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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甲辰年 새해 하시는 일들이 日就月將하시고 乘勝長驅.하시고 萬事亨通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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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岳岩 최학근


인간은 대개 백년쯤 사는 게 한계(限界)다. 팽조(彭祖)는 하()왕조부터 상()왕조에 걸쳐 약 800년을 살았다는 전설 속의 인물이다. 아직 천 년을 산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만 년을 산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생명(生命)의 한계 때문에 가끔 내 사유(思惟)가 가끔 흐트러지고 혼란(混亂)스러워 질 때가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우아하고 품위 있는 고급스러운 생각을 한차원 높게 홍보(弘報)하고 싶다. 그런데 내 능력에는 한계(限界)가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집중(集中)시키는 초점화제(焦点话题)나 인기스토리를 흥미롭게 제시하지 못한다. 좀 더 가닥을 잡고 심도 깊게 말해보고 싶다. 그런데 아무리 쥐어짜도 동인(動因)이 부족하고 핵심이 돌출(突出)하지 못하다. 다만 몹시 난처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물론 이런 한계(限界)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인교(人巧)가 있었으면 좋으련만..

글을 읽고 쓸수록 원초적 한계에 봉착(逢着)하게 된다. 나는 글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읽기 위해 태어나지도 않았다. 여전히 단어가 어렵고 문장이 까다롭게 느껴진다. 이런 한계(限界)로 말미암아 나는 글을 거침없이 쓰지 못한다. 두루뭉실 적당한 선에서 대충 끝낸다. 문학분야에서 태두(泰斗)가 되기엔 이미 글렀다.

가령 마음씨 착한 누군가가 내 글을 좋게 봐준다 해도 나는 중압감(重壓感)을 느낀다. 따라서 거의 책임감 비슷한 가책(呵責)을 가지게 된다. 한 사람이 사회를 품을 수 있는 능력(能力)에 한계가 정해져 있다. 세상에 감춰진 진실이 이렇다. 그러나 각성(覺醒)한 사람들은 어두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목도(目睹)하길 원하지 않는다.

나는 평범한 존재다. 그런데 내가 오늘처럼 한계를 절실히 경험한 적이 종래로 없었다. 이 말은 내가 여태까지 한계에 도달할 만큼 노력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계에 도전(挑戰)한다는 것은 내 좁은 테두리를 넓힐 기회를 잡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한계 앞에 나설 용기가 없다. 나는 이런 비겁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자기를 망가뜨려서라도 지키고 싶은 사람이다. 한계점(限界點)에서 나를 포기(抛棄)하고 싶지만 힘내라고 나 스스로 자신에게 손 내밀며 마음을 다독여본다.

일 년 내내 쓰던 유의 글만 쓰는 것도 내 한계라고 생각한다, 계획 없이 글을 쓰다 보니 거의 대부분의 글이 자가 복제(複製) 수준이다. 그러니 내가 보기에도 지루하고 재미없게 느껴진다. 애초에 내가 보고 싶은 걸 글로 쓰는데 역시나 그러면 여기서 끝나면 실패(失敗)가 아닌가? 나 스스로 깊이 절망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처음 글쓰기 시작할 땐 뭣도 모르고 이래저래 글 쓰는 게 뭐가 어려울까 하고 쉽게 생각했다. 난 상 받을 이런 마음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글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 같다. 글이 어렵기 시작했던 건 학교시절이 아니라 지금이다. 시를 읽기 어려운 이유는 추상적(推想的)인 감상들을 지나치게 구체화(具體化)해서라는데, 구체화된 것을 추상화(抽象化) 하는 것보다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 하는 게 훨씬 어렵다는 걸 알았다.

내가 느끼는 것을 머릿속에서 백만 가지 생각하면 몇 개 정도(程度)만 단어가 달랑 튀어나온다. 쓰던 유의 글만 쓰는 것도 내 한계라고 생각한다.

마음에 드는 글쓰기가 어렵다. 제 딴에 무엇을 열심히 끄적거려 본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구체화에 쓰는 경험이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나와 내 글이 완전히 분리(分離)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 쓰는 일과 글 읽는 일은 너무 즐겁다. 약간 모순(矛盾)되는 경향이 없잖아 있는 것 같다. 내 글이 지루하고 재미없다. 또 남에게 보여준다는 생각해도 재미없고 내 눈에도 역시 재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나는 긴 글보다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을 좋아한다. 드라마보다 영화를 좋아하는 맥락과 비슷하다고 할까. 짧고 굵은 충격(衝擊)에 굉장히 섬세하게 반응하는 성격이다. 오래 끌어가면 집중하기 힘들어져서 금세 소홀해진다. 그래서 내가 긴 글을 못 쓰는 이유이다. 꽃을 쓸 때 아름다움의 정체성을 확실히 가지고 있다는 걸 계속 상기(想起)하려고 한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간결성(簡潔性)이요, 함축성(含蓄性)이요 하는 글의 본질을 연상하게 된다. 나는 작은 거짓말이 큰 거짓말이 되고 또 그 거짓말을 잘 포장(包裝)하고 지속적으로 반복하면 결국 사람들이 믿는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한계가 존재(存在)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 한계를 넘어서려 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한계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중엔 복제(複製), 도작(盜作)이요 하는 실체가 드러나지만 결국 글이란 재치와 기교로 남을 속이는 수단(手段)과 방법이다.   

워낙 글쓰기는 자아정서에 깊이 몰입(沒入)하여 우주공간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하고 싶은 말을 분명히 하되 꼭 분촌(分寸)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글 쓰는 사람은 특정된 세계관 속의 특정된 이야기를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다른 사람들을 지극히 납득(納得)시킬 수 있는 필촉(筆觸)을 가져야 한다.

한마디로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눈앞에 다이아몬드나 금강석이 놓여있어도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물이나 능력(能力), 책임 따위가 실제 작용할 수 있는 범위 또는 그런 범위를 나타내는 말이나 행동이 침체(沈滯)와 답보적(踏步的)인 한계에 머물러 있는 점이 현실을 안타깝게 만든다.

세상을 많이 공부를 하면 그만큼 성과(成果)가 나오는 것이다. 또 공부는 오래 할수록 시야(視野)가 넓어지고 생각이 깊어진다. 그러니 세상의 출세(出世)에 연연(戀戀)하는 공부나 세상에 자신(自身)을 드러내기 위한 공부(工夫)가 아닌, 자기 자신의 성장(成長)을 위한 공부를 하면, 저절로 세상(世上)이 사람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것이다.

서서히 양성(養成)하다, 차차 길러 낸다는 의미의 함양(涵養)은, 우리는 자신에게 또는 다른 사람에게 너무 급하게 능력(能力)이나 품성(品性)이 순식간에 길러지기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주말(週末)에는 시간 여유(餘裕)를 갖고 느긋한 마음으로 긴 시간 책(冊) 읽어보면 어떨까?

마지막으로 표절과 모방, 그리고 창작(創作)과 모방(模倣) 그리고 표절(剽竊)에 대해 알아보자. 오픈 소스 사용이 일반화된 지금 표절(剽竊)과 모방(模倣)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다른 작품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그리고 디자인의 영감(靈感)을 얻고자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디자이너(设计师)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요. 하지만 단순히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몰래 훔쳐 와서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危險)한 행동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돈이나 명성에 대한 욕심(慾心)이 동기가 되어 다른 사람의 작품(作品)을 그대로 옮겨오는 행위를 표절이라고 생각해요." - 헥타의 공동 설립자이자 CDO, 존티 샤플스의 말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어낸 것처럼 속일 때" - 아사드 알리 


"아이디어를 위해 다른 작품들을 참고하는 것은 좋지만 반드시 그 아이디어에 자신만의 개성(個性)을 집어넣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創造)해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데이브 앨리스 악암(岳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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