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미국 무인기(드론) 공격으로 사망한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 추모식에서 3일(이하 현지시각) 폭발이 일어 최소 95명이 숨지며 이란 정부가 보복을 다짐했다. 미국은 이번 폭발이 미국 및 이스라엘과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전날 레바논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고위 간부 살해와 더불어 역내 긴장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AP> 통신은 이란 국영 방송을 인용해 아흐마드 바히디 이란 내무장관이 이날 오후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남동쪽으로 약 820km 떨어진 케르만에서 열린 솔레이마니 사령관 추모식에 수천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오후 3시께 20분 간격으로 두 차례 폭발이 일었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바흐람 에놀라히 이란 보건장관은 국영 방송에 당초 103명으로 알려졌던 사망자 수를 중복 집계로 인해 95명으로 조정했지만 부상자 중 상당수가 중상으로 사망자가 늘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솔레이마니 사령관 무덤에서 각 700m, 1km 가량 떨어진 지점에서 일어난 두 번의 폭발로 최소 211명이 다쳤다.
솔레이마니 사령관은 이란과 중동 일부 지역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민병대를 조직해 이란에선 국민 영웅으로 추앙 받고 있다. 2020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 대통령은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미국인에 대한 "임박하고 사악한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며 제거를 지시해 이라크 바드다드 공항 인근에서 무인기 공격을 통해 살해했다. 솔레이마니 사령관 장례식엔 100만 명 이상의 추모객이 몰렸다고 한다.
이번 폭발을 주도했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나타나지 않은 가운데 "국가의 적"을 언급한 이란 정부도 직접적으로 배후를 지목하진 않았다. 이란 국영 <IRNA> 통신을 보면 3일 이란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공격자들이 "가혹한 대응"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은 "이 비겁한 행위의 가해자와 지도자는 곧 밝혀져 처벌될 것"이고 "국가의 적들은 그러한 행위가 이슬람 이상을 수호하려는 이란 국민의 확고한 결심과 의지를 약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란 내부에선 이미 이번 사건 배후를 이스라엘과 미국으로 보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로이터> 통신은 3일 이란 혁명수비대 정예 쿠드스군 최고 사령관 에스마일 카니가 이번 공격이 "시오니스트 정권(이스라엘)과 미국"에 의해 자행됐다고 발언했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이란 국영 방송에 이날 밤 묘지 인근에 모인 군중이 "이스라엘에 죽음을", "미국에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 보도됐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란 혁명수비대와 긴밀히 연계돼 있고 이란 의사 결정자들 사이 내부 논의에 정통한 두 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이란 군사 및 정치 지도자들이 이스라엘에 폭격 책임을 돌리기로 신속하게 결정했다고 전했다. 소식통들은 이후 테러리스트나 다른 조직이 공격 배후로 나선다고 해도 이란은 이스라엘이 개입했다고 주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번 폭발과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다. 매튜 밀러 미 국무부 대변인은 3일 언론 브리핑에서 "미국은 어떤 식으로든 관여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이 이번 폭발에 관여했다고 믿을 이유가 없다"고 일축했다. 그는 "폭발 원인에 대해 말하기는 너무 이르다"며 제공할 수 있는 독립적 정보가 없다고 설명했다. <뉴욕타임스>는 세 명의 미 당국자들이 미 정보 기관의 초기 평가에 따르면 폭발에 이스라엘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뉴욕타임스>는 분쟁전문 싱크탱크 국제위기그룹(ICG)의 이란 국장 알리 바에즈가 이번 폭발이 이란을 공격할 때 이스라엘이 사용하던 일반적인 방법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고 전했다. 이스라엘은 이란에서 정기적으로 비밀 작전을 수행했지만 이란 과학자나 당국자 같은 특정 개인, 핵 또는 무기 시설 등 겨냥해 왔다는 것이다. 매체는 전문가들이 이번 폭발이 이슬람 테러리즘의 전형적 특징을 갖고 있다고 보고 있다면서도 이슬람국가(IS) 등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가 지난 20년 간 이란에선 거의 공격을 자행하지 않았다고 짚었다.
이날 이란 폭발은 전날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이스라엘이 배후로 추정되는 무인기 공격으로 하마스 고위 정치 지도자 살레 알아루리가 사망하며 레바논 무장 정파 헤즈볼라가 "처벌"을 다짐하는 등 이스라엘이 가자자구에서 하마스와 벌이고 있는 전쟁이 역내로 확산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진 가운데 나온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헤즈볼라 수장 하산 나스랄라가 3일 연설에서 이스라엘이 레바논과의 전쟁을 선택한다면 "무제한으로 끝까지" 전쟁을 수행하겠다고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우리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적이 레바논과의 전쟁을 고려한다면 우리 전투엔 경계도 규칙도 없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이스라엘은 해당 공격을 가했다는 주장에 대해 인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있지만 매체는 미국과 레바논 당국자들이 이 사건을 이스라엘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 남부를 습격한 지난해 10월 7일 이후 헤즈볼라와 이스라엘은 레바논 남부 이스라엘 국경 지대에서 제한적 교전을 벌이고 있지만 그 범위가 확대되진 않았다. 그러나 전선에서 먼 헤즈볼라 거점 베이루트 교외에서 알아루리 살해가 일어나며 헤즈볼라를 크게 자극했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학제 간 연구소인 튀니지대 마그레브메리안고등연구원(MECAM) 이마드 알수스 연구원은 알아루리가 베이루트에 머물며 헤즈볼라와 하마스 사이 연락을 담당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나스랄라의 신뢰를 받고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다만 외신들은 나스랄라가 3일 연설에서 구체적 응징 방법을 거론하진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로이터>는 3일 익명을 전제로 기자들에게 말한 한 미국 관리가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모두 서로와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고 보도했다.
이날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도 언론 브리핑에서 나스랄라의 연설 관련 질문을 받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판단할 것"이라며 "헤즈볼라가 하마스를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서는 걸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나스랄라는 5일 알아루리 살해 관련 추가 연설을 예고했다.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하마스 조직을 이끌던 고위 지도자 알아루리 사망으로 하마스가 타격을 입은 것은 분명하지만 이미 여러 차례 지도자 암살을 겪은 이 조직이 이미 대응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알수스 연구원은 <뉴욕타임스>에 연이은 암살로 하마스가 개인의 카리스마에 기대지 않고 선거를 통해 지도자가 정당성을 획득하는 구조를 형성했다며 "하마스 내에서 개인은 권력의 원천이 아니"고 "교체가 매우 원활하다"고 설명했다.
<뉴욕타임스>는 알아루리 살해로 인질 협상이 어그러질 것이라는 우려가 이스라엘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매체는 이스라엘 칼럼니스트 나훔 바르네아가 이스라엘 언론 <예디오트 아르노트>에 3일 알아루리 살해는 "도박"이라며 이번 사건이 "협상을 그르치거나 지연"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