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 동남아시아의 가치를 제대로 모른다
2017년 초 세계적 명품 업체인 샤넬을 취재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 본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샤넬 의류, 향수, 시계 담당 사장을 비롯해 여러 간부들을 만나 하루 종일 인터뷰 했다. 이들을 인터뷰하면서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샤넬이 한국 시장을 파리와 뉴욕에 이어 세계 3대 시장으로 본다는 점이었다. 런던이나 도쿄, 홍콩보다 한국이 크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한국에서 온 기자에게 립서비스 하는 줄 알았다. 한국 부유층이 아무리 명품을 좋아한다지만 세계에서 뉴욕과 파리 다음으로 구매력이 높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들은 빅뱅의 지드래곤 등 한국 연예인들을 줄줄이 파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패션 아이콘을 샤넬 앰버서더로 지정해서 특급대우를 하고 있었다. 지드래곤이 파리에 오면 샤넬 본사 매장에서 쇼핑을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오로지 지드래곤만을 위해서 문을 연다고 했다. 그 의문은 곧 풀렸다. 지드래곤의 SNS 팔로어가 수천 만 명에 달한다. 글로벌 패션리더로 자리매김한 지드래곤이 샤넬 제품을 입거나 쓰는 사진이 그의 SNS에 게재되는 순간, 샤넬 제품은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다. 샤넬 입장에서는 지드레곤을 통해서 샤넬의 가치를 지키는 동시에 매출을 올릴 수 있는 고부가 창출 전략이다. 지드래곤 외에도 배우 김고은, 블랙핑크의 제니가 샤넬 엠베서더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미국 LA에서 열린 미 배우조합상(Screen Actors Guild, SAG) 시상식에서 오징어게임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정호연은 샤넬 모델이었다. 이처럼 샤넬의 한국 ‘친구’들은 즐비하다.
그래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한국 연예인 중 글로벌 스타들이 많은 것과 한국이 샤넬의 세계 3대 시장인 이유는 쉽게 연결되지 않았다. 샤넬 경영진에게 다시 캐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 연예인들이 전 세계적으로 뜨면, 한류에 열광하는 동남아 고객들이 움직인다고 했다. 지드래곤이 샤넬 제품을 SNS에 올리면, 동남아 고객들이 유럽이나 미국으로 가기에는 너무 멀기 때문에 가까운 서울로 와서 관광도 하고, 명품 샤넬쇼핑도 하고 간다는 것이다. 동남아 관광객이 한국을 세계 3대 시장으로 끌어올리는 셈이다.
이 같은 현상은 비단 샤넬 뿐 아니라 모든 세계적 명품 브랜드 공통적으로 선택하는 전략이다. 따라서 이들 명품 브랜드 대부분 한국에 신상품을 10% 더 많이 배정하고, 가격은 도쿄나 홍콩에 비해 10%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다고 했다. 물량도 그만큼 받쳐준다. 이와 같이 해외에서는 한국이 갖는 동남아 시장에 대한 영향력을 인정하는데, 정작 한국은 그에 상응할 정도로 동남아를 중시하지 않고 있다. 현재 우리가 동남아 시장을 홀대하는 건 아닌지, 동남아 시장의 가능성을 간과하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볼 때다. 한류가 널리 퍼진 동남아의 인구는 인도네시아 2억8000만 명, 베트남 1억 명, 태국 7000만 명 등 모두 합치면 6억6,000만 명이 넘는다. 이들 인구 중 10%는 한국 1인당 GDP(국내총생산)와 비슷한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다. 아세안 관광위원회(ASEAN Tourism Board)에 따르면, 2017년 방한한 동남아 국적자는 214만 2000여명에서 2018년 246만2000여명, 2019년 270만 여명으로 늘어났다. 코로나만 아니면 이 같은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동남아를 매우 중요한 또 다른 한국 시장으로 여겨야 하는 이유다.
인도네시아 대통령도 한국 아이돌그룹 팬
2016년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조선일보 주최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에 인도네시아 조코 위도도(조코위) 대통령이 참석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조코위 대통령이 수퍼주니어 멤버들을 불러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자기 딸이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그룹이라는 것이다. 수소문해서 수퍼주니어 멤버 두 명이 참석했다. 다음 해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조선일보 주최 한-인도네시아 비즈니스 서밋이 열렸다. 수퍼주니어 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 이수만 회장과 수퍼주니어 이특씨가 참석했다. 조코위 대통령 축사 직후 수퍼주니어 멤버 이특씨가 청중 앞에서 인사했는데, 참석자들의 박수가 조코위 대통령 연설 때보다 더 크게 터져 나왔다. 이특씨는 “비즈니스 서밋 개회식만 참석하고 자카르타에서 관광 등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는데, 하루 종일 인도네시아 언론과 인터뷰하느라 쉬지도 못했다”고 하소연했다. 이수만 회장도 깜짝 놀랄 만큼 인도네시아에서는 2005년 데뷔한 수퍼주니어의 인기가 여전했다.
한류스타의 방문은 인도네시아 정치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2019년 조코위 대통령이 방한하면서 수퍼주니어 멤버들과 만날 수 있겠느냐고 다시 한 번 부탁했다. 재선에 나서는 조코위 대통령이 인도네시아의 젊은 유권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수퍼주니어와 같은 젊은이들과 어울리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에서였다. SM엔터테인먼트는 해외 나가 있던 수퍼주니어 멤버 전원을 긴급 소집했다. 당시 SM은 자카르타에서 수퍼주니어 공연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수퍼주니어 멤버들은 조코위 대통령 부부 및 인도네시아 장관 등과 인사를 나누며 참석자들과 일일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인도네시아 언론은 조코위 대통령과 수퍼주니어와의 만남을 대서특필했고, 수퍼주니어의 콘서트에도 큰 도움이 됐다. 이 만남의 영향이었는지 조코위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다.
아시아 시장을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
2017년 자카르타에서 열린 한-인도네시아 비즈니스 서밋을 추진하면서 겪은 일이다. 당시 인도네시아 측은 한국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비즈니스 서밋에 참석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특히 현대자동차의 고위 인사를 반드시 초청해달라고 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자국 자동차시장의 90%이상을 점유한 일본 자동차 업체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일본 업체들이 독과점을 형성하고 있어 인도네시아 소비자들이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차를 불러들여 일본 자동차 업체들과 경쟁하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한마디로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었다.
현대자동차는 2010년대 인도네시아 시장에서 완전 철수했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시장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철수 당시의 앙금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측은 인도네시아 정부의 끈질긴 요청을 받고 고위 임원을 비즈니스 서밋에 참석시켰다. 조코위 대통령은 비즈니스 서밋에 참석한 한국 기업인들과 별도의 미팅을 통해 한국 기업인들의 발언을 경청했다. 그러면서 그는 현대자동차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조코위 대통령의 진정성을 확인한 현대자동차는 이후 인도네시아 시장을 다시 보게 됐고, 현대자동차는 인도네시아 시장 진출을 정식으로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국에서 생산된 차량을 인도네시아로 직접 수출하기에는 여러 제약이 있었다. 제일 큰 문제는 자동차 크기였다. 한국에서 생산되는 가장 작은 사이즈의 차량이 인도네시아 도로에서는 너무 크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현대자동차 측은 인도에서 생산되는 차량을 인도네시아로 수출하는 방안을 조심스럽게 타진했다. 인도에서 현지 생산되는 차량 사이즈가 인도네시아 시장에 알맞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내용을 전달 받은 필자는 한-인도네시아 비즈니스 서밋의 파트너였던 인도네시아 정부 관계자에게 현대자동차의 고민을 전달했다. 그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는 “인도네시아는 대(對) 인도 무역 흑자가 너무 커서 해결방안을 놓고 고민 중”이라고 설명했다. 14억 인구의 인도는 가정에서 식용유로 쓰이는 팜유 대부분을 인도네시아로부터 수입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흑자 규모가 너무 커서 인도와 무역 마찰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뒤 조코위 대통령도 이 제안을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현대자동차측에 전달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은 인도로 자동차 부품을 수출하고, 인도는 현지 생산한 현대자동차를 인도네시아로 수출하고, 인도네시아는 현대자동차 수입으로 일본자동차 업체들을 견제하면서 인도와의 무역 흑자를 줄이는 일석이조의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한마디로 모두가 윈윈하는 삼각 무역 구도가 형성됐다.
인도네시아 시장에는 현대자동차뿐 아니라 CJ그룹, 롯데그룹 등도 앞다퉈 뛰어들고 있다. CJ그룹은 2019년 현재 인도네시아에 275개의 CGV 상영관을 보유, 인도네시아 시장에서 로컬 기업인 Cineplex21(1003개 상영관)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다. CGV의 약진은 한국 콘텐츠의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2021년 10월 한국콘텐츠진흥원 주최 ‘스테이지K팝’ 행사가 자카르타 CGV상영관에서 열렸다. 물론 만석이었다. 세 번 공연에 1500여명이 관람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실감기술(XR)을 활용해 K팝 가수들이 눈앞에서 공연하는 것처럼 연출했다. 한국의 신기술을 엔터테인먼트에 접목해 동남아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인도 시장만 보거나, 인도네시아 시장만 보는 등 양자 관계에만 천착했다면 단선적, 또는 단편적 비즈니스 기회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도-인도네시아 시장을 삼각으로 묶어 가능성을 봤고, 기어이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냈다. 현재 세계 7위의 경제 대국 인도는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고 화성에 탐사대를 보낸 과학 선진국이다. 골드만삭스는 인도가 2025년 일본을, 2042년 미국을 추월해 중국과 함께 세계 경제 2강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세계적 컨설팅 업체인 맥킨지는 세계 16위의 경제 대국인 인도네시아가 2030년 독일과 영국을 추월해 세계 7위의 경제 대국이 된다고 전망했다. 한국 기업들이 인도와 인도네시아 시장에 눈을 떠야 하는 이유다.
인도네시아를 포함하는 동남아(ASEAN) 시장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2018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업이 가장 많이 수출한 지역은 중국(1417억 달러)이 아니라 동남아(1485억 달러)인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 통계작성 이후 동남아가 중국을 앞지른 건 처음이다. 이는 한국의 (對) 아세안 투자에서도 나타난다. 한국의 아세안 투자는 2017년 52억8400만 달러에서 2018년 64억9500만 달러, 2019년 95억4800만 달러로 늘어났다. 또 아세안에서 활동하는 한국 기업 숫자도 2017년 1만3388개에서 2018년 1만4676개, 2019년 1만6070개로 늘어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동남아 시장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만큼 언론도 동남아에 대한 다양한 뉴스를 보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시아에 중국만한 시장이 또 있다
인도는 중국에 버금가는 14억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인도와 한국의 인연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도 아유타 왕국의 공주가 한반도 남쪽에 자리 잡고 있던 가야왕국으로 시집을 왔다. 지금도 김해에는 인도 공주였던 허왕후의 무덤이 잘 보전돼 있다.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많다. 인도는 한국전쟁 중 6800여명을 파병했다. 의무부대와 포로감시임무 부대였다. 조선일보는 이 같은 사실을 1953년 9월3일자 2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등 인도군의 활약상을 소개하기도 했다. 파병됐던 의무부대원 627명은 22만 명의 군인 및 민간인을 돌봤고, 2300여회 수술을 집도했다. 이 가운데 5명은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인도 제60 공수야전병원에서 일어난 일이다. 마침 6·25전쟁 참전 인도군 특별사진전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오는 6월12일까지 열린다. 의료지원국중 인도가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기 때문에 이 전시회의 의미가 크다.
이 뿐만 아니다. 1951년 파병됐던 인도의 유니 나야르 중령은 대구 인근에서 전사했다. 인도군 첫 전사자였다. 나야르 중령의 부인은 당시 임신 중이었다고 한다. 부인은 나야르 중령이 숨진 후 소중한 딸을 출산했고, 이후 평생 수절하다 2009년 세상을 떠나면서 한국에 있는 남편의 묘소에 함께 묻히길 원했다고 한다. 지금도 나야르 중령 부부의 묘소가 대구에 잘 보존돼 있다. 딸은 미국 워싱턴DC 인근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영화 같은 이야기도 있다. 1951년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이 후퇴할 당시 평양에 있던 인도 의무대원 60여명은 부상당한 국군 포로 100여명을 버려두고 올 수 없어서, 북한 인민군 열차를 탈취해 부상 군인들을 태우고 의정부로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들 인도 의무부대원들의 목숨을 건 영웅적 모습은 지금도 양국 군대의 귀감이 되고 있다. 2000여 년 전부터 70여 년 전 한국전쟁,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국과 인도의 인연을 비즈니스 기회로 창출한다면 무궁무진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오래 전부터 한국이 인도를 비롯하여 아시아의 수많은 나라들과 맺은 인연을 고려할 때 우리가 아시아의 잠재력을 간과하고 아시아를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분명 아시아는 미국, 유럽보다 더 가까운 우리의 이웃이다. 이제 한국인들은 아시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한류로 다가간 동남아 시장, 진정한 쌍방향 소통 이뤄져야
동남아 시장에서 한류는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방콕, 하노이, 마닐라 등 동남아 지역을 다니다보면 한류를 쉽게 접할 수 있다. 한류가 한국 기업들을 위해 동남아에 ‘무역’ 고속도로를 만드는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고속도로는 일방향이 아니라 양방향이다. 한국에서 동남아로 가기도 하지만, 동남아에서 한국으로 오기도 해야 한다. 필자는 한국 기업인들에게 물건만 팔 생각하지 말고, 동남아 인적 네트워크에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우리와 동등한 파트너로 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디지털플랫폼이 발달하면 할수록, 이 같은 인적 네트워크 구축은 훨씬 더 용이해질 것이다. 물건이야 있다가도 없고, 돈이야 벌었다 말다 하지만 사람을 얻으면 평생 간다. 동남아 사람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다.
SM엔터테인먼트는 2017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SM사무소를 차리고, 인도네시아 연습생 발굴을 목표로 활동했다. 또 2019년에는 슈퍼주니어 공연을 치르기도 했다. JYP 소속인 유명 아이돌그룹 2PM의 닉쿤은 태국출신이다. 닉쿤 때문에 2PM은 태국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 아이돌그룹이다.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오래전부터 이 같은 양방향 소통을 실천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게 비즈니스적으로도 도움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 기업들도 이 같은 인적 투자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남아 출신 인재들을 발굴, 육성, 등용해서 양국 산업 발전에 가교 역할을 맡도록 하면 된다. 또 국내 대학들은 동남아 인재 유치에 적극 나서야 한다. 유학을 핑계로 불법 취업에 나서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보다는 인재를 키워서 다 함께 성장한다는 전략을 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