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오히려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거칠고 패륜적인 비속어를 내뱉기 일쑤였다. "솔직히 말할게, 우리 아버지는 XX놈이야, 요즘 세상이었으면 아버지는 무조건 교도소에 갔을 거야..." 하고, 만취 상태의 A는 자주 중얼거렸다. 물론, 동석한 친구들은 A가 만취하기 전까지 A의 아버지가 A에게 행했던 수없이 많고 다양한 폭력의 기록들을 경청해야 했다.
아버지의 폭력을 복기하고, 아버지에 대한 평가까지 끝내고 나면, A의 화두는 언제나 A 본인에게로 향했다. "난 절대 자식은 안 낳을 거야, 보고 배운 게 때리는 거잖아. 잘 기를 자신이 없어" 숱한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느낀다는 바로 그 감정, 폭력의 대물림에 대한 우려와 체념, 자기혐오 등의 감정이 A가 매 술자리 끝에 내리는 결론이었다.
A의 이야기는 사실 그 술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친구들에게도 제법 익숙한 이야기였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자신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친구들의 증언은 끊이지 않았다. 이야기 속 아버지들의 사연도 모두 비슷한 래퍼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가령 우리가 나고 자란 곳은 충청도 소재의 한 소도시였고, 우리 아버지들은 그 근방 시골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대다수였는데, '시골 가정에서 거칠고 열악하게 보낸 유년 시절'이 그들 폭력의 근원이라는 식이었다.
그러니 질릴 만도 했을 것이다. 어느 날 또 이야기를 시작하는 A에게 어떤 친구가 "그만 좀 하라"고 넌더리를 냈다. "공감할 것 다 했고, 결론도 다 난 이야기"라며 "네 이야기는 이제 그냥 술자리 무용담 같다"고 그는 쏘아붙였다. 그 말을 들었을 때 A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파괴되지 않기 위해, 부스러짐을 기록하다
작가 김가을이 '아버지폭력'에 대한 본인의 경험을 기록한 도서 <부스러졌지만 파괴되진 않았어>를 읽는 동안 끊임없이 그날 A의 표정을 상상했다.
A의 토로가 술자리 참석자 전원의 공동 화두로 흘러갔던 것처럼, 이 책을 읽는 꽤 많은 수의 독자들이 독자 본인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것이다. 작가가 제시하는 개념인 '아버지폭력'은, 책의 추천사를 쓴 작가 장강명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 모두가 알지만 어떻게 분류하고 명명해야 할지 몰랐던 폭력 범죄"는, "학벌제일주의와 사회적 계급"에 의한 폭력이 만연한 한국사회에선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대다수 가정에 만연해 있는 폭력이니 말이다. 실제로 작가가 소개하는 초기 아버지폭력의 양태는 앞서 언급한 술자리 속 아버지들의 사연과도 놀랍도록 닮아있다.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폭력적인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잔인한 폭력, 어머니와 자매와 남매에게로 뻗어 나가는 '내리갈굼', 너도 크면 똑같을 거라는 폭력의 대물림...
누군가는 이 지겹고 잔인한 이야기를 왜 또 읽어야 하느냐고 불만을 표할 수도 있겠지만, 책은 폭력의 전시도 고발도 아닌 극복을 위해 쓰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작가가 기록한 그의 폭력의 경험들은 스스로 "신파"와 같은 효과를 우려할 정도로 자극적인 게 사실이지만, 작가는 이를 자기연민의 소재로 태우는 대신 "나 자신 이외에 아무도 모를 생각들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 활용한다. 분노나 슬픔의 기억을 놓지 못해서 기록한 게 아니다. 작가는 그저 그 기억을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글을 썼다. 그 과정이 책이 됐다.
그래서 이 책을 '생존'의 기록이라 부르고 싶다. 여기서 생존이란. 물론 남들이 쉬이 경험하지 못할 물리적인 폭력으로부터의 생존이기도 하다. 작가 나이 대여섯 살부터 스물셋까지 이어진, 때로는 화상통화를 통한 대리폭력의 형태로까지 집행된 (출장 중이던 그는 작가의 어머니를 시켜 작가를 폭행하고, 이를 화상통화로 감시했다) 아버지의 폭력은 실제로 작가의 생존을 물리적으로 위협했다.
다만 작가의 기록은 그가 마침내 아버지를 신고하고, 아버지와의 물리적인 분리가 이뤄지는 시점에서 끝나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삶 전반을 강력하게 지배해 버린 폭력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즉 "폭력의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위해 그가 행한 모든 노력들을 세세하게 기록한다.
'아버지 폭력'의 사회적 근원을 탐구하고, 피해자를 방관자로 만들고 "집노예 도비"로 만드는 가해의 구조를 파악한다. 구조 속에서 느낀 무력함과 굴절 혐오를 고백한다. 경제학자 에덤 스미스와 존 스튜어트 밀,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와 인류학자 김현경,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웹툰작가 랑또와 밴드 브로콜리너마저까지 무수한 이들의 텍스트를 소환하고, 그것들을 통해 폭력의 반대 방향으로 달려 나갈 동력을 얻는다.
"나는 스코필드가 가능성이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데까지 내달리는 장면에서 힘을 얻었다. 나도 그처럼 희망이 손에 잡히지 않는 상황에서도 달릴 수 있을 때까지 달려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김가을, 영화 <1917>에 대한 서술)
폭력에 완전히 파괴되지도 그 후유증에 매몰되지 않고 그 반대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는 일, 그를 위해 자신의 피해는 물론 가해의 기억까지 톺아보며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 책에 기록된 '생존'의 의미는 이 모든 과정을 포괄한다.
누군가 "아주 천천히" 자신의 언어를 찾아갈 수 있도록
책을 다 읽은 뒤에도 A의 표정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때 A가 우리에게 하지 못했을 말들, A 이외엔 "아무도 모를 생각들", 혹은 A 자신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을 그의 이야기들에 대해서 조금은 상상하게 됐다.
끔찍한 기억을 왜 빨리 놓아버리지 못하냐고 다그치던 당시의 우리는, 그런 행간의 이야기를 알지 못했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혹 그가 원한 바가 정말로 신파를 통한 자기연민이었을지 모른다. 그에게 넌더리를 낸 친구의 말처럼 정말로 불행을 전시해서 무용담을 만들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조차 폭력의 후유증이었을지 모른다.
작가에게도 "실어증 걸린 것마냥 말을 잃어버렸"던 때가 있었다. 그는 "던져진 질문들을 천천히 고민하고 그것에 대답을 해가며, 아주 천천히 내 언어를 찾아갔다"고 극복의 과정을 기술한다. 그 느린 탐색의 과정에 기꺼이 함께해준 이들에게는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안부 인사를 건네줘서, "나를 계속 밖으로 꺼내고 불러줘서" 전화를 받아주고 전화를 해줘서 고맙다고, 그래서 "당장 바뀌는 것이 없더라도 그날 그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잊지 않고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작가가 감사를 표한 사소한 행위들이야말로, 어쩌면 지난한 폭력의 해결책일지도 모르겠다. 작가 또한 "폭력을 내 주변 일이 아니라 기사나 뉴스에서나 볼 수 있는 드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어딘가 어두운 눈빛, 초점을 잃은 멍한 눈, 불안한 눈빛을 띠고 있는 얼굴을 알아봐 주는 시선"을 통해 "독해지지 않아도 폭력으로부터 살아남는 사람이 늘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한다.
제도와 구조의 개선 대신 개인의 선의를 통해 폭력을 해결하자는 말이 아니다. 제도와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삶의 모든 방면에서 "폭력의 반대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는 말이다. 2018년 서울 강서구에서 일어난 가정폭력 살해 사건을 기억한다. 가정폭력 문제를 잠깐이나마 사회 최대 이슈로 만든 그 사건 당시에도, 피해자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날 선 시선들이 사회문제의 하나로 지목된 바 있다.
폭력 속에 떨어진 이가 그 반대로 달려 나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비용이 필요한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반대로 그 노력과 비용을 마련해 낼 수만 있다면, 어느 누구라도 반드시 폭력의 반대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 또한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책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쓰였다. 폭력 속의 누군가가, 아주 천천히라도 자신의 언어를 찾아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