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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나라의 백은(白銀) 1냥(兩)은 현재 화폐(貨幣)로 얼마나 될까?

所谓的“康乾盛世”真有宣传中的那么美好吗?

 

: 일갱역사(一更歷史)

청나라는 중국역사상 최후의 봉건왕조(封建王朝)이다. 청나라의 전, 중기는 강희(康熙), 옹정(雍正), 건륭(乾隆)의 세 황제의 통치를 거치면서 사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추세였으며, 민생경제도 대폭 제고되었다. 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강건성세(康乾盛世)'라 부른다.

 

이 시기에 백은(白銀)은 청나라의 주요 화폐로 시중에서 유통되었다. 그렇다면, 청나라의 백은 1냥을 현재의 인민폐로 환산하면 대체로 얼마의 가치(價値)가 될까?

 

우리는 청나라중기를 예로 들어보자. 관련 문헌기록에 따르면, 강건성세(康乾盛世) 때 시중의 품질이 우수한 쌀 1되의 가격은 10-15()이었다. 1()1,000()이다. 1되의 쌀은 1.5근이다.

 

, 청나라중기의 백은 1냥은 150근의 우등쌀을 살 수 있었다. 쌀을 시장에서 사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각지의 대형 수퍼마켓에서 판매되는 동북의 우등쌀 오상대미(五常大米)의 근당 가격은 5-5.5위안이다.

 

같은 양의 쌀값으로 환산하면, 백은 1냥은 750위안(한화 14만원정도) 인민폐가량이라 할 수 있다.

 

경제학의 원칙대로라면 서로 다른 시기의 화폐의 구매력을 비교할 때, 당시의 실제상황 엥겔계수와 상대구매력(相對購買力)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비로소 적절한 환율을 찾아낼 수 있다.

 

쌀값만으로 환산하는 것만으로 확실하지 않다면, 우리는 다시 집값을 가지고 환산해보기로 하자.

 

사서(史書) 기록에 따르면, 청나라 건륭연간 북경 서성구(西城區)14칸짜리 사합원이 한채 팔렸다. 가격은 백은 600냥이었다. 지금 북경 서성구의 사합원(四合院)의 가격은 분명 3천만위안(한화 약55억원)이상일 것이다.

 

이렇게 계산해보면, 청나라중기의 백은 1냥은 최소한 현재의 5만위안(한화약950만원)의 가치가 있다.

 

그러나, 집값으로 환산하는 것도 실제에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다. 다시 당시의 청나라 국가연간세금과 노동자의 실제보수, 그리고 생활필수품소비(生活必需品消費)를 가지고 계산해보면 당시의 백은은 얼마의 가치를 지닐까?

 

청나라중기, 국가의 매년 세수는 개략 백은 8천만 내지 9천만냥을 오갔다. 청나라후기에 이르러, 국가의 매년 세수는 1.2억냥으로 올라간다.

 

우리는 중간치를 취해서 청나라중기의 국가매년 세수를 개략 백은 1억냥이라고 계산해보기로 하자. 2018년 중국의 국가세수는 1.5조위안에 달한다.

 

청나라시기 최고인 1억냥의 세수와 2018년 국가세수를 비교하면, 청나라 때의 1냥은 현재의 15위안(한화 약 2800)이 된다. 이 숫자는 너무 과장되어 있으니 잠시 고려하지 말도록 하자.

 

<대청회전칙례(大淸會典則例>의 기록에 따르면, "친왕(親王)의 연간 봉급은 백은1만냥, 군왕(郡王)의 연간봉급은 백은5천냥, 패륵(貝勒)의 연간봉급은 백은2,500, 패자(貝子)의 연간봉급은 백은1,300, 1품 관리의 연간봉급(年間俸金)은 백은 180, 2품은 백은 155, 3품은 백은 130, 4품은 백은 105, 5품은 백은 80, 6품은 백은 60, 7품은 백은 45, 8품은 백은 40, 정구품은 백은 33.1, 종구품은 백은 31.5냥이었다.(이렇게 계산하면 당시 1품 관리의 매년 봉록(俸祿)으로는 2.7만근의 쌀을 살 수 있었다)

 

당연히 이는 당시 상류귀족계층(上流貴族階層)의 수입이다. 보통사람으로서는 바라지도 못할 금액이다. 증국번(曾國藩)은 청나라의 중신인데 그에게는 좋은 습관이 있었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조리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었다.

 

증국번(曾國藩)이 남긴 기록을 보면, 청나라중기, 청장년남자가 노동력을 팔아서, 매일 벌 수 있는 돈이 30문이었다. 월급은 1000문 가량이다. 이는 백은 1냥에 해당한다.

 

기술이 있는 노동자, 예를 들어, 철장(鐵匠), 목장(木匠)의 매일 급여는 100-150문가량이었다. 이들 기술노동자들은 매일 일거리를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날씨가 좋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었다. 청나라의 고급기술자(高級技術者)들의 매월수입은 개략 2천문가량 즉 백은 2냥정도로 볼 수 있다.

 

1년 동안 열심히 일을 해서 총수입이 백은 10냥이면 상당히 괜찮은 편이다.

 

지금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매달 실제로 손에 쥐는 수입은 4천위안 가량이다. 기술노동자들의 급여는 7-8천위안에 이른다. 이렇게 계산하면, 청나라중기 백은1냥은 현재의 3천위안(한화 약57만원)이 된다.

 

그 외에, 증국번(曾國藩)은 일기에 당시의 일용품과 식품의 가격도 상세히 기재해 놓았다.

 

증국번(曾國藩)은 엄육(腌肉)을 좋아했다. 그는 도광21년 정월 백은 1냥으로 15근의 엄육을 구매한다. 증국번의 동료인 이씨성의 관리는 함채(鹹菜)를 좋아했다. 그가 정월 초이틀 백은1냥으로 시장에서 10근의 대두채(大頭菜)10근의 배추, 합계 20근의 함채를 구매한다.(함채 1근이 개략 50문이다)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연말연시가 되면 새로운 의상도 구해야 한다. 역시 그 이씨성의 관리가 함채를 산 후에 다시 백은1냥을 주고 면상의 1벌을 만든다.

 

그의 기술에 따르면, 이 면상의는 단오(短襖)이다. 만일 장포(長袍)를 만든다면 백은3냥을 들여야 한다. 비단이 추가되면 제작가격은 백은5냥을 넘어선다.

 

<요재지이(聊齋志异)>의 작자인 포송령(蒲松齡)이 서당 선생으로 있을 때, 1년의 속수(束脩, 급여)는 겨우 백은4냥이었다. 비록 숙식을 제공받았지만, 이 돈으로 포송령의 일가족이 먹고사는데 불충분했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여러분들은 청나라중기의 일반민중의 매월수입에 대한 개략적인 개념이 잡힐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수입으로 얼마나 많은 물건을 구매할 수 있을지도.

 

청나라 때의 기술노동자의 매월수입은 기껏해야 백은2냥인데, 당시 시중에서 단면오(짧은 면웃옷)를 한 벌 제작하는 비용이 이미 백은 1냥이다. 함채 1근의 가격도 50문이나 된다. 그래서 당시 백은1냥의 실제구매력은 근본적으로 오늘날과 나란히 비교할 수 없다.

 

어떻게 보더라도, 우리가 3천위안으로 슈퍼에 가면 최소한 품질이 뛰어난 면의 4벌은 살 수 있다. 같은 이치로 3천위안이면 수퍼에 가서 100근의 돼지고기를 살 수 있다. 이런 구매력을 청나라사람들은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고대에는 물자가 결핍되어 있었다.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평생 쌀이나 흰밀가루를 먹어보지 못한다. 양수청(楊秀淸)의 모친은 죽기 전의 소원이 바로 흰쌀밥 한 그릇을 먹어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바램도 양수청은 이뤄주지 못했고, 평생의 한이 된다.

 

청나라 때 1()의 밭은 200-300근의 식량을 수확할 수 있었다. 지금은 1무의 밭에서 1000근의 식량을 수확가능하다. 그 외에 봉건사회는 체력노동자들이 1년 동안 은자 몇 냥도 벌지 못했다. 은자는 가치가 아주 높은 화폐의 종류이고, 결국 낮은 생산력과 높은 식량가격을 불러온다.

 

만일 쌀값으로 계산하면 청나라의 백은 1냥은 현재의 200-300위안에 상당한다. 국가세수로 환산하면 백은1냥은 1000여 위안에 상당한다. 이런 계산방법은 어느 정도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다.

 

80년대의 만원호(萬元戶)를 지금으로 보면 실제구매력(실제구매력이 200만 위안은 될 것이다. 다만 상대적인 구매력, 사회적 영향력은 최소한 지금 수천만 위안을 가진 부자에 상당할 것이다.

 

설사 청나라중기라 하더라도, 일반가정의 1년 수입으로 백은 몇 냥이면 괜찮은 편이었다. 드라마에서 걸핏하면 식사한 후에 식사비로 백은1냥을 내는 장면은 아마도 그저 스크린에서나 나올 수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러 방면의 정보와 자료를 종합해서 환산해보면, 청나라중기의 백은1냥은 현재의 인민폐로 환산할 때 개략 700-750위안정도가 될 것이다.

 

煮酒君:所谓的“康乾盛世”真有宣传中的那么美好吗?

煮酒君:所谓的&ldquo;康乾盛世&rdquo;真有宣传中的那么美好吗?


文/煮酒君
清朝时期的“康雍乾”三朝,是大清帝国鼎盛时代,历来被后世所推崇,誉为“康乾盛世”。中国在这三位有为的皇帝所治理下,其统治疆域仅次于元代,成为中国历朝历代少有的幅员辽阔的国家。也因为它的武功,奠定了中国现在统一的多民族国家的雏形,而它不仅在深度上,也在广度上,都超过了历代。

所谓的“康乾盛世”真有宣传中的那么美好吗?

在一百年多年中,政局稳定,经济发展,清朝的中央政府做了很多大事。调动全国人力、武力抵御了俄罗斯的扩张;彻底消灭了准噶尔汗国,收复了新疆;打击了西藏的叛乱;治理西南,“改土归流”;收复台湾等。同时,在文化上也有很大发展,譬如编修《四库全书》、《康熙字典》,直到现在,这些伟业还在润泽后代。

虽然“康雍乾”时期留给后代一些珍贵的资产,但是也让中国失去了很多东西。而且失去的代价,甚至其后的一个世纪都能感到它的沉重。譬如,闭关锁国的制度,彻底隔绝了与国外的交流,使得中国与西方的工业文明失之交臂。其后发生的鸦片战争,以及一系列丧权辱国的条约,皆与此有关。更为重要的是,在这三朝“有为”君主的治理下,文字狱大兴,文化思想领域万马齐喑,尤其是雍正、乾隆时期,厉行集权,有骨气的知识分子被整肃杀头,导致人才不断消磨,官僚腐朽,不仅国家的生机被窒息,抵御敌人的实力也在乾纲独断之中迅速消减。

所谓的“康乾盛世”真有宣传中的那么美好吗?

纵观康、雍、乾三朝的文字狱,发展趋势有高有低、有严有松,但是大趋势是愈来愈炽烈。康熙少年登基,朝中一切政事,基本上无从插手,直到在一六六九年五月,也就是康熙八年,他开始亲政,结束了四位辅佐大臣的联合执政时代。他开始控制“文字狱”的泛滥,调整对汉族知识分子的政策,从康熙亲政到“《南山集》案”发,在康熙统治的四十年内,只发生过一起较为著名的“朱方旦案”。当时的知识界很是活跃。一些前朝的遗老开始撰写明朝的历史,譬如有计六奇的《明季南略》、《明季北略》,温睿临的《南疆逸史》等,都在这时期完成。王夫之在《读通鉴论》中左“夷狄”,右“异类”,康熙也不以为杵。甚至还专门规定:“凡旧刻文卷,有国讳勿禁;其清、明、夷、虏等字,则在史馆奉上谕,无避忌者。”康熙时期,总体来讲,对于知识界,思想领域的控制并不严厉,不少案件其实汉族知识分子之间互相攻讦、构陷所致。康熙曾经对李光地说:“你们相倾相害,满洲谁害汝!”

所谓的“康乾盛世”真有宣传中的那么美好吗?

雍正执政后,“文字狱”开始严厉起来,案件也增多。雍正三年十二月,大将军年羹尧被雍正赐死,接着便发生了汪景祺的“《西征随笔》案”和钱名世的“作诗寄赠年羹尧案”,这其实在清理年羹尧的余党。汪景祺是年羹尧的幕宾,他曾经写诗讽刺康熙,诅咒“雍正”年号有“一止之象”,所以被清朝政府认定犯了”悖逆”的大罪,而且他还在《功臣不可为论》中写道,劝年羹尧别打算做功臣,如果坚持这么做,结果必然会因为功高震主,而死无葬身之地。这些话怎么会容于清朝政府,所以,雍正抓住汪景祺,直接将其砍头处死。

钱名世在当时属于著名文化人,很有点社会地位,他看到年羹尧位高权重,便刻意吹捧,当年羹尧被雍正处死后,他曾经的马屁诗作转眼变成了“朋党”罪证。雍正以“文词谄媚奸恶,为名教所不容”为由,革去其职务,发回原籍。并且还让地方官员把他亲自书写的“名教罪人”四个字的牌匾,悬挂在钱名世的住宅门上,要求地方官定期查看,如果未悬挂,当即治罪。这样还不算,雍正发动朝中官员,人人表态,而且要求写诗攻击钱名世,最后编辑成书,交给钱名世保存。雍正下令,出版这些“刺钱”的诗文,以《御制钱名世》为书名,向各省的学校颁布一部,用以教训天下的读书人。这种“打翻在地,还要踏上一万只脚”的做法,虽然没有砍脑袋,但是却诛其心,生前蒙羞,死后也遗臭万年。而雍正则靠着严酷的措施,让统治下的全国知识分子彻底来了一场“触及灵魂”的“洗澡”运动。

乾隆登基后,因为父亲的口碑在知识分子中实在太差,同时清朝政府也彻底的巩固了统治基础,便开始调整雍正时期的极端做法,文禁不再如前朝严酷。乾隆在执政前十年,除了“谢济世私注经书案”,几乎没有特别重大的文字狱。谢济世在雍正时期因为私注《大学》被惩罚,乾隆执政后,他被重新起用,官复原职,担任御史。谢济世觉得机会来临,重新将自己私注的经书送给乾隆,并且上疏,建议:“去邪勿疑”、“出令勿贰”。这一下触怒了乾隆,皇帝因地位特殊,当然可以指摘皇考之中的一些失误,哪里能够让手下大臣说东道西。乾隆对谢济世极为不满,斥责他“摭拾浮言”。谢济世中央的官既然做不成,贬谪为湖南粮储道回到老家奉养老娘。可是湖南巡抚蒋溥早就与他有矛盾,看他灰头土脸回到老家,趁机落井下石。蒋溥秘密给乾隆上书,声称谢济世刊印《大学注》、《中庸疏》。乾隆就让湖广总督孙嘉淦彻查此事,但故意给孙的指示中写道:“(谢济世)识见迂左”,“至其居官,朕可保其他也”。这摆明了乾隆不想扩大此事。随后,谢济世的书籍被毁版销毁,而官位依然保留。

所谓的“康乾盛世”真有宣传中的那么美好吗?

但是乾隆十六年开始,全国各地出现伪造孙嘉淦的奏稿一案后,乾隆便开始大兴文字狱。孙嘉淦是当时朝中著名的敢于直谏的大臣,在此前的一年七月,江西千总卢鲁生和守备刘时达为了阻止乾隆劳民伤财的南巡,合谋伪造了孙嘉淦指责高宗失误的奏稿。乾隆发现后,开始彻查,这一查不要紧,全国各省乃至西南土司地区,都有伪造的奏稿暗中传阅。这其实也从一个侧面说明,乾隆南巡的不得人心。乾隆看到继续查下去,有可能得不偿失,对自己不利,便终止了调查,将卢鲁生凌迟处死,两个儿子处斩,刘时达处斩,草草结案。

乾隆虽然除掉了伪造者,但是,也知道仅仅他们两个基层小官伪造的奏稿,绝无可能遍及全国,这背后的“黑手”只要一天不揪出,乾隆便一天不安心。他时而怀疑是曾静张熙的余党所为,时而认为这是反清的汉族知识分子所为。他开始怀疑之前的宽容的文化政策,不仅没有换来支持,反倒出现更多异议者。这一对局势变化的判断,成为乾隆中后期大兴文字狱,文网严密政策产生了重大影响。

乾隆二十年,也就是公元一七七五年,乾隆为了消灭朝廷的朋党,打击鄂尔泰的政治势力,故意将内阁大学士胡中藻在《坚磨生诗抄》中一句“一把心肠论浊清”摘出,认定为“浊”字加在“清”字上,居心叵测。并且严厉斥责众臣:“数年以来,并无一人参奏胡中藻,足见相习成风,牢不可破。朕更不得不申我国法,正尔嚣风,效皇考之诛查查嗣庭!”胡中藻随后被斩首。广西巡抚鄂昌跟胡中藻作诗唱和,在《塞上吟》一诗中称蒙古人为“胡儿”,乾隆认为鄂昌自己就是胡儿,诋毁同类,丧心病狂,下令自杀。鄂尔泰的政治势力倒塌,张廷玉派系随即也遭到清洗。

其后,不管是江苏东台诗人、原翰林院庶吉士,早已死去的徐骏在《一柱楼诗》中有“清风不识字,何故乱翻书”;“举杯忽见明天子,且把壶儿抛半边”,乾隆认为“清风”就是暗指清廷;“壶儿”就是“胡儿”,显然诽谤政府,嘲讽满清没文化,徐被剖棺戮尸,儿孙和地方官员全部斩首指鹿为马的案件,还是之前消灭鄂尔泰大兴的“文字狱”,等等其实都说明清朝政府在思想领域的控制,不仅为了维护满族少数民族统治,内心极度惊恐自卑,更从一个侧面看出当时皇权的专制已经达到了登峰造极的地步。这与明朝时期皇权和阁权相互制衡简直不可同日而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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