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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도 잘 모르는 대만의 과거

 

▲ 중국대륙과 대만 지도. 대만이 지배하고 있는 진먼다오(왼쪽 아래 Kinmen)와 마주다오(오른쪽 위 Matsu)가 표시되어 있다. ⓒwikimedia.org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대만문제 민감하지만, 전쟁 가능성 매우 낮아

김영신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연구교수  |  기사입력 2023.07.21. 08:58:26

팬더믹 이전 일 년에 두어 차례씩 오가던 중국을 3년 반 만에 다녀왔다. 4박 5일의 짧은 일정이었던지라 많은 것을 보고 들을 기회는 없었지만, 이전에 비해 물가가 상당히 올랐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숙박비, 기름값, 음식값 등등 실생활과 관련된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다보니 현지인들의 불만도 적지 않았다.

체류하는 동안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몇몇 분과 대만문제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민감한 대만문제에 대해 중국인들이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적인 대화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대만해협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필자 역시 기회 있을 때마다 대만해협 양안의 갈등이 전쟁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을 것이라는 지론을 펼쳤기에 대만문제에 대한 의견이 대부분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많은 중국인들이 대만문제의 현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대다수 중국인들이 대만의 과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는 사실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역사연원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중국인들은 왜 대만을 '통일'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한결같이 대만문제가 중국의 '핵심가치'이기 때문이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지질학적 연구성과에 의하면 대만은 본시 중국대륙의 동남지방에 붙어있던 대륙의 일부분으로 밝혀지고 있다. 즉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 이전까지도 대만해협은 여전히 육지였다. 현재 대만 주민의 대다수는 17-8세기 이후 중국대륙에서 도래한 한족의 후예들이다. 

그러나 이들보다 먼저 대만에 정착하여 나름대로의 조직과 문화를 이루며 살아온 사람들이 흔히 고산족으로 알려진 원주민이다. 이들 원주민이 대만에 도래한 정확한 연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각기 의견을 달리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최소한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에 이미 그들이 대만 각지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대륙에서 대만까지 가장 근거리는 130㎞에 불과하다. 이는 고대 인류의 항해술이 보잘것 없었다하더라도 바람과 해류의 조건만 맞는다면 충분히 도달 가능한 거리로 보인다. 따라서 고대로부터 중국의 문헌에는 현재의 대만 혹은 대만 원주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명칭이 자주 등장한다. 

다만 문헌상으로 확인된 바로는 한족이 대만에 처음 진출한 것은 16세기 중엽이다. 이 이전까지 대만은 원주민만의 생활터전이었고, 대만과 외부세계와는 전혀 접촉이 없었다는 것이다. 처음 대만에 진출한 한족은 대부분 해적이었다는 것도 특기할만하다. 

날이 갈수록 더욱 극심해지는 해적들의 노략질에 대해 당시 일부에서는 해금정책을 견지하여 살길이 막막한 백성들을 해적으로 만드느니 차라리 해양을 개방하는 것이 나으리라는 의견이 제시됐다. 결국 명나라는 16세기 말 해금정책을 폐지하여 백성들이 자유롭게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엽 수많은 상선과 어선이 대만 본도까지 진출했다. 이 무렵에는 대만해협을 건너 온 한족과 대만 원주민의 관계도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 서남부의 캘리컷(Calicut)에 도착하여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직항로가 개설됐다. 이후, 막대한 무역이익을 노린 유럽의 해상국가들은 인도양과 태평양 일대에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들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동방 해상무역의 패권을 차지한 나라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해양개척의 후발주자였던 네덜란드는 처음 지금의 인도네시아를 동방경영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이어 1624년 가을부터 1662년 초까지 대만 남부지역 일부를 식민 지배했다. 대만에는 당시 네덜란드인들이 쌓은 성채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필리핀을 무대로 활동하던 네덜란드의 경쟁자 스페인도 1626년 14척의 선박과 300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대만 북부지역을 점령했다. 네덜란드세력에 의해 축출된 1642년 여름까지 지금의 타이베이 이북 지역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것이다. 

청나라에 맞서 싸우던 정청공(鄭成功)이 1862년 초 네덜란드 세력을 축출하고 대만에 정권을 건립했다. 정청공은 대만전체를 동도(東都)라 칭하고 중앙행정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두 개의 현(縣)을 설치하는 등 대만통치의 기본을 마련했다. 정청공 사후인 1666년 2월에는 대만 최초의 공묘(孔廟)가 완성됐다. 

네덜란드와는 적대적 관계, 스페인과는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청나라에 맞서던 정청공의 후손들은 1683년 가을까지 3대에 걸쳐 22년간 대만을 통치하다 청나라에 항복했다. 

두 세기 이상 대만을 지배하던 청나라는 1895년 4월 체결된 마관조약에 의거하여 대만과 팽호열도를 일본에 할양했다. 일본정부는 대만의 역사와 문화, 언어, 풍속습관 및 사회상황이 일본과 다르다는 이유로 열강의 식민지 통치책을 원용하여 대만에서 반세기 동안 민족차별적인 식민정치를 수행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다음날 중화민국정부는 정식으로 일본에 선전을 포고했다. 이로서 1937년 7월 일본과의 전면전이 발발한 후 4년여 동안 고군분투하던 중화민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중일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중일전쟁이 세계대전의 한 축을 이루며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오랫동안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대만이 중화민국의 영토로 편입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943년 11월, 중·영·미 3국 영수는 카이로에서 회의를 갖고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빼앗은 만주, 대만 및 팽호열도를 응당 중화민국에 되돌려야 할 것이라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회의 결과를 담아 12월 공포된 이른바 카이로선언은 비록 정식의 국제조약은 아니었으나 전후 대만의 통치권을 중화민국에 귀속시켜야한다는 국제적 공감대를 형성시킨 의미 있는 선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7월 26일, 중·영·미 3국은 포츠담선언(Potsdam Declaration)을 발표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고 그 조건으로 카이로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 반드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재차 천명했다.

1945년 10월 25일, 마지막 대만총독 겸 일본군 10방면사령관 안도 리키치(安藤利吉)가 항복문서에 서명하여 반세기에 걸친 일본의 대만 지배가 마감되고 대만은 공식적으로 중화민국의 영토로 귀속됐다. 

원주민만의 삶의 터전이었던 대만에는 16세기 중엽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외부세력이 진출하기 시작했다. 소수의 한족이 대만에 발을 디딘지 얼마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식민통치가 수십 년간 이어졌다. 외세를 축출한 정청공과 그 후손들의 대만통치도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식민지배에 다름 아니었다.

두 세기에 걸친 청나라의 통치, 반세기간 이어진 일본의 식민지배를 거친 대만은 슬픈 역사를 가진 아름다운 섬이다. 대만의 과거사를 제대로 안다면 이 아름다운 섬이 누구의 땅인지,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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