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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의 '크리스마스 선물', 일본을 '전쟁 피해자'로 만들었다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전범 히로히토 (下)-② 공무사(公務死)된 처형된 전범들
 

2001년 9.11 테러가 터졌을 때 필자는 늦깎이 공부를 하느라 뉴욕 맨해튼에 있었다. 하루아침에 3000명의 희생자가 생겨난 뒤, 한동안 매캐한 공기가 맨해튼을 감쌌다. 창문을 열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이웃집 80대 할머니는 딱 60년 전인 1941년 2,4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낳았던 진주만 피습 때의 충격과 분노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9.11테러의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을 전범자로 처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진주만 피습 뒤 미국 분위기를 되살리듯, 애국주의 바람이 몰아쳤고 해병대를 비롯한 군 지원자가 줄을 이었다.

지난 글에서 살펴봤듯이, 진주만 공습 성공 뒤 히로히토는 해군제복 차림으로 신하들의 배알을 받으며 흐뭇한 하루를 보냈다. 빈 라덴이 ‘뉴욕 쌍둥이 빌딩을 어떤 각도로 부딪치는 것이 충격을 더 줄 수 있을까’ 하며 9.11테러의 세부사항을 점검했듯이, 히로히토는 진주만 공습을 코앞에 두고 작전의 세부사항을 군부 핵심들과 함께 짚었다. 미국을 겨냥해 60년을 터울로 이뤄진 기습 공격의 총책이란 점에서, 누군가가 히로히토를 '사무라이 빈 라덴'이라 부른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 1943년 4월29일 히로히토 국왕이 참석한 대본영 회의 모습. 왼쪽이 해군 지휘부, 오른쪽이 육군 지휘부다. 진주만 공습을 비롯해 주요 안건을 다룰 때마다 히로히토가 참석해 세부사항을 챙겼다.
 

"검찰에게 면죄부 받은 범죄단체 두목"

진주만 피습 뒤 미국에서 이뤄졌던 여러 여론조사로는 "히로히토를 처형해야 마땅하다"는 것이 대세였다. 독일은 이미 항복했고 일본이 ‘1억 옥쇄’ 어쩌고 하며 버티던 시점인 1945년 7월26일 연합국 지도자들이 일본의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에서도 전범자 처단 뜻이 분명히 담겨있었다. "일본 국민을 속이고 이들을 세계정복을 꾀하는 길로 이끌어 잘못을 저지르게 한 권력 및 세력은 영원히 제거돼야 한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히로히토는 1945년 4월말 이틀 사이로 죽은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도쿄 극동국제전범재판소의 피고석에 서지 않았다. 히로히토가 불기소된 가운데 1948년 11월 도쿄재판이 마무리되자, 재판정 안팎에서 격앙된 목소리들이 튀어 나왔다. 프랑스에서 파견된 베르나르 앙리 판사는 "일본 국왕을 심판하지 않았다"며 도쿄 재판의 한계를 지적했다. 패전 뒤의 일본을 다룬 1999년도 역작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미 역사학자 존 다우어(MIT 명예교수)는 앙리 판사의 심정을 이렇게 그렸다. 

"히로히토가 법정에 서지 않은, 누가 봐도 명백한 불공평은 앙리 판사에게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도저히 다른 피고인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일본이 저지른 평화를 깨뜨린 범죄에는 ‘일체의 기소에서 빠져나간 주범(히로히토)이 있고, 어떤 경우에도 피고들은 공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존 다우어, <패배를 껴안고>(Embracing Defeat) 민음사 2009, 598쪽). 

재판 내내 조지프 키넌 수석검사와 신경전을 펼쳤던 호주 출신의 윌리엄 웨브 재판장(수석판사)은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히로히토에게 반드시 실형을 선고했어야 했다. 그는 검찰에게 면죄부를 받은 범죄단체의 두목과 같다"고 한탄했다(에드워드 베르,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2002, 496쪽). 하지만 법정 문은 이미 닫힌 뒤였다.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선물 

히로히토 불기소뿐 아니다. 주요 전범재판 자체가 흐지부지 끝났다. 도쿄재판이 진행 중이던 무렵 17명의 주요 전범이 다음 재판을 기다리며 스가모 형무소에서 수감돼 있었다. 또한 언제 미군 헌병들이 집으로 들이닥치나 하며 떨고 있던 전범 용의자들도 수두룩했다. 많은 사람들은 1차 재판 뒤 곧 2차, 3차 재판이 이어질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1948년 12월23일 전범자 7명을 처형한 다음날 맥아더 사령부는 스가모 형무소에서 2차 재판을 기다리던 전범 17명을 불기소 처분하고 모두 풀어줬다.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17명 가운데는 아베 신조 전 총리(2022년 총격으로 사망하기 전에 ‘극우파’란 비판을 받았던 인물)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가 있었다. 괴뢰 만주국의 경제를 주무르면서 ‘명석하지만 매우 악랄한 인물’로 입소문이 났던 기시다. 도조 내각의 상공대신 및 군수성 차관으로 일제 침략전쟁의 실무자 역할을 충실히 해냈고, 석방 뒤 외무대신, 총리를 지냈다. 패전 뒤 일본 '보수 본류'의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다. 1958년 말 일본 감옥에 있던 모든 전범자들이 풀려난 것도 당시 총리로 있던 기시 덕이다. 따지고 보면 전범이 전범을 풀어준 셈이었다.

17명 석방자 속에는 마지막 조선총독의 얼굴도 보였다. 1945년 9월9일 존 하지 중장에게 항복했던 아베 노부유키(육군대장, 전 총리)다.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내몰며 마지막까지 히로히토에 충성을 바쳤던 아베는 항복 당일에 할복자살을 꾀했지만 실패했다. 측근들의 부축을 받아 총독부(옛 중앙청) 건물에서 항복문서에 서명을 마쳤다. 기시와 아베는 스가모 형무소를 나서면서도 "뭔가 착오로 풀려나는 거 아닌가?"라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고 알려진다.

이들의 불기소 석방은 하루 앞서 이뤄졌던 7명의 전범자 처형을 끝으로 "더 이상 고위급 전범 처벌은 없다"는 미국 쪽의 입장을 확인해준 셈이다. 어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1948년 말 무렵은 미국-소련 사이엔 동서냉전의 갈등이 커져가던 시점이었다. 워싱턴 트루먼 행정부와 도쿄 맥아더 사령부는 전범 처벌로 일본 보수 본류의 반감을 사기보다는, 사면으로 그들의 환심과 협조를 얻고 미일 유착을 다지는 것이 미국에게 더 이롭다는 판단을 내렸다. 뒤이은 6.25 한국전쟁은 일본 전범 처리에 대한 관심을 아예 사라지게 만들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히로히토는 도쿄 전범재판에서 자신을 지켜준 ‘생명의 은인’ 맥아더 장군을 떠나보내야 했다. 당시 맥아더는 한국전쟁에 개입한 중국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핵무기 사용을 포함한 군사적 강공책으로 투르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고, 끝내 전격 해임됐다. 그 소식을 듣자, 히로히토는 맥아더가 머물던 도쿄 공관으로 곧바로 가서 위로의 말을 전했다. 

"공직에서 물러나는 맥아더가 작별 인사를 하러 오는 게 당연하니, 움직이지 마시라"고 궁내청 고위관리가 말렸지만 히로히토는 듣지 않았다(다우어, 717쪽). 왜 그랬을까. 지난 5년 반 동안 맥아더에게 큰 신세를 졌다고 여겼던 그로선 의전이나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하기 앞서 자신의 정치생명을 구해준 든든한 ‘후견인’을 잃게 됐다는 아쉬움이 컸을 것이다.

▲ 1945년 9월2일 미주리 전함에서 일본의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맥아더 장군. 안정적인 점령정책에 도움 된다는 명분으로 히로히토를 비롯한 주요 전범들을 풀어줬기에 그 뒤 많은 논란을 낳았다. ⒸUnited States Navy

"도쿄 전범재판에서 아시아가 빠졌다" 

히로히토 불기소를 비롯해 그야말로 흐지부지 끝난 도쿄 전범재판은 그 뒤로 줄곧 비판을 받아왔다. 장제스 국민당정부의 거점도시였던 충칭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을 일본군이 무차별 공습함으로써 숱한 민간인들을 죽였지만, 그에 대한 책임자 문책이나 공방은 법정에서 없었다. 식민지 조선인들을 강제연행하고 성노예를 비롯한 노동착취로 피눈물을 흘리게 했던 범죄에 대해선 법정에서 논의조차 이뤄지질 않았다. 그렇기에 "도쿄재판에서 아시아가 빠졌다"는 지적을 받아 마땅했다. 이와 관련한 존 다우어의 비판. 

"공포의 대상이던 일본 헌병대 수뇌 중 기소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조선과 대만에서 사람들을 강제로 징용했던 책임자는 물론 수만 명의 비(非)일본계 젊은 여성들을 대규모로 징집하여 ‘위안부’로 만든 뒤 일본제국 군대의 성적 노리개로 삼았던 당사자들도 기소되지 않았다"(다우어, 604-605쪽). 

도쿄재판을 이끌었던 미국의 관심사는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과 필리핀 점령 등으로 빚어진 자국의 피해에 집중됐다. 도쿄재판에 참여한 영국, 네델란드, 호주 등도 자국인들이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에게 겪은 고난에 초점을 맞추었다. 연합군 포로들을 혹사시켰던 버마(미얀마) 철로 공사, 필리핀 바탄에서 미군 포로들이 겪었던 죽음의 행진, 인도네시아에서의 네델란드계 여성들에 대한 성폭행 등 백인들의 자존심을 짓밟은 행위들을 중심으로 전쟁범죄 추궁이 이어졌다. 도쿄재판에서 아시아가 빠졌다는 지적이 그래서 또 나온다.  

전범 처벌 피해간 왕족과 731부대 

히로히토 불기소와 더불어 왕족 출신 주요 전범자들도 기소 명단에서 빠졌다. 히로히토의 고모부 뻘인 아사카 야스히코 장군도 그 가운데 하나다. 아사카는 1937년 난징 공격 당시 몸이 아팠던 마쓰이 이와네 사령관으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무려 30만 명을 희생시킨 잔혹행위에 책임을 지고 교수형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맥아더가 내려준 왕실 면죄부 덕에 살아남았다. 그 대신 왕족 지위를 박탈당했다. 평민으로 돌아간 아사카는 취미인 골프를 즐겼고 히로히토와도 가끔 함께 치기도 했다. 난징 대학살 44년 뒤인 1981년 94세로 죽었다. 저승에서 오랫동안 기다렸을 원혼들이 아사카를 만났다면 뭐라고 했을까. 

또 있다. 이시이 시로 중장을 비롯한 731부대의 수괴들은 미국에 세균전 자료를 건네주는 조건으로 면죄부를 받고 도쿄 재판을 비껴갔다. 이시이 쪽으로부터 ‘거래’ 제안을 받자, 맥아더 장군과 미 통합참모본부가 협의 끝에 빠르게 내린 결론은 "세균 실험자료를 확보하는 것이 전범자 처벌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붙들려온 사람의 머리를 깎은 뒤 꽁꽁 묶어 놓고 ‘마루타’(통나무)라 부르며 세균 실험용으로 희생시켰던 이시이는 세계 전쟁범죄사에서 잔혹하기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악마였다. 1959년 식도암으로 67세에 죽기 전까지 미국의 화학전 본부가 있는 버지니아주 데트릭 기지에서 강연을 하고, 일본에서 병원을 여는 등 자유롭게 지냈다. 이시이의 공범이었던 731부대 주요 간부들도 만주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바탕으로 이른바 ‘잘 나가는’ 의대 교수나 병원 의사로 지냈다.

이시이 일당은 세균무기 개발과정에서의 인체 실험으로 적어도 3000명에서 1만 명가량을 죽였다. 희생자들 가운데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관동군에 붙잡혀 731부대로 넘겨진 조선의 젊은이들도 있었다. 그런 흑역사를 없던 일로 치면서까지 ‘피 묻은 실험자료’에 보였던 미국의 관심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미래의 세균전을 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균의 위협으로부터 우리 인류를 지켜내려는 큰 뜻에서였을까. 

히로히토를 비롯한 주요 전범자들이 처벌을 비껴간 결과는 전후 일본에 심각한 문제점을 낳았다. 무엇보다 히로히토가 ‘천황’ 자리에 그냥 머무는 것을 본 일본인들은 전쟁범죄에 대한 공범 의식을 덜 느끼게 됐다. "국왕이 전쟁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우리도 책임이 없다"는 분위기가 퍼져갔다. 1948년 12월 주요범죄자들이 불기소로 풀려남으로써 "전범 처벌은 이제 모두 마무리됐다"고 여기게끔 됐다. <난징의 강간>을 쓴 아이리스 장도 히로히토의 불기소가 낳은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히로히토에게 전쟁 책임을 묻지 않고, 더욱이 왕좌를 지킬 수 있게 함으로써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저지른 범죄 행위에 대해 역사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아이리스 장,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미다스북스 2014, 255쪽).

▲ 1937년 12월18일 난징 비행장에서 만난 난징 학살 주범들. 도쿄재판에서 교수형을 받았던 마쓰이 이와네(왼쪽에서 두 번째), 왕족이라 전범 처벌을 피했던 아사카 야스히토(오른쪽에서 두 번째).

공무사(公務死)로 바뀐 전범자들의 죽음 

1950년 한반도에서 터진 비극은 일본에 여러 가지로 이롭게 작용했다. 35년 동안 가혹한 수탈을 당했던 곳에서 벌어진 유혈 참극 덕에 일본은 전쟁 특수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다. 반공이 미국 대외정책의 1순위로 떠오르면서 일본 점령정책도 바뀌었다. 지난날 일본제국의 식민지 착취와 침략전쟁의 충직한 하수인으로 움직였던 공직자들은 8.15 패전과 더불어 쫓겨났었다. 하지만 1950년 8월과 1951년 8월 두 차례에 걸친 공직추방령 해제 조치로 복직이 이뤄졌다.

공직추방령 해제 한 달 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고 미국과의 유착관계를 이어갔다. 1951년 9월 강화조약에는 48개 국가가 서명했지만, 일제의 피해 당사자인 동아시아의 주요 3국(남북한, 중국)은 아예 초청 대상에서 빠졌다. 이것이 미-일 중심으로 진행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지닌 문제점의 하나로 꼽힌다. 강화조약과 동시에 미국과 일본은 미일안전보장조약을 맺었다. 미국의 입장에선 일본을 반공 요새로 삼고, 일본의 입장에선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 경제발전을 이룬다는, 양국 나름의 이점이 있었다. 

미국에게 일본의 전쟁범죄는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었다. 동서냉전 구도와 미일 유착은 히로히토를 비롯한 주요 전범 불기소와 더불어 일본의 과거사 왜곡과 불감증을 더욱 도지게 만든 요인이다.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조약 발효에 맞춰 일본 의회의 우파 정치인들은 해괴한 법률 하나를 통과시켰다. 도쿄재판에서 교수형을 받았던 A급 전쟁범죄자들을 ‘공무사’(公務死), 다시 말해 ‘공무 중에 사망’한 것으로 인정했다. 전쟁범죄 행위를 공무라니? 이로써 주요 전범자들의 유족들은 제법 많은 연금을 달마다 챙기게 됐다. 

일본인이 전쟁 피해자?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인들의 과거사에 대한 불감증은 도져갔다. 전쟁범죄의 피해자, 희생자들에게 사과 또는 배상을 미루면서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오늘날 일본인들의 모습이다. ‘집단적 과거사 불감증’이라 해야 할까. 나치 시절의 전쟁범죄에 나름의 성의 있는 사과와 배상을 해왔고 앞으로도 나치 잔당들을 꾸준히 찾아내 전쟁범죄자로 기소하겠다는 독일과는 너무 차이가 난다. 

더 나아가, 히로히토의 전범 면책은 일본인들 스스로를 전쟁 피해자로 여기게 만들었다. 일제가 벌인 전쟁으로 많은 일본인들은 고통을 겪었다. 가족이 전쟁터에 나가 죽거나 불구가 됐고, 식량 부족으로 굶주림은 일상적인 괴로움이 됐다. 미군 공습의 공포로 일부 여성들은 생리가 끊기기도 했다. 그들 자신이 전쟁 피해자라는 여길 만도 했다. 거기에 전쟁범죄에 대한 공범의식이 무뎌진다면 남는 것은 미군 공습과 원자폭탄으로 생명과 재산을 잃었다는 ‘피해자 기억’이다.

원폭이 떨어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가보면, ‘평화공원’이란 이름으로 잘 꾸며져 있어 방문객들을 놀라게 한다. 안내자는 "여기야말로 평화의 성지입니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필자의 기억으론 한 곳마다 대여섯 번씩 들었다. 그 말 속에는 원폭 피해자인 일본인들이 ‘반전 반핵 평화’의 구호를 외칠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럴 만도 하다. 문제는 염치없는 극우 집단과 정치가들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이용해 슬며시 자기주장을 끼어 넣는다는 점이다. "일본은 전쟁 피해국이라 사과할 필요 없다"며 목에 핏대를 올린다. 과연 그럴까. 전쟁범죄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배상 없이 피해를 내세우면서, 슬며시 안보와 군비강화를 끼워 넣어도 되는 걸까. 

왜곡된 전쟁관과 역사인식은 지난 80년 동안 일본인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 극우파들은 일본인들의 '전쟁 기억의 창고'에서 '가해'를 지우고 '피해' 기억을 그 자리에 밀어 넣어왔고 실제로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다름 아닌 21세기에 일본이 보이는 신보수주의 군사대국화 흐름이다. 집단적 기억상실과 비뚤어진 현실인식은 ‘과거사 청산’이란 역사의 미결과제를 풀어야 한다고 여기는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2차 가해나 다름없는 아픔을 안겨주고 있다.

베네딕트, "일본인은 기회주의자"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일본인들을 분석한 <국화와 칼>은 오랫동안 널리 읽혀온 책이다(초판 1946년). 그녀는 일본문화의 특성을 섬세하게 짚으면서도 ‘일본인들은 기회주의자’라는 표현을 책에서 여러 번 썼다. ‘극단적인 기회주의적 윤리를 가진 국민’이라고도 했다. 칼을 허리에 찬 사무라이들이 평소엔 일본어로 ‘기리’(義利)와 ‘온’(恩, 은혜)을 말하지만, 위기 국면에서 어느 편에 서야 내게 이로운가를 따질 때는 행동이 확 달라지기도 한다는 얘기다.

같은 맥락에서, 1945년 패전 뒤 일본이 점령자인 미국에 순한 양처럼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상황에 따라 언제든 ‘무장된 진영으로 조직된 세계 속에서 자신을 찾을 것’이라고 내다봤다(베네딕트, <국화와 칼> 책만드는집 2017, 361-362쪽). 정치학자가 아닌 인류학자가 일본에 한 번도 간 적도 없이 77년 전에 쓴 이 경고성 문장은 짧지만 예지력이 돋보인다. 오늘날 평화헌법 9조를 바꾸고 재무장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은 예사롭지 않다. 독도를 일본 땅이라 우기는 것은 19세기 정한론(征韓論)의 21세기 판(版)이라 봐야 할까. 

▲ 1947년 히로시마를 방문한 히로히토. 멀리 원폭 돔이 보인다. 극우파들은 일본이 침략국이 아니라 전쟁 피해국이라 주장하는 근거로 히로시마, 나가사키를 들먹인다.

동아시아의 공영과 평화 이루려면... 

일본의 극우집단들은 21세기에 아직도 ‘대동아공영’이란 몽상을 품고 있다. 1941년 진주만 공습 성공 뒤 군국주의자들은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외쳐댔었다. 그러면서 전쟁 이름도 ‘대동아전쟁’이라 불렀다. 대동아 공영? "백인 제국주의자들을 아시아에서 몰아내고 ‘공동 번영’을 누리자"는 것이니 얼핏 듣기엔 그럴 듯하다. 하지만 그 속살을 만져보면, 일본제국주의의 탐욕과 야망이 흠뻑 묻어난다. 

지금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다. 이웃 국가들과 평화로운 관계가 아니라 자국 중심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고집한다면 갈등은 필연적이다. 갈등이 쌓이면 전쟁, 그리고 파멸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이것이 패배로 끝난 지난 전쟁이 남긴 역사의 교훈임을 일본인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전쟁 피해자, 희생자인양 역사의 기억을 왜곡하고 전쟁범죄 자체를 없던 일로 부인한다면, 동아시아 평화는 더욱 멀어진다. 

일본의 극우파들은 소수의 양심적인 사람들이 지난날 전쟁범죄에 사과와 더불어 용서를 빌자고 하면, '자기학대하는 일본인'이라 조롱한다. 히로히토 전쟁 책임론을 꺼내면 ‘비(非)국민’이라며 돌을 던진다. 과거사를 돌아보자는 몇몇 사학자들의 ‘자성(自省) 사관’을 아예 ‘자학(自虐) 사관’으로 몰아세운다. 그러면서 ‘전쟁 포기’와 ‘전력 포기’ ‘교전권 불인정’ 등을 담은 평화헌법 9조의 개정 또는 자의적인 해석으로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밀어붙인다면, 동아시아의 평화는 어렵다.

이제 글을 매듭지어야겠다. 전쟁 주범 히로히토를 비롯해 일본의 전쟁범죄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던 때문에 많은 문제점들이 생겨났다. 지난 80년 동안 일본의 전쟁범죄와 관련된 동아시아의 과거사는 안타깝게도 미해결 상태다. 일본은 과거사를 진심으로 사과하고 피해자들에게 합당한 배상을 하는 것이 먼저다. 과거사를 둘러싼 현재진행형 갈등을 풀어야 하는 쪽은 일본이다. 결국 일본이 바뀌어야 한다. 

끝으로, 다음 주 글 미리보기. 도쿄재판은 1948년 12월 주요전범들이 풀려나고 흐지부지 막을 내렸지만, 아시아 각지에서 열렸던 B급, C급 전범재판은 달랐다. 중국, 필리핀, 버마(미얀마), 네델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의 전범재판에서 5,700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사형 948명 포함). 문제는 식민지 조선 출신 148명이 ‘전쟁범죄자’로 낙인 찍혔고, 그 가운데 25명이 사형판결로 죽었다는 사실이다. 다음 주엔 왜 이들이 BC급 전범자로 내몰렸는지, 문제점은 무엇인지를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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