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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는 어떻게 운동권에 뛰어들게 되었는가?

 

[김지하를 위한 변명] ①

송철원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  |  기사입력 2022.06.03. 07:51:10
 
고(故) 김지하의 49재 날인 오는 25일 오후 3시, 서울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해원상생을 위한 '고 김지하 시인 추모문화제'가 열린다고 한다. '시인 김지하'가 아니라 '친구 지하'를 떠나보내는 마당에 감회가 새롭다. 그와 함께했던 옛 시절을 그리며 몇 자 적어 그가 저승 가는 길에 함께 띄워 보낸다. 필자.

김지하는 어떻게 운동권에 뛰어들게 되었는가?

▲ 서울대 문리대에서 김지하와 함께 행동했던 친구와 후배들이 1963년 겨울 동숭동 교정에 모여 찍은 사진으로, 김도현(정치61,서울사대부고)이 촬영했다. 앞줄 왼쪽부터 이원재(사회61,경북고), 송재윤(정치62,남성고), 박삼옥(정치62,경북고), 안택수(정치62,경북고), 둘째 줄 왼쪽부터 성유보(정치61,경북고), 김영배(철학62,경북고), 박용환(정치62,경북고), 김중태(정치61,경북고), 김지하(미학59,중동고), 박재일(지리60,경북고), 뒷줄 왼쪽부터 조화유(사회61,부산고), 김유진(정치61,경북고), 백승진(사학62,경북고), 송진혁(정치61,경북고), 이수용(정치60,마산고), 배한룡(정치61,대전고), 최혜성(철학60,대광고). 괄호 안은 학과, 학번, 출신 고등학교. ⓒ송철원
 

1.

내가 문리대에 들어간 것은 1961년이었다. 바로 그해 서울대 미술대 소속이었던 미학과가 문리대로 넘어와 지하를 처음 보게 된다. 내 기억이 틀릴지는 몰라도 그의 초창기 모습은 넥타이 잡숫고 반짝반짝하는 구두 신고 연극한다며 껍죽대어 우리들의 눈으로는 영락없는 '부르주아'였다. 한편 시끄러운 일에 항상 앞장서는 궁상맞고 꾀죄죄한 우리 정치학과 놈들의 모습은 인문학도(人文學徒)인 그의 눈에는 뭐를 하는지도 모를 '거지'로 비쳤으리라.

지하는 1941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다. 자신이 쓴 기록에 의하면, 아버지 김맹모(金孟摸) 선생을 따라 원주로 와 그곳에서 중학을 졸업했고, 고등학교는 1차 시험에서 배재고에 떨어져 2차로 중동고에 진학하였다. 어린 시절의 꿈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으나 어머니의 반대가 심해, 차선책으로 1959년 미술대학 미학과에 들어가고 미학과가 문리대로 옮겨와 정치학과 놈들과 어울리게 되고…. 인연이란 것은 거슬러 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대목이 많다.

지하의 정금성(鄭琴星) 어머님은 외아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이따금 우리가 들리면 음식 솜씨 좋은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지어준 식사를 맛있게 먹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잠시 뒤 이야기할 테지만  <오적(五賊)>으로 유명해진 자신의 귀한 아들을 저속한 주간잡지에 실리게 했다며 호되게 야단 맞은 적도 있었다. 

지하와 나를 굳게 엮어 놓은 매개체는 역시 술이었다. 그나 나나 과장해서 말하면 강의실에 앉아있던 시간보다 술집에 앉아있던 시간이 더 많았으니 함께 퍼마시다 비몽사몽 간에 막역지간(莫逆之間)의 친구가 되어버려 학번 따위를 팽개쳐버린 것이다. 술 마시다 나 뿐만 아니라 김중태, 김도현 등 정치학과 동기들과도 친해져 그는 급기야 문리대 '칫솔부대'의 일원이 되어버린다. 

 

2. 

지하의 기록을 보면 그의 '행동'이 시작된 것은, 1962년 6월 8일 문리대에서 있었던 '한미행정협정 체결촉구 시위' 때부터였다. 그때 얘기를 들어보자. 

나는 그날 시위대 속에 있었다. 동숭동 문리대 정문의 돌다리 위에서였다. 시위대 앞으로 중대 하나 정도의 군병력이 총에 착검을 하고 칼날을 수평으로 세워 들이대며 명령에 따라 일보 또 일보 다가들었다. 순간 화가 나서 총칼을 손으로 잡아 크게 다치는 학생도 있었다. 내 가슴 바로 앞에 들이댄 총칼을 보며 가슴 밑바닥에서 갑자기 들끓기 시작한 시뻘건 분노를 나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분노! 이것이 내 행동의 시작이었다. 

며칠 후 나는 서울대 의과대학 구내에 있는 함춘원 숲속에서 당시 정치학과 학생으로서 시위를 조직했던 김중태를 만났다. 김중태는 웅변가였다. 

"김형! 4·19는 5·16을 향해 반격을 시작해야 합니다. 4.19를 경험한 김형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문화에서도 전선을 만들어야 합니다. 협조합시다. 우리는 전국 각 대학을 연합하고 야당이나 언론과 연대할 것입니다. 이번엔 상대가 미국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일본과 밀착해가고 있는 현 군부정권이 주적(主敵)입니다. 투쟁은 필사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각오를 단단히 하십시오. 참여해주시겠지요?" 

당시 <새세대>를 편집하고 있던 정치학과의 김도현과도 만났다. 그러나 나는 그때까지도 내 결단이나 행동의 약속을 일절 표현하지 않았다.(<흰 그늘의 길 1>(김지하 지음, 도서출판 학고재 펴냄) 453∼454쪽)

이후 나는 지하를 포함한 친구들과 자주 술자리를 함께한 기억은 있지만, 술자리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억은 없다. 다만 검지손가락에 찍은 왕소금을 안주 삼아 막소주를 사발 채로 들이키던 김지하 특유의 모습은 생생하다. 친구들과 함께 당시 중구 인현동에 있던 우리 집에 자주 들러 잠자리를 함께하다가 내 형님으로부터 푸대접을 받았던 장면도 눈에 선하다. 

1963년 후반은 그와의 접촉이 뜸해져서 그의 움직임에 대해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나는 부친의 미국 유학 독촉에 따라 집에서 유학 준비에 몰두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지하는 어디 있었을까? 

1963년 겨울. 

그 겨울 나는 원주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 겨울, 나는 원주의 한 다방에서 시화전을 열었다. 현실과 몽상, 과거의 어두운 기억과 미래에의 판타지, 모던니즘적이거나 쉬르적인 것과 민족적이고 민요적인 것이, 국가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의식의 황홀에 대한 깊은 집착이 두서없이 참으로 무질서하게 엇섞이고, 흑백적인 요소와 무지개적인 요소가 이리저리 엇갈리는 이른바 '혼허(混虛)'의 시화였다.(<흰 그늘의 길 2>(김지하 지음, 도서출판 학고재 펴냄) 19쪽) 

여기까지가 주변의 상황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그와 나의 한계였다. 젊은 시절 가장 중요하게 다가온 것은 '명분'이란 것이어서, 선천적인 예술가로 감수성이 예민하였던 김지하와 유학하여 선진 지식을 받아들이려 했던 나는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그런 계기를 만든 것은 이듬해에 벌어진 한일회담 반대운동이었다.

3. 

1964년 3월 24일, 이날 박정희 정권이 일본과 진행하던 "굴욕적"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운동이 폭발했다. 이날의 지하 모습부터 보자. 

'3.24 제국주의자 화형식'을 보고 있었다. 그날 나는 도서관 아래 숲속에 앉아 정문 안쪽에서 고장난 책상다리 등을 모아다 불 질러 일본 제국주의자의 허수아비를 태우는 동료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김중태 형이 연설을 했다. 과연 그는 웅변가였다.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지고 불길이 사납게 솟아오르고 기자들은 연설 내용을 열심히 따라 적고 있었다. 학생들은 땅바닥에 앉아 흥분과 격정으로 샛노오래진 얼굴들을 하고 이마에는 흰 띠, 손에는 플래카드를 들고 환호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흰 그늘의 길 2>(김지하 지음, 도서출판 학고재 펴냄) 29쪽) 

당시 지하와 나는 소극적이었다. 그에게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고, 나는 유학 준비에 몰두하고 있어서였다. 이날 나는 이현배로부터 연락을 받고 3·24 데모에 참여한 후 유학 준비를 계속하고 있었으나, 이를 포기해야 할 상황이 발생한다. 나와 아주 절친했던 선배가 중앙정보부원이 되어 학교에 나타나 설쳐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명분'을 따라야 했다. 즉시 중앙정보부가 문리대생을 대상으로 하여 벌인 학원사찰 조사에 들어가, 1964년 4월 23일 '학원사찰에 대한 성토대회'를 개최하여 이를 폭로했다. 이를 계기로 한일회담을 졸속으로 마무리하려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했고, 지하의 본격적 참여도 이 시기에 이루어진다.

그 저항운동은 당시 박정희가 내건 정치이념인 이른바 민족적 민주주의를 장사지내어 그 허구성을 폭로, 비판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5월 20일 문리대 운동장에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한 후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자 중앙정보부는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 조사(弔辭)를 낭독했던 나를 납치하여 심한 고문을 가하여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게 된다. 

다음은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 대한 지하의 기록이다. 

그 장례식 조사(弔辭)를 내가 쓰고, 그 책임과 발표·낭독 등은 정치학과의 똘똘이 송철원이 맡았다. 송철원 형은 본디 경기고 출신의 서울 토박이에 깍쟁이인데, 당시 중앙정보부의 비밀 학생 프락치 조직이었던 'YTP', 즉 '청년사상연구회'의 정체를 폭로해 세간을 놀라게 하고 곧 정보부에 붙들려가 손가락 사이를 담뱃불로 마구 지지는 등의 고문을 받고 나와 또다시 그 사실을 언론에 폭로한, 말하자면 정보부가 혀를 내두를 정도의 독종 중의 독종이었다.... 박 정권을 아예 초장부터 시체요, 썩어가는 송장으로 단정하여 일단 죽이고부터 들어갔으니, 이 노골성이 그들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책임을 진 송철원 형이 체포가 안 되어서 내게는 그리 심각한 피해가 없었다.(<흰 그늘의 길 2>(김지하 지음, 도서출판 학고재 펴냄) 35∼36쪽) 

4.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후 문리대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정치학과 동기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등이 전국에 지명수배되자, 이때부터 지하는 문리대 학생운동의 전면에 나선다. 그때 안전하게 논의할 수 있던 장소는 우리 집뿐이었다. 내가 고문당한 사실이 큰 파문을 일으키자 우리 집은 언론인, 변호사, 문병객들로 붐비고 있어서 정보부의 눈을 피할 수 있어서였다. 

그날 저녁과 이튿날 오전까지 밤을 새우며 나는 송철원의 집에서 손정박·박영호·박지동 형과 모임을 가졌다. 제일선 리더십이었던 삼인조, 김중태·김도현·현승일 형이 동국대의 장장순 형 등과 함께 전국에 현상수배되어 몸을 감추었기 때문이었다. 제2선의 리더십이 일선으로 나오면서 구축되고 있었다. 

우리는 장기적인 연좌단식농성 '시위'를 계획했다. 장소는 문리대 캠퍼스의 4·19 학생혁명기념탑 아래였고, 이번에는 김덕룡 형의 문리대 학생회를 끌어들이기로 하고 총책임을 손정박이 맡았다. 나는 농성 시 가장 중요하다는 '방송선전반'을 맡았다.(<흰 그늘의 길 2>(김지하 지음, 도서출판 학고재 펴냄) 35∼36쪽) 

당시 문리대 학생회장이던 김덕룡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고 판단하고 김지하, 김정남 등과 함께 다음 단계의 투쟁 방법을 모색하였다. 누군가의 제의에 따라 대일굴욕외교반대 서울대투쟁위원회 소속 학생 40여 명은 4·19학생혁명기념탑 앞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였다. 내가 선언문을 낭독하였고 김중태, 현승일 학우에 대한 무기정학 처분을 집중 성토한 후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우리들의 단식 소식을 전해 들은 다른 학교 학생들이 속속 문리대로 몰려와 우리들을 격려해 주었다. 심지어 멀리 수원에서 걸어온 학생들도 있었다. 단식 닷새째를 맞은 6월 3일, 우리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교문을 나서 광회문 쪽으로 몰려나갔다. 다른 대학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몰려나왔고, 시민들의 호응 또한 대단했다. 시위대는 단순히 한일회담 반대만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의 하야까지도 요구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날 밤 9시 50분을 기해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전방에 있던 3개 사단의 군 병력을 서울 일원에 배치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6·3 사태'였다.(<눈물을 닦아주는 남자>(김덕룡 지음, 자유문학사 펴냄) 117∼120쪽)

1963년 6월 3일 계엄령이 선포되자 지하는 원주로 피신했다 체포되어 첫 감옥 체험을 하게 된다. 한편 중앙정보부는 '불꽃회 사건'이라는 것을 만들고 혈안이 되어 나를 잡으려 하였으나, 고마운 사람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체포를 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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