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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의(汪靜宜): 임표의 정혼녀

网易首页>网易号>正文申请入驻> (四)汪静宜的悲情坚守林彪

글: 복녕객(福寧客)

정의(靜宜)는 왕정의이고, 육용(育容)은 임육용이다. 전자는 출토문물같지만, 후자는 현대중국역사상 몇 손가락 내에 꼽히는 인물이며, 누구도 그를 현대사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가장 혁혁한 인물중 하나이다. 기실,분명히 당신도 그 이름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정사에서 통상적으로 임표라고 불린다.

 

한 프롤레타리아혁명가는 임표와 같은 고향사람이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고향에 이런 말이 있다. 임표의 조상이 살던 곳은 왕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곳이다. 임표는 혁명하러 가면서 첫번째 부인을 버렸는데, 그녀는 평생 시집을 가지 않고 매일 임표의 집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원녀(怨女)의 음기가 중하여 임표의 왕기가 꺽였다." 필자는 대학에서 공부할 때 이 일을 알아보기 위하여 임표의 한 비서를 만난 적이 있다. 아래의 이야기는 그 비서가 친히 말해준 내용이다.

 

1) 1924년, 임표의 부친 임명경(林明卿)은 임표에게 며느리를 구했다고 얘기한다. 여자의 이름은 왕정의(汪靜宜)이고 1907년 12월 6일생이며 임가대만(林家大灣)사람이다. 임표보다 하루 늦게 세상에 나왔다. 왕씨집안은 현지의 유명한 대갓집이다. 한 해는 두 도적이 담장을 넘어 왕씨집에 숨어들어 사십일을 먹고 자고 했는데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보면 왕씨의 집이 얼마나 크고,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왕씨집안은 조상의 가훈을 지켜, 여자에게는 글을 읽지 못하게 했다. 왕정의는 명문집안출신이지만 글을 전혀 몰랐다.

 

임표는 웅자영발(雄姿英發)하여 반드시 크게 성공할 것으로 보았다. 왕씨집안은 그것때문에 딸을 임표에게 시집보내기로 한다. 임표는 어른들의 뜻을 꺽지 못하고 이 혼인에 동의한다. 그러나 좋아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러 떠난다. 이때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항전후기에 그는 섭군(葉群)과 결혼하여 임립형(林立衡, 린리헝)과 임입과(林立果, 린리궈)를 낳는다. 1949년, 제4야전군이 남하한다. 임표는 금의환향한다. 우한을 함락시킨 후, 임표는 호북의 최고군정장관이 된다. 임명경은 우한으로 그를 보러 가서 맗해준다: 왕정의는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다. 임표는 나를 불러서 임가대만으로 가서 이 일을 처리하라고 시켰다. 그리고 2천위안의 돈을 왕정의에게 보내고, 임표와 섭군이 같이 찍은 사진도 주면서 나에게 왕정의에게 전해주라고 했다. 이것으로 아마 그녀의 마음을 끊으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왕정의는 예쁘진 않았다. 젊었을 때는 약간 뚱뚱했다. 임가대만에서 그녀는 검은 머리카락으로 아주 유명했다.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좌르를 흘러래닌다. 그녀는 머리를 빗는 것을 좋아했고, 자주 거울 앞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곤 했다.

 

머리카락은 그녀의 보배였다. 그녀는 심계가 있었다. 임표가 상친(相親)을 위하여 그녀의 집을 찾아오는 날 낮에는 죽어도 규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밤이 되면 나가겠다고 한다. 아가씨는 낮에는 임표가 자신의 용모를 너무 잘 볼 수 있어서, 어둠으로 가리려 한 것이다. 그녀는 문틈으로 임표를 훔쳐보고는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임표는 젊고 짙은 눈썹은 칼과 같았다. 눈빛은 번개와 같았다. 왕씨집안으로 들어온 후에는 계속하여 침목을 지킨다.

 

임표의 침묵은 항상 아무리 단단한 것도 무너뜨릴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다. 밤이 되자, 왕정위는 임표와 만난다. 그녀는 그를 보지 않았다. 그도 그녀를 보지 않았다. 그녀가 그를 보지 않은 것은 부끄러움 때문이고, 그가 그녀를 보지 않은 것은 자신이 원하지 않아서이다. 왕정의의 규방 앞에는 배나무가 한 그루 있다. 배는 아주 달았다. 왕정의는 임표를 위하여 한 개를 따준다. 그녀는 용기를 내서 임표에게 복을 빌어주고, 배를 건넨다.

 

임표는 한 입 먹었는데, 물기가 배어 나왔다. 임표가 말한다: "맛이 좋다." 사람들이 나가고 집에는 그들 둘만 남는다. 왕정의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필 이럴 때 사고가 난다. 그녀는 건너편의 의자에 앉았는데, 의자가 쓰러져 버린 것이다. 아마도 이전부터 이미 튼튼하지 못했던 것같다. 그래도 왜 하필 이럴 때 무너진단 말인가? 그녀는 얼굴이 발개져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두 사람이 헤어진다. 임표는 다시 왕정의를 찾지 않는다.

 

왕정의는 몰리 임표를 몇번 보러 간다. 임표는 한번 떠나가 황학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왕정의는 1년 또 1년을 기다린다. 집앞의 배나무꽃도 지고 다시 폈다. 매번 배가 익을 때면, 왕정의는 가장 크고 가장 좋은 것을 따로 한광주리 담아서 임표를 위하여 남겨둔다. 배는 점점 상해가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평형관대첩대, 북방에서 소식이 전해진다. 임표가 팔로군의 고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왕정의는 임표가 돌아와서 자신을 부인으로 맞이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항상 문앞에 기대어 서서, 멀리 큰 길을 바라본다. 군인이 그녀의 집으로 오지 않는지 보고 있던 것이다.

 

2.) 나는 임가대만으로 간 후, 먼저 왕정의의 부친에게 온 뜻을 말한다. 왕정의의 부친은 눈물을 흘리며,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왕정의의 부친은 나를 데리고 왕정의를 만나러 갔다. 아가씨는 마침 머리를 빗고 있었다. 그녀늬 모습은 고귀한 공주와도 같았다. 단정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입가에는 가느다란 미소를 띄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정말 예뻤다. 먹처럼 새카맣고, 숲처럼 많았고, 거울처럼 빛났다. 두발무세월(頭髮無歲月), 소하유춘추(梳下有春秋). 그녀는 이미 사십이었다. 그녀는 아름답지는 않았으나, 뚱뚱하지는 않았다. 화장대 위에 작은 배광주리가 있었다. 바로 배가 익을 때였다. 나뭇가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마치 치심(痴心)의 아가씨의 슬픔과 같았다. 나는 왕정의에게 온 뜻을 얘기했다. 아마도 그것은 그녀를 바닥없는 심연으로 몰아넣었던 것같다. 그녀는 기절한다. 왕씨집안 사람들은 모두 통곡을 했다. 이십년간 기다렸는데, 인연을 이루지 못했다. 강철같은 마음이라고 견디기 힘들 것인데, 하물며 약한 여자임에야. 그녀는 깨어난 후에 얼굴을 감싸고 뛰어나간다.

 

사람들이 전체 마을을 찾아다녔으나, 찾지 못했다. 왕정의의 부친이 말한다: "분명히 형룡산(迥龍山)의 뒤에 있는 그 길에 가 있을 것이다." 임표는 어려서 준신소학을 다닐 때부터 발의 힘을 기르기 위하여, 두 다리에 각각 모래주머니를 매고, 달려서 학교로 가곤 했다. 임표의 모친이 이를 발견하고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자 그는 방학을 하면 형룡산의 뒤에 있는 작은 길에서 달렸고, 왕왕 한밤중이 되어야 집으로 돌아왔다.여러해동안 이를 쉬지 않았다. 왕정의와 알고 난 후에 아가씨는 이 비밀을 듣는다. 그래서 밤이면 작은 길로 간다. 그녀는 아직 혼인하지 않은 정혼자를 부르지 못하고, 그저 나무 뒤에 숨어서 그를 살펴보았다. 작은 길을 동네사람들이 석재를 채취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길에는 돌조각이 항상 떨어져 있었다. 왕정의는 임표보다 먼저 도착해서, 길에서 비교적 큰 돌맹이들을 치워놓았다. 그녀는 임표가 돌맹이에 걸려 넘어질까봐 걱정해준 것이다. 그녀는 반년이나 이렇게 했다. 임표가 떠난 후, 그녀는 그곳에 가기를 좋아했다.

 

왕정의는 과연 그 작은 길에 있었다. 달이 떠오르고, 맑은 빛이 온 산을 비춘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유령과 같았다. 왕정의의 부친은 딸의 손을 잡아서 집으로 돌아온다. 왕정의는 부친의 품에서 대성통곡한다: "아빠, 힘들어요..."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임표와 섭군의 사진을 왕정의에게 건낸다. 두 사람은 모두 군복을 입고 있었다. 각반을 차고, 등에는 모두 두립(斗笠)을 매고 있었다. 왕정의는 보지도 않고 찢어버린다. 사람들이 떠나가, 왕정의는 다시 사진을 붙이고, 다시 찢었다. 이렇게 붙이고, 찢고를 밤새도록 여러번 한다.

 

다음 날, 나는 우한으로 돌아왔고, 왕씨집안과 작별한다. 단지 하룻밤만에 아가씨는 급변한다. 어제는 얼굴색이 복숭아꽃과 같았는데, 오늘은 죽은 얼굴이다. 어제는 아가씨였는데, 오늘은 아줌마가 되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틀어올렸다. 그녀의 머리에는 한줄기 백발이 보였다. 그것은 어제 저녁에 나온 것이다. 틀어올린 머리카락은 백발을 감추어 주었다. 아가씨는 이미 평정을 되찾았다. 제대로 차려입고 있었다. 얼굴에는 고귀한 신색이 나타났다. 나는 임표가 준 2천위안을 그녀에게 건넨다. 그녀는 묵묵히 받았다. 그날 아침, 왕정의는 쌀밥 한 그릇을 다 먹고, 다시 한 그릇을 푼다. 왕정의의 부친은 놀라서 그녀를 쳐다본다. 아가씨가 세번째 밥그릇을 먹으려 할 때,부친은 참지 못하고, "야. 너 미쳤느냐"라고 말한다. 아가씨는 말을 하지 않고, 그냥 입으로 밥을 쑤셔넣었다. 볼이 가득하였다. 두 줄기 맑은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려서 밥그릇으로 떨여졌고, 그녀는 밥과 함께 먹고 있었다.

 

3) 해방후, 천지개변한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고, 부자가 가난해진다. 구사회에서 사람을 착취했던 사람들은 이제는 사람들에게 착취당하게 된다.

 

왕정의의 집안은 지주로 규정된다. 왕정의의 셋째오빠는 국민당의 관리를 지낸 바 있어, 진압된다. 왕정의의 부친은 병사한다. 죽기 전에 한 마지막 말은 "나는 일생동안 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한 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은 바로 딸 정의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은 것이다. 만일 내 딸이 공부를 했다면 임표가 그녀를 이렇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왕정의에게는 난장이인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역시 시집을 가지 못했다. 두 아가씨는 서로 의지해서 살았다. 집과 전답을 모조리 빼앗겼다. 임표의 체면을 봐주어서, 규방은 그녀 둘이 살도록 남겨주었다. 어떤 사람은 왕정의에게 시집가라고 권했다. 그러나 왕정의는 말한다: "일처리가 바르지 못하면 뒤에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는다. 육용(임표의 본명)은 다른 사람을 찾았지만, 나는 찾지 않겠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말했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뭐라고 하도록 하지 않겠다. 나는 옥쇄할지언정 흰색을 바꾸지는 않겠고, 대나무를 불태워도 절개는 바꾸지 않겠다. 나는 살아서도 임씨집안의 사람이고, 죽어서도 임씨집안의 귀신이다." 1960년, 호북에 대기근이 발생한다. 임가대만에서는 임표에게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청한다. 그때 왕정의의 이야기도 전한다. 임표에게 왕정의는 아직도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임표는 가볍게 웃으며 말한다: "그녀가 아직도 나를 기다린다고?" 이 순간 얼굴은 잠시 발그레졌다. 임표는 섭군과 상의한 후, 왕정의를 집으로 불러 보모로 쓰기로 한다. 나는 두번째로 임가대만으로 간다.

 

땅은 헐벗었고, 사람이 사람을 먹는 지경이었다. 이 즈음 왕정의의 생활은 아주 곤궁했다. 그녀는 포혜(布鞋)을 만들 줄 알았다. 여동생이 바깥으로 나가서 낡은 베를 구해오면 그녀가 신발을 만들었다. 시간이 흐르자, 그녀의 오른 손가락에는 깊은 홈이 패인다. 그녀는 신발을 팔아서 식량을 구했다. 중매를 서려는 사람들은 매번 그녀에게 거절당한다. 몇년전에 한 생산대장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했다. "너를 보자마자 내 바지가 다 내려갈 뻔했다." 왕정의는 굳게 거절한다. 생산대장은 화가나서 말한다: "남자도 없는 냄새나는 아줌마!" 왕정의는 한바탕 곡을 하고 여동생에게 말한다: "남자가 없지만 있는 척하자." 이때부터 그녀는 임명경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임표의 아버지는 얼굴이 붉어져서 마치 남의 집안 것을 훔친 것같았다.

 

나는 다시 왕정의를 만난다. 그녀는 늙었다. 그녀는 베나무 아래에 정좌하고 앉아서 신발을 만들고 있었다. 곁에는 몇 켤레의 포혜가 놓여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주름이 나타났고 약간 말랐다. 머리카락은 여전히 많았지만, 흰 머리칼과 검은 머리칼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아주 집중하여 포혜를 만들고 있었다. 햇볕은 아주 좋았다. 그녀의 손에서 은빛 침을 볼 수 있었다. 간부 모양의 옷을 입은 사람이 그녀의 앞에 멈추어 섰다. 그녀는 놀라서 침에 손이 찔린다. 손에서는 붉은 피가 꽃처럼 흘렀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입으로 손가락을 빨았다. 회백색의 머리카락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그 사람이 말한다: "신발을 사겠다." 돈을 내려놓았지만, 포혜를 집지 않았다. 왕정의는 포혜를 집어서 건네주었지만, 그는 받지 않고 가버린다. 그는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다. 가련한 왕정의를 도와주려는 것이다. 왕정의는 쫓아가서 돈을 그에게 돌려준다. "나는 당신의 돈을 그냥 받을 수 없다." 그 사람은 할 수 없이 포혜를 한 켤레 받아서 간다.

 

나는 온 뜻을 얘기한다. 나는 왕정의가 기꺼이 응락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는 얼굴색이 차가워지더니 말한다: "나는 안간다."

나는 말했다: "섭군 동지가 재삼 당부했다. 당신 혼자서 농촌에서 너무 힘들게 사니. 당신을 북경으로 데려오고싶다고."

왕정의는 차가운 웃음을 남기고 방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사람들은 문앞에서 기다렸다. 왕정의가 마음을 바꾸기를 기다렸다. 조금 있다가, 동생 왕금의(汪金宜)가 나와서 말한다:

"언니가 말하기를 동사영풍참(凍死迎風站), 아사불만요(餓死不彎腰). 얼어죽어도 바람을 맞고 서있을 것이고, 굶어죽어도 허리를 굽히지 않겠다. 당신들은 더 권하지 마세요."

 

나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저녁후 나는 다시 촌간부와 왕정의를 만나러 간다. 왕정의와 여동생은 모두 집에 없었다. 촌간부는 머리를 탁 치더니. "그렇구나" 하더니 말한다. 어느 촌민노파가 오늘 자식을 낳는데, 왕정의는 분명 거기에 도와주러 갔을 거리고. 최근 임가대만의 어느 집에 자식을 낳으면 왕정의는 꼭 간다고 한다. 그녀는 아이를 좋아하고, 임산부가 애낳는 것을 도와주기를 즐겨했다고 한다. 사람들도 그녀가 오면 좋아했다. 한가지 규칙이 있다: 갈때는 기뻐서 가지만, 올때는 우울해 한다. 어떤 때는 병이 들기도 한다. 아마도 촉경생정(觸景生情)일 것이다. 왕정의는 오십여세이다. 그녀와 같은 나이의 여인들은 대부분 자손이 많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서 외롭게 살고 있다. 내심으로 고통이 심했을 것이다. 한 해는 강에 더러운 플라스틱 완구인형이 떠내려 왔다. 왕정의는 건져올려서 깨끗하게 씻고는 침대옆에 두었다. 인간세상의 비극은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여인으로 태어나서, 처가 되고 모친이 될 권리를 잃다니. 다른 사람들이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보면 그녀는 어찌 영혼과 육체의 고통을 겪지 않았겠는가? 아가씨, 당신은 연약한 몸 속에 얼마나 강인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인가. 촌간부가 가서 그녀를 찾았다. 작은 강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그녀와 마주쳤다. 왕정의는 조용히 말한다: "아이를 낳는데 피를 세 통이나 흘렸다." 목소리는 비감했다. 돌연 그녀는 헛발을 디뎌 강에 빠진다. 강은 깊지 않아서, 그녀 스스로 기어올라왔다. 그리고 여동생에게 말한다: "강물이 원래 뜨거웠구나."

 

임표는 왕정의의 상황을 보고받은 후,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섭군의 눈은 촉촉해 진다. 나중에 그녀는 황강지구정부에 지시하여 왕정의에게 "광영혁명노인"증서를 주도록 한다. 그렇게 하여 지방에서 특수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왕정의가 죽은 후, 증서는 그녀의 여동생이 보관한다. "9.13"사변후에 회수된다.

 

4) 1963년 가을, 황강시위는 전보를 보낸다: "왕정의의 병이 위중하다." 임표는 나에게 다시 임가대만으로 가라고 지시한다.

 

근1년간 왕정의의 몸은 아주 좋지 않았다. 각혈도 했다. 어제는 일찍 일어나더니 그녀가 말했다. "시간이 되었다." 여동생에게 자신을 부축해서 형룡산 뒤의 작은 길로 가자고 한다. 그녀는 힘없이 한 돌맹이 위에 앉아서, 깊이있는 눈으로 이 낯익은 작은 길을 훑어보았다. 40년전에, 한 소녀가 이 곳에서 연소했다. 오늘 한 노인이 이곳에서 열반한다. 인생은 오래 가기 어렵다. 청산도 백두로 바뀐다. 오로치 처연한 애정만이 영원히 남는다. 여동생은 울었다. 그러나 언니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녀의 눈물을 이미 말랐다. 그녀는 조용히 석상처럼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그녀는 쓰러진다.

 

나는 급히 왕정의의 집으로 갔다. 배나무는 이미 늙었다. 배나무도 울고 있었다. 마른 나뭇잎이 떨어져 내린다. 왕정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여동생은 침대 앞의 숯불쟁만에 무언가를 태우고 있었다. 소학생이 쓰는 공책이었다. 그 위에는 비뚤비뚤한 글자가 가득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왕정의는 몰래 글을 배웠구나. 이 아가씨는 마지막 순간까지 항전했구나. 나는 눈물이 흘렀다.

 

왕정의는 여동생에게 말한다. "금의, 언니의 머리를 빗겨줘라." 여동생이 그녀를 부축해서 앉혔다. 그녀의 머리는 모조리 흰색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무성했다. 여동생이 가볍게 머리를 빗겨준다. 왕정의의 입에는 있는듯 없는듯 미소가 떠올랐다. 임종때, 왕정의는 여동생에게 당부한다: "내가 죽은 후 나를 산에 묻어도 좋다. 나의 묘 옆에는 빈 무덤을 하나 말들어 두어라. 그것은 그의...." 말을 마치고, 왕정의는 영원히 눈을 감는다. 나중에 내가 듣기로 같은 시간에 북경, 임표가 있는 서재에 태양이 비추는데, 한 마리의 제비가 유리창에 부딛쳐 죽었다고 한다. 임표가 말했다: "왕정의가 죽었구나"

 

1963년 가을, 왕정의는 세상을 떠난다. 임종때 이렇게 말했다: "나의 일생은 명이 좋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그녀의 후사를 처리하다가, 그녀의 베개 아래에 임표가 그에게 보내준 붉은비단옷과 임표가 그녀에게 준 두터운 돈이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임씨집안에서 이 소식을 듣고는 모두 깜짝 놀란다. 족보를 만들 때, 임씨집안사람들은 왕정의의 일생을 동정하여, 임표의 이름 아래에 그녀의 이름을 써넣는다. 그리고 "빙(聘)"이라고 써둔다. 그 뜻은 집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경의 임표는 이 소식을 들은 후 탄식한다: "세상에 어찌 이런 여자가 있단 말인가...."

 

她7岁许配林彪,结婚时被抛弃,后收到林彪3000元却至死未动

 
来源: 栗子找事  举报

(说历史的女人——第1508期)

林彪在十大元帅中是最特殊的一位,他是唯一被打上负面标签的人。不过功是功,过是过,他在中国战争史上也是很有地位的,甚至有战神之称。他在他戎马生涯的各个阶段都有很精彩的发挥。另一方面,也如他的骄人战绩一样,他的爱情生活也是丰富多彩,被后人津津乐道。

一般认为,林彪前后共有三位夫人,大家比较熟悉的是叶群,但在叶群之前他已经结婚两次。本文讲述他原配夫人的故事。她是一位很普通的农家女,普通的让许多人都不知道她的存在。然而,上帝面前人人平等,她也曾在世界上存在过,也应该让人知道:她7岁被父母许配给林彪,却在结婚时被抛弃;后来她收到林彪给她的3000元钱,却至死都没有花一分……

(一)七岁定终身

她有个美丽的、很诗意的名字,叫汪静宜,这个名字如今看来都不过时;事实上,林彪后来著名的妻子叶群本来也叫这个名字,即叶静宜,她不想同林彪的前妻重名,后来才改为叶群的。

本来汪静宜也不叫这个名字,这是林彪给她改的(能给她改名,也证明林彪曾对她关注过);她原名叫汪伯梅,当然这个名字也顶好了,证明她家也是有一定文化积淀的。

汪静宜于1907年12月6日,出生在一个如今享誉中国教育界的地方,即湖北黄冈。她的家乡在黄冈也是叫得很响,即回龙镇,距林彪家(林家大湾)仅有16里的距离。说来汪家跟林家也是世交,汪静宜的父亲汪友诚同林彪的父亲林明卿是很好的朋友。

有天汪友诚到林家做客时,向林明卿提出了两家结亲的事,这在旧时是很正常的现象。再说,汪家的女儿汪伯梅和林家的儿子林彪年龄相仿,她只比林彪小一天,从生辰八字上看二人还是很般配的。林明卿也没多想就答应了。于是1914年,农历正月初四,林家办了两桌酒席,把这事就定下了。当时林彪和汪静宜都才7岁。两个小娃娃什么也不懂,全凭大人说了算。

然而,这两桌酒席,却把7岁的汪静宜定了终身。自此,她便永远地成了林家的人了。

(二)男儿不展风云志,空负天生八尺躯

林彪小时候也不叫林彪,他叫林育蓉,一个很女孩的名字。旧时,一般父母给男孩起女性化名字的,都是对儿子比较娇宠的。林育蓉自小体弱,经常会有点小病小灾,使他长得比较瘦小。待他上学时,父亲就给他取了个比较大气的名字,叫“彪”。彪者,虎也,是为了让儿子像老虎一样长得壮实,而且要成就一番事业。也有说法是,林彪这个名字是他后来给自己改的。无论如何,这是个充满霸气的名字。

林彪9岁上私塾,13岁就进新式学堂了,看来林父对教育还是很有前瞻性的。接触新式教育的林彪后来对爱情有了自己的认识。其实他在少年时便情窦初开,不过他喜欢的并不是被定了娃娃亲的汪静宜,而是另有其人。她叫陆若冰,人如其名,长得清清秀秀,冰清玉洁。她比林彪大一岁,她家离林家更近,仅三里路。也许是近水楼台,林彪小时候就跟她很好,有点青梅竹马的味道。

林彪在17岁时到武昌的共进中学读书,而陆若冰却进了安庆女师,他们二人只有鸿雁传书了。那时林彪对陆若冰是真的喜欢,于是就写情书表白了。但陆若冰却是一个比较理智的人,她没有接受林彪的追求,还劝他先把书读好再说。陆若冰的话还真刺激了林彪的自尊心,本来就胸有大志的他,自此发下宏愿:“男儿不展风云志,空负天生八尺躯!”

其实根据后来陆若冰的回忆,当时她拒绝林彪还有另一个原因,即“林彪已经有未婚妻了,我不能做拆人家墙角的事。”这个未婚妻就是汪静宜。(实际上,陆若冰内心真正喜欢的人是林彪堂兄林育南,后因家庭原因,两人未能结婚,后林育南牺牲,但陆若冰对林育南之爱却始终没变。)

林彪说到做到,他要去干一番事业,不想早结婚。1925年秋,林彪从武昌共进中学毕业后,父母想叫他到家乡附近谋个教师的职业,好照顾家里,言外之意,就是让他早点结婚成家。但此时林彪的志向早已超过父亲的预想,他在学校已经是团支部书记了。金麟岂是池中物?他有更大的抱负。于是他说服父亲继续求学。

1925年10月,林彪考入黄埔军校第四期。

(三)逃婚

林彪在黄埔军校如鱼得水,眼看一个军事天才将要诞生,一只大鹏鸟将要展翅高飞,于是林父慌了。

由于林彪考上黄埔后一直没有回过家,所以他在1926年底给父亲林明卿写了封信,说明自己最近的情况,不是我不回去,而是确实走不开。那时林彪参与了北伐战争,被分在国民革命军第四军独立团,部队正在武汉休整。

林父收到信后,把信又转交亲家汪友诚看,证明自己的儿子确实重任在身。因为汪友诚实在是等不及了,眼看女儿汪静宜都19岁了,在那时已经是大龄了。汪友诚看完信,就让林明卿想办法把儿子弄回来,跟女儿成婚。于是林明卿回家后就跟妻子陈氏商量对策……

数日后,林彪就收到父亲的一封信。林彪看信后大吃一惊!信中如此说道——

育蓉吾儿:

时光过得真快,转眼你离开家又有一年多了,前不久听人说,你参加了北伐军……父已年老,近来更是一天不如一天。特别是近月来,父已病入膏肓,至今再也不能下床行走了。望吾儿能在繁忙中抽空回家一趟,看一眼你可怜的父亲……

林彪也是个孝子,即便不太孝顺看到这样的信也不能不动容。于是他就请假回了一趟家。

那年的腊月二十八,一身戎装的林彪回到了离别一年多的家乡。可当他急匆匆地推开家门时,却发现父亲好好的,一点也不像有病的样子。

原来父亲是以生病为由把他骗回来同汪静宜结婚的。林彪十分生气,当场就向父亲拒绝了,并且提出要和对方退婚,他对父亲说,如今都什么时代了,都提倡爱情自由的。他还想同父亲讲大道理。结果遭到父亲的大骂,并告他说:“你绝没有退婚的道理!”意思很明确,这婚你结也得结,不结也得结!

林彪自幼就比较害怕父亲,也确实感觉此时退婚有点无道理,于是就默认了。

第二天,林彪按父母的吩咐带着一些礼品和一件红绸嫁衣来到汪家。因为按当地的风俗,姑娘出嫁的嫁衣要男方做好并送到女方家里的。

“丈母娘见女婿,横竖都可以”。岳父岳母见林彪来了,自是欢喜的不行。于是岳父就趁机同林彪商议他的婚姻大事。

“彪儿,这就要过年了。这次回来能多呆些时吧?要不瞅个日子,把事办了吧。”毕竟林彪也是一军官了,岳父还是很客气的。

林彪却苦着脸,显出很为难的样子说:“不行啊,这次只有四天假,办事也太仓促了吧,要不,以后再说吧……”

此时的汪静宜就躲在里间的屋子里,一听林彪这话,心里咯噔了一下。

只听汪父又说,“彪儿,我跟你父亲都是多年的老交情了,正因为这,我才把女儿许配给你。我知道你是个知书达礼的孩子,你可不能耽误了静儿的青春啊!”

故事讲到这里出现了分歧。因为历史人物,特别是具有传奇色彩的人物,他们的故事往往不会仅有一个版本。所以笔者在此尽量做到客观。

一种说法是林彪被岳父“说服”,当场没有反对岳父的提议,答应就近完婚;另一种说法是,林彪坚持己见,说等北伐胜利后,再回来同未婚妻完婚。在此,笔者倾向第一种说法,因为汪父好不容易见着林彪了,他肯定要抓住这个机会让女儿完婚的。因为他也不傻,这林彪素有大志,如果把他放走,谁知道什么时候再回来呢。

于是两家开始匆匆忙忙准备婚事。两天以后,即大年初一那天,林家举办了婚礼。

这天大家都很热闹,唯独林彪郁郁寡欢。接受新思想的他实在是不愿面对这位没有感情基础的新娘。在洞房花烛夜,林彪经过反复思索,找了个借口逃了。他走时对着父母的房间深深地鞠了一躬,然后扭头便向武昌奔去……

对于这个情节,也许不少人不认可,这样林彪岂不是太不仁不义了?如果你不相信,那么还有另一个版本,就是林彪当时根本就没有答应双方的父母同汪静宜成亲,他提前回到了武昌;而且再也没有回来,让汪静宜空等了他一辈子。这样的结局也同样残忍。

事实上,对于第一种版本,历史上出现的例子并不少。比如鲁迅先生,他当初跟朱安也是拜过堂的,但是他也逃离了。林彪跟他一样,只是拜了堂,事实上,跟妻子并没有婚姻之实。在此笔者仍倾向于第一种说法。

(四)汪静宜的悲情坚守

林彪在婚礼之夜回到部队后,立即给父母和汪静宜写了一封信,大意是,我已投身革命,前途未卜,不知何时就会身首异处。所以请汪静宜原谅我的不仁不义,别浪费了自己的青春,另嫁他人吧。也请父母大人原谅他的不孝。

收到林彪的信后,父亲大骂不止。汪静宜却大哭失声,并发誓此生决不另嫁,她生是林家人,死是林家鬼!后来她确实说到做到,不管父母家人如何劝说,她坚决拒绝任何人的提亲,终身未再嫁人,一直在林家侍奉林彪的父母。这一点颇有点像鲁迅的朱安,不管丈夫承认不承认,反正自己承认是婆家的人了。

大革命失败后,林彪彻底同家里失去了联系。直到1937年,国共第二次合作,林彪才与父亲通了信。知道儿子的下落后,林父就写信让他把汪静宜接到延安去。不过当时林彪正处在和张梅的热恋中,一接到父亲的来信,他便很快同张梅结了婚,并把两人的结婚照寄回了老家。这下林家也没有办法了。林父向汪家赔礼道歉,汪家人尽管生气,也没有任何办法。战乱年月,这种事情很多,当时谁都没法较真。

1938年秋,日本人攻到湖北,林彪父亲带上一家老小逃难走了,汪静宜回到了娘家。当时林彪的哥哥林庆佛留在家里没走,他尊父命,对汪家有所照顾。后来汪家的房屋被日本人烧毁,父亲汪友诚带着一家逃难,然途中父亲病故;汪静宜只得带着年迈的母亲和得了侏儒症的妹妹继续逃难,曾经以乞讨为生。最后她们在黄冈的香炉山上定居。

从此,汪静宜过着十分清苦的生活。她一直没有考虑过嫁人。有人劝她再嫁人时,她总摇摇头说:“玉碎不改白,竹焚不改节,烈女不嫁二夫!”在她的内心深处,似乎还在等着她的林郎的回归……

1954年(一说是1959年),林彪回到故乡,他想见见汪静宜。但汪静宜却不愿见他。他叫来公社领导,问汪静宜的情况。公社领导说:“她家里已经没什么人了,不过她身体还好,现在靠做鞋子生活。是不是叫她来见见您啊?”

林彪摇摇头,叹了口气说:“既然她不情愿,就算了吧。”于是他拿出3000元钱让公社领导转交给汪静宜。并嘱咐他说:“如果她问是谁给的钱,你就说是党给的。”

3000元钱在当时不是个小数目,当公社领导拿着钱见汪静宜时,她有点迟疑,当然不会随便接受。她一再问公社领导,“这钱到底是谁给的?你不说实话,我就不收!”

最后,公社领导让汪静宜发誓不向外人讲的情况下,才告知钱是林彪给她的。汪静宜最终接下了那3000块钱,却流着泪说:“真是他给的吗?他还没忘了我啊?”

如果按当时的物价,3000块钱就是一小笔财富了,汪静宜一个人生活,可以什么都不干,也能生活的像模像样。可她不,她是习惯了劳动的人,她照旧以做鞋子为生。她一天到晚不停地忙碌着。也许她是以此来打发寂寞的光阴,或者实现自我价值?或者是为了社会主义建设?没有人去追究。

不过,自那以后,汪静宜的鞋就不愁销路了,当地的供销社会定期去上门收购一次。她还获得了政府发的“光荣革命老人卡”,每月可以领到上级发的一部分生活费。

上世纪60年代初,汪静宜得了肺病,一直都没有好,她也不愿去治,最后都瘦成一把骨头了。1963年(一说是1967年)汪静宜离开了人间,她共活了56岁或者60岁。没儿没女,孤苦伶仃的汪静宜死时说了这样一句话:“我这辈子可真命苦啊……”

人们在清理汪静宜的遗物时,发现了她的箱子底部还放着当时林彪送给她的那件红绸嫁衣,另外还藏了一包钱,钱包得严严实实,一数,正好是3000元。原来,林彪给她的钱,她至死都没有动。在场的人都潸然泪下……

后来在林家湾保存的《林氏宗谱》里,林彪的名字后面写着他三个妻子的名字,叶群排在第三位;张梅排在第二位;排第一位的是汪静宜。

而今,当人们提到大名鼎鼎的林彪的时候,也请不要忘了他曾有个媳妇,她有个诗一样美丽的名字,叫汪静宜……

(文/说历史的女人·花无去)

参考资料:《林彪传》《林彪的五段情史》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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