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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는 살아있다. 우리 안의 '친밀한 적'으로…"

▲ <친밀한 적>(아시스 난디 지음, 이옥순·이정진 옮김, 창비 지음) ⓒ창비

[인문견문록] 아시스 난디의 <친밀한 적>

글 : 김창훈 칼럼니스트
어린 시절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이제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다. 필자가 말을 안 들을 때 할머니는 종종 "순사 온다"라고 어린 손자를 을렀다. 울고 떼쓰면 순사가 와서 잡아간다는 의미였다. 어렸지만 '순사'는 도깨비 비슷한 그런 존재일 거니 생각했다. 일본인 순사가 조선민중에게 얼마나 큰 공포였으면 해방되고 수십년이 지나서도 '순사 온다'라는 표현을 썼을까? 일본은 물러갔지만 '순사'라는 말은 그 후에도 사용되었듯 식민주의는 퇴각했으나 식민주의의 잔재는 이후에도 남아서 우리를 괴롭혔다. 식민주의의 잔재 특히 식민지민중들에게 남은 식민지배의 심리적 영향에 대해 주목한 지식인이 있다. 인도 출신 정치심리학자 아시스 난디다. 그의 책 <친밀한 적>(이옥순·이정진 옮김, 창비 펴냄)을 읽기 시작한다.

거대한 인도대륙이 유럽 귀퉁이의 작은 나라 영국에 의해 그토록 오랫동안 지배받았다는 사실이 늘 궁금했다. 3억5000만의 인도를 통치한 영국인 관료는 한창때도 5만 명을 넘지않았다. 조선의 경우 하급관료조차 일본인의 수가 조선인보다 더 많았다. 영국의 인도통치를 가능케한 그 마술적 성공요인은 무엇이었나? 책의 저자 난디에 따르면 답은 인도인을 정신적 영국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정신적 인도인은 단순히 영국에 충성하는 인도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영국인의 가치와 관점으로 세계를 보는 인도인을 뜻한다. 식민통치 초기인 1830년까지 영국의 중간계급은 문화적으로 주도계층이 아니었기에 주로 봉건적 배경을 가진 집단에서 식민통치 인력이 차출되었다. 이들은 세계를 기독교, 자본주의, 자유주의로 구원하겠다는 '문명화사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회적 진화론이나 자유주의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인도인을 변화시키는 데에 관심이 없었다. 난디는 당시 영국인들의 생활을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인도 의상을 입고 인도의 풍습과 종교관행을 따르는 등 집이나 일터에서 모두 인도인처럼 생활했다."

1830년대 말이 되자 상황은 급변했다.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서 영국에서 중간계급이 정치적 문화적으로 부상했다. 중간계급은 이전의 봉건적 영향하에 있던 인적자원들과는 정신적, 문화적으로 달랐다. 역사를 이끌어 간다는 소명의식에 충만했던 이들은 인도를 바꾸고자 했다. 난디의 설명이다. "영국 중간계급의 복음주의적 정신이 만개하고 이어서 영국과 인도 양쪽에서 새로운 정치문화가 영국의 지배에 문화적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본격적인 식민주의가 출범했다." 

이전 영국인과 달랐던 새로운 정신과 문화로 무장한 영국인들과 접촉했던 인도인들은 자신들의 정신을 변모시켜갔다. 난디의 말이다. "일부 인도인들이 식민주의적 역할정의(role definition)를 내면화하고 개혁적인 열정을 품고서 성적 위계와 정치적 위계 간의 상동관계를 전제하는 언어로 말하게 되자 인간정신을 둘러싼 싸움은 상당한 정도로 식민통치 세력의 승리로 끝나게 됐다" 난디의 글은 어렵다. 그런데 이 문장이 책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핵심 문장이기에 부연설명해 본다. 일부 인도인들은 식민주의를 통해 봉건주의를 해체하고 새로운 문명으로 발돋움한다는 영국인들의 '문명화사명' 주장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신흥 영국부르주아의 개혁적 열정이 이들에게 확산되었다. 이제 영국 부르주아 사회를 주조해낸 성적위계 개념인 '아이>성인여성>성인남성'의 위계는 그대로 식민지에서의 정치적 위계 '인도인>영국인'의 유비관계로 전이되었다. 결국 확실한 위계질서로 구조화되어 있는 사회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위계질서의 전이가 잘 이해되지 않는 독자는 삼국시대 불교의 전래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군주제를 정착시키고자 할 때 지배세력은 불교를 도입하거나 진흥시켰다. 부처와 현실의 부처인 전륜성왕의 관념이 사람들의 마음에 형성되면 자연스럽게 현실의 왕이 전륜성왕의 자리를 꿰차게 되는 것이다. 부처와 전륜성왕같이 지극히 높은 존재라는 관념은 이전에는 없던 관념이었고 부족연합체의 합의로 추대한 왕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왕이 되기 위해 필요한 관념이었다. 삼국시대 지배세력은 불교를 이용했고 19세기 영국인들은 성적위계를 활용했던 것이다. 

왜 하필 성적위계였을까? 식민지로의 성적위계 도입에 대해 난디는 이렇게 설명한다. "서구 식민주의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및 라틴아메리카에서 예외없이 항시 동원했던 성적지배와 정치적 지배 간의 상동관계는 식민주의 역사의 우연한 부산물이 아니었다." 왜일까? "서구문화 전반에서 심리적 양성성(bisexuality)이 부정되면서 강화된 그 상동관계는 중세 이후 서구에서 전개된 지배와 착취 및 잔인한 행위들을 자연적이며 타당한 것으로 말끔하게 정당화했다. (중략) 식민주의는 정치적·사회-경제적 지배가, 여성과 여성성에 대한 남성과 남성성의 지배를 상징한다는 문화적인 합의를 낳았다." 난디는 쉬운 사실을 어렵게 설명하고 있다. 한국 사회를 생각하면 된다. 특정 사회 조직에서 특정 남성이 힘들어할 때 "남자가 뭐, 이런 것 가지고"라는 심리적 압박이 으레 들어온다. "남자가 뭐"라는 한 마디엔 사회가 부여한 기준에 미달한다는 가혹한 평가가 내재되어 있다. 여성의 경우도 다른 방식의 심리적 압박 즉 덫이 설계되어 있다. 심리학자 김태형에 따르면 한국은 학대가 만연한 학대사회다. 그런 심리적 학대를 용이하게 하는 것이 성적위계의 덫이다. 식민지 인도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성적위계만이 아니었다. 난디는 식민주의가 장기간 나름 순조롭게(?) 지속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근대 식민주의는 군사적·기술적인 힘보다는 전통적인 사회질서와 배치되는 세속적인 위계질서를 창출하는 능력을 통해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새로운 질서는 다수에게, 특히 전통적인 사회에서 착취당하거나 궁지에 몰린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전망을 열어주었다. 그들에게 새로운 사회질서는 보다 공정하고 평등한 세계를 향한 첫걸음으로 보였고, 바로 거기에 식민주의의 심리적 유인이 있었다." 식민지배 시기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소수에게는 분명히 물질적 동기뿐만 아니라 심리적 유인이 있었다. 세상에는 문명과 비문명이 있고 식민주의를 통해 식민지도 드디어 문명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식민지지배층과 그들의 원주민협력자들에게는 일반적인 정서였다. 심리적 유인이 없었다면 그래서 심리적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없었다면 그렇게 많은 식민지협력자는 생겨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식민지배국이 물러난 후에도 식민지배국이 만든 가치와 세계관 그리고 제도적 장치들이 그대로 남았다. 난디는 이것을 '제2의 식민화'라고 말한다. 식민주의가 공식적으로 끝났지만 그들이 만들어 놓은 심리적 장벽이 생생히 살아서 현재의 우리를 괴롭히는 상황을 의미한다. 순사는 물러갔지만 순경이 생겨났고 순사 앞에서 뒷걸음치던 사람들은 민주화가 자리잡을 때까지 상당기간 대한민국 경찰 앞에서 비슷한 행동을 보였다. 

압도적 무력과 경제력을 앞세운 영국을 마주해서 인도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난디에 따르면 인도인들은 정신분석학에서 '공격자와의 동일시'라고 말하는 심리적 과정을 경험하게 되었다. 자신보다 훨씬 강한 어른의 불가피한 지배를 대면할 때 아이는 이런 방어기제를 자주 동원한다. 이런 자기동일시가 있었기에 인도인들은 영국에 충실했다. 1차대전에 100만 명 이상의 인도인이 참전했고 2차대전에도 그 이상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단순히 영국의 압력 때문에 마지못해 참전했다기엔 이들이 세운 전공이 만만찮다. 역사학자 이병한의 책 <유라시아견문>에는 이런 글이 있다. "이란의 남부를 지배한 것도 인도군이었으며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친영정권을 막후지원한 것도 인도총독부였다. 따라서 대국적 견지에서 보자면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에 그쳤다고만 말하기가 힘들다. 제국의 협력자이자 공모자였으며, 나아가 스스로 '하위제국'이기도 했다." 저명한 경제학자 조반니 아리기는 책 <베이징의 아담스미스>에서 영국에 있던 인도의 존재가 미국에는 없기 때문에 미국 패권이 의외로 쉽게 무너져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성숙한 남성성 이데올로기'가 인도로 본격적으로 수입되면서 인도인들도 세상을 철저한 위계질서의 관념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관념이 도입되자 인도몰락의 원인을 최근 인도의 남성성상실에서 찾고 과거 전통 속에서 남성성을 발견하려는 움직임이 만들어진다. 가령 시인 마두수단(Madhusudan)은 뱅골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는 칭송을 받은 <메그나와드 카비야>를 통해 이런 작업을 의식적으로 수행했다. 원래 이 작품은 인도 전래의 <라마야나>를 새롭게 쓴 것이다. <라마야나> 속에서 원래의 주인공은 우유부단하고 수동적이었던 라마와 동생 락슈마나였다. 메그나드는 이들을 수동적 공격성을 드러내는 여성적 악당으로 그려낸다. 라마의 개방적 성격은 열등하고 비남성적이고 미성숙하게 그려진다. 반면에 전통에서는 악마로 묘사되던 라바나와 메그나드는 당당하고 남성적인 근대적 의미의 영웅으로 변했다. 셈족의 신과 달리 인도인의 신 라마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혼재된 존재였다. 유럽의 위계질서 관념이 유입되면서 여성성은 나약한 열패자로, 과잉남성성은 당당한 영웅으로 묘사되었다. 

남성성에 혹한 인도지식인들은 이제 힌두전통을 남성성의 관점으로 재해석하기 시작한다. 민족주의자 뱅킴찬드라는 소설을 통해 "크리슈나를 진보적인 서구인이 보기에도 그 숭배자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이교도적이지 않고 정상적인 남성신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힌두교 승려 비베카난다는 고대의 힌두교는 위대했지만 크샤트리아(무사신분층)와의 관계를 잃어버리면서 전락해버렸다고 주장했다. 상무적 정신을 강조한 이런 역사해석에 대해 난디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서구 오리엔탈리스트의 이데올로기나 식민주의적 사유의 지배적인 틀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뱅킴찬드라와 비베카난다-필자 주) 두 조류 중 어느 쪽도 인도인의 자존감과 문화적 자율성을 위한 적절한 기반을 제공할 수 없었다." 물론 이런 와중에도 힌두교를 따르면서도 과잉남성성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자신의 노선을 굳건히 했던 비디야사가르 같은 이도 있었다. 그러나 소수였다. 그 소수에 간디가 있었다. 그는 힌두교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저항방식 즉 과잉남성성이 아닌 여성성에 기반해 정치운동을 조직해냈다. 

간디를 제외한 대다수의 운동은 어떤 한계를 갖고 있었나? 난디의 이들에 대한 평가다. "서구에 대한 표준적인 적대자, 즉 서구와 대결하는 이들은 그 적대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지배적인 보편주의 모델 바깥에 있지 않다. 그들은–말하자면 정형화된 배역선정에 따라-장식적인 반대자로서 지배적인 식민주의 의식 속으로 통합됐다." 상당한 수준의 저항도 난디가 '궁극적 폭력'이라고 말한 식민지배자가 설정한 심리적 테두리 안에서만 수행된다. 그래서 저항은 강력했지만 식민지체제에는 별다른 타격을 가하지 못했다. 운동의 외양은 과격했지만 대중들의 마음과 심리의 기저를 뚫어버리는 그런 돌파를 성취하지 못했다. 여성성에 기반한 간디의 노선만이 그런 돌파를 만들어내었다. 

난디는 비폭력 '아힘사'를 주장한 간디의 투쟁을 높이 평가한다. 높이 평가하는 수준이 아니라 책 전체의 요지가 간디가 걸어간 길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강력한 저항은 식민지체제를 금가게 하지 못했다. 그 체제를 요동치게 한 것은 식민지배자들이 설정한 범위 밖에서 수행된 간디의 이념적, 관념적 수준의 저항이었다.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식민지배를 뒷받침한 관념의 위계질서체제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 그것이 간디의 투쟁 목표였다. 난디는 이렇게 말한다. "간디의 투쟁이 실상 인간 본성의 더 온화한 측면, 즉 서구적 자아개념의 망각지대로 추방된 이른바 비남성적인 자아를 되찾기 위한 보편적인 투쟁임을 말해주고 있다." 간디의 투쟁은 인도 독립만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제국주의체제를 뒷받침하는 위계질서의 핵심요소인 과잉남성성에 대하여 투쟁하고 여성성원리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간디의 행동주의는 국소적인 민족적 이익을 넘어서 인류보편의 전망을 확보하게 되었다. 

난디에 따르면 평균적인 인도인은 약자 특유의 수동적이고 '여성적'인 교활함을 발휘해 자존감을 지켰다. 이들은 비굴하게 살아갔지만, 결코 식민주의자들에게 심리적으로 흡수되지 않았다. 난디는 비굴한 사람보다 더 안 좋은 것은 자신의 내면이 식민지배자처럼 바뀐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쁜 쪽은 영혼을 상실하고 승자를 내면화하는 것"이다. 왜 더 나쁜 것일까? 난디의 설명이다. "정신상태로서의 식민주의는 외부의 힘에 의해 촉발되지만 식민지내부의 과정이며, 그 근원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정신 깊숙한 곳에 자리한다." 당연히 우리 것이라고 알고 있던 가치체계, 관념이 사실은 식민지배가 우리 마음 속에 심어놓은 것, 이것이 '친밀한 적'이다. 우리 자신의 것으로 알았기에 친밀하고 식민지배가 심어놓았기에 적이다. '친밀한 적'을 걷어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승자의 가치에 따라 승자가 설계해둔 사회모델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식민지가 독립되어도 식민지배자들이 주조해낸 가치체계와 관념에 따라 사회가 작동된다. 식민지배국이 사라진 식민지체제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국가에서도 힘들게 살아가게 된다.

난디의 책 <친밀한 적>은 신선한 시각이지만 또한 도발적이다. 특히 식민지의 원주민협력자들을 '부역자'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한국인의 시각에는 매우 거슬린다. 왜일까? 토착민협력자의 성공사례가 인도이기 때문이다. 인도를 제외하고는 성공적인 토착민의 협력은 그다지 눈에 띄지않는다. 식민주의는 내부 협력자와의 상호정치행위였다고 주장하는 '정치적 협력자' 문제를 제기한 역사학자 로빈슨(R.E. Robinson)조차 "아시아에서는 인도와 일본 외에는 협력세력을 만드는데 모두 실패했다"고 인정한다. 역사학자 강철구 전 이화여대 교수는 책 <역사와 이데올로기>에서 일본도에서 성공했다는 그의 판단에 대해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라고 일축한다. 협력자는 고도의 자율성을 가진 존재이지 관료조직의 부속품이 아닌 것이다. 조선에서 친일파는 그저 부역자에 불과할 뿐이었다. 

협력자에 대한 다소 온정적인 시선을 논외로 한다면 책은 많은 시사점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철학자 조성환은 책 <개벽파선언>에서 한국인은 집단적으로 '근대화 실패'라는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고 말한다. 트라우마를 안은 한국인의 모습을 조성환은 이렇게 말한다. "전통을 부정하면서 서구를 추종하고, 한편으로는 일본을 도덕적으로 미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근대화를 높이 평가하는 상반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런 트라우마는 근육질 과잉남성성에 대한 판타지를 추구하게 만들었다. 국가, 사회, 개인의 목표가 '근육질'일 때, 새로운 국가도 이전 식민지배국과 별다르지 않은 사회로 귀착되어 버린다. 일본 영화 <인간의 조건> 속 1940년대 관동군의 폭력과 넷플릭스 드라마 <D.P.> 속 한국군의 폭력은 놀랄 만큼 우리와 닮아있다. 세계 최저의 출산율, 세계 최고의 자살률은 국민들의 국가에 대한 보이콧에 다름 아니다. 열심히 따라 한 결과다. 

식민지에서 독립한 신흥국가가 인간 전체를 아우르고 보듬는 여성성의 원리를 잊어버리고 식민지배국의 사회발전모델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결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없음을 책 그리고 현실은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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