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우인연화(愚人煙火) 장경국(蔣經國)의 부인 장방량(蔣方良)은 모두 4명의 자식을 낳았다. 각각 장효문(蔣孝文, 장남), 장효장(蔣孝章, 장녀), 장효무(蔣孝武, 차남), 장효용(蔣孝勇, 막내아들)로 3남1녀이다. 이 세 아들에 대하여 장경국은 일기에서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효문은 멍청하고, 효무는 황당하며, 효용은 귀엽다." 장개석은 대만으로 패퇴한 후, 한때 3명의 손자를 후계자로 양성하고자 했다. 그들을 전후로 까오슝(高雄)의 봉산군관학교(鳳山軍官學校)로 보내어 공부하게 했는데, 아쉽게도, 장남, 차남은 전형적인 버릇없는 도련님타입이었다. 군사학교의 엄격한 기율을 견디지 못하고, 몇달도 되지 않아 둘은 학교에서 도망치고 만다. 겨우 가장 어린 장효용은 진중하고 공부를 좋아했는데, 사고로 부상을 입어, 조모인 송미령의 말에 따라 결국 군사학교생애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장씨집안의 제3대에도 직업군인을 배출하고 싶었던 장개석의 꿈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장효문은 원래 "효(孝)"자배에서 가장 총애를 받은 인물이다. 장손이어서 장개석이 어려서부터 장효문을 아주 총애한다. 장효문의 혈액에는 러시아유전자가 있어서, 성격이 조숙하고 열정적이다. 거기에 중국아이의 총명함과 장난끼도 있다. 중학교때, 그의 학업성적은 이미 바닥으로 떨어진다. 모조리 낙제수준이었다. 그러나 생활은 더욱 다양해진다. 함밤중에 자주 사복시위에게 명령을 내려 차고의 지프차를 문밖의 큰 길로 내놓게 한다. 부친에게 제지당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몰래 나가서 엔진의 시동을 걸고 밖을 돌아다니면서 미친듯이 놀았다. 장경국은 장효문을 심하게 때렸다. 어떤 때는 거꾸로 매달고 채찍으로 치기도 했다. 놀란 장방량이 울면서 아이를 용서해달라고 빌어야 했다. 장경국은 장효문이 큰 그릇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일찌감치 그에 대한 희망을 접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이 장손을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장효문에게 여전히 기대를 크게 걸고 있었다. 1954년 장효문은 '봉산육군군관학교'에 합격한다. 비록 장개석부자가 신경을 많이 써서 계속 교장에게 부탁하여, 장효문을 잘 관리감독해달라고 했지만, 장효문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 그리하여 학교내에서 유일무이한 특권분자가 된다. 그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것이 다반사였다. 매일 밤이면 불을 끄고 담장을 넘어가서 비슷한 친구들과 어울려 까우슝 시내에서 밤을 새워 술마시고 춤추며 남녀가 한 방에서 같이 놀아났다. 그럼에도 장효문은 군사학교를 마치지 못한다. 그는 스스로 퇴학하고 타이페이로 돌아간다. 장경국은 그를 위해 새로운 길을 찾아줄 수밖에 없었다. 기실 4명의 아이들 중에서 장경국은 장효문을 가장 아꼈다. 아마도 장효문이 1835년 소련에서 태어났고, 장경국, 장방량과 함께 가장 힘들었던 시절을 보냈기 대문일 것이다. 그 당시 장효문은 두 부부가 힘든 와중에 가장 크게 위로를 받는 대상이었다. 게다가 장효문은 어른이 된 후에 키도 크고 기우가 헌앙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장효문이 푸른 눈동자를 지녀 미국의 영화배우 폴 뉴먼을 닮았다고들 했다. 그는 매력적인 외모를 지녔다. 키가 크지 않았던(163) 장경국으로서는 장효문처럼 키큰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결국 장경국은 온갖 방법을 강구해서 아들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분교에 보내어 경영학을 공부하게 한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해서도 장효문의 버릇없는 도련님 근성은 여전했다. 그때 장경국은 매일 공무로 바빴다. 매일 열몇시간씩 일을 했지만, 그래도 하루가 멀다하고 미국에서 장거리전화를 받는다. 아들이 사고를 쳤다는 전화이다. 장효문이 큰 사고를 칠까 우려하여, 장경국은 특별히 미국 CIA에 부탁해서 장효문의 매일상황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미국정보기관을 이용하여 자신의 아들을 감시한 것이다. 결국 장효문은 주색에 빠져서 매일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퇴폐적인 생활을 해서 몸을 망친다. 결국은 큰 병이 들었고, 장개석은 장손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게 된다. 장개석이 나이들었을 때, 주관적으로 장씨집안의 제3대 바통을 이어받을 인물로 둘째손자인 장효무를 생각했다. 현재 기밀해제된 원시자료를 보면, 장개석은 한때 장효무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는 장효무를 적극적으로 배양하고자 했고, 그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중임을 맡기고자 했다. 장효무는 항전승리전에 중경에서 태어났다. 사천, 항주, 남경, 봉화계구에서 모두 장개석과 장효무는 함께 한 기록이 있다. 1966년 5월, 장효무는 약관의 나이로 대만을 떠나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 장개석은 여러번 장효무에게 서신을 보내었는데, 그를 아끼는 마음이 서신에 넘쳐난다. 유학에서 돌아온 후, 장효무는 원래 조부에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문제는 성격이 진중하지 못하여, 큰 일을 처리하면서 항상 망치곤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장경국은 머리아파한다. "장효무는 네 아이중에서 가장 총명하고 영리하다. 다만 그는 어려서 폐병을 앓아서, 자주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마도 이 병때문인지 그의 성격은 극단이다. 애증이 너무나 분명하다. 그리고 상당히 음침하다." 나중에, 장효무는 과연 자신의 성격과 맞는 분야를 찾는다. 그것으 장경국이 일찌기 후계자의 길을 걸을 때 갔던 정보조직의 길이다. 정보계는 사람을 유혹하는 각종 신비한 요소가 있다: 권력, 금전, 여인. 특히 권력은 국민당이 대만으로 패퇴한 후, 장부부서가 거의 대부분의 유형무형의 자원을 장악하게 된다. 그도 정보계에서 큰 일을 하려고 생각한다. 이 때가 장경국과 장효무 부자간에 가장 마음이 맞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당시 장경국이 정보기관을 시찰할 때면 거의 모두 장효무를 대동한다. "효무선생"은 마치 장경국의 그림자 혹은 그의 대변인 같았다. 다만 장경국으로 하여금 장효무에 대하여 진정으로 실망하게 만든 일은 장효무가 왕장시(汪長詩)와의 혼인문제를 처리할 때였다. 장효무는 부친의 권고를 듣지 않고, 처와 이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이에 대하여 장경국은 큰 불만을 가진다. 결국 송산공항의 총기난동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장경국은 장효무에 대하여 진정으로 실망한다. 한번은 장효무가 왕장시와 크게 다투었다. 왕장시는 화가 난 나머지, 트렁크를 챙겨서 송산공항으로 간다. 장효무는 말리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녀에게 가라고 소리친다. 아예 아이까지 데려가라고. 왕장시가 차를 몰고 송산공항에 도착했을 대, 동생 장효용이 그 소식을 듣고, 급히 장경국에게 보고한다. 장경국은 그 말을 듣자, 급히 국가안전국의 국장 왕영주(王永澍)에게 공항으로 달려가서 왕장시가 비행기를 타지 못하게 하고, 만일 왕장시가 이미 비행기를 탔으면 방법을 강구해서 비행기가 이륙하지 못하게 하라고 한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왕장시가 비행기에 오를 때, 왕영주도 급히 송산공항에 도착한다. 급히 공항관리직원들에게 통지하여, 특정 비행기편은 이륙하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한다. 그리하여 송산공항은 마치 대적을 맞이하는 것같은 상태가 되고, 여행객들은 무슨 비행기납치사건이라도 벌어진 줄 알았다. 장효무도 이때 공항에 도착한다. 왕영주가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장효무는 이미 권총을 손에 쥐고, 왕영주의 배를 겨눈다. 그리고 히스테리에 빠진 말투로 소리친다: "즉시 비행기를 이륙시켜라. 그러힞 않으면 너를 쏴죽여버리겠다!"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는데, 당당한 총통의 아들인 장효무가, 권총을 꺼내서 국가안전국 국장의 배를 겨누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상황인가? 장효무의 권총이 배를 겨누고 있자, 왕영주는 장효무가 정신이 나가 사고를 일으킬까 우려하여, 할 수 없이 왕장시가 탄 비행기의 이륙을 허가한다. 공항난동사건으로 장효무는 장경국의 마음 속에서의 지위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후 장효무가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소문은 완전히 사라진다. 장경국의 생각은 집안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아이가, 무슨 자격으로 후계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장효용은 장경국의 셋째아들이자 막내아들이다. 어려서 대만에서 지낸다. 장개석부부 특히 송미령은 이 막내손자를 특히 좋아했다. 무슨 골치아픈 일이 있더라도, 이 손자가 앞에 나타나서 "할아버지 할머니 안녕하세요!"만 외치면, 그들은 즉시 얼굴에 화색을 띄웠다. 이를 보면 그가 장개석과 송미령의 마음 속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둘째형인 장효무는 장효용보다 2살이 많다. 이들 형제는 어려서부터 원수지간 같았다. 만나기만 하면 싸웠다. 장효용은 나이도 어리고, 키도 작아서, 당연히 장효무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 싸워서 지면 오직 한 가지 방법 뿐이다. 우는 것이다. 장경궁은 자주 그에게 울지 말라고 하지만, 그래도 우는 것을 보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때리곤 했다. 이렇게 울면울수록 더 많이 맞았고, 맞으면 맞을수록 더 크게 울었다. 어른이 된 장효용은 거리낌없이 말한다. 자신이 부친에게 가장 많이 맞았다고. 비록 어렸을 때는 장난끼가 많아 자주 맞았지만, 자란 후의 장효용은 제3대중 가장 철이든 아이가 된다. 그는 장경국부부에게 가장 걱정을 덜 끼친 아이이기도 하다. 장개석은 그에게 크게 희망을 건다. 자주 그를 불러서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쳤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장개석과 장경국은 오래 상의한 후에, 그를 봉산육군군관학교에 보낸다. 봉산군관학교는 장씨집안의 희망이었다. 장남 장효문과 차남 장효무가 모두 자유롭고 산만한 버릇없는 도련님타입이어서, 군사학교의 엄격한 기율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몇달도 되지 않아 도망나왔다. 이는 장개석부부를 크게 실망시킨다. 그들이 보기에, 장씨집안의 제3대가 자신이 죽은 후에 계속하여 의발을 이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군대내의 영향력이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막내손자 장효용에게 모든 기대를 걸었다. 그가 자신처럼 먼저 국민당의 군대내에서 일을 하기를 바랐다. 과연 장효용은 그의 형들과 달리, 차를 몰아 교통사고를 내지도 않았고, 학교규칙을 수시로 어기지도 않았으며, 각종 시험에서도 여러번 앞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한번의 사고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한번은 군사훈련도중, 부주의로 발목을 삔다. 병원으로 갔는데 오래 지나도록 고쳐지질 않았다. 몇달이 지나서야 약간 호전되었으나, 이미 동기들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조모인 송미령은 바로 결정을 내린다. "내가 보기에, 차라리 효용을 군사학교에서 불로오는 것이 좋겠다. 그의 부상입은 다리를 겨우 낫게 했는데, 만일 계속 훈련을 받다가 다시 부상을 입으면 어떡한단 말인가?" 이는 장씨집안에서 제3대에 직업군인을 배출하려던 장개석에 있어서 적지 않은 타격이었다. 그리고 장효용 본인도 이번 좌절로 인생계획이 뒤바뀌게 된다. 그는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업의 길을 선택한다. 결국, 3명의 손자의 서로 다른 인생의 길은 결국 장개석이 제3대에서 자신의 후계자를 기르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도록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