鮮國(선선국)(지금의 신강지방에 위치)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그가 선선국에 도달했을 때, 흉노의 사신도 그곳에서 이미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결국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不入虎穴不得虎子(불입호혈부득호자)."는 판단 아래, 그는 흉노 사신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옮겼다.
그의 과감한 행동 덕에 선선국과 한은 연맹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계속해서 서역의 50여개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그의 공로로 흉노는 세력이 약화됐고, 그는 定遠候(정원후)에 봉해졌다.
그는 서기 75년경 흉노가 서역도호부를 격파하고 다른 유목국가와 연합하여 한을 압박하는 사태가 일어났을 때도, 다시 90년 대월씨족이 發兵(발병)하여 한을 위협했을 때도 서역도호부를 재건하고 스스로 지휘관인 도호가 되어 서역을 평정했다. 그는 97년에는 동로마제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비롯 숫자는 적지만 중국인들에게 페르시아만 일대를 여행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해 주었다. 반초는 모두 31년간을 서역에 머무르다 70세의 고령으로 수도 洛陽(낙양)에 귀환했고,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반초는 중국의 서역통제에 기여했을 뿐아니라, 그의 노력으로 비단길이 본격적으로 활성됐다. 비단길은 동서교류의 혈로이며, 이 길을 통해 중국인들은 서역은 물론 중동이나 유럽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비단 칠기 동전 등 중국의 문물과 중국 자첵에 대한 지식이 서양인에게 전달되고, 석류 포도 후추와 같은 서역의 산물과 서역문화가 중국인에게 파고들 수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장건과 반초는 단지 중국사뿐 아니라 인류사 전체의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