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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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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란?

 

중국의 문헌인 「석명(釋名)」에 ‘궁(宮)은 궁(穹)이다’라고 했다. 궁(穹)은 “담 위로 우뚝 솟은 집”이라는 뜻이다. 즉, 나라 안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궁과 관련된 용어에 궁궐(宮闕), 궁전(宮殿), 궁실(宮室), 궁가(宮家), 대궐(大闕) 등이 있다.궁궐이란 궁(宮)과 궐(闕)을 합친 말이다. ‘궁’이 왕과 신하가 함께 정무를 보고 거처하는 곳이라면,‘궐’이란 그 궁을 지키는 궁성과 성루와 성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궁궐은 “궁+궐”이다.

 

궁전은 궁궐 안에 있는 전각(殿閣)을 의미한다. 왕이 사용하는 사적, 공적인 개개 건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궁실에서 실(室)은 실(實)이다. 사람과 사물이 그 속에 가득한 것을 말한다고 석명(釋名)에 해석되어 있다. 궁가란 궁전과 같은 말이긴 하지만 굳이 구분하자면 왕이 아닌 왕족들이 거처하는 건물을뜻한다. 궁궐은 왕조 국가의 최고 통치자인 왕이 사는 곳이다. 그러나 궁궐의 의미는 여기서 그치지않는다. 단순히 국왕이 일상적으로 먹고 자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활동 외에 나라를 다스리는 일 즉 주권자요, 통치자로서 행하는 모든 일 “공식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정치와 행정에 관한 모든 일은 국왕이 집행하게 되어 있지만 국가의 모든 일을 국왕이 직접 집행할 수는 없다. 국왕을 도와 특정한 임무를 맡은 수많은 관리들이 궁궐에 드나들며 왕을 만나 정치적인 협의를 하고, 집행 결과를 검토하고 보고하였다. 즉, 궁궐은 국가 경영의 핵심적인 공간, 국가 최고의 관청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궁궐을 통해서 우리는 그 시대의 역사와 사상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고, 최고통치자의 공간을 위한 최고의 건축, 예술, 미학 등을 가늠할 수 있다.

 

1989년 8월 1일 국보 제249호로 지정되었다. 2점 모두 견본채색(絹本彩色)이다. 16첩 병풍으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가로 576㎝, 세로 273㎝이다. 각각 고려대학교박물관과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입체감이 나도록 조감도식으로 그려 자연의 구릉과 능선, 계류와 원림(苑林) ·궁담 ·전각 ·재실 ·정자 등이 생생하며, 집과 물체마다 먹으로 이름이 쓰여 있어, 역사적 자료로 가치가 높다.

 

《순조실록》에 의하면, 1830년(순조 30) 8월에 창경궁 환경전(歡慶殿)이 불탔다 하였는데, 이 그림에는 환경전이 그려져 있어 1830년 이전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궁궐지에는 창덕궁 후원 내의 연경당(演慶堂)이 1828년(순조 28)에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배치도에는 연경당이 없다. 궁궐지에 창덕궁 경복전(景福殿)이 1824년(순조 24)에 소실되었다고 하였는데, 이 그림에는 경복전기(景福殿基)로 불탄 자리만 그려져 있다.

 

따라서 동궐도는 1824년 경복전이 소실된 후부터 1828년 연경당이 건립되기 이전까지의 기간 중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궁의 옛 모습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왕궁의 건물 배치나 조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궁궐 (宮闕)

개념

임금과 그의 가족 및 그들의 생활을 돌보는 사람들이 사는 집.

 

정의

임금과 그의 가족 및 그들의 생활을 돌보는 사람들이 사는 집.

 

개관

왕권국가에서 임금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으로 궁중의 생활은 그를 중심으로 엄격한 규범 아래 행하여져 왔으며, 생활양식도 가장 세련되고 화려하였다.

 

궁궐이란 용어는 궁(宮)과 궐(闕)의 합성어로서 궁이란 천자나 제왕, 왕족들이 살던 규모가 큰 건물을 일컫고, 궐은 본래 궁의 출입문 좌우에 설치하였던 망루를 지칭한 것으로, 제왕이 살고 있던 건축물이 병존하고 있어서 궁궐이라 일컫게 되었다. 궁궐은 궁전·궁성·궁실 등으로도 불리며, 이들 용어는 넓은 의미로 볼 때 같은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사원 辭源≫에 보면 “궁궐은 같은 말로 궁전이라 한다. 궁문(宮門) 밖에는 두 개의 궐이 있어 옛날에는 궁궐이라 하였는데, 그 내용을 말함에는 궁전이라 하고 그 외관을 말함에는 궁궐이라 한다(猶言宮殿 宮門外有兩闕 古稱宮闕 又就其內容言則曰宮殿 就其外觀言之則曰宮闕).”고 정의하고 있다. 궁궐은 지배계급인 제왕이나 영주의 정무(政務) 및 일상생활에 가장 적합한 전유공간(專有空間)으로서 당대를 대표할 수 있는 최상급 건축물이었다.

 

기능별로는 정사(政事)를 위한 정무건축 공간과 일상생활을 위한 생활건축 공간, 그리고 휴식과 정서를 위한 정원건축 공간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들 세 공간구역은 시대와 지형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한 궁장(宮牆)구역 안에서 유기적으로 배치하여 건물과 건물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동선(動線)이 단절되지 않도록 구성하였다.

 

배치형식은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정사를 목적으로 한 건물군을 앞에 배치하고 생활건축군을 뒤편에 배치하는 전조후침(前朝後寢) 형식이 통례로 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배치법은 중국이나 일본의 궁궐 배치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궁궐의 구성요소에는 궁궐을 둘러싸는 방형(方形)이나 장방형(長方形)의 외벽 설비가 있었고, 이 외벽은 높고 넓은 석담[石墻]이나 토담[土墻]으로 둘러쳐져 있으며, 외벽 4주(四周)에는 궁문(宮門)을 설치하였다. 궁역(宮域)은 정무건축군을 전면 중앙에 배치하여 정전(正殿)을 중심건물로 하여 그 주위에 정방형 또는 장방형의 회랑(回廊)을 세워 4주 회랑에는 각각 문을 설치하였고, 이 정무건축 뒤편에는 침전(寢殿)과 내전(內殿) 등을 두고, 이곳 역시 회랑으로 둘러막는 것이 일반적인 배치형식이었다.

 

휴식과 정서를 위한 후원(後苑), 즉 정원건축은 누각(樓閣)·정사(亭榭) 등의 건축물과 연못·조산(造山)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위치는 궁역의 동쪽이나 서쪽, 혹은 북쪽에 자리잡아 일상생활 공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이 통례였다.

 

궁궐의 역사

조선시대 이전의 궁궐건축은 지상건축 유구(遺構)가 현존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문헌에 나타난 궁궐건축의 관계자료와 그들 유지(遺址)에서 밝혀진 조사 내용을 통해 당시의 궁궐건축의 실상을 일부 알 수 있다.

 

고구려시대의 궁궐

고구려의 궁궐건축은 만주 통구(通溝)의 국내성(國內城)과 평양의 안학궁(安鶴宮) 유지에서 그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국내성의 경우에는 일부 초석이나 기와조각만으로는 궁지(宮址) 내용을 확실히 알 수 없고, 평양의 안학궁은 근년 발굴된 조사 내용으로 그 배치형식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궁궐에 대한 기록이 동명성왕·유리왕·봉상왕·광개토왕·평원왕조(條)에 보이고 있으며, 그 내용은 궁궐과 이궁(離宮)을 건설하거나 증축, 수리하였다는 기록이다. 봉상왕조에는 특히 “임금이란 백성이 우러러보는 바이니, 궁전이 장엄하고 화려하지 못하면 어떻게 위엄을 보일 수 있겠는가(君者百姓之所瞻望也 宮室不壯麗無以示威重).”라는 구절이 있어 궁궐의 규모와 내용이 장엄하고 화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안학궁은 발굴조사 결과 궁역 범위와 전당(殿堂) 및 회랑·문지(門址) 등의 배치형식이 밝혀졌으며, 건물 수도 52개소나 확인되었다. 이곳은 평양 대성산(大城山) 기슭에 위치한 궁궐로 남북 및 동서 길이 약 620m의 방형 궁성을 돌리고, 그 안에 남북 방향의 3개 축(軸)을 기준으로 건물을 배치하였다.

 

궁의 배치는 3개의 남북축 가운데 중심이 되는 중심축에는 남쪽으로부터 외전·내전·침전 등의 구역을 차례로 배치하고 외전의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같은 규모의 동·서전을 둔, 중심축 기준의 완전 대칭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궁궐의 동북쪽에는 별도로 동궁(東宮)으로 생각되는 전당이 한 구역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 동궁 앞에는 정원이 마련되고 침전 뒤편 북쪽에는 인공의 조산을 만들어 후원 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시대의 궁궐

백제의 궁궐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전 4년(온조왕 15) 한도(漢都)에 세웠던 신궁(新宮)이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儉而不陋 華而不侈).”는 기사로 미루어 초창기의 궁궐건축은 소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391년(진사왕 7)에 궁전을 수리하고 연못을 파서 그 속에 산을 만들고 기이한 금수(禽獸)와 초목(草木)을 길렀다는 기록을 보면 그 당시 궁궐건축의 화려함과 조경술(造景術)의 수준을 알 수 있다.

 

웅진(熊津)으로 수도를 옮긴 뒤 동성왕은 궁궐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지었는데 그 높이가 50여 척(尺)이었다고 하며, 연못을 파고 기이한 새들을 기르게 하므로, 신하들이 상소로 항의하였으나 왕은 회답하지 않고 오히려 궁문을 닫기까지 하였다는 것을 보면, 궁궐의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538년(성왕 16)에는 사비(泗沘 : 오늘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고 도성(都城) 안에는 사비궁(泗沘宮)·망해궁(望海宮)·황화궁(皇華宮)·태자궁(太子宮) 등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그 실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634년(무왕 35) 궁궐 남쪽에 땅을 파고 20여리의 거리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연못 연안에는 나무를 심었으며, 못 안에는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기록들을 통하여 백제에도 고구려에 뒤떨어지지 않는 권위와 장엄함, 그리고 호사함을 갖춘 궁궐건축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신라시대의 궁궐

신라시대 궁궐건축은 박혁거세가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 궁궐을 남산 서쪽 기슭 고허촌(高墟村)에 만들고, 서기전 37년(혁거세 21)에는 금성(金城) 안에 궁궐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101년(파사왕 32)에는 월성(月城)을 만들고 궁궐을 그곳으로 옮겼으며, 249년(첨해왕 3)에는 남당(南堂)이라는 정청(政廳)이 건축되었다. 또 585년(진평왕 7)과 622년에는 대궁(大宮)·양궁(梁宮)·사량궁(沙梁宮)을 만든 뒤, 내성(內省)을 두어 3궁(三宮)을 장악하게 하였다.

 

그 뒤 651년(진덕왕 5)에는 조원전(朝元殿)에서 왕이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어, 중요한 의식행사를 하던 궁궐이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유구(遺構)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통일신라시대의 궁궐

통일신라시대의 궁궐건축은 삼국을 통일한 통일국가답게 더욱 융성, 발전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674년(문무왕 14) “궁내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짐승을 길렀다.”고 하며, 679년에는 궁궐을 중수하였는데 매우 장려하였다고 한다.

 

궁궐건축의 이름을 보면 임해전(臨海殿, 674)·강무전(講武殿, 677)·좌사록관(左司祿館, 677)·우사록관(右司祿館, 681)·숭례전(崇禮殿, 687)·영창궁(永昌宮, 727)·서란전(瑞蘭殿, 800)·동궁만수방(東宮萬壽房, 804)·평의전(平議殿, 811)·월지궁(月池宮, 822)·월정궁(月正宮)·내황전(內黃殿)·요석궁(瑤石宮)·나궁(古奈宮) 등이 있고, 문루(門樓)로는 임해문(臨海門)·인화문(仁化門)·귀정문(歸正門)·현덕문(玄德門)·무평문(武平門)·준례문(遵禮門)·월상루(月上樓)·망은루(望恩樓)·명학루(鳴鶴樓)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궁궐건축은 현존하지 않으며, 유지로서 확인된 것은 1975년 발굴조사된 안압지(雁鴨池) 주변 유적뿐이다. 안압지 주변에서는 총 30개소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는데, 건물의 배치는 남북 중심축을 기준으로 하여 좌우대칭 형식이었다. 연못가의 건물터는 연못과의 조화를 위하여 대칭을 약간 변형시킨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궁궐 배치의 좌우대칭 기본형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고려시대의 궁궐

고려시대의 궁궐건축은 개성 만월대(滿月臺)에 남아 있는 궁궐터의 초석과 석축유구 자료를 기초로 문헌과 비교하여 대략의 형식을 알 수 있다.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따르면, 궁궐은 송산(崧山)에 의지하여 고목이 우거져 있어 원경이 악묘(嶽廟)나 산사(山寺)에 가까운 느낌이 있고, 담담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또 궁성 주위에는 13개의 문이 있어 광화문(廣化門)이 정동(正東)의 문으로 긴 거리와 통하고, 전문(殿門)은 15개인데 신봉문(神鳳門)이 가장 화려하다고 하였으며, 외전의 중심건물인 회경전(會經殿)을 비롯하여 장화전(長和殿)·원덕전(元德殿)·건덕전(乾德殿)·연영전각(延英殿閣) 등을 설명하고 있다.

 

만월대의 궁궐 특징은 평지가 아닌 구릉지대에 건물을 배치한 점이며, 궁궐의 중심이 되는 외전·내전·침전 등의 건물군이 남북의 동일 중심축에 배치되지 않은 점이다. 즉, 회경전을 중심으로 한 외전 일곽과 장화전을 중심으로 한 내전 일곽 및 뒤편의 침전 일곽이 지형에 맞추어 축을 달리하고 있다. 건축의장은 건물에 단청이 되어 있고 구리로 꽃무늬를 만든 동화(銅花)로 꾸며져 웅장하고 화려하였다고 한다.

 

후원의 조경도 괴석(怪石)을 모아 선산(仙山)을 만들고, 물을 끌어들여 샘과 연못을 만들었으며, 이름난 꽃과 기이한 나무를 심어 매우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다. 특히 ≪고려사≫에 보면, 의종은 왕궁 동쪽에 이궁(離宮)을 만들고 태평정(太平亭)·관란정(觀蘭亭)·양이정(養怡亭)·양화정(養和亭) 등의 누정(樓亭)을 지었으며, 양이정에는 청자기와를 덮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궁궐의 화려함을 짐작할 수가 있다.

 

조선시대의 궁궐

조선시대 궁궐건축으로 대표적인 것은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일명 경운궁) 등이다. 경복궁은 이들 궁궐 중 정궁(正宮)으로서 주위에 궁장을 쌓아 전체 평면이 남북 방향으로 긴 장방형이며, 정남 중앙에 광화문(光化門), 동쪽과 서쪽에 건춘문(建春門)과 영추문(迎秋門)을 세우고 북쪽에는 신무문(神武門)을 배치하였다.

 

정남의 광화문을 들어서면 홍례문(弘禮門)이 있고, 영제교(永濟橋)를 지나 외전 정문인 근정문(勤政門)에 다다른다. 근정전(勤政殿) 일곽을 회랑의 보간이 2칸인 복랑(複廊)이 장방형으로 둘러막아 외전공간을 만들었으며, 그 내정(內庭) 북쪽으로 치우쳐 궁궐 정전(政殿)인 근정전이 남향해서 자리잡고 있다.

 

이 근정전 일곽 뒤편에는 사정전(思政殿) 구역과 강녕전(康寧殿)·교태전(交泰殿)이 자리잡고 있어, 광화문에서 교태전까지의 중요 건물이 남북 중심축상에 배치되고 좌우 일곽들이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강녕전 이북의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헐려 현존하는 것이 없다.

 

현존하는 건물은 근정전 일곽의 건물들, 사정전·천추전(千秋殿)·자경전(慈慶殿)·경회루(慶會樓)·수정전(修政殿)·함화당(咸和堂)·집경당(絹敬堂)·향원정(香遠亭)·집옥재(集玉齋) 등이며, ≪궁궐지 宮闕志≫에 보이는 160여 전각(殿閣)의 7,300여칸의 규모는 그 유지만이 남아 있다. 경복궁의 후원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누어 배치하였는데, 그 하나는 궁역 서쪽의 경회루 지역이며, 다른 하나는 궁역 북쪽의 향원정 지역이다. 경회루 지역은 왕실의 권위를 과시한 대외적 정원이며, 향원정 지역은 대내적 정원으로 꾸며졌다.

 

창덕궁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에서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별궁이다. 1405년(태종 5) 이궁으로 창건되고,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 하여 일명 동궐(東闕)이라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1611년(광해군 3)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덕궁은 다른 궁궐과는 대조적으로 자연적인 지형과 산세(山勢)에 따라 전각을 배치하고 자연과 인공을 무리없이 조화시킨 점에 그 특징이 있다.

 

궁궐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들어서면 동북쪽으로 정전인 인정전(仁政殿) 일곽이 있고, 이 일곽 동서 양쪽에는 비대칭으로 선정전(宣政殿)과 선원전(璿源殿)을 배치하였으며, 침전은 인정전 일곽의 중심축과 다른 보조축을 만들어 선정전 동북쪽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중심축과 보조축의 결합과 연결은 합리적으로 조화되었으며, 동선상의 무리가 없도록 하였다.

 

특히 후원인 비원(祕苑)의 누각과 정사(亭榭)들은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선경(仙景)에 가까운 비경(祕景)으로 만들어 자연순응의 법칙을 최대한 발휘한 조선시대 궁궐의 대표적 정원이다.

 

창경궁은 1483년(성종 14) 고려 수강궁(壽康宮)터에 세운 궁궐로 임진왜란 때 전소한 것을 1616년(광해군 8) 다시 중건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경궁은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일곽이 궁궐 배치의 기본형식인 남향 배치가 아닌 동향이고, 중심축인 동서축보다 남북축이 더욱 긴 것이 특징이다.

 

궁장으로 둘러싸인 궁역은 동쪽 중앙부에 위치한 중층누문(中層樓門)인 홍화문(弘化門)을 통하여 출입하고, 이 문을 지나 옥천교(玉泉橋)를 건너면 정무구역의 입구인 명정문(明政門)에 다다르게 된다.

 

명정문 좌우에는 장랑(長廊)이 길게 남북으로 놓여 동서 방향의 회랑과 만나고, 명정문을 들어서면 명정전 앞에 내정이 펼쳐지고 서북쪽에 정전인 명정전이 동향으로 위치하여 정무구역을 형성하고 있다. 정침(正寢)인 환경전(歡慶殿)과 경춘전(景春殿)을 비롯한 내전들은 정전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내전들의 뒤편에는 멀리 성밖의 시가지가 보이고, 남산을 비롯한 산천이 바라보이는 밝고 높은 언덕인 통명전(通明殿) 언덕과 북쪽의 환취정(環翠亭)을 중심으로 후원이 형성되어 있다.

 

정궁인 경복궁의 남쪽에 위치한 덕수궁은 처음부터 궁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고 왕족의 사저(私邸)로 쓰이던 것을 궁으로 개조한 것이다. 이곳이 본격적으로 궁의 모습을 갖춘 것은 고종이 궁궐로 사용하면서부터이다. 덕수궁의 배치를 보면 남북 중심축상에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중화문(中和門)을 비롯하여 석어당(昔御堂)·즉조당(卽祚堂)·대한문(大漢門) 등이 있는데, 다른 궁궐에 비하여 궁장을 두른 기지(基地)나 내전의 여러 전각 배치가 산만한 느낌이 있다. 이는 덕수궁이 원래 민간 가옥이었던 것을 궁궐로 용도를 바꾼데다가 임진왜란 때 피난에서 환도하여 임시궁궐로 거처하였던 탓이라 생각된다.

 

그 밖에 조선시대의 궁궐로는 경희궁을 들 수 있다. 현재는 그 광대한 궁궐터가 완전히 변하여 옛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고, 다만 궁의 석축과 계단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전시대(全時代)를 통해 볼 때 우리 나라 궁궐건축의 중추적 공간은 배치와 건물 형태에 있어서 유가적(儒家的) 사상이 기본이 되어 엄격한 위계성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이후로는 부속공간 구성이 도가적(道家的) 사상에 더욱 접근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이 두 사상이 결국 구체적으로 조형예술과 건축 등의 대상을 통해 구현되었다.

 

궁중생활

궁중에서 상주하는 사람은 왕을 중심으로 그의 가족과 이들의 사생활을 돕는 여인 집단인 궁녀, 그리고 내시들로 이루어진다. 왕의 가족은 왕의 배우자와 직계 존·비속으로 구성된다. 즉 왕비와 대비·왕대비·대왕대비 등 현재와 과거의 왕비들과 왕의 자손 및 그 배우자이다. 다만 배우자는 장래 왕통을 이을 장자와 장손의 배우자에 한한다. 일반 왕자녀(대군·군·공주·옹주)들과 세손을 제외한 세자의 자녀(대군·군·군주·현주)는 계례(筓禮 : 成人禮) 전의 미성년자만이 함께 생활한다.

 

이 밖에 후궁이 있는데, 이들은 왕비 이외의 복수의 부인들로 내명부에 속한다. 일반 왕자녀와 왕손들이 궁궐 안에 상주하는 기간은 계례 전에 한하는데 남자들은 그보다 빨라서 10세 미만까지이며, 여자들은 혼례 전(13세 이전)까지이다. 계례는 13∼14세 때 치르지만 남자는 왕과 세자·세손을 제외하고는 10세가 넘으면 궁궐에서 잠을 잘 수 없기 때문에 대체로 8세 무렵부터 저택을 마련해서 보모상궁과 소정의 궁녀를 딸려 독립시킨다.

 

궁녀제도

궁녀는 궁인·나인·내인·여관(女官)이라고도 하는데, 군주국가의 사치와 실리의 양면성에서 존재하는 일종의 노예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존재는 백제가 망할 때 3천 궁녀가 낙화암에서 투신했다는 전설이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 궁제에 보이는 여성들로 미루어 왕권의 존재만큼 오래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보이는 이들이 단순히 노동력만을 제공하는 고용녀들이었는지, 아니면 그 이상의 임무, 즉 왕을 곁에서 모시는 소임을 하는 여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문희(文姬)·보희(寶姬) 자매를 처로 맞이한 무열왕이나 신라가 망할 때 경애왕의 곁에 몇 명의 시첩이 있었다는 사실은 궁궐에 왕을 위한 복수의 여인들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본격적인 궁녀제도는 고려 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고려 초에는 후비 이하를 모원(某院)·모궁부인(某宮夫人)으로 일컫다가 현종 때에 비로소 상궁(尙宮)·상침(尙寢)·상식(尙食)·상침(尙針)의 직명을 정했다. 한편 귀비(貴妃)·숙비(淑妃) 등의 호칭도 있었는데 정종 이후는 원주(院主)·원비(院妃)·궁주(宮主)로 일컫기도 하였다. 문종 때 궁제를 정하여 귀비·숙비·덕비(德妃)·현비(賢妃)의 구분이 생겼는데 이들은 사실상 왕의 후궁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한 시대에 500∼600인이 존재하였는데, 이들은 넓은 의미의 내명부에 속하였다. 궁녀의 범위는 본궁·별궁·제사궁이나 혼궁(魂宮)으로 불리는 왕실의 사당에 종사하는 여인까지 포괄한다. 궁녀는 최소 4∼5세 정도의 어린 견습나인(아기나인)에서 70∼80대의 원로상궁까지 있으며, 신분상 세 등급으로 나뉜다. 이들은 중병이 들어 임무 수행이 불가능할 때까지 종신제로 근무한다.

 

(1) 상 궁

입궁한 지 30년이 되면 왕이 상궁 첩지를 내린다.

 

(2) 나인[內人]

입궁한 지 15년이 되면 관례를 치른 후 정식 나인이 된다. 관례는 머리를 쪽찌고 어른이 되는 성인식인데 임궁 연령 4세를 기준으로 하면 보통 20세 전후가 된다.

 

(3) 아기나인(견습나인)

가장 어린 나이에 입궁하는 곳은 지밀(대전○내전 등)로 4∼5세이며, 침방·수방은 7∼8세, 그 밖의 처소는 12∼13세에 입궁한다.

 

이러한 궁녀들 이외에 각심이·방자·무수리·손님이라는 명칭으로 불린 하급 일꾼들이 있었다. 각심이는 상궁과 개인들의 처소에서 부리는 가정부이고, 방자와 무수리는 궁궐에서 막일을 하는 잡역부로 소주방·세답방·생과방 등 각 처소에서 일한다. 이들 중에는 기혼녀로서 통근하는 사람도 있었다.

 

궁궐의 생활체제

왕의 가족이 사는 집은 궁궐 내에서 각기 독립가구를 이룬다. 심지어 부부간에도 명분상으로는 별개의 가구이다. 즉 대전(大殿)과 중전(中殿), 세자와 세자빈, 세손과 세손빈 등 명분상으로는 별개의 가구여서 궁녀도 따로 딸린다. 뿐만 아니라 숙식하는 곳도 다른 경우가 많다. 예컨대 어느 궁이나 가장 깊은 침전은 중전의 정침으로 명기되어 있으며, 왕과 공동의 침전이라고는 나와 있지 않다.

 

이들 각 전궁(殿宮)에는 여섯 개의 부서가 있어 왕족의 생활을 도왔다. 6부서는 지밀(至密)·침방(針房)·수방(繡房)·소주방(燒廚房)·생과방(生果房)·세답방(洗踏房)으로 이루어진다. ① 지밀 : 침전·안사랑·대청 등이 있는 안채. ② 침방 : 바느질하는 곳. ③ 수방 : 자수를 관장하는 곳. ④ 소주방 : 음식을 만드는 곳. 안소주방과 밖소주방으로 나누어지는데 안소주방은 주로 일상음식을 담당하고 밖소주방은 잔치음식을 담당한다. ⑤ 생과방 : 음료수·죽·다식·약과·전과 등을 만드는 곳. ⑥ 세답방 : 빨래·다듬이질·염색 등을 맡은 곳.

 

이 밖에 부속 처소로 퇴선간·세수간·복이처가 있었다. 퇴선간은 수라를 짓고 탕을 데워서 수라상을 차리는 곳인데, 소주방이 멀어서 중간부엌으로 설치된 것이다. 세수간은 왕의 세숫물과 목욕물을 대령하고 수건·요강·타구·매우틀(변기)을 담당한다. 복이처는 아궁이에 불을 때고, 등촉(燈燭)·납촉(蠟燭 : 촛불)을 담당하는 곳이다.

 

각 부서에 근무하는 궁녀는 지밀을 제외하고는 상궁과 나인을 합하여 15인 정도이고, 지밀은 20인 정도이다. 그러나 전궁의 주인인 왕족의 신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1897년(광무 1) 대한제국으로 승격할 때 정한 궁녀의 숫자는 대전·대비전·중궁전이 각 100인, 세자궁 60인, 세자빈궁 40인, 세손궁 50인, 세손빈궁 30인이었다.

 

왕과 비빈, 궁녀의 생활

왕 내외와 궁녀의 일과는 다음과 같다.

 

왕의 일과

왕의 생활은 공사(公私)의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만민의 위에서 가장 모범을 보여야 하는 공인이므로 그 생활은 보통 상상하는 것같이 사치하고 편하고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일찍 일어나서 글을 읽고 조반 전에 왕대비나 대왕대비 등 웃전에 문안사(問安使)를 보내고, 자신도 아랫사람으로부터 온 문안사를 접견한다. 수라를 들고 나서는 외전에 나가 정사를 본다.

 

삼상육경(三相六卿)·사간(司諫)·옥당(玉堂)까지 합석하는 정식 시무는 한 달에 여섯 번이지만 대신들과 만나는 날이 많다. 또 왕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며칠에 한 번씩 유신들과 한자리에서 경서의 강의도 받는다. 저녁에도 자리에 들 때까지 늦도록 독서를 한다. 이 밖에 가끔 웃전에 올라가 직접 문안을 드리고 수라를 드는 곁에서 지켜보는 시선(視膳)도 해야 한다. 또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병중이면 왕이 직접 약과 미음을 받들어 권한다. 종기가 나면 고약까지도 붙여 주는 효의 모범도 보인다.

 

왕이 내전에 있을 때는 안사랑을 쓰며, 그 곁에는 내관과 시녀상궁과 대전상궁들이 모시고 있다. 신하를 대할 때는 바깥사랑으로 나가는데, 절대 혼자서는 만나지 않으며 반드시 시관과 함께 만난다. 시관 없이 만나는 것을 사적(私覿)이라 하는데 오해를 받기 쉬워 몹시 삼간다. 비록 장인이라도 사적을 피하는 것이 궁중의 법도이다. 버선은 한 켤레씩 갈아 신었으나 사복으로 입는 두루마기는 몇 조각을 기워서 입을 정도로 검박을 시범하였다.

 

비빈(妃嬪)의 일과

왕비나 세자빈으로 대표되는 궁중의 귀인들은 비교적 한가한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새벽 문안에서부터 시작되는 효와 돈목(敦睦)의 실천은 일상화되어 있었다. 문안은 해가 뜨기 전인 식전에 하는 법이므로 어린 비빈들은 그 전날 밤에 잠을 마음놓고 못 잤다는 고백이 있다. 문안 이외에 왕보다도 더 간병·시선·탕약시중과 같은 효의 실천이 요구되었다.

 

그런 일과 이외에도 궁중에는 관혼상제를 비롯한 종친·외척의 빈가에서 들어오는 손님 대접, 벼슬아치 부인들의 초대 등으로 일 년 열두 달 조용한 날이 없다. 더욱이 왕족들의 장례풍속은 5개월에서 3개월에 걸치는데 어느 때는 궁궐 안에서 두 건의 국상이 겹치는 경우도 있어 비빈을 비롯한 궁녀들의 노고가 컸다. 하루에 여섯 번의 곡(哭)과 아침저녁의 제전과 주다례(晝茶禮:3년상 안에 수시로 魂殿이나 山陵에서 낮에 지내는 제사)의 참예는 복중이나 엄동에는 더욱 어려웠다.

 

왕비의 임무는 민간에서 맏며느리가 제사를 받드는 총책임자이 듯이 궐내의 약식 사당인 선원전의 차례, 4대조까지의 봉제사 등이 다 그의 책임이었다. 앞치마(휘견치마)를 두르고 직접 제물을 감선(監膳)하고 사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무 일도 없이 한가한 날이라고는 별로 없다. 모처럼 조용한 날이면 궁녀들을 거느리고 후원에 나가 꽃구경·단풍구경을 하기도 하는데, 후원에 나갈 때는 간단한 가마를 탄다.

 

후원뿐만 아니라 비빈들은 같은 궁내에서 다른 전각으로 갈 때도 걷는 법이 없다. 가마는 세수간 나인들이 멘다. 이 밖에 궁중의 오락으로는 투호와 윷놀이가 있었다. 투호는 특히 정월에 많이 하던 놀이로 비빈들도 참여한 놀이인 데 비하여 윷놀이는 궁녀들이 많이 하던 놀이였다.

 

궁녀의 일과

지밀을 제외하고는 격일제로 일하였다. 지밀 소속의 궁녀는 하루를 상·하번으로 나누어 낮과 밤으로 교대하였다. 즉, 상번은 아침 8시에 근무를 시작하여 오후 3시에 하번과 교대하는 형식이다. 하번의 임무는 그 전궁(殿宮) 주인의 저녁 수라의 시중, 잠자기 전 시중, 말동무, 침실의 자리 펴기, 야참 시중 등을 맡고, 주인이 침실에 들면 그 외곽 방에서 신변 보호의 뜻으로 직숙(直宿:숙직)하였다. 다만 노쇠한 궁녀와 아기나인은 밤 근무를 하지 않았다.

 

왕의 침전의 직숙은 왕의 유모나 보모·원로상궁 4∼5인이 맡았다. 왕의 침실은 정자형(井字形)으로 장지로 칸을 막은 9개의 방으로 되어 있다. 중앙의 큰방에서 왕이 잠들면 둘레의 작은 방에서 한 사람씩 숙직을 하였다. 숙직하는 상궁들은 서로 보이도록 장지를 열어 놓고 자는 것이 궁중의 법이었다.

 

숙직하는 상궁들에게는 이부자리 같은 것은 아예 없고 딱딱한 목침만이 있었다. 그러나 이 목침을 베면 소라껍질 같은 조짐머리의 쪽이 닿기 때문에 아파서 잘 수가 없어 실제로는 거의 잠을 자지 않고 침실을 지키는 것이다. 지밀을 제외한 다른 처소의 궁녀들은 밤을 새우는 근무는 없었다. 다만 소주방·생과방 등 음식과 관계가 있는 처소는 야참을 대기 위하여 늦도록 남아 있었다.

 

비번날에는 교양과 성격에 따라 다른 처소에 놀러가서 잡담과 ‘담배잡히기’ 등으로 시간을 보내거나, 소주방·생과방 등에 가서 떡과 과자 만드는 것을 도와주기도 하고, 또 침방·수방에 가서 그들의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이 밖에 붓글씨로 궁체(宮體)를 연습하거나, 친정에 문안편지를 쓰고, 이야기책을 빌려다 읽으며 소일했다.

 

지밀에서는 다회짜기도 많이 하였다고 한다. 다회란 비단실로 짠 끈으로, 너비에 따라 주머니끈에서부터 도포끈인 세조대(細條帶), 대려복이나 적의(翟衣)의 대로 쓰는 광다회(廣多繪) 등이 있다.

 

궁녀들은 아기나인일 때는 선배 상궁의 방에서 훈련을 받지만 계례를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되면 마음에 맞는 친구와 함께 따로 방을 꾸며 한 가정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비번날에는 비자(婢子:계집종)에게 취사·청소·빨래 따위의 일을 맡기고 독립생계를 영위한다. 물론 당번일 때는 소속 처소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상궁은 비자와 침모를 각각 한 명씩 두고, 그 밖에 손님이라 하여 친척 중에서 가정부같이 살림을 맡아 주는 여인도 있었다.

 

궁궐의 용어

▷동궐(東闕)-창덕궁과 창경궁을 일컸는 말

▷북궐(北闕)-경복궁

▷서궐(西闕)-경희궁, 경운궁(서궐은 원칙적으로 경희궁[경덕궁]만을 지칭하고 경운궁[덕수궁]은행궁의 시절을 거친후 西宮으로 불린다.)

▷별궁(別宮)-정식 코스가 아닌 왕이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집을 잠저(潛邸)라 하는데 왕이 된 뒤에도 계속 왕실 소유로 갖고 있으면서 왕실에서 필요한 대로 사용한 집

▷행궁(行宮)- 왕이 외출시 머무는 임시 거처(군현의 관아의 집 두어채)

▷법궁과 이궁(法宮, 離宮)-왕이 임어하여 사는 궁궐로서 으뜸 되는 궁궐을 법궁, 또 언제 어떤 목적으로 옮겨가기 위한 제2의 궁을 이궁이라 함

-내전: 왕과 왕비의 공식활동와 일상적인 생활공간, 대전(大殿)(왕)과 중궁전(中宮殿)(왕비) 대전에는 여러채의 건물이 있다. 그중 왕의 일상적인 기거 집을 연거지소(燕居之所)

-편전: 왕이 주요 신료들을 만나 공식적인 회의를 여는 건물

-외전: 왕이 공식적으로 만나 의식, 연회 등 행사를 치르는 공간. 외전의 중심은 정전(正殿) 혹은 법전(法殿): 궁궐에서 외형상 가장 화려하고 권위가 있어 왕의 위엄을 드러내는 건물

-조정(朝庭): 조정의 앞마당, 국가의 공식적인 의식을 거행하는 곳

-동궁: 세자의 활동공간, 대전의 동편에 배치함

-후원: 정원이며 휴식공간, 과거시험, 군사훈련, 종친모임, 내농포(內農圃)도 있음

-궐내각사: 궁궐안에 설치된 관서

 

·빈청-정승과 판서 등의 고위 관료의 회의장소

·정청-이조와 병조의 관원들이 들어와 인사업무 처리

·대청-사헌부와 사간원의 언관들의 언론

·승정원-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승지들의 언론 활동

·홍문관- 학문을 도야하여 왕의 주문에 응하고 왕과 함께 경전과 역사책을 토론

·예문관- 외교 문서 작성

·춘추관- 역사기록 담당 그 외의 다수의 관서가 있었음

 

-궐외각사: 국가기관의 관서로 궁궐 정문 앞 궁궐과 인접한 곳에 설치된 관서의정부, 육조, 사헌부, 비변사, 한성부 등

 

궁궐의 건물이름으로 본 신분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

 

·전(殿): 건물 중에서 가장 격이 높은 건물, 왕,왕비, 전왕비, 왕 어머니나 할머니가 공적인 활동을 하는 건물(세자나 영의정 등은 전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당(堂): 규모는 떨어지지 않을 수 있어도 전보다 한 단계 낮은 건물. 일상적인 생활공간

·합과 각: 전이나 당의 부속 건물

·재와 헌: 왕과 왕비도 쓸 수 있지만 주로 왕실 가족이나 궁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주로 쓰는 기거활동공간. 재는 숙식 등 일상적인 주거용이거나 조용하게 독서나 사색을 하는 용도로 쓰인 건물. 헌은 대청마루가 발달되어 있는 집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고 공무적 기능을 가진 경우가 많다.

 

·루와 정: 바닥이 지면에서 한 길 높이 정도의 마루로 되어 있는 집을 루. 연못가나 개울가의 휴식 공간 또는 연회 공간이 정. 이층일 경우 일층과 이층의 이름을 따로 짓는데 1층은 각 이층은 루가 붙는다.

 

-사찰의 경우 부처님 모신 집은 전, 사람을 모시는 집은 당

-성균관도 공자의 위패를 모신 건물을 대성전, 공부하는 건물은 명륜당

* 위의 자료는 궁궐 길라잡이에서 일부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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