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강균 영국의 홍콩총독관저(1945년), 1941년 말 일본이 홍콩을 침략하지 영국총독은 싱가포르로 피난했다.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영국의 홍콩총독이 싱가포르에서 홍콩으로 돌아오는 행사장면, 바이두바이커캡쳐.
작금의 홍콩의 사태는 2010년대부터 홍콩의 반중세력들이 홍콩행정장관 직선제를 내세우면서 시작된 혼란의 산물이라는 논의가 있다.
중국과 홍콩은, 1997년 영국이 150여년을 식민지배했던 홍콩을 돌려주고, 중국은 150여년을 빼앗겼던 홍콩을 되돌려 받는 그런 관계였다.
두 나라는 향후 홍콩의 과도기간을 50년으로 정하고 홍콩기본법에 합의했다.
양국이 합의한 홍콩기본법에 따르면, 홍콩행정장관은 800명의 선거인단의 투표로 간접선거하기로 돼있다. 그 임기는 5년이고 한 번 더 연임할 수 있게 돼있다.
그렇게 합의된 규정에 의해 1997년부터 홍콩내 명망있는 인사들이 홍콩행정장관을 역임하고, 2020년 현재 홍콩행정장관인 캐리 람은 제 5대 장관으로서 2017년에 임명돼 2022년까지 1차 임기를 수행하는 중이다.
그런데 지난 2014년 홍콩의 반중세력은 홍콩행정장관의 직선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그 때부터 홍콩의 정정이 내내 불안해져 오다가, 미국 트럼프정부의 등장이후 직간접적인 홍콩간섭이 본격화되었고, 코로나 사태로 트럼프의 재선이 불확실해지면서 중미 무역분쟁속에서 홍콩이 핫 플레이스가 되버린 양상이다.
1984년 9월 26일 중국과 영국이 베이징에서 사인한 홍콩반환협정은, 홍콩행정장관의 선거는 간선제로 하기로 양국의 합의사항을 명기하고 있다.
일국양제 이기 때문에, 양제 즉 두번째 다른 체제를 가진 홍콩의 정치관련규정을 변경하려면, 일국 즉 중국중앙정부의 비준이 있어야 한다.
즉 중국중앙정부의 국회격인 전국인민대회가 홍콩의 행정장관을 직선제로 하겠다라고 변경해야 한다.
중국은 대륙에서도 간선제로 국가지도자를 선출한다. 홍콩이 당연히 중국의 일부이므로 당초에 중국과 영국이 합의한 대로 간선제로 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영국은 1842년부터 1997년까지 모두 28명의 홍콩식민지총독을 내려보냈다. 물론 직선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총독은 홍콩반환 3년전인 1994년에 갑자기 입법회의 대표를 직선제로 하겠다 해서 2년정도 형식적인 대의제를 취했다.
전문가들은 이 것을, 더 이상 못먹게 될 홍콩에 시한폭탄을 묻어둔 것이라고 표현한다.
지난 2014년부터 홍콩행정장관 직선제를 앞세우며 반중시위를 지도했던 이들은, 상당수가 1994년 홍콩식민정부의 안배로 정계에 입문했던 친영국파 정치인들이거나, 그 아들 딸들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황즈펑( 黃之鋒) 은 1996년생이다. 2014년이면 18살이다. 그는 2011년 부터 반중 정치조직인 '학민사조'를 만들었다고 한다. 15살 때의 일이다.
황즈펑의 아버지는, 황웨이밍 (黄伟明) 으로 1994년 홍콩야당인 공민당원으로서 입법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난 156년동안 홍콩주민들을 철저한 식민지 노예로 다스렸던 영국이, 중국반환 3년을 남겨두고 직선제를 허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다.
바로 지금같은 혼란을 예상하지 않았을까?
이 세계가 민주 자유의 세상이 된 것은 대략 2차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부터이다.
영국이 홍콩을 돌려준게 1997년이니 1945년 세계, 특히 거의 온통 식민지였던 아시아가 자유와 민주를 찾은 지 52년 만의 일이다.
그 영국이 지금 홍콩에 대해 자유와 민주를 얘기하고 있다.
영국과 함께 19세기 중국을 침략했던 프랑스는, 1946년 자신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하기위해 다시 베트남을 침략해, 베트남과 1954년까지 무려 9년동안 전쟁을 벌이다 실패했고, 이로 인한 혼란은 결국 1975년까지 이어져 장장 30년동안 베트남을 전쟁의 도가니에 몰아넣은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