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거의 2주째 지속된 러시아 내 작전 목적이 완충 지대 형성이라고 밝혔다. 우크라이나가 통제 중이라고 밝힌 러시아 남서부 쿠르스크 지역 수드자 마을을 방문한 외신은 약탈 정황은 없지만 주민들이 평화 협상 및 대피로를 열어주길 바라고 있다고 전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8일(현지시간) 영상 연설에서 "러시아의 전쟁 점재력을 파괴하고 최대한의 반격 조치를 취하는 것이 현재 우리 방어 작전의 주요 임무"라며 "여기엔 쿠르스크 지역에서의 작전처럼 침략자의 영토에 완충 지대를 만드는 것이 포함된다"고 말했다. 지난 6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영토 내 침범을 시작한 뒤 우크라이나의 목적에 대한 추측이 분분한 가운데 처음으로 작전 목표를 공개한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발언은 우크라이나 공격의 방어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우크라이나가 쿠르스크 침공에서 서방 지원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는 가운데 서방은 자국 지원 무기를 방어적 목적으로만 사용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지난 13일 우크라이나 외무부는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영토 점령에 관심이 없고 쿠르스크 지역에서 우크라이나를 향해 이번 여름에만 2000건 이상의 공습이 이뤄졌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쿠르스크 작전이 국경 인근 우크라이나 지역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의미다.
지난 5월 우크라이나 제2의 도시 하르키우가 있는 북동부로 지상군을 진입시켜 새 전선을 연 러시아도 국경 지대 보호를 위한 완충 지대 설정을 이유로 든 바 있다.
주말 우크라이나군은 쿠르스크 지역에 흐르는 세임강 다리를 연달아 파괴하며 러시아 보급망 교란을 시도했다. 우크라이나 공군은 16일과 18일 이 지역 글루슈코보와 즈반노에서 각각 다른 다리를 공습해 폭파하는 영상을 공개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끊긴 다리의 위치는 우크라이나가 통제 중이라고 밝힌 쿠르스크 수드자 마을 서쪽과 우크라이나 국경 사이 지역으로, 인접한 카리즈에서 세임강의 또 다른 다리를 끊을 경우 러시아가 이 부근 물자 및 병력 보충에 어려움을 겪게 돼 우크라이나의 이 지역 점령이 용이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우크라이나가 쿠르스크 지역에서 서울 면적의 2배에 가까운 1150㎢를 점령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는 18일 우크라이나군이 수드자 남동쪽으로 좀 더 진격했다고 분석했다.
반면 러 국영 <타스> 통신은 17일 압티 알라우디노프 러 체첸공화국 아흐마트 특수부대 사령관이 쿠르스크 지역 상황이 "완전히 통제 중"이라고 설명했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18일 러 국방부가 지난 24시간 동안 쿠르스크 방면에서 우크라이나 쪽이 병사 300명과 장갑차 27대를 잃었다고 밝혔다고 덧붙였다.
러 국방부는 우크라이나군이 지난 6일부터 18일까지 쿠르스크에서 병사 3460명을 잃었다고 주장했지만 쿠르스크에 인접한 우크라이나 국경지대 수미 지역의 군사 행정 책임자 올렉시 드로즈덴코는 18일 <가디언>에 "이번 작전으로 인해 병원으로 실려 온 부상자 수가 예상보다 적었다"고 말했다. 그는 작전에서 수미 지역 병원이 사상자를 수용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작전 첫날 사상자는 15명에 불과했고 이 중 60~70%는 폭탄 및 파편으로 인한 매우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워싱턴포스트>(WP)는 17일 우크라이나가 점령한 쿠르스크 수드자 마을에 우크라이나군과 함께 방문한 결과 민간 주택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보였지만 중심부 건물은 포격으로 심하게 파괴돼 있었다고 전했다. 신문은 인터뷰한 10여 명의 주민들이 우크라이나군으로부터 잘 대우 받고 있고 살해된 주민은 알지 못하지만 러시아가 마을을 되찾길 바란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주민 인터뷰 중 절반엔 우크라이나군이 동석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우크라이나군이 주민들에게 물과 식량을 나눠줬고 약탈의 증거는 보지 못했다며 이는 이번 공격의 목표가 영토 병합이 아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한 협상 전술이라는 주장을 강화한다고 분석했다.
이 지역 주민 마리나(57)는 <워싱턴포스트> 기자와 함께 다닌 우크라이나군에 "푸틴(러시아 대통령)이 당신 쪽 젤렌스키(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협상하게 하라"며 "우릴 잘 대해줘서 고맙지만 우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호소했다. 그는 "우린 그저 평화와 조화를 원한다"며 우크라이나군을 향해 주민들을 러시아 통제 지역으로 내보내달라고 간청했다. 한 91살 주민은 이 신문 기자에게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 있는 딸을 찾고 싶다며 그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우린 그저 무고한 민간인"이라고 말하는 마리나에게 우크라이나군 드론 부대 지휘관인 복서(28)가 자신의 고향도 러시아군에게 폭격 당하고 점령됐다며 "나도 민간인일 때 그렇게 생각했었다"고 답했다고 덧붙였다.
반면 18일 쿠르스크주 주도 쿠르스크시에서 보도한 <뉴욕타임스>(NYT)는 주민들 사이에 분노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자신의 이름을 타티아나라고 밝힌 주민은 신문에 "평화 협상을 해선 안 된다"며 "이제 키이우(우크라이나 수도)로 진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7일 수드자에서 대한 류드밀라 브라크모바(66)는 우크라이나군이 마을을 파괴한 것을 "참을 수 없다"며 "왜 그렇게 많은 증오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우크라이나군 침공으로 쿠르스크 지역 주민 12만 명 이상이 피난길에 올랐다.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 인근에서 러시아 민간 군사 병력으로 싸운 경력이 있고 쿠르스크 주민들에게 자신의 권투 체육관을 임시 피난소로 제공한 이반 크루이티코보는 <뉴욕타임스>에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아버지 없이, 형제 없이 남겨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 증오를 씻어내는 건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18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군의 러시아 남서부 쿠르스크 침공에 따라 대피한 주민들이 이 지역 한 권투 체육관에 피난해 있다. ⓒEPA=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