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는 여전히 작년 대선의 연장전을 치르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세계의 시간은 묵묵히 내달리고 있다. 기후변화도, 인공지능 개발도, 강대국들 사이의 합종연횡도 몇 달 전이 몇 년 전처럼 느껴질 만큼 빠르게 전개된다. 그럴수록 세계의 시간과 다시 엇나가는 한국 사회 현실이 더욱 절망적으로 다가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식사회의 일각은 그래도 세상의 빠른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서점에서 감지되는 출판계의 풍향이 그러하다. 여전히 잘 팔리는 책은 투자안내서나 자기계발서 따위이지만, 한국어 지식세계가 가난해지지 않도록 어려운 형편에도 안간힘을 쓰는 출판인들이 있다.
최근 그런 노력의 결실로 나온 두 신간 번역서가 눈에 띄었다. 공교롭게도 두 책 모두 제목에 '리바이어던'을 달고 있다. 하나는 각각 미국과 캐나다의 사회과학자인 조엘 웨인라이트와 제프 만이 공저한 <기후 리바이어던: 지구 미래에 관한 정치 이론>(장용준 옮김, 앨피, 2023)이고, 다른 하나는 벨기에 출신 철학자 마크 코켈버그의 <그린 리바이어던: 기후위기와 AI 시대에 인간의 자유는 어디까지 가능한가>(김용환, 최영호 옮김, 씨아이알, 2023)다.
'리바이어던'이 무엇인가? 구약성서 '욥기'에 등장하는 괴물이다. 17세기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유명한 저작 <리바이어던: 교회국가 및 시민국가의 재료와 형태 및 권력>(진석용 옮김, 나남, 2008)에서 국가의 기원을 논하며 이 신화 속 괴물을 다시 불러냈다. 홉스는 '욥기'에 나오는 또 다른 괴물, 베헤모스를 혼란스러운 무정부 상태의 비유로 들면서, 리바이어던을 베헤모스에 대적시켰다. 무질서라는 괴물에 맞서려면,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괴물을 불러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억압적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는, 그래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기후변화와 인공지능 등장의 시대에 '리바이어던'을 제목에 다시 등장시킨 두 저작이 동시에 나왔다(국역본만이 아니라 원서 출간 시점도 비슷하다). 이는 우리 시대가 근대 국가가 처음 대두한 17세기만큼이나 심대한 변화를 마주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전에 없던 혼란 속에서 많은 이들이 새로운 권력의 부상, 혹은 홉스의 비유에 따른다면 새로운 괴물의 등장을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기후 리바이어던, 기후 마오 그리고…
우선 웨인라이트와 만의 <기후 리바이어던>은 사회과학서의 탈을 쓴 심란한 디스토피아 예언서다. 긴 분량에 걸쳐 풍성한 학문적 논의를 담고 있기에 이는 너무 피상적인 평가일 수 있다. 그러나 책 전체를 꿰뚫는 네 가지 미래 시나리오의 기본 정조는 확실히 어둡다. 심지어는 공저자들이 대안으로 추천하는 마지막 시나리오조차 이 분위기에 압도된다.
<기후 리바이어던>은 일단, 기후위기의 존재를 둘러싸고 논쟁하거나 기후변화를 완화하려고 시도할지 말지 옥신각신하던 시기는 일찌감치 지났다고 단언한다. 이미 기후붕괴는 시작됐고, 재난이 일상이 되고 있다. 이에 따라 기후위기 완화보다도 이에 대한 적응이 더 급박한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위기에 대한 '적응'이 쟁점이라는 것은 곧 생존 자체가 어려운 과제인 시대가 열린다는 뜻이다. 생존이 도전 과제인 시대, 이것이야말로 홉스적 문제의식의 출발점이다.
웨인라이트와 만이 제시하는 첫 번째 시나리오는 이 홉스적 상황에서 정확히 홉스적인 결말이 실현되는 경우다. 책 제목이기도 한 '기후 리바이어던'이 출현하는 것이다. 그 중요한 전제는 지구 자본주의가 어쨌든 별 도전을 받지 않고 지속되는 것이며, 기존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 즉 미국, 서유럽, 일본이 계속 패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두 저자는 이 상황에서 세계 각국의 기후위기 완화와 적응 노력을 조정하는 전 지구적 주권체로서 21세기 리바이어던, '기후 리바이어던'이 출현하리라 전망한다.
기후 리바이어던은 이미 2010년대에 파리 협정을 통해 그 맹아를 선보였다. 중심부 국가들은 자국 자본의 지속적 축적을 위협하지 않는 방향에서 전 지구적 기후변화 대응 노력을 조정, 할당하려 했다. 물론 기후위기가 급속히 확대되는 상황에서 파리 협정의 태평한 분위기가 그대로 지속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때 이미 선보인 구조는 더 강력한 기후위기 대책을 통해 보다 노골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가령 기존 기후체제를 대체하는 강대국 주도의 새 기후체제가 각국에 경제활동의 방향과 규모를 지시하거나 심지어 인구 허용치를 정해주는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다.
탈탄소 노력이 늦춰져 위기가 더욱 급속히 전개될수록 기후 리바이어던은 더 광범하고 강력하게 정당성을 인정받으며 대두할 것이다. 그러나 기후 리바이어던은 기후위기 적응의 이름 아래 북반구와 남반구의 격차와 모순, 각국 내부의 계급 불평등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 기존 리바이어던(국민국가)과는 달리 민주적 대의-책임 구조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이 주권체, 기후 리바이어던은 역사상 가장 뻔뻔하게 이런 억압과 수탈을 자행할 수 있을 것이다.
<기후 리바이어던>에 따르면, 이것이 유일한 시나리오는 아니다. 다른 전망들이 있을 수 있다. 이 책이 제시하는 두 번째 시나리오는 얄궂게도 이름이 '기후 마오'다. 마오쩌둥의 그 '마오'다. 즉, 기존 중심부 국가들에 대한 도전을 이끄는 중국을 중심으로 국가자본주의 국가들의 동맹이 지구적 기후위기 대응을 주도하는 상황이다. 이 경우에는 북반구-남반구 관계가 사뭇 달라지겠지만, 민주주의의 발전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기후 리바이어던 시나리오에서 그나마 명맥은 남아 있던 민주주의의 허울조차 기후 마오 시나리오에서는 억압될 것이다. 그냥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시진핑 체제가 지구 전체로 확장된 모습일 것이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아예 진지한 지구적 기후위기 대응 자체가 지체되는 상황이다. 홉스가 국가 출현 이전의 무질서를 베헤모스라 칭했던 것처럼, 두 저자는 이를 '기후 베헤모스'라 이름 붙인다. 이 경우에는 지구적 주권체 같은 문제적 기구는 출현하지 않지만, 대신 자국의 이해, 더 정확히는 자국 자본의 이해를 배타적으로 강조하며 협력과 조정을 거부하는 주요국 정부들 때문에 기후재난이 극대화될 것이다. 차기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다시 당선될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 어쩌면 기후 베헤모스야말로 가장 유망한 시나리오일지 모른다.
판도라의 상자마냥 온갖 끔찍한 미래 가능성은 다 나온 셈이다. <기후 리바이어던>은 여기에 마지막 시나리오 하나를 보탠다. 그리고 이를 '기후 X'라 부른다. 이는 자본주의에 맞서며 국민국가의 테두리 안에 갇히지 않는 아래로부터의 기후위기 대응 노력들이 서로 연계하고 협력하여 거대한 흐름을 이루는 상황이다. 비록 기후 리바이어던이 그 머리를 드러내더라도 기후 X가 함께 전개된다면, 인류의 미래는 하나의 경로로 쉽게 닫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는 다른 세 시나리오에 비하면, 모호하기만 하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희망'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괴물을 피할 수 없다면, '필멸의' '민주적' 괴물을!
<그린 리바이어던>도 어쩌면 비슷한 분위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결론에서 받는 느낌은 좀 다르다. 우선 이 책의 저자 코켈버그부터 소개하자면, 최근 인공지능의 현황과 전망을 비판적으로 짚은 그의 저작들이 집중적으로 소개됐다. <AI 윤리에 대한 모든 것>(신상규 외 옮김, 아카넷, 2023), <인공지능은 왜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가>(배현석 옮김, 생각이음, 2023) 등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AI 윤리에 대한 모든 것>은 인공지능을 둘러싼 숱한 쟁점을 요령 있게 정리한 책으로, 이 분야에 입문하려는 독자에게 안성맞춤이다.
코켈버그의 다른 책들처럼 <그린 리바이어던> 역시 인공지능을 다룬다. 그런데 기후위기와 함께 다룬다. 이 점이 돋보인다. 기후위기와 인공지능 모두 우리 시대의 거대한 현안인데, 둘을 따로 다룬 책은 산처럼 쌓여 있어도 함께 다른 책은 보기 힘들다. 한데 코켈버그는 여기에서 예외다. <그린 리바이어던> 말고 <AI 윤리에 대한 모든 것>에서도 코켈버그는 "문제는 기후야, 바보야!"라는 장으로 끝맺는다.
말하자면 코켈버그는 <기후 리바이어던>의 저자들보다 한 발 더 나아가, 기후위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공지능 때문에도 21세기판 리바이어던의 등장을 피하기는 힘들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고 보면 <그린 리바이어던> 쪽이 <기후 리바이어던>보다 더 암울하지 않을까 짐작되기도 한다.
실은 이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암울하다기보다는 숨 막힌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게 된다. 그 이유는 <그린 리바이어던>이 무엇보다도 '질문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섣불리 답을 내놓는 책이 아니라 쉴 새 없이 물음을 던지는 책이다. 어쩌면 코켈버그의 의도 자체가 독자에게 기후위기와 인공지능의 시대에 제대로 묻고 따지는 법을 가르치려는 데 있는 것 같다. 특히 그는 21세기 리바이어던의 등장이 자칫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지는 않을지, 그럴 위험이 있다면 과연 이를 피할 대책이 있을지, 줄기차게 캐묻는다.
우울하게도 코켈버그가 내놓는 잠정적 답변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엘리트들에게 기후위기와 인공지능 관리를 맡기는 플라톤식 대안도, 가장 조심스러운 방법으로 사람들이 사회와 자연의 변화에 적응하게 만드는 '넛지'형 대안도 현재에 비해서는 자유를 제한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한다. 20세기 말, 21세기 초에 정점에 이르렀던 자유에 관한 특정한 이해는 황혼을 맞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코켈버그는 이 대목에서 물음의 방향을 바꾼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자유의 관념으로 보면, 확실히 미래는 부정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 관념이 과연 자유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자유 관념은 정말로 숱한 부작용을 감내하면서까지 지속되어야 할 값어치가 있는가?
코켈버그는 현대의 자유 관념과 어깨를 나란히 할, 아니 어떤 상황에서는 더 소중한 다른 가치들이 있다고 답한다. 예를 들면, 평등, 정의, 공동선 등이 그런 가치들이다. 실은 자유조차도 지금은 무시되고 있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많은 이들이 현대판 리바이어던의 등장으로 위축되리라 염려하는 자유가 '간섭받지 않을' 자유, '소극적' 자유라면, 자유의 여러 얼굴 중에는 삶을 함께 꾸려가기 위한 역량과 상상력, 가능성을 뜻하는 자유, '적극적' 자유도 있다.
코켈버그는 적극적 자유에 더 주목하자고 권한다. 기후위기, 인공지능 시대에 더 많은 이들의 적극적 자유를 증진시키기 위해 소극적 자유는 오히려 제한할 수도 있다고 설득한다. 예를 들면, 지난 코로나-19 팬데믹을 돌이켜보자. 그때 소극적 자유의 침해를 이유로 의무적 마스크 착용에 저항한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마스크 착용 의무화 덕분에 바이러스 확산 범위와 속도가 통제됨으로써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더 많은 기회와 가능성이 열리기도 했다. 기후위기와 인공지능 시대에는 이런 복잡한 선택의 상황이 더 거대한 형태로, 일상적으로 반복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코켈버그는 기후위기에 맞서고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21세기 리바이어던의 등장을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려 한다. 더 나쁜 혼돈을 막기 위해 이런 괴물이 필요함을 받아들여야만 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처음부터 괴물의 '필멸성'과 한계선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마치 자본과 함께 등장한 근대 국가가 오랜 대중투쟁의 개입을 통해 민주주의의 무대라는 또 다른 성격을 갖게 된 것처럼, 21세기 리바이어던 역시 근대 국가와 마찬가지로 대중의 참여와 자치가 관통하는 자기제한적 기구로 길들이자는 것이다.
"AI는 새로운 리바이어던이 될 수 있다 … AI는 인간의 자유를 빼앗을 수 있다. 그러나 자유와 자치를 위한 더 나은 조건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 만약 리바이어던이 필요하다면, 계속해 필멸의 신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민주적 리바이어던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은 국가적-국제적 수준에서 더 포괄적이고 참여적이며 자유를 자치와 역량 개발로 지지하는 새로운 정치 기관이다. 바라건대, 민주적이지만 충분히 강력한 그 괴물은 너무 많은 소극적 자유를 빼앗으려는 시도를 자제하고, 인간과 비인간을 위한 적극적 자유, 역량의 실현, 번영, 그리고 선한 삶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그린 리바이어던> 210-211쪽)
굳이 <기후 리바이어던>과 비교한다면, 기후 리바이어던과 기후 X를 양자택일의 대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둘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을 통해 '필멸의' '그린' 리바이어던이 탄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보편적 돌봄의 정치를 향해
여기에 몇 마디를 덧붙이자면, 코켈버그는 흔히 '자연'이라 불리는 비인간 주체들을 정치에 포함시키자는 브뤼노 라투르, 도나 해러웨이 등의 논의를 검토하고 이를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의 공동체주의에 접목시키면서 적극적 자유를 중심에 둔 정치의 보다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한다. 그것은 인간과 비인간 모두가 "무능과 타인에 대한 의존"(205쪽)에 근거함에 바탕을 두고 관여(engagement)와 돌봄(care)에 몰두하는 정치다.
즉, <그린 리바이어던>에 따르면, 뜻밖에도 선량한 괴물, '그린' 리바이어던과 마주하는 결말은 불가능하지 않다. 기후위기 시대에 인공지능을 활용하면서 비록 소극적 자유는 일정하게 제한하더라도 다른 사회적 가치들을 획기적으로 증진시키는 미래는 충분히 '가능하다'. 너무 늦지 않게, 우리가 보편적 돌봄의 정치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