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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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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로 쓰는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중에서

 

베르나르 앙리 레비(Bernard Henri Levy)사르트르의 세기라는 책으로 유명하다. 그는 20세기를 사르트르의 세기라고 명명했다. 그는 사르트르 한 사람만 보면 20세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이 칭찬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두자! 레비는 사르트르를 그저 흉내쟁이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平價切下)하였다. 20세기 내내 헤겔 흉내를 내다가 결국 헤겔이 되지 못한 사람 말이다.

 

좋든 싫든 헤겔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상가들은 많다. 어쩌면 현대 철학자들 대부분은 헤겔의 추종자와 헤겔을 반대하는 자로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헤겔은 사람의 본질을 위신을 위한 투쟁으로 보았다. “내가 너보다 잘났어! 아니 적어도 너와 동등한 입장이야!”라고 생각하는 게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 둘이 만나면 목숨을 걸고 싸움을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진정한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서 투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투쟁 끝에 한 사람이 죽는다.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를 비웃기보다는 오히려 강한 상대였다고 인정해준다. 자신과 대등한 힘을 가졌던 진정한 친구로서 후하게 장사를 지내주는 것이다.

 

반면에 한 사람이 싸움 끝에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항복을 한다면? 승리를 거머쥔 사람에게 이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더 이상 자신과 대등한 위치에 있지 않은 이는 무자비하게 밟아 버릴 수밖에 없다. 항복한 이는 자연스레 노예가 되어 피라미드와 같은 건축 노역에 동원된다. 반대로 승자는 놀고먹으며 더 이상의 노동을 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한 번 역전현상이 일어난다. 노동을 하지 않으며 방탕하게 생활하는 승자는 몸과 마음이 점차 타락해 간다. 하지만 노예는 물건을 만들어내며 기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기술을 익힌 종국에는 심지어 설계를 할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피라미드를 건축할 수 있는 지도같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신 현상학에 나오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다.

 

주인은 타락하고 노예는 일함으로써 주인이 되어 버리는 것.

 

조르쥬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는 헤겔의 이론을 빌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대한 평론을 썼다. 노인과 바다는 산티에고 노인이 40일간 아무것도 잡지 못하다가 결국 대어를 낚아 집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이다.

 

헤겔을 빌린 바타이유는 이 소설을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해석한다. 당연히 주인은 노인이고, 그의 상대가 물고기이다. 여기에 그는 서양의 군주를 끌어들인다. 군주들은 자신의 영지에 숲을 만들어 일 년에 한두 번씩 사냥을 나간다.

 

이런 사냥의 행위는 그저 군주와 같이 절대적인 힘을 가진 자들만이 할 수 있는 행위라고 한다. 승자는 패자를 노예로 만들고부터는 깊은 허망함에 빠져든다. 그 허전한 마음을 메우기 위해 군주는 사냥이라는 대체행위를 택하는 것이다. 군주와 같이 어느 정점에 올라가 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 허무한 행위를 이해할 수가 없다.

 

노인과 바다의 노인 역시 어찌 보면 이런 군주와도 같다. 그의 행위는 어떤 이에게 의미 없이 보일지 몰라도 그에겐 의미 있는 투쟁이다. 노인은 손이 터지는 아픔을 참아내며 3일간이나 물고기와 싸운다.

 

결국 노인이 물고기를 잡는 데 성공했을 때 이 둘의 싸움은 투쟁심에서 이미 동지애라는 애틋한 감정으로 이행한 후였다. 물론 나중에 상어가 나타나 물고기의 살점을 죄다 뜯어먹는 일이 생기지만 말이다. (우리는 이를 삶에 침투하는 허무라 부른다.)

 

이것이 헤겔의정신 현상학만이 설명할 수 있는 문학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

 

김윤식 <한국 근현대문학사의 지층탐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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