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허난성에 삼국지 조조 무덤 확인…두 부인 유해도 발견
글: 정주호
맏아들 조앙(曹昻) 의관총도 확인…中당국 확인에도 진위논란 지속
발굴단장 "성대한 장례 후 도굴 우려 부근 건축물 철거 추정"
중국 허난(河南)성의 평원지대에서 발견된 고분이 삼국지 위나라의 시조인 조조(曹操 155∼220)의 묘로 최종 확인됐다.
26일 베이징 청년보에 따르면 허난성 문화재 고고연구원은 허난성 안양현 안펑(安豊)향 시가오쉐(西高穴)촌에 위치한 동한(東漢)시대 무덤군에서 조조와 조조 부인 2명의 무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허난성은 지난 2009년 12월 이 지역 무덤군을 발굴(發掘)하는 과정에서 조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릉(高陵)을 발견, 연구 분석 작업을 진행해왔다.
발굴팀은 고릉 주변의 분토 기반, 천도통로, 동부 및 남부 건축물 등을 포함한 주요 구조를 밝혀내고 조조와 맏아들 조앙(曹昻)의 모친 류(劉)씨, 조비(曹丕), 조식(曹植)의 모친 변(卞)씨가 매장(埋葬)돼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묘원 안에서는 모두 남성 1명, 여성 2명 등 3구의 유해(遺骸)가 발견됐는데 이중 남성 유해는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60세 전후의 나이에 숨진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무덤 구조와 소장품, 역사 기록 등을 분석해 이 남성이 조조라고 결론을 내렸다.
삼국지 위서에 조조의 정실부인 변씨가 70세 전후에 숨진 뒤 조조 묘에 합장됐다는 기록에 따라 여성 노인 유해는 변씨(卞氏)인 것으로, 젊은 여성 유해는 일찍 숨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첫째 부인 류씨인 것으로 추정됐다.
주묘 부근에서 발견된 작은 묘혈(墓穴)은 당시 전사한 뒤 시신을 찾지 못한 조앙의 의관총인 것으로 나타났다.
삼국지 위서(魏書)의 무제기(武帝紀)에는 건안 23년(218년) 노년기의 조조가 자신의 장지로 메마른 고지대를 골라 분봉(分封)을 하지 말고, 나무도 심지 말며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라는 영을 내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발굴단장 판웨이빈(潘偉斌) 연구원은 아들 조비가 부친의 유지(遺旨)를 지키지 않고 성대한 장례를 치렀으나 후대에 도굴되는 것을 우려해 묘지 부근에 세웠던 건축물(建築物)을 철거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당시 장례 규격으로 보면 황제 1급에 해당하는 장례였다.
삼국지에서 유비(劉備), 손권(孫權)에 맞선 간웅으로 그려진 조조(曹操)는 후한 조정을 장악해 제도를 정비하고 인재를 등용해 세력을 크게 확대했으며 스스로 위왕(魏王)으로 봉하면서 황제와 마찬가의 권력과 위세를 행사했다.
조조는 220년 낙양에서 죽은 뒤 무왕(武王)의 시호를 받고 업성(業城)의 고릉에 묻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조 사후 조비가 위왕의 지위를 계승한 뒤 헌제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아 위나라 황제가 됐고 조조는 무황제(武皇帝)로 추존됐다.
조조 무덤이 맞다는 중국 당국의 결론에도 진위 논란은 완전히 해소(解消)되지 않고 있다.
분묘(墳墓) 발견 후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출토(出土)된 비석 글씨가 현대의 것과 유사(類似)하고 조조 생전에 쓰지 않았던 '위무왕(魏武王)'이란 명패가 나타난 점을 들어 조작(造作)됐을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曹操临死前开创了一个骗局,后世很多君王纷纷模仿
曹操,很多人都说是乱世的枭雄。林俊杰的一曲《曹操》,更是从不同的角度解读了这位历史人物。
但小编觉得,曹操确实是位了不起的人物。能够写出“月明星稀,乌鹊南飞。绕树三匝,何枝可依?山不厌高,海不厌深。周公吐哺,天下归心。”这样忧国忧民的句子。也能够说出“天下英雄,唯使君与操耳。”这样霸气外露的话。
作为历史人物,曹操既经历了官渡之战这样的成功,也饱尝了赤壁之战这样的失败。但你知道吗,曹操临死之前,还设下了一个骗局,至今依然无人能够给出确切的答案。而后世的君王更是纷纷模仿:那就是他的七十二疑冢。
曹操一生纵横风云,更是有老骥伏枥,志在千里这样的豪情,然而睥睨天下,难敌百年,岁月终究还是将他推往了衰老和死亡。这时候曹操更加坐立不安了,生怕死后遭人报复,鞭尸挖坟挫骨扬灰。
其实他这个担忧并不是毫无道理,原因有三点:曹操生前玩弄权术,疑心又很重,杀害了不少将军和大臣。而且还干做挟天子以令诸侯这种事,当时汉朝还有很多死粉,对这样的做法也肯定很不满。为了筹集军费,曹操也挖开过不少坟墓,所以,也很怕这些墓主人后代的报复。
正当曹操一筹莫展,忧心忡忡的时候。东汉献帝建安二十四年的一天晚上,曹操刚刚睡着,这时候突然一个白胡子老头来到他的床前。曹操曾经趁董卓睡觉时搞过刺杀,生怕别人效防,所以警惕性一直很高,甚至还有梦中杀人的典故。当白胡子老头刚到床前,他就一剑刺过去。
然而,宝剑刺在白胡子老头身上却毫无伤口,老头还一脸笑呵呵的看着他:“丞相大人,难道你不认识我了吗”
曹操非常吃惊:“你到底是谁,来找我,究竟是为了什么?”
白胡子老头说:“我乃左慈是也,曾经戏弄过你,也算是对你有愧。掐指一算,你明年即将归天,特来给你献上一计,保你死后身体得以完整。”
曹操大吃一惊:“难道仙人就无法让我延寿吗”
左慈摇了摇头:“你没有仙根,修不了仙,终究难逃一死。并且杀戮太重,上天也不允许给你续命。与其纠结于寿命长短,不如好好考虑如何让自己最后得以周全。”
曹操忍不住长叹:“神龟虽寿,犹有竟时。腾蛇乘雾,终成土灰。看来我难逃一死,只求道长传授我方法,让我死后得到一份安宁。”
左慈笑了笑:“我给你留下的锦囊,按照上面说的来做就行了。今天龙王那里请我喝酒,我先走了。”话音刚落,就消失不见了,只留下一个锦囊。
曹操打开了锦囊,看完上面的方法,忍不住一声长叹:“左仙人简直太有智慧了!这个方法果然是万无一失!从此可以安心睡觉了。”
东汉献帝25年正月,曹操在洛阳病死,尸体运回了封地临漳进行埋葬。当他安葬的那一天,72具棺木从东南西北四个方向,同时从各个城门抬出去,在秘密的地方进行安葬,总共有72处,这就是历史上很出名的72疑冢。
后世很多君王纷纷效仿,比如李世民,朱元璋都曾经采用过这种方法。
但其实,那72个疑冢里面,并没有一个是真正的曹操墓,真正的曹操尸首,其实埋在古漳河下面。
曹植的《祭先王诏》里面就写道:“欲祭先王于河上,览省上下,悲伤感切”。曹操的坟墓,至今也未被发现,因为他的坟墓深埋在河下面,随着古漳河数次改道,就谁也不可能找到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