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가르는 국경 철조망이 지난 7일 가자지구를 통제하는 무장 정파 하마스에 순식간에 뚫린 배경을 두고 원격 감시 시스템에 대해 지나치게 의존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더해 이스라엘군이 베냐민 네타냐후 정권의 사법개편 추진으로 인한 예비군 복무 거부 등에 관심이 분산되며 하마스 동향에 집중하지 못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10일(현지시각) <뉴욕타임스>(NYT)는 수천 명의 하마스 무장 세력들이 "놀라울 정도로 쉽게" 국경 철조망 일부를 파괴하고 이스라엘로 침투할 수 있었던 이유로 원격 시스템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꼽았다. 익명을 요구한 2명의 이스라엘 고위 보안 관계자는 이스라엘 국경 감시 시스템이 거의 전적으로 원격으로 작동하는 카메라, 센서, 기관총에 의지하고 있었다며 "이스라엘 지휘관들이 이 시스템을 과신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원격 감시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배치 병력은 줄어 들었다. 이스라엘 쪽은 원격 시스템과 무기, 지상 장벽 및 땅굴 방지를 위한 지하 장벽을 결합하면 대량 침투가 불가능해 국경선을 따라 물리적으로 많은 병력을 주둔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 주둔하던 병력 일부는 요르단강 서안 등 다른 지역으로 파견됐다.
그런데 하마스가 감시 시스템과 신호를 주고 받는 기지국을 드론(무인기)으로 파괴하자 시스템은 무용지물이 됐다. 통제실 군인들은 철조망 훼손에 대한 경보를 받지 못했고 하마스 공격자들이 바리케이드를 부수는 영상도 보지 못했다. 덕분에 무장 세력은 별다른 저항 없이 군사 기지에 도달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숙소에서 자고 있던 중 살해당했다.
애초에 하마스가 2021년 무력 충돌 이후 분쟁을 피하려 한다고 착각해 방심한 점, 하마스 공격 초기 단계에 군 지휘관들이 한 지점에 모이는 판단을 내린 바람에 전체 공격 범위 파악이 늦어졌다는 점도 실패 요인으로 꼽혔다.
이스라엘군이 하마스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배경엔 네타냐후 정권이 추진한 사법개편 등으로 예비군 복무 거부를 포함해 국내 혼란이 극심했던 점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10일 칼럼에서 관련 조사가 진행된다면 "조사관들은 이스라엘군 지도부가 네타냐후의 사법 쿠데타에 항의하기 위해 공군 조종사와 예비역 장교들이 복무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극우 정착민들이 요르단강 서안에서 저지르는 "미친 짓"을 막기 위해서도 시간과 관심, 자원이 너무 많이 쓰였다고 덧붙였다.
막대한 인명 피해 앞에서 네타냐후 총리가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뉴욕타임스>는 7일 하마스의 공격을 받아 수십~수백 명이 사망한 이스라엘 남부 크파르 아자르 마을 급수탑에 "부끄러운 줄 알라"고 적힌 반정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고 보도했다.
매체에 따르면 이스라엘 전 국방장관 모셰 얄론은 네타냐후 총리의 사임을 요구했다. 이스라엘 언론인 아미트 세갈은 매체에 "그(네타냐후)가 정치적으로 살아남는 건 매우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와 교전 중인 이스라엘 군인들이 10일(현지시각) 시리아 및 레바논과 인접한 골란고원 헤르몬산 점령지의 진지 근처에 배치돼 있다. ⓒAFP=연합뉴스
네타냐후, 일부 야권과 연합 전시 내각…"이, 인질·벙커 탓 지상 공격 어려움 겪을 것" 전망도
김효진 기자 | 기사입력 2023.10.12. 20:20:53
이스라엘이 일부 야권과 함께 전시 내각을 꾸리며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지상 공격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이스라엘 내부에선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책임론이 불거지며 사임 여론이 커지고 있다. 가자지구를 통제하는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 남부를 침략한 지난 7일 이후 연일 이스라엘의 보복 폭격이 이어지며 가자지구 난민 수는 30만 명을 넘어섰다.
<워싱턴포스트>(WP), <AP> 통신 등을 보면 11일(현지시각) 네타냐후 총리와 제2야당 국가통합당 대표인 베니 간츠 전 국방장관은 공동성명을 내 양쪽이 비상 정부와 전시 내각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비상 전시 내각은 네타냐후 총리, 간츠 대표, 요아브 갈란트 국방장관으로 구성되며 국민통합당 소속 가디 아이젠콧 전 이스라엘군(IDF) 참모총장, 론 데르머 전략장관이 참관인(옵서버)으로 들어간다.
공동성명은 "전쟁 기간 동안 전쟁 수행과 관련 없는 법안 및 정부 결정은 처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제시했다. 이에 따라 올해 내내 이스라엘에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가져왔던 네타냐후 정부의 사법부 무력화 법안도 보류된다.
다만 제1야당 예시 아티드를 이끄는 야이르 라피드 전 총리는 전시 내각 참여를 요청 받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라피드 전 총리는 현 정부 연정에 포함돼 있는 극우 정당과의 협력을 거부해 왔다.
하마스 침공을 예측하지 못한 네타냐후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가운데 <워싱턴포스트>는 전문가들이 전쟁이 끝난 후 비상 정부가 해산된 뒤에도 네타냐후 총리가 집권을 유지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고 보고 있다고 전했다. 이후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네타냐후 총리의 안보 역량에 대한 명성이 타격을 입은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싱크탱크 이스라엘 민주주의 연구소(IDI)의 요하난 플레스너 소장은 매체에 "대중의 관점에서 볼 때 네타냐후는 (비상 통합 연정) 파트너십에서 약자"라며 "그(네타냐후)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안보 실패의 감독자였고 간츠가 이를 돕기 위해 뛰어든 모양새"라고 분석했다.
이스라엘 매체 <예루살렘포스트>는 12일 공개된 여론조사에서 86%의 응답자가 하마스의 이번 가자 기습 공격이 국가 지도부의 실패라고 답했으며 거의 모든 응답자(94%)가 안보 준비 부족에 대한 책임이 정부에 있다고 답했다고 보도했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56%)은 네타냐후 총리가 이 전쟁이 끝나면 사임해야 한다고 답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이날 방송 연설을 통해 "모든 하마스 대원들은 죽은 사람"이라며 하마스를 "부수고 파괴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스라엘은 지상 공격을 예고하고 30만 명 이상의 예비군을 동원해 가자지구 국경 인근에 배치 중이다.
마이클 클라크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 전 소장은 11일 영국 방송 스카이뉴스에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지상군 투입까지 "몇 시간, 혹은 며칠"이 걸릴 것으로 예측했다. 작전 계획 수립 및 군인 동원에 다소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지상 공격이 시작되더라도 이스라엘군이 파죽지세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클라크 전 소장은 스카이뉴스에 이스라엘이 그간 공습으로 가자지구를 타격해 이 지역이 "평평해졌고" 이는 지상 공격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짚었다.
그는 "모든 잔해는 누군가에겐 방어용 벙커가 된다"며 하마스가 터널과 벙커를 이용해 싸울 것으로 전망했다. 클라크 전 소장은 인구가 많은 중심부로 갈수록 전차와 장갑차 사용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스라엘 쪽이 인질 구출을 위해 노력하겠지만 "많은 인질이 억류돼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공격을 단념하진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AP>는 하마스가 인질을 무기로 팔레스타인 수감자 석방 등 거래를 시도할 수 있고 현재는 이스라엘 공격에 자제를 촉구하는 국제적 움직임이 크지 않지만 사태가 지속될 경우 바뀔 수 있어 결국 하마스가 계속 가자를 통제하고 이스라엘은 국경 방어를 강화하는 수준에서 중재가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 통신은 이 경우도 "하마스 입장에선 승리"라고 짚었다.
11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유대인 지도자들과의 백악관 간담회에서 이번 사태가 "홀로코스트(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 이후 유대인에게 가장 치명적인 날"이었다며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과 지지를 재확인했다. 미 백악관은 하마스로 인한 미국인 사망자 수가 22명, 실종자 수가 17명으로 늘었으며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지난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 남부를 기습 침투해 수백 명의 민간인을 죽이고 150명 가량을 납치한 뒤 가자지구에는 이스라엘군의 보복 공습이 하루도 빠짐 없이 이어지고 있다. 카타르 알자지라 방송에 따르면 12일 오전까지 가자지구에서 적어도 1200명이 죽고 5600명이 다쳤으며 요르단강 서안에서도 28명이 죽고 150명이 다쳤다. 이스라엘 쪽 사망자는 1300명, 부상자는 3300명으로 늘었다.
집, 학교, 의료 시설에까지 무차별 폭격이 이어지며 민간인 피해는 점점 불어나고 있다. 가자지구 당국은 공습 이후 4626채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거나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주거용 건물이 폭격 당해 가족들이 사망한 사례가 28곳 이상에서 일어났다고 밝혔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은 11일까지 가자지구 난민이 33만8934명에 달했고 팔레스타인난민기구(UNRWA)는 가자지구 학교에 21만8597명을 보호하고 있다고 밝혔다. 가자지구 총 인구는 230만 명 가량이다.
남편과 8살 딸, 두 달 된 아들과 함께 피난 중인 가자지구 주민 마람 후메이드는 카타르 알자지라 방송에 11일 기고한 글에서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더 이상 우리가 이 상황에서 살아서 벗어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의 집이 폭격 첫날 밤 파손되며 가족 모두가 친정으로 피신했지만 10일 친정집 인근에 폭격이 쏟아지며 가족들은 다시 시가로 피신한 상태다. 그는 "이곳에 40명이 모여 있다. 미사일이 우리를 따라다니는 느낌"이라며 "가자에는 안전한 곳이 없다"고 호소했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은 이스라엘이 9일 연료 및 식량 공급 차단을 포함해 가자지구를 완전 봉쇄한 뒤 11일 가자지구에 전기를 공급하는 유일한 발전소(GPP)가 연료 부족으로 가동을 멈추며 이 지역의 인도주의 위기가 가중되고 있다고 밝혔다. 물 공급도 끊기며 65만 명 이상이 심각한 식수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연이은 공습에 식량 부족, 향후 지상 공격까지 예상되지만 가자지구를 벗어나는 것도 쉽지 않다. 이스라엘 쪽은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로 향하는 통로인 에레즈와 케렘 샬롬 검문소를 폐쇄했고 이집트로 향하는 라파 통행로를 9일부터 이틀 연속 폭격했다. 연이은 폭격에 이집트 쪽이 라파 통행로를 폐쇄한 상태다.
전날 미국은 이집트 및 이스라엘과 가자지구 민간인 대피를 위한 통로를 만들기 위한 협의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지만 11일 <로이터>는 이집트 보안 소식통을 인용해 이집트가 난민 통로 개설을 거부했다고 보도했다. 이집트가 이미 경제적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대규모 난민 유입에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11일 "연료, 식량, 물을 포함해 생명을 구하는 데 필수적인 물품이 가자지구로 반입되는 것이 허용돼야 한다. 지금 당장 신속하고 방해 받지 않는 인도주의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밝히며 이스라엘의 전면 봉쇄 해제를 촉구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3일 회의를 열어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갈등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이스라엘군 탱크들이 11일(현지시각)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인접한 국경 근처에서 이동하고 있다. 지난 7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기습으로 교전이 시작된 가운데 이스라엘이 탱크와 장갑차를 결집시키면서 지상전이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왔다. ⓒAP=연합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