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비 레이 스미스는 픽사뿐 아니라, 지금껏 우리가 봐온 모든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가능케 만든 괴짜 사색가다. 디지털 라이트가 우릴 어디로 데려갈지, 그에게 새로운 비전에 대해 물었다.
무대 위 패널이었던 에드윈 캣멀과 존 래시터는 픽사의 발전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약물과 반문화는 여러 세대에 걸쳐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디즈니에겐 불안한 주제다. 마침내 래시터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혹시 앨비 레이 스미스 씨가 있나요?” 아마도 이 수염투성이 픽사 공동 설립자가 답변할 기회를 얻었더라면, 즉시 LSD(마약류 환각제)가 그의 창조적인 방향을 정하는 데 도움을 줬고, 픽사의 문화와 기술 모두를 형성했다는 걸 인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그는 회사를 떠났고, 영화와 관련된 모든 작업은 스미스의 몫이었다.
그 후 스미스는 영화가 코드와 알고리즘에 의해 생성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했고, 결국 픽사 전후의 작업에서 최초의 디지털 페인트 소프트웨어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 이건 이미지를 조절하는 우리의 능력을 완전히 변화시킨 코딩 작업인 셈이다. 하지만 무대 위가 아닌 강당 뒤편에 있는 스미스의 존재는 다른 걸 말해준다. 바로 공헌과 명성 사이의 불일치였다. 컴퓨터 과학과 엔터테인먼트 영역 모두에서 그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독특한 스미스’는 결국 원시적 그래픽 시대와 현란한 가상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0년대 ‘세계관weltanschauung’은 그가 만든 모든 작품에 주입되어, 지금까지도 여전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래시터의 호명 후 스미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픽사의 전 동료인 팸 커윈은 픽사와 컴퓨터 그래픽의 역사에 관한 한, 우리 모두는 그에게 큰 빚을 졌다고 말한다. “현재 포토샵에서 사용하는 모든 건 기본적으로 앨비로부터 가져온 거죠. 심지어 자율주행 자동차와 증강현실까지도. 이건 모두 이미지 프로세싱과 기계적 비전에 관한 겁니다. 앨비와 동료들은 이 모든 것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일흔여덟 살의 스미스가 만들어낸 ‘흔적’은 과거에 국한되지 않는다. 세상은 여전히 그의 창의력을 따라잡아야 한다. 지난여름 마침내 세상으로 걸어 나와 <픽셀 전기A Biography of the Pixel>를 출간한 그는 책에서 “디지털 표현에 관한 대통합 이론”을 제시한다. <픽셀 전기>는 더글라스 호트스태터의 과학 교양서 <괴델, 에셔, 바흐>의 정신을 계승한, 오랫동안 예견된 디지털 융합에 대한 깊이 있는 도전이다. 그는 또 시각과 텍스트, 음성, 영상 등 우리가 사용하는 거의 모든 표현은 “기계적 세계”로 이동했으며, 이는 물리적 현실 못지않게 현실적이라고 설명하는데, 이건 그저 은유적인 동등성이 아닌, “말 그대로의 현실”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스미스는 이를 일컬어 디지털 라이트Digital LIght라 부른다. 물론 스미스가 이 용어를 만들어내진 않았다. 10여 년 전 한 회의의 주최자가 스미스에게 이 제목으로 강연을 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처음 사용했다. “사람들이 픽셀로 하는 다양한 측면을 다룬 이 용어야말로 내가 원했던 모든 것이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스미스가 기록하는 ‘디지털 라이트’는 길게 뒤틀린 과학적 여정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푸리에, 블라디미르 코텔니코프, 앨런 튜링과 같은 뜻밖의 유능한 주인공들이 등장하게 된다. 빛, 샘플링, 계산의 본질에 대한 이들의 공헌을 종합해 스미스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현실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다. 그가 수십 년간 지켜온 믿음이다. 컴퓨터 그래픽 저널리스트인 바바라 로버트슨은 스미스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고 한다. “당신도 알다시피 모든 건 그저 물결일 뿐이죠.”
그는 나아가 이렇게 첨언한다. “이 전기의 주제인 픽셀(화소)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픽셀이 단지 화면에 나타나는 작은 사각형 중 하나라는 잘못된 믿음은 버려야 하죠.” 스미스는 픽셀이 의식적으로 만든 콘텐츠 요소가 프로세싱을 거쳐 특정 화면에 나타나는 산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화면에서 보는 건 픽셀이 아니라, 픽셀의 표현인 것이다. 픽셀 그 자체? 그건 그냥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라는 거다. 로버트슨은 말한다. “일단 여러분이 이 차이를 알게 되면, 디지털 라이트가 부수적인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픽셀과 디스플레이 요소를 분리하는 단순한 발상은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오류일 뿐입니다.”
이때부터 스미스는 ‘화소’라는 영역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로 등장하고, 그를 거의 죽일 뻔했던 사람들, 그러니까 스티브 잡스, 조지 루카스, 그리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애니메이션 개척자 알렉스 슈어까지 차례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 혁명과도 같은 전환기에서 스미스는 우리를 ‘디지털 융합’이라는 새로운 시대로 이끈다. 앨비 레이 스미스가 이 책을 만들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아니, 디지털과 함께 살아온 시간을 감안한다면 어쩌면 50년이 넘게 걸렸을지도 모른다. 스미스의 아내 앨리슨 고프닉은 이렇게 말한다. “어느 순간 앨비의 삶에 대한 각본을 상상할 수 있었어요.”
“3막으로 구성된 이 각본은 실제로 환상적인 영화가 될지도 모르죠. 첫 번째 신은 뉴멕시코 사막이에요. 머리를 약간 기울인 금발 꼬마가 있고, 주변엔 말들과 선인장이 있어요. 그리고 화이트 샌드 국립공원의 수평선 너머로 로켓 하나가 등장해요. 꼬마는 그걸 바라보고 있죠.” 실제로 스미스는 라스크루시스에서 살았던 두 살 때, 1백 마일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1945년 트리니티 핵 실험의 폭발음을 들었다. 아버지는 참전 중이었고, 그의 부모는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결혼했지만, 다시 돌아와 텍사스 팬핸들 인근의 작은 마을 클로비스에서 소 사료 사업을 운영했다.
스미스는 수학에 특별한 재능을 지닌 학생이었지만, 예술가인 삼촌과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했다. 어린 스미스는 조지 삼촌이 자신의 스튜디오에 허락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스미스는 삼촌이 캔버스를 펼치고, 오일과 테레빈유를 섞고, 색소를 사용해 빈 표면에 생명을 불어넣는 방법을 묵묵히 관찰했다. 또 인근 화이트 샌즈 미사일 발사장에 있는 과학자들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관심을 가졌는데, 결국 뉴멕시코 주립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스미스는 훗날 인공지능을 공부하기 위해 스탠퍼드로 향했다. 캘리포니아에서 그는 컴퓨터 이상의 많은 것을 배웠다. “이듬해 제 머리카락은 여기까지 내려왔어요. 골든 게이트 공원에서 놀면서 온갖 마약을 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LSD에 빠져들면서 내가 기계적인 프로그래머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예술이 있는 무언가를 해야만 했으니까요.”
그가 규칙 기반 시스템을 통해 생성된 디지털 유기체, 오토마타(기계 장치를 통해 움직이는 인형이나 조형물)를 연구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리고 박사 학위를 받은 후 교사로 일하기 위해 동쪽 뉴욕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1971년에는 〈사이언티픽 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 2월호 표지를 장식한 셀룰러 자동화장치를 고안했지만, 학술적인 만족은 얻지 못했다.
이듬해 12월, 스미스는 뉴햄프셔의 스키 슬로프를 달려 내려가다 오른쪽 대퇴골에 심한 골절상을 입었다. 3개월 동안 온몸에 깁스를 하고 지내게 된 스미스는 당시의 시간을 이렇게 떠올렸다. “하루 15시간씩 쉬지 않고 생각하다가 비로소 세상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고. 그는 컴퓨터와 예술을 융합하는 일에 늘 열정적이었지만, 그 즈음에는 이상하게도 예술을 부르짖으면서 점점 예술을 잃어갔다. 그 후 스미스는 뉴욕 대학에 사임서를 내고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버클리에서 1년간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1974년 5월 어느 날, 친구 리처드 슙은 제록스 팔로 알토 연구소(PARC)의 일을 제안했는데, ‘슈퍼페인트SuperPaint’라 불리는 이 프로젝트는 대중적인 축복을 받지는 못했지만, 컬러 TV 화면에서 이미지를 만들고 조절할 수 있는 최초의 ‘인터랙티브 컬러그래픽 프로그램’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저는 13시간 동안 계속해서 프로그램을 갖고 놀았어요. 그건 예술과 컴퓨터의 만남이었죠.”
당시 컴퓨터에 풀 컬러 그래픽은 드문 일이었고, 하나의 이미지라도 생성하기 위해서는 ‘프레임 버퍼’라고 알려진 엄청난 양의 메모리가 필요했다. PARC의 퍼스널 컴퓨터 개발 책임자인 앨런 케이는 말한다. “화면에 이미지를 조합하려면 버퍼가 필요했고, 어떤 것은 50만 달러가 들었죠.” 당시 연구소에는 슈퍼페인트를 가능하게 하는 ‘느린’ 프레임 버퍼만이 있었다. 그때 스미스는 슈퍼페인트와 프레임 버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이것들을 조합하면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이해했어요.” 그는 만화 속 인물이 눈을 찡끗하고 시선을 돌리는 것을 포함한 영화적 시퀀스를 만들기 위해 연구소를 방문했다.
스미스는 내심 PARC에 입사하길 원했지만, 연구소는 그를 정규직으로 고용하진 않았다. 스미스를 붙잡는 가장 위험도 낮은 방법은 어쩌면 마치 장비를 빌리는 것처럼 구매 주문서와 같은 서류에 사인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스미스를 포함해 몇몇은 8백57시간의 ‘전문 노동 서비스’에 계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디오 아티스트인 데이비드 디프란체스코가 합류했고, 스미스는 ‘슙 시스템’을 위한 인터페이스를 만들었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개인용 그래픽 프로그램의 초안이었다. 그는 곧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한 소프트웨어를 사용했으며, 디프란체스코는 그 영상들을 촬영했다. 이건 놀라운 혁신이자 혼란이었다.
평화로운 시기는 짧았다. 중역들은 스미스와 디프란체스코에게 예산 삭감을 알렸고, 결국 슈퍼페인트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미스는 자신만의 미션을 발견했다. 그것은 컴퓨터 그래픽의 미래를 만드는 것이었다. 스미스와 디프란체스코는 흰색 포드 토리노에 짐을 가득 싣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유타 대학으로 향했다. 유타의 컴퓨터 그래픽 연구원들은 컬러 픽셀에 대한 사이키델릭한 페인팅보다는 CAD 등의 더 기능적인 응용 프로그램에 초점을 맞췄다. 이들은 스미스와 디프란체스코를 고용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부분이 많은 유타 대학 졸업생 에드윈 캣멀을 소개해줬다.
아직 서른이 되지 않은 캣멀은 컴퓨터 그래픽이 엔터테인먼트에 혁신을 일으킬 수 있다는 역투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캣멀은 뉴욕 공과대학에서 일자리를 얻어 작업 중이었다. 그 후 캣멀은 스미스와 디프란체스코를 소환했고, 이들은 즉시 롱아일랜드로 가서 합류했다. 캣멀은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앨비는 긴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매우 똑똑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스미스는 컴퓨터 그래픽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단 하루 만에 캣멀과 뜻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를 ‘꿈의 영화’라고 불렀다.
당시 컴퓨터 그래픽은 상대적으로 원시적인 기계식 전원으로 작동되는 컴퓨터 과학의 한 분야였다. 하지만 이들은 ‘무어의 법칙’이 이 상황을 변화시킬 거라 이해했고, 컴퓨터와 엔터테인먼트가 주축이 되는 분야를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곧바로 슈어는 모든 자산을 털어 18개의 프레임 버퍼를 구입했다. 그렇게 최소한의 필요한 장비를 갖춘 팀은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식 재기jaggies 현상’으로 불리는 난제에 부딪힌다. 해결 방법은 더 조밀한 그래픽을 만드는 기술인 ‘안티에일리어싱’에 대한 연구뿐이었다. 버퍼의 추가는 스미스와 캣멀을 중요한 개념적 진보로 이끌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한 풀 컬러 팔레트로 만든 레드, 그린, 블루의 3색 기본 컬러 채널과 함께 픽셀 투명도를 조절하는 요소를 추가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물체의 불투명도가 조절되면서 움직임을 흐릿하게 할 수 있었고, 결국 디지털 애니메이션의 초기 시도를 망친 ‘불편한 스타카토 움직임’을 수정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알파 채널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효과는 더 뚜렷해졌다. “앨비가 알파 채널을 발명했다고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을 겁니다”라고 뉴욕 대학의 글렌 엔티스가 말한다. 글렌은 <슈렉>과 <마다가스카>를 후원하는 그래픽 회사를 공동 설립한 인물이다.
스미스와 동료들은 결국 두 가지의 기술 중 하나인 ‘알파 채널’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1975년, 스미스와 캣멀은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낀다. 마침내 <터비 더 튜바>가 나왔지만 정말 지루했기 때문이다. “맨해튼에서 상영했는데 그중 몇몇은 잠이 들었죠.” 캣멀이 말한다. 스미스는 교훈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훌륭한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서는 훌륭한 그래픽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바로 이야기꾼이다. 이들은 사무실 인근의 용품점에서 주철 수동 타자기 하나를 빌려 조지 루카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편지를 썼다.
몇 달 후 일부 연구원들은 캘리포니아 마린 카운티의 ‘루카스필름’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80년에 계약한 로렌 카펜터는 “알고리즘의 한계를 끌어올리기 위해 반드시 가입해야 할 클럽”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루카스와 스미스는 근본적인 의견 불일치를 해결하지 못했다. 스미스에 따르면, 루카스는 자신을 그래픽 그룹의 영화 제작자가 아닌 도구 제작자로 보았다고 한다. 당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학자들이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 표현 가능한 도구들을 만들어야 했다. 스미스와 캣멀은 컴퓨터를 통해 생성된 이미지를 포착하는 가상 카메라를 포함해, 이러한 툴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광범위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루카스는 컴퓨터 안에서 영화 전체를 촬영할 수 있다는 전제를 거부했던 것이다.
1982년 실제 할리우드 영화에 툴을 적용할 기회가 생겼다. 루카스필름은 <스타 트랙 2 – 칸의 분노>에 효과를 제공했다. 커크와 스팍이 유기생명체가 피어나기 시작하는 죽은 행성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는데, 이건 실제 필름 해상도와는 비교가 안 되는 당시의 컴퓨터 그래픽을 투입해볼 만한 좋은 기회였다. 스미스가 감독한 시퀀스는 ‘제네시스 효과’로 알려졌다. 척박한 표면을 푸른 지구와 같은 천국으로 바꾸기 위해 행성을 향해 어뢰를 발사하는 배가 등장한다. 스미스는 가상 카메라를 사용해 물리적 장치로는결코 해낼 수 없는 매끄러운 피루엣을 만들었는데, 그제야 루카스는 스미스에게 한마디를 툭 던진다. “카메라 동작이 훌륭했다”고.
얼마 후 <제다이의 귀환>과 <피라미드의 공포>에도 특수효과가 사용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루카스는 자신의 위치를 고수했다. 기술 개선에 따라 하드웨어를 개선해야 했고, 나아가 프레임 버퍼가 내장된 이미징 컴퓨터도 설계해야 했다. 점심을 먹으면서 장치 이름을 쥐어짜던 중, 스미스는 스페인식 동사 느낌이 나는 ‘레이저-픽서laser-pixer’를 제안했다. 고민 끝에 로렌 카펜터가 이를 다시 ‘픽사pixar’로 수정했고, ‘픽사’가 가장 쿨한 이름이라는 데 다들 동의했다.
그 후에도 여전히 영화를 꿈꿨던 스미스는 1983년, 독자적인 컴퓨터로 단편 스토리보딩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1년 안에 끝낸다는 목표를 세웠고, 스토리는 짤막한 비네트에 가까운데, 내용은 숲에 사는 앙드레라는 안드로이드에 관한 것이었다. 루카스필름 팀은 농담 삼아 “앙드레와 아침 식사를”이라고 불렀고, 스미스는 후에 작가 마이클 루빈에게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부흥을 위한 안드로이드의 각성”을 의도했다고 말했다.
그해 말, 스미스와 캣멀은 디즈니 임원들을 만나기 위해 비밀 순례를 떠났고, 언젠가는 그곳에서 영화가 만들어지길 희망했다. 이때 이들은 존 래시터라는 인상적인 젊은 애니메이터를 만났는데, 당시 곧 디즈니를 떠난 그를 스미스와 캣멀이 고용할 기회를 잡는다. 루카스는 컴퓨터 공학자들의 영화 제작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래시터에게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이너’라는 칭호를 주었다.
기대에 걸맞게 그는 곧 ‹앙드레›라는 단편 영화를 제작했고, 작품 속 영웅을 더 생생하게 만들었다. 이후 작품 <앙드레와 왈리 B의 모험>는 모든 영화 제작에서 중요한 시초가 되었다. 스미스와 래시터의 창조물은 모든 컴퓨팅, 프랙털, 알고리즘, 알파 채널이 토대였다. 특히 앙드레가 벌에 쏘여 뛰어다니는 장면은 시뮬레이션 세계가 실제 행동처럼 생생할 수 있다는 걸 알리는 계기가 됐다.
코넬 대학의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을 이끌었던 돈 그린버그는 단 2분의 상영으로 1천 명의 학생이 컴퓨터 애니메이션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가 한 일을 알고 있었어요”라고 스미스는 말한다. 이후 스미스와 캣멀은 아티스트들이 열심히 그린 캐릭터들의 애니메이션화를 돕는 컴퓨터 페인트 시스템을 선보일 수 있었다.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고 예술가들이 손으로 그린 캐릭터에 더 많은 디테일을 추가할 수 있게 해주는 이 디지털 페인팅을 두고서, 디즈니 임원들은 시스템의 사용을 결정했다. 이로써 스미스와 디즈니, 그리고 루카스필름 사이의 협상이 이뤄지면서 컴퓨터 애니메이션 제작 시스템은 <미녀와 야수>를 포함한 당대 모든 고전에서 주요한 툴이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즈니는 여전히 이러한 과정을 거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당시 루카스필름은 루카스의 이혼 협상 등 재정적 타격으로 자금난을 겪고 있었고, 자금 조달 문제를 걱정한 스미스와 캣멀은 서점으로 차를 몰아 곧장 비즈니스 섹션으로 갔다. 이때 각자 회사 설립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샀는데, 두 사람은 영상 컴퓨터를 주축으로 한 사업을 시작하거나, 적어도 스튜디오를 설득해 영화 제작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책 어디에도 주요 문제인 스티브 잡스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은 담고 있지 않았다. 이후의 시간들은 좌절로 가득했다. 스미스와 캣멀은 루카스필름에서 분리된 픽사를 설립했지만, 자금줄을 찾아야 했다.
1985년 스미스의 PARC 동료인 엘런 케이는 스티브 잡스와의 미팅을 주선했다. 스미스와 캣멀은 “잡스가 컴퓨터 애니메이션으로 장편 영화를 제작하는 비전에 개방적이지 않을 것”이라며 걱정했다. 필립스와 제네럴 모터스의 계약이 무산된 후 잡스는 당시 애플을 떠나 넥스트를 창업했지만, 스미스와 캣멀이 그래픽 기반 하드웨어 사업을 추구하는 한 픽사가 애니메이션을 탐구하게 내버려둘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그 후 잡스는 픽사를 1천만 달러에 인수했다.
매각 후 첫 미팅에서 모두가 잡스의 의견을 듣기 위해 모였다. 스미스는 잡스가 비현실적인 결과를 요구하면서 결국 자신과 캣멀이 구축한 문화와 팀이 사라지게 될 거라 우려했다. 그래서 스미스는 가능한 한 잡스가 건물 안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스미스와 잡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를 맞대게 된다. 종종 잡스는 일부러 터무니없는 발언으로 회의를 시작했고, 스미스는 그때마다 철회하라고 즉각적으로 주장했다.
“그건 순수한 자아 경쟁이었습니다. 앨비는 자신의 비전이 지배적이길 원했어요.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죠”라고 픽사의 팸 커윈은 말한다. 이후에도 픽사는 단편 영화를 계속 제작했고, 몇몇은 찬사를 받으며 오스카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문제는 이런 과정을 두고 잡스는 이를 마케팅 수단으로 보았고, 스미스와 캣멀은 영화의 시범 운행 과정으로 바라봤다는 점이다.
결국 잡스는 인내심을 잃기 시작했다. 1990년 이사회에서 잡스는 픽사가 프로젝트를 미루고 있다고 불평했고, 스미스는 넥스트사 제품 때문에 밀렸다고 말했다. 스미스는 잡스가 자신의 남서부식 억양을 조롱하기 시작했다고 기억한다. “그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냥 미쳐버렸죠. 잡스의 얼굴에 대고 소리를 질렀고, 그 역시 내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친, 완전히 미친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알았어요. 그를 스치고 지나가 화이트보드에 글을 썼죠.” 화이트보드까지 몇 발짝 다가간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도 스티브 잡스의 텅 빈 화이트보드에 글을 쓰지 않았다. 마커를 들고 휘갈겨 쓸 때(심지어 무얼 썼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스티브-살해”를 쓰고 있었다.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더 이상 제 인생에서 그런 독을 원치 않았으니까요.”
다음 해에는 사무실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그러면서 스미스는 개인용 컴퓨터 사용자들이 자신의 그래픽 발전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고, 사용자들이 쉽게 오브젝트를 움직일 수 있는 ‘플로팅 이미지’ 앱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초기 데모를 본 오토데스크 임원인 에릭 라이온스는 “눈앞에서 보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당시에는 포토샵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 스미스에게 디즈니로부터 좋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제프리 카젠버그와의 만남을 통해 잡스, 스미스, 캣멀, 래시터는 다시 공동 작업이 가능해졌고, <토이 스토리>라는 작품을 제작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 후 영화 제작에 대한 더 분명한 확신이 들자 스미스는 픽사를 떠난다.
컴퓨터 그래픽계의 모세처럼, 돌아보면 스미스는 픽사를 약속의 땅이 보이는 곳까지 이끌었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 직접 들어가지는 않았다. <벅스 라이프>, <라따뚜이>, <소울>까지 스튜디오는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넓혔고, 스미스가 키워온 비전을 충족시켰다. 픽사의 전 동료들은 만장일치로 그의 공헌을 인정한다. 하지만 스미스가 떠난 후 그의 이름은 웹사이트에서 삭제되었고, 많은 사람이 이 삭제는 일종의 ‘배신’이라고 느꼈다.
캣멀은 “이 웹사이트를 역사적 문서로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스미스 역시 이 신에서 깨끗이 탈출하지는 못했다. 라이언스와 세 차례의 공동 설립을 거쳤고, 새로운 이미지 편집 소프트웨어를 팔기 위해 회사를 시작했다. 회사의 이름은 2만 년 된 스페인 동굴벽화의 이름을 따서 ‘알타미라’로 지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스미스는 자신의 코드를 가져갈 만한 문서를 갖고 있지 않았어요.” 캣멀은 말한다. 잡스는 알타미라의 제품이 팔릴 때마다 엄청난 로열티를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오랜 협상 끝에 잡스는 스미스의 회사 지분과 맞바꾸는 계약을 체결한다.
어느 날 스미스는 가족들과 집에 머물고 있을 때 ‘비명을 지를 만큼 격렬한 가슴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한 달 후 밴쿠버로 가는 페리호에서도 같은 통증을 다시 느꼈다. 결국 스미스는 폐 절제술을 했고, 현재까지 폐의 1/3만 갖고 있다. “모든 건 순전히 스트레스였어요.” 캣멀 역시 동의했다. “그건 생명을 위협하는 경험이었어요. 잡스의 압박감이 엄청났으니까요.”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잃어버린 몇 개월은 스타트업 사업에 큰 타격을 주었고, 포토샵은 ‘레이어’라 불리는 경쟁 기능을 출시했다. 그 과정에서 알타미라의 매출은 저조했고, 회사는 생명을 연장해줄 산소 마스크가 필요했다.
스미스는 마이크로소프트 리서치의 책임자인 네이선 미어볼드를 만난다. “단지 마이크로소프트의 마케팅 도움을 받고 싶었어요.” 미어볼드는 제품보다 스미스를 더 원했지만, 결국 회사를 인수했다. 스미스는 그곳에서 4년을 더 보냈고, 1999년에 은퇴했다. “많은 사람이 더 이상 제 아이디어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스미스의 다음 행보는 주변을 당황하게 했다. 그는 계보학자genealogist가 되었다. 체계적으로 헤리티지를 탐구하기 시작했고, 2010년에 미국 계보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첫 번째 아내와 이혼 후 스미스는 버클리 대학의 심리학 교수 앨리슨 고프닉을 만나 2010년에 재혼했다. “상냥하고 성공한 남자지만, 미친 히피 같은 부분이 함께 있어요.” 고프닉은 말한다. 계보 연구에 회의적이었던 그녀는 스미스에게 <픽셀 전기>를 쓰라고 권했다. 수년간 이들은 컨퍼런스에 참여하면서 안식년 여행을 가졌다. 이때 스미스는 ‘디지털 라이트’의 토대를 만든 이들의 이야기를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마도 알파 채널의 코드나 <스타 트랙 2: 칸의 분노>의 급강하하는 카메라 회전 속에서 스미스의 존재를 정확히 집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그는 거기에 있다. “스트리밍은 영화 스크린인지 아이패드든지 중요치 않다. 실물 연기만큼이나 생생한 감정선을 전달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것이 픽사 필름의 핵심이다.
암호화폐에서 NFT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많은 것이 디지털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디지털 라이트에 잠긴 물리적 문화의 표현만큼이나 메타버스에서 더 많이 논의되는 것이 있을까? 그래서인지 최근 몇년간 스미스가 ‘바오밥Baobab’이라는 가상 현실 회사에 조언해온 것은 우연은 아니다. CEO 모린 팬은 그와의 만남을 이렇게 말한다. “실시간 그래픽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회사를 세우는 방법, 아, 그리고 창조적인 시각을 화학적으로 확장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어요. 그는 정말 이상주의자예요.”
지난여름, 책 발간을 기념하기 위해 스미스의 버클리 자택에 전 동료들이 모여들었다. 많은 사람에게 코로나19 이후 커튼을 연 첫 번째 사회적 행사였다. 낯익은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그는 목덜미까지 긴 머리칼과 턱수염을 한 채 활짝 웃고 있었다. 책은 스미스의 집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임을 시작한 지 1시간쯤 지났을 때, 누군가가 따끈따끈한 책을 들고 나타났다. 스미스는 책을 높이 들어 올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물리적 실체의 경계를 허무는 디지털 미디어에 대해 5백 페이지가 넘는 책을쓴 사람치고는, 아날로그 종이책을 받아든 그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황홀해 보였다!
-- Words / STEVEN LEVY 패션 에디터 / CAYCE CLIFF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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