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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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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이 손자 3명을 후계자로 양성하려던 계획은 어떻게 실패하였는가?

글: 우인연화(愚人煙火)
장경국(蔣經國)의 부인 장방량(蔣方良)은 모두 4명의 자식을 낳았다. 각각 장효문(蔣孝文, 장남), 장효장(蔣孝章, 장녀), 장효무(蔣孝武, 차남), 장효용(蔣孝勇, 막내아들)로 3남1녀이다. 이 세 아들에 대하여 장경국은 일기에서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효문은 멍청하고, 효무는 황당하며, 효용은 귀엽다."
장개석은 대만으로 패퇴한 후, 한때 3명의 손자를 후계자로 양성하고자 했다. 그들을 전후로 까오슝(高雄)의 봉산군관학교(鳳山軍官學校)로 보내어 공부하게 했는데, 아쉽게도, 장남, 차남은 전형적인 버릇없는 도련님타입이었다. 군사학교의 엄격한 기율을 견디지 못하고, 몇달도 되지 않아 둘은 학교에서 도망치고 만다. 겨우 가장 어린 장효용은 진중하고 공부를 좋아했는데, 사고로 부상을 입어, 조모인 송미령의 말에 따라 결국 군사학교생애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장씨집안의 제3대에도 직업군인을 배출하고 싶었던 장개석의 꿈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장효문은 원래 "효(孝)"자배에서 가장 총애를 받은 인물이다. 장손이어서 장개석이 어려서부터 장효문을 아주 총애한다. 장효문의 혈액에는 러시아유전자가 있어서, 성격이 조숙하고 열정적이다. 거기에 중국아이의 총명함과 장난끼도 있다.
중학교때, 그의 학업성적은 이미 바닥으로 떨어진다. 모조리 낙제수준이었다. 그러나 생활은 더욱 다양해진다. 함밤중에 자주 사복시위에게 명령을 내려 차고의 지프차를 문밖의 큰 길로 내놓게 한다. 부친에게 제지당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몰래 나가서 엔진의 시동을 걸고 밖을 돌아다니면서 미친듯이 놀았다. 장경국은 장효문을 심하게 때렸다. 어떤 때는 거꾸로 매달고 채찍으로 치기도 했다. 놀란 장방량이 울면서 아이를 용서해달라고 빌어야 했다.
장경국은 장효문이 큰 그릇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일찌감치 그에 대한 희망을 접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이 장손을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장효문에게 여전히 기대를 크게 걸고 있었다. 1954년 장효문은 '봉산육군군관학교'에 합격한다.
비록 장개석부자가 신경을 많이 써서 계속 교장에게 부탁하여, 장효문을 잘 관리감독해달라고 했지만, 장효문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 그리하여 학교내에서 유일무이한 특권분자가 된다. 그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것이 다반사였다. 매일 밤이면 불을 끄고 담장을 넘어가서 비슷한 친구들과 어울려 까우슝 시내에서 밤을 새워 술마시고 춤추며 남녀가 한 방에서 같이 놀아났다.
그럼에도 장효문은 군사학교를 마치지 못한다. 그는 스스로 퇴학하고 타이페이로 돌아간다. 장경국은 그를 위해 새로운 길을 찾아줄 수밖에 없었다. 기실 4명의 아이들 중에서 장경국은 장효문을 가장 아꼈다. 아마도 장효문이 1835년 소련에서 태어났고, 장경국, 장방량과 함께 가장 힘들었던 시절을 보냈기 대문일 것이다. 그 당시 장효문은 두 부부가 힘든 와중에 가장 크게 위로를 받는 대상이었다. 게다가 장효문은 어른이 된 후에 키도 크고 기우가 헌앙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장효문이 푸른 눈동자를 지녀 미국의 영화배우 폴 뉴먼을 닮았다고들 했다. 그는 매력적인 외모를 지녔다. 키가 크지 않았던(163) 장경국으로서는 장효문처럼 키큰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결국 장경국은 온갖 방법을 강구해서 아들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분교에 보내어 경영학을 공부하게 한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해서도 장효문의 버릇없는 도련님 근성은 여전했다. 그때 장경국은 매일 공무로 바빴다. 매일 열몇시간씩 일을 했지만, 그래도 하루가 멀다하고 미국에서 장거리전화를 받는다. 아들이 사고를 쳤다는 전화이다. 장효문이 큰 사고를 칠까 우려하여, 장경국은 특별히 미국 CIA에 부탁해서 장효문의 매일상황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미국정보기관을 이용하여 자신의 아들을 감시한 것이다.
결국 장효문은 주색에 빠져서 매일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퇴폐적인 생활을 해서 몸을 망친다. 결국은 큰 병이 들었고, 장개석은 장손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게 된다.
장개석이 나이들었을 때, 주관적으로 장씨집안의 제3대 바통을 이어받을 인물로 둘째손자인 장효무를 생각했다. 현재 기밀해제된 원시자료를 보면, 장개석은 한때 장효무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는 장효무를 적극적으로 배양하고자 했고, 그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중임을 맡기고자 했다.
장효무는 항전승리전에 중경에서 태어났다. 사천, 항주, 남경, 봉화계구에서 모두 장개석과 장효무는 함께 한 기록이 있다. 1966년 5월, 장효무는 약관의 나이로 대만을 떠나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 장개석은 여러번 장효무에게 서신을 보내었는데, 그를 아끼는 마음이 서신에 넘쳐난다.
유학에서 돌아온 후, 장효무는 원래 조부에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문제는 성격이 진중하지 못하여, 큰 일을 처리하면서 항상 망치곤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장경국은 머리아파한다. "장효무는 네 아이중에서 가장 총명하고 영리하다. 다만 그는 어려서 폐병을 앓아서, 자주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마도 이 병때문인지 그의 성격은 극단이다. 애증이 너무나 분명하다. 그리고 상당히 음침하다."
나중에, 장효무는 과연 자신의 성격과 맞는 분야를 찾는다. 그것으 장경국이 일찌기 후계자의 길을 걸을 때 갔던 정보조직의 길이다. 정보계는 사람을 유혹하는 각종 신비한 요소가 있다: 권력, 금전, 여인. 특히 권력은 국민당이 대만으로 패퇴한 후, 장부부서가 거의 대부분의 유형무형의 자원을 장악하게 된다. 그도 정보계에서 큰 일을 하려고 생각한다. 이 때가 장경국과 장효무 부자간에 가장 마음이 맞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당시 장경국이 정보기관을 시찰할 때면 거의 모두 장효무를 대동한다. "효무선생"은 마치 장경국의 그림자 혹은 그의 대변인 같았다.
다만 장경국으로 하여금 장효무에 대하여 진정으로 실망하게 만든 일은 장효무가 왕장시(汪長詩)와의 혼인문제를 처리할 때였다. 장효무는 부친의 권고를 듣지 않고, 처와 이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이에 대하여 장경국은 큰 불만을 가진다. 결국 송산공항의 총기난동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장경국은 장효무에 대하여 진정으로 실망한다.
한번은 장효무가 왕장시와 크게 다투었다. 왕장시는 화가 난 나머지, 트렁크를 챙겨서 송산공항으로 간다. 장효무는 말리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녀에게 가라고 소리친다. 아예 아이까지 데려가라고. 왕장시가 차를 몰고 송산공항에 도착했을 대, 동생 장효용이 그 소식을 듣고, 급히 장경국에게 보고한다. 장경국은 그 말을 듣자, 급히 국가안전국의 국장 왕영주(王永澍)에게 공항으로 달려가서 왕장시가 비행기를 타지 못하게 하고, 만일 왕장시가 이미 비행기를 탔으면 방법을 강구해서 비행기가 이륙하지 못하게 하라고 한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왕장시가 비행기에 오를 때, 왕영주도 급히 송산공항에 도착한다. 급히 공항관리직원들에게 통지하여, 특정 비행기편은 이륙하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한다. 그리하여 송산공항은 마치 대적을 맞이하는 것같은 상태가 되고, 여행객들은 무슨 비행기납치사건이라도 벌어진 줄 알았다. 장효무도 이때 공항에 도착한다. 왕영주가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장효무는 이미 권총을 손에 쥐고, 왕영주의 배를 겨눈다. 그리고 히스테리에 빠진 말투로 소리친다: "즉시 비행기를 이륙시켜라. 그러힞 않으면 너를 쏴죽여버리겠다!"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는데, 당당한 총통의 아들인 장효무가, 권총을 꺼내서 국가안전국 국장의 배를 겨누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상황인가?
장효무의 권총이 배를 겨누고 있자, 왕영주는 장효무가 정신이 나가 사고를 일으킬까 우려하여, 할 수 없이 왕장시가 탄 비행기의 이륙을 허가한다. 공항난동사건으로 장효무는 장경국의 마음 속에서의 지위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후 장효무가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소문은 완전히 사라진다. 장경국의 생각은 집안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아이가, 무슨 자격으로 후계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장효용은 장경국의 셋째아들이자 막내아들이다. 어려서 대만에서 지낸다. 장개석부부 특히 송미령은 이 막내손자를 특히 좋아했다. 무슨 골치아픈 일이 있더라도, 이 손자가 앞에 나타나서 "할아버지 할머니 안녕하세요!"만 외치면, 그들은 즉시 얼굴에 화색을 띄웠다. 이를 보면 그가 장개석과 송미령의 마음 속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둘째형인 장효무는 장효용보다 2살이 많다. 이들 형제는 어려서부터 원수지간 같았다. 만나기만 하면 싸웠다. 장효용은 나이도 어리고, 키도 작아서, 당연히 장효무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 싸워서 지면 오직 한 가지 방법 뿐이다. 우는 것이다. 장경궁은 자주 그에게 울지 말라고 하지만, 그래도 우는 것을 보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때리곤 했다. 이렇게 울면울수록 더 많이 맞았고, 맞으면 맞을수록 더 크게 울었다. 어른이 된 장효용은 거리낌없이 말한다. 자신이 부친에게 가장 많이 맞았다고.
비록 어렸을 때는 장난끼가 많아 자주 맞았지만, 자란 후의 장효용은 제3대중 가장 철이든 아이가 된다. 그는 장경국부부에게 가장 걱정을 덜 끼친 아이이기도 하다. 장개석은 그에게 크게 희망을 건다. 자주 그를 불러서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쳤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장개석과 장경국은 오래 상의한 후에, 그를 봉산육군군관학교에 보낸다. 봉산군관학교는 장씨집안의 희망이었다. 장남 장효문과 차남 장효무가 모두 자유롭고 산만한 버릇없는 도련님타입이어서, 군사학교의 엄격한 기율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몇달도 되지 않아 도망나왔다.
이는 장개석부부를 크게 실망시킨다. 그들이 보기에, 장씨집안의 제3대가 자신이 죽은 후에 계속하여 의발을 이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군대내의 영향력이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막내손자 장효용에게 모든 기대를 걸었다. 그가 자신처럼 먼저 국민당의 군대내에서 일을 하기를 바랐다.
과연 장효용은 그의 형들과 달리, 차를 몰아 교통사고를 내지도 않았고, 학교규칙을 수시로 어기지도 않았으며, 각종 시험에서도 여러번 앞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한번의 사고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한번은 군사훈련도중, 부주의로 발목을 삔다. 병원으로 갔는데 오래 지나도록 고쳐지질 않았다. 몇달이 지나서야 약간 호전되었으나, 이미 동기들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조모인 송미령은 바로 결정을 내린다. "내가 보기에, 차라리 효용을 군사학교에서 불로오는 것이 좋겠다. 그의 부상입은 다리를 겨우 낫게 했는데, 만일 계속 훈련을 받다가 다시 부상을 입으면 어떡한단 말인가?"
이는 장씨집안에서 제3대에 직업군인을 배출하려던 장개석에 있어서 적지 않은 타격이었다. 그리고 장효용 본인도 이번 좌절로 인생계획이 뒤바뀌게 된다. 그는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업의 길을 선택한다.
결국, 3명의 손자의 서로 다른 인생의 길은 결국 장개석이 제3대에서 자신의 후계자를 기르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도록 만든다.


蔣介石培養三個孫子接班人的計劃是如何失敗的?


文章:愚人煙火
蔣經國的夫人蔣方良共生下了4個孩子。 他們分別是蔣孝文(長子)、蔣孝章(長女)、蔣孝武(次子)、蔣孝勇(小兒子),共3男1女。 對於這三個兒子,張經國在日記中這樣評價:"孝文笨,孝武荒唐,孝勇可愛。"
蔣介石敗退到臺灣後,一度想把3個孫子培養成接班人。 他們前後被送到高雄的鳳山軍官學校學習,可惜長子、次子是典型的少爺類型。 經不起軍校的嚴紀,不到幾個月兩人就逃學了 好不容易最小的張曉勇穩重,喜歡學習,卻因事故受傷,按照祖母宋美玲的話,最終只能結束軍校生涯。 因此,在張氏家族的第三代也想培養職業軍人的張介石的夢想最終以失敗告終。
張孝文本來就是"孝"字輩中最受寵愛的人物。 因爲是長孫,蔣介石從小就很寵愛張曉文。 張曉文血液中有俄羅斯基因,性格早熟熱情 那裏還有中國孩子的聰明和調皮勁。
中學時,他的學習成績已經跌入谷底。 全部不及格。 但是生活變得更加多樣化。 深夜經常向便衣示威下達命令,讓車庫的吉普車駛出門外的大道。 爲了不被父親制止。 然後偷偷出去發動引擎,在外面轉悠,玩得像瘋了一樣。 張慶國狠狠地打了張曉文。 有時還倒掛,用鞭子抽打。 受驚的張芳亮哭着求饒孩子。
張慶國得知張曉文不能成爲大器皿後,早早地就放棄了對他的希望。 但是蔣介石還是沒有放棄這個長孫。 對張孝文仍然寄予厚望。 1954年張孝文被"鳳山陸軍軍官學校"錄取。
雖然蔣介石父子費了不少心思, 繼續拜託校長, 讓張曉文好好管教, 張曉文卻隨心所欲。 因此成爲學校內獨一無二的特權分子。 他不聽誰的話,抽菸喝酒是家常便飯。 每天晚上都關燈越過圍牆,和相似的朋友們一起在高雄市內通宵達旦地喝酒跳舞,男女在一個房間裏一起玩耍。
儘管如此,張孝文還是沒能完成軍事學校學業。 他自動退學回臺北。 張慶國只能爲他尋找新的途徑。 紀實4個孩子中,張慶國最疼愛張孝文。 也許張孝文1835年出生於蘇聯,與張慶國、張方亮一起度過了最艱難的時期。 當時張孝文是兩對夫婦在困難中得到最大安慰的對象。 再加上張孝文長大後個子高,杞人憂天。 當時很多人說張孝文的眼睛是藍色的,長得像美國電影演員保羅·紐曼。 他有着迷人的外貌。 對於個子不高(163歲)的張景國來說,像張孝文這樣個子高的兒子非常自豪。 最終張慶國想盡辦法把兒子送到美國加利福尼亞大學伯克利分校學習經營學。
但是,到達美國後,張孝文依然沒有禮貌的少爺的韌性。 那時張慶國每天忙於公務。 雖然每天工作十幾個小時,但她還是每天在美國接長途電話。 這是兒子闖禍的電話。 擔心張孝文出大事, 張慶國特別委託美國中情局告知張孝文的每日情況。 他利用美國情報機關監視自己的兒子。
結果張孝文沉溺於酒色,每天熬夜喝酒,過着頹廢的生活,毀了身體。 結果得了大病,蔣介石完全放棄了對長孫的期待。
蔣介石上了年紀時,主觀上想到了張氏家族的第三代接力棒人物張孝武。 從目前解密的原始資料來看,蔣介石一度對蔣孝武寄予厚望。 他想積極培養張孝武,想讓他肩負起治理國家的重任。
張曉武在抗戰勝利前出生在重慶。 在泗川、杭州、南京、奉化溪口都有張介石和張孝武一起的記錄。 1966年5月,張孝武以條款之年離開臺灣前往美國留學。 蔣介石多次給張孝武寫信,信中充滿了對他的疼愛之情。
留學歸來後,張曉武本想活得無愧於祖父。 但他的最大問題是性格不穩,處理大事總是搞砸。 於是張慶國頭裏亞派。 "張孝武是四個孩子中最聰明、最聰明的。 只是他小時候得了肺病,經常躺在牀上 也許是因爲這個病,他的性格是極端的。 愛憎分明 而且相當陰沉。"
以後,張孝武果然會尋找與自己性格相符的領域。 這就是張慶國早年走接班人之路時走過的情報組織之路。 情報界有誘惑人的各種神祕因素:權力、金錢、女人。 特別是國民黨敗退到臺灣後,掌權部門幾乎掌握了大部分有形無形的資源。 他也想在情報界做大事。 這也是張慶國和張孝武父子之間最合拍的時期。
當時張慶國視察情報機關時,幾乎都帶着張孝武。 "孝武先生"就像張經國的影子或他的發言人。
只是讓張慶國真正對張孝武失望的是張孝武處理與汪長詩的婚姻問題。 張曉武不聽父親的勸告,執意要和妻子離婚 張經國對此非常不滿。 最終,松山機場發生了槍擊事件。 因此張經國對張曉武真正感到失望。
有一次張曉武和王江西大吵了一架。 王江西生氣了,帶着後備箱去松山機場。 張曉武不但沒勸阻,反而叫她走開。 乾脆把孩子也帶走吧。 王江西開車到達松山機場時,弟弟張曉勇聽到這個消息,急忙向張經國報告。 張慶國一聽這話就急忙向國家安全局的局長王永宙跑去機場,不讓王江西坐飛機,假如王江西已經坐飛機,就想辦法不讓飛機起飛。
怒火中燒的王江西登上飛機時,王英珠也匆匆趕到松山機場。 緊急通知機場管理人員,指示特定航班不得起飛 於是松山機場就像迎接大敵一樣,旅客們以爲發生了什麼劫機事件。 張孝武也將在此時抵達機場。 王英珠還沒來得及還手,張曉武已經拿起手槍,瞄準王英珠的肚子。 然後用陷入歇斯底里的語氣大喊:"馬上讓飛機起飛。 不然就打死你!"
大家都看着, 堂堂總統之子張孝武, 掏出手槍對準國家安全局局長的肚子, 這算什麼情況?
張曉武的手槍對準了船, 王英珠擔心張曉武精神失常, 不得不允許王江市乘坐的飛機起飛。 機場動亂事件使張孝武在張慶國心目中的地位跌入谷底。 此後,張孝武將成爲接班人的傳聞徹底消失。 張慶國的想法是,連家都管不好孩子,還能以什麼資格成爲接班人呢?
張曉勇是張景國的第三個兒子,也是最小的兒子。 幼年在臺灣生活。 蔣介石夫婦特別是宋美玲特別喜歡這個小孫子。 不管有什麼麻煩, 只要這個孫子出現在前面喊"爺爺奶奶你好", 他們就立刻面帶笑容。 由此可以看出,他在蔣介石和宋美齡的心中佔據着什麼樣的地位。
二哥張孝武比張孝勇大2歲。 他們兄弟從小就如同仇人。 一見面就吵架。 張曉勇年紀小,個子矮,當然不是張曉武的對手 打輸了只有一個辦法。 在哭。 張慶宮經常叫他不要哭,但看到他哭的樣子,他總是氣得直冒煙打他。 這樣哭得越多,捱得越多,捱得越多,哭得越厲害。 長大成人張曉勇直言不諱。 他說自己被父親打得最多。
雖然小時候愛淘氣,經常捱打,但長大後的張曉勇卻成了第三大衆最懂事的孩子。 他也是張慶國夫婦最不擔心的孩子。 蔣介石對他寄予厚望。 經常叫他帶他去教書。
高中畢業後,蔣介石和蔣經國商量很久後,把他送到鳳山陸軍軍官學校。 鳳山軍官學校是張氏家族的希望。 長子張孝文和次子張孝武都是自由散漫的少爺類型,經不起軍校的嚴格紀律。 所以沒過幾個月就逃走了。
這讓蔣介石夫婦大爲失望。 因爲在他們看來,張氏家族的第三代人能否在自己死後繼續留住衣鉢,在軍隊內部的影響力是關鍵。 所以現在把所有的期待都寄託在了小孫子張曉勇身上。 他希望像自己一樣先在國民黨的軍隊內工作。
果然張曉勇和他的哥哥們不同,沒有開車出交通事故,也沒有隨時違反學校規則,在各種考試中也多次佔據前排位置。 但是,一次思考會改變一切。 有一次在軍事訓練途中,不小心扭傷了腳踝。
去了醫院,過了很久也沒治好。 過了幾個月才稍有好轉,但已經跟不上同學們了 事情發展到這個地步,祖母宋美玲馬上下決定。 "在我看來,還不如把曉勇從軍事學校引火過來。 他受傷的腿剛好,萬一繼續受訓又受傷怎麼辦?"
這對於張家第3代培養職業軍人的蔣介石來說是一個不小的打擊。 而且張曉勇本人也因此次挫折而改變了人生計劃。 他選擇遠離政治的事業之路。
最終,三個孫子不同的人生道路最終讓蔣介石在第三代培養自己接班人的計劃化爲泡影。

宋美龄一辈子无儿女,蒋介石晚年私人日记透露原因,实在太心疼

“平时不觉夫妻乐,相别方知爱情长”。——蒋介石写给宋美龄的情诗

众所周知,宋家三姐妹已成为一个时代的传奇,不仅得益于她们每个人各自的才华,更因为她们各个都嫁入了“豪门”,家族实力雄厚,在政坛、商界均有涉足。

其中宋美龄和蒋介石的故事流传最为广泛,虽然他们最初选择结为夫妻的理由,主要是政治原因,但是婚后的生活却非常的幸福。

无论在政局中多么心狠手辣、刚强冷漠,但蒋介石始终把所有温柔的一面都给了宋美龄。

在她面前,总是不自觉卸下左右的“面具”,那口中的“三妹”,饱含着一个男人对一个女人最温柔的宠溺。

从他们结婚后,蒋走到哪里都会带上他的“三妹”。在抗日战争时期,宋美龄作为国民党政府和美国政府的桥梁和纽带,曾多次奉夫君之名前往美国访问。

在美国国会发表了精彩的演讲,一口流利的英文和大方得体的仪态,引得台下掌声不断。一时间,大量的美国援助物资纷纷抵达中国。

这与她早年间在美国留学的经历不可分割,天资聪慧伶俐的她,在很小的时候,就熟练掌握了多个国家的语言,擅长交谈发言的她还有着很强的交际能力。

在留学期间,她就建立了很多强大的人脉关系网,在美国混得如鱼得水。之后,她并没有选择继续留在他乡,而是选择回到了祖国。

可是从小接受着西洋文化的她,倒是对自己国家的文化有了些生疏。于是她的父亲找了私人家教,一段时间的积淀后,成为了一个兼具中西方文化底蕴的奇女子。

那时候,各行各业的佼佼者,无不拜倒在这位奇女子的石榴裙下,受到了许多人的追捧,蒋介石就是其中之一。

在大姐宋霭龄的一番张罗下,于宋家家宴上,蒋介石终于见到了倾心已久的宋美龄。

他并不是一个专一且深情的男人,甚至他的花花肠子,也给他带来了很多不好的影响。

可是,自从开始追求宋家三妹,他便变得专一起来。经过长期的坚持不懈与努力,终于抱得美人归。

他们于1922年相识,直到5年后才正式走到了婚姻的殿堂,他们的结合当时引起了舆论的轩然大波。

但是无论是政治联姻,还是有目的地攀附于宋家的势力,不得不承认他们拥有了一段美好的婚姻。从民国时期走到了新中国的崛起,跨越时代的婚姻显得历久弥坚。

风雨同舟、磕磕绊绊,他们始终并肩一起。

众所周知,蒋家有两个儿子经国、纬国,但并不是宋生下的,是蒋与前妻之子。但是善于处理各种人际关系的宋,还是与两个儿子相处得非常融洽,待如己出。

宋一直很喜欢孩子,但遗憾的是,她自己和丈夫结婚48年,却一生没有自己的孩子。

但通过史书记载以及蒋自己发布的声明来看,他们没有子嗣是源于一次很大的惊吓,而且那时,宋已经怀有身孕。究竟是怎么回事呢?

原来,宋嫁给蒋之后有过一次身孕,但是在怀孕期间,他们经常过着心惊胆战、随时应对刺客暗杀行动的心理准备。

这种日子很是煎熬,有多时候都不能睡个安稳觉,因为说不定就会有刺客,趁他们熟睡之际悄悄潜伏到寝室。

虽然已经动员了强大的安保系统,但往往还是防不胜防。

有一天,半夜睡眼惺忪之际,突然她感觉屋里有响动,随后就看到后窗有人影掠过,她急忙唤醒丈夫,叫来保镖才没有出什么差错。

其实当年的蒋虽说位高权重,但是想暗杀他的人比比皆是,据说有人收买了他宅子里的侍卫,就很顺利地了解到了蒋宋二人的卧室。

过了几天,又是在一个午夜时分,他们刚刚就寝就发现有个刺客带着枪进来,宋非常害怕,不过所幸保镖们来得及时,将刺客制伏,帮助他们顺利躲过了一劫。

接二连三地受到惊吓,她的身体很是虚弱,经常做噩梦被吓醒,尽管吃了很多药物、请了很多大夫还是无济于事。

最后,还是没能保住肚子里的孩子。

以前的生活一直顺风顺水,她也一直是骄傲的大小姐,在他们的世界里,好像没有她办不到的事情,但是前后生活的心理落差之大,再加上失去孩子的焦心和痛心,令她久久卧病不起。

心情抑郁之下她患上了更大的疾病,失去了生育孩子的能力。这也是蒋对宋非常愧疚的地方,他觉得是他害宋吃了这么多苦,过着这种受惊吓的不太平日子。

之后,他对宋更加细心体贴地照顾,可谓是百依百顺,二人因为这次危机也变得更加紧密。

蒋介石去世30年后,真相才得以大白。

他曾在自己的日记里也写到:“婚后不久,三妹就怀孕了,众人都很欣喜。但由于刺客行刺不成致其小产,此后再无法生育”。

晚年回忆起来蒋还是非常痛心,因为最初两人结婚的时候总是聚少离多,他每天都在处理着繁重的工作,没有把家庭放在第一位,二人一直也没有要孩子的打算。

等到后来有时间和精力要孩子时,偏偏天不顺遂,发生了很多意外事件,令人可惜和遗憾。

抗日战争结束后,蒋的野心无限扩大,已到了利欲熏心的地步。他过河拆桥,转而发动了全面内战,给深处火深火热的旧中国致命的一击。

结果不到三年时间,就被我党领导的人民军队击败,落荒而逃。随后没过几年,他就病故台湾。

在这之后,宋或许是带着逃离的心态,不愿意触景生情,漂洋过海去了美国生活,一个孀居老人就这么远走他乡,一去就再没有回来。

最后她在美国去世,被安葬到了一个寂静整洁的名人墓地里,虽然他们的一生没有属于自己的子嗣,但是跨越时间的长度去看,他们的婚姻生活还是很幸福的,毕竟,风雨中的不离不弃就是最好的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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