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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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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전기(金笠傳記)  1부       

김삿갓 전기(金笠傳記) 1부

1. 비운(悲運)의 잉태(孕胎)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불리는 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은 조선조 후기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대가(勢道大家) 안동김씨(安東金氏) 문중에서 태어났다. 

TV사극 '명성황후'에 등장했던 김병익(金炳冀), 김병학(金炳學), 김병국(金炳國) 등과 같은 ‘炳’자 항렬이요, 그의 아버지 김안근(金安根)은 하옥대감(荷屋大監)으로 불리는 김좌근(金佐根)을 비롯하여 김문근(金汶根). 김수근(金洙根)과 같은 항렬이며,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은 순조(純祖)임금의 장인으로서 안동김씨 세도를 창시했던 김조순(金祖淳)과 같은 항렬이었다.

그토록 60년 세도가문의 한 허리에 태어나서 탄탄대로(坦坦大路; 장래가 어려움이 없이 순탄함을 길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가 보장(保障; 장애가 없이 잘되도록 보호함.)되었을 그가 세상을 등지고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조국산하를 누비면서 숫한 일화(逸話;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이야기.)와 명시(名詩)를 남기고 57세를 일기로 비운(悲運; 슬픈 운명. 또는 불행한 운명.)의 일생을 마친 연유는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 정법(金益淳正法)'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병연(金炳淵)이 겨우 다섯 살이던 순조(純祖) 11년(1811)에 평안도에서는 '關西(푸대접)'을 이유로 한 '홍경래의 난(洪景來亂)'이 일어났고 당시 그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은 그 지역의 한 고을인 선천부사(宣川府使)로 나가 있었는데 불의에 반군(叛軍)의 습격을 받은 그는 싸워 보지도 못하고 적에게 항복(降伏)하고 말았다.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라고 자칭한 홍경래(洪景來)는 노도와 같이 일어난 민중을 조직적으로 지휘하여 거사(擧事)한지 6일 만에 청천강 이북의 가산(嘉山), 박천(博川), 곽산(郭山), 정주(定州), 선천(宣川), 태천(泰川), 철산(鐵山), 용천(龍川) 등 8읍을 점령하였으니 그 와중에 저항다운 저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밀려난 고을이 비단 선천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산군수(嘉山郡守) 정시(鄭蓍) 같이 반도에게 포위되어 항복을 강요하는 적으로부터 양팔이 잘이면서도 인둥이(守令을 상징하는 인장)을 입으로 물고 항복을 거부하다가 끝내 목숨을 버리고 절의(節義)를 지킨 충신도 있었지만 그 외엔 다른 고을의 수령들도 거의가 선천부사와 다를 바 없었으니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항복한 것만으로 중형(重刑)에 처해질 일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김익순이 장금세력(壯金勢力)의 비호를 기대할 수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참형(斬刑)에 처해지고 만 데는 또 다른 사연이 있었다. 그는 저항 없이 적에게 항복하여 순순히 복종하고 협력하다가 전세가 역전되자 반도(叛徒)가 흩어지는 틈을 타서 적진을 벗어난 후에 농민이 벤 홍경래의 참모 김창시(金昌始)의 목을 돈 천 양을 주기로 하고 사서 자기의 전공으로 위장하고서도 약속한 목 값을 주지 않음으로서 파렴치한 그의 죄상이 낱낱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김익순은 대역죄인(大逆罪人)이 되어 참수(斬首)되고 가산(家産)은 적몰(籍沒; 예전에, 중죄인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가족까지 처벌하는 일을 이르던 말.)되었으며 가족은 겨우 연좌형(連坐刑)을 면하여 목숨은 부지하였으나 대역죄인의 아들이 된 아버지마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나니 병연은 홀어머니에 이끌리어 황해도 谷山을 비롯한 여러 곳을 유랑하다가 깊은 산골 영월(寧越)에 찾아 들어 정착(定着; 사람이 한곳에 자리를 정해서 머물러 삶.)했었나보다.

영월군(寧越郡) 하동면(河東面) 와석리(臥石里) 속칭 '노루목'에 그의 묘가 있고 거기서 2km쯤 더 들어가면 그의 모자(母子)가 살던 옛 집터가 나온다. 10년 전쯤 내가 그 곳을 찾았을 때는 진입로공사를 하는 중이어서 차를 3km쯤 떨어진 입구에 세워 놓고 걸어서 들어가야 했는데 지금은 진입로(進入路) 뿐 아니라 묘역이 말끔히 정비되어서 하나의 관광명소(觀光名所)가 되고 있다고 한다.

제법 큰 내가 흐르는 산기슭의 양지바른 언덕에 "나는 청산을 향하여 가는데 푸른 물 너는 어디로부터 오느냐? (我向靑山去 綠水爾何來)"라는 유명한 그의 시가 새겨진 작은 빗돌이 하나 서 있고 그 위에 "시선난고김병연지묘(詩仙蘭皐金炳淵之墓)"라고 쓰인 자연석묘비(自然石墓碑)와 함께 시인 김삿갓의 무덤이 흘러오는 푸른 물을 바라보며 조용히 누워 있다.

그의 어머니 함평이씨는 첩첩산중, 노루꼬리만큼 해가 든다고 하여 노루목이라고 했다는 이  곳에 숨어 살면서 어린 아들에게 가문의 내력을 일체 숨긴 채 그저 글만 가르쳤고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던 병연은 열 살을 전후해서는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독(通讀; 건너뛰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 읽음.)하였을 뿐 아니라 고금의 시서(詩書)를 두루 섭렵(涉獵; 물을 건너 찾아다닌다는 뜻으로,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거나 다양한 경험을 쌓음을 이르는 말.)하면서 특출(特出; 남보다 특별히 뛰어나다)한 시재(詩才)를 표출(表出; 속에 있던 것을 겉으로 드러냄.)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곤 했다고 한다. 

더욱이 영월은 단종(端宗)의 장릉(莊陵)이 있는 곳으로서 단종애사(端宗哀史)가 담긴 비통한 유적들이 도처에 자리하고 있으며 영월읍을 둘러싼 산봉우리들의 이름마저도 성삼문봉(成三問峯)이니 박팽연봉(朴彭年峯)이니 하고 지어 부르는 충절(忠節)의 고장에서 경서(經書)를 배우고 사서(史書)를 익히면서 그는 불의를 미워하고 절의(節義)를 흠모(欽慕; 마음에 그리고 우러러 따름.)하는 대쪽 같은 선비가 되어 가고 있었다.   

2. 장원급제(壯元及第)한 아들

김병연(金炳淵)이 백일장(白日場)에 나가 응시한 것은 그의 나이 스무 살 나던 해 늦은 봄의 어느 날이었다. 백일장이란 초야(草野)의 무명유생(無名儒生)들에게 학업을 권장(勸獎)하기 위하여 각 고을 단위로 글 짖기 대회를 여는 일종의 지방과거(地方科擧)와 같은 것이었다. 

순수하게 학문을 좋아 하였을 뿐, 공명심이나 출세욕(出世慾)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병연은 처음부터 백일장 따위에는 나가고 싶은 생각조차 없었다. 출세를 할양이면 어엿이 서울에 올라가 과거를 볼일이지, 지지리 못나게 시골 백일장은 보아 무얼 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달랐다. 시골 백일장에서 장원급제(壯元及第)를 해도 그것은 그저 한 고장에서의 명성일 뿐 벼슬길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의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아들의 힘으로 가문을 다시 일으키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에 떠밀리어 영월 백일장에 나온 병연은 동헌에 높이 걸인 오늘의 시제(詩題)를 보고 회심(會心)의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논정가산충절사(論鄭嘉山忠節死) 탄김익순죄통우천(嘆金益淳罪通于天)" 열다섯 자는 기개(氣槪) 있는 선비라면 한번 필봉(筆鋒)을  휘둘러 볼만한 논제(論題)였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이 나라에 벌어졌던 대역사건(大逆事件), 그 중의 대조적인 두 인물, 정가산(鄭嘉山)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金益淳)의 하늘에 이르는 죄를 탄핵(彈劾)하라는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의 사적을 너무도 잘 아는 김병연은 붓을 들어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했다.

   대대로 신하라고 일컬어 오던 너 김익순아

   정공은 문관이면서도 충성을 다하지 않았더냐.

   너는 오랑캐에게 항복한 한나라의 이릉(李陵) 같은 놈이요

   열사 정시의 공은 죽은 뒤에 드높았다.

   曰爾世臣金益淳

   鄭公不過卿大夫

   將軍桃李壟西落

   烈士功名圖末高

역적 김익순(金益淳)을 탄핵하는 김병연의 붓끝은 추상같았다. 선천방어사 김익순이란 자를 진작부터 미워하여 왔기에 충신 정시(鄭蓍)와 비교하여가면서 그의 죄상을 여지없이 질타(叱咤)하고 생각을 가다듬어 다시 붓을 달린다.

   시인은 이런 일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기에 

   칼을 어루만지며 물가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노라

   선천은 자고로 대장이 지켜 오는 큰 고을

   가산보다도 먼저 의를 지켜야 할 곳이 아니더냐.

   詩人到此亦慷慨

   撫劍悲歌秋水?

   宣川自古大將邑

   比諸嘉山先守義

   너와 정공은 모두 한 임금의 신하인데

   죽는 마당에는 어찌 다른 마음을 품었던가.

   태평성대나 다름없던 신미년 그 해에

   관서에서 풍운이 일었으니 그 무슨 변괴이더냐.

   淸朝共作一王臣

   死地寧爲二心子

   昇平日月歲辛未

   風雨西關何變有

   주나라를 높인 충신이 노중련 하나가 아니요

   한나라를 돕기 위해서 제갈량 같은 이가 많았듯이

   우리나라에도 만고의 충신 정가산이 나와

   맨손으로 풍진을 막다가 절개 세우고 죽지 않았더냐.

   尊周孰非魯仲連

   輸漢人多諸葛亮

   同朝舊臣鄭忠臣

   抵掌風塵立節死

   가산에 묻힌 늙은 관리의 명성은 갈수록 드높고

   그 이름은 가을 하늘의 태양처럼 빛날 것이니

   혼백은 남묘에 돌아가 악비와 벗할 것이요

   뼈는 서산에 묻혀 백이숙제와 이웃하리로다.

   嘉陵老吏揭名旌

   生色秋天白日下

   魂歸南畝伴岳飛

   埋骨西山傍伯夷

김병연은 정가산의 장렬한 전사광경을 눈앞에 그려보며 머리를 숙이고 그의 충절을 경건한 마음으로 한 것 찬양했다. 그러나 충절을 찬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는 김익순 같은 비겁하고 용렬(庸劣)하면서도 교활하기 그지없는 역적을 철저히 규탄하는 것이 더욱 긴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서쪽에서 들려오는 소식 서글프기 그지없기에

   국록 먹은 불충한 신하 뉘 집 사람인가 물었더니

   문벌은 명성이 드높은 장동김씨요,

   항렬은 장안에서 소문난 순자 돌림이라네.

   西來消息慨然多

   問是誰家食祿客

   家聲壯洞甲族金

   名字長安行列淳

   가문도 훌륭하고 성은도 두터웠으니

   백만대적 앞에서도 의를 굽히지 말았어야 할 것을

   청천강 물에 고이 씻긴 병마는 어디다 두고

   철옹산에 간직했던 궁시는 어떻게 했단 말이냐.

   家門如許聖恩重

   百萬兵前義不下

   淸川江水洗兵波

   鐵甕山樹掛弓枝

   임금 앞에 꿇어 드나들던 그 무릎으로

   서북 흉적에게 꿇고 항복했으니

   너는 죽어 황천에도 가지 말거라

   저승에는 선대왕이 계실 것 아니냐.

   吾王庭下進退膝

   背向西域凶賊股

   魂飛莫向九泉去

   地下猶存先大王

   너는 임금도 배반하고 조상도 배반한 놈

   한 번 죽어서는 오히려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다.

   춘추의 필법을 너는 아느냐 모르느냐

   부끄러운 이 사실은 우리 역사에 길이 전하리라.

   忘君是日又忘親 

   一死猶輕萬死宜

   春秋筆法爾知否

   此事流傳東國史

실로 통렬하고 신랄한 규탄이었다. 마지막 구절을 끝낸 김병연은 가슴이 후련했다. 오랫동안 가슴속에 뭉쳐 있던 울분을 한꺼번에 토해낸 통쾌함과 이제까지 익히기만 했지 한 번도 써보지 못한 글재주를 마음껏 발휘해 본 뿌듯함이 온 몸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이윽고, 동헌마당에는 급제자의 방문이 나붙었고 그 첫머리에 '장원급제(壯元及第) 김병연(金炳淵)' 일곱 자가 크게 두드러져 보였다. 병연은 기뻤다. 백일장의 장원급제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기뻐하실 모습을 떠올리면서 효도를 하게 된 것을 기뻐했다.

3. 통곡하는 어머니 

영월 백일장에서 장원급제한 김병연(金炳淵)은 주변의 칭송과 축하를 듣는둥 마는둥 집으로 향했다. 장원급제라는 그 일 자체보다도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 아들이 장원급제한 것을 아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우리들 삼형제 형 병하(炳夏) 아우 병호(炳湖)를 홀로 길러 내시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신 어머니시던가. 3년이 멀다 하게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시며 밥을 굶어가면서도 자식들만은 잘 가르치려고 매질해가며 글공부를 독려하시던 어머니셨다.

걸음을 재촉하여 집에 돌아오니 예상했던 대로 어머니와 아내 황씨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병연은 두 손 모아 어머니 앞에 공손히 큰 절을 올렸고 재빠르게 눈치를 알아챈 어머니와 아내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들의 글재주를 아는 어머니는 급제쯤이야 할 줄로 알았지만 장원을 했다는 말을 듣고는 이미 아기 아버지가 되어 있는 아들의 등을 왈칵 부둥켜안았다. "너의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셨겠느냐" 하고 눈물까지 글썽이는 것이 아닌가?

감격의 눈물을 참아 낸 어머니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네가 내 바라던 대로 백일장에서 장원급제를 했으니 이제부터는 서울에 올라가 과거 볼 준비를 하여라. 네 실력이면 어렵지 않게 과거에 급제할 수 있을 것이다. 벼슬길에 나아가 반듯이 가문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

병연은 평소에 벼슬길로 나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소위 양반이라고 거들막대는 서울의 벼슬아치들은 도탄(塗炭)에 든 백성은 아랑곳없이 당파싸움과 세도정치(勢道政治)에 여념이 없고, 지방의 수령(守令)들은 제 배나 채우고 벼슬자리나 지키려고 토색(討索)질을 일삼고 있으니 그 흙탕물 속에 들어간들 물을 맑히기는커녕 그 스스로의 맑음도 지켜내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씀 속에는 그 어떤 숨은 뜻이 있는듯하니 만약 우리 가문에서 지난날에 누군가가 고관대작(高官大爵)을 지내다가 몰락한 일이 있다면 그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후손된 자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이 기회에 가문의 내력을 바로 알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짐짓 말머리를 돌려 오늘의 백일장 시제(試題)와 장원한 아들의 글을 듣고 싶어 했고, 병연도 기뻐하는 어머니와 아내 앞에서 신바람 나게 휘둘렀던 시구(詩句)를 떠올리면서 어깨를 으쓱하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부터 15,6년 전에 홍경래 난(洪景來 亂)이라고 하는 반란사건(反亂事件)이 있었던 것을 어머님은 기억하십니까?" 홍경래라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놀라 가슴이 덜컹했지만 애써 태연한체하면서 다음 말에 신경을 곤두세웠고, 이를 깨닫지 못한 병연은 예사롭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 홍경래 난 때 끝까지 충절을 지켰던 가산군수 정시(鄭蓍)를 칭송(稱頌)하고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한 후에도 비겁한 짓을 꾀하였던 선천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을 탄핵하라는 시제가 주어졌는데 그 일에 대해서는 제가 익히 알고 있을 뿐 아니라 평소 마음속으로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분명히 했던 소신대로 일필휘지(一筆揮之)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는 어머니는 눈앞이 캄캄해 왔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이냐. 그럴 줄 알았더라면 장성한 아들에게 진작 집안내력의 귀띔이라도 해 주었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엇하랴. 아니 그 치욕스런 과거를 어떻게 입에 올릴 수 있었으랴.

그런 줄도 모르고 신명나게 낭송해 가는 아들의 詩를 듣고 있던 어머니는 "너는 죽어 황천에도 못 갈 놈, 거기에는 선대왕이 계시지 안느냐. 혼비막향구천거(魂飛莫向九泉去) 지하유존선대왕(地下猶存先大王)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더는 참지 못하고 아들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풀썩 엎드린 채 목 놓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아들도 며느리도 모두 영문을 몰라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얼마 동안을 흐느껴 울고 일어난 어머니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와 내가 함께 조상님께 큰 죄를 지었구나." 그리고는 아직도 영문을 몰라 하는 아들에게 벽장 속에 숨겨 두었던 작은 책 한 권을 내어 놓았다. 

그것은 집의 계보(系譜)와 사적(史蹟)을 적은 일종의 가족사(家族史)라 할 가승(家乘)이었다. 병연은 바쁜 손으로 가승을 펼쳐 보았다. 거기에는 수십 대를 내려오는 조상들의 빛나는 계보가 기록되어 있었고, 끝판에 와서는 김익순(金益淳) ☞ 김안근(金安根) ☞ 김병연(金炳淵)으로 이어져 김익순과 자기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아이구, 이럴 수가 ..." 병연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자리에 쓰러졌다. 그리고 통곡(痛哭)했다. 역적(逆賊)의 후손이라니, 울어도울어도 설움은 자꾸만 복받쳐 올랐다. 역적이든 충신이든 그 어른이 나의 조부님이신 것만은 틀림없거늘 그토록 처절하게 매도(罵倒)하다니 장차 어찌 얼굴을 들고 세상을 본단 말인가?

4. 번민(煩悶)하는 시인(詩人)  

백일장에서 자기가 그토록 추상 같이 매도했던 대역죄인 김익순(金益淳)이 바로 자기 할아버지였음을 확인한 김병연(金炳淵)은 한 순간에 천길 나락으로 떨어진 운명의 비통함과 조상에게 지은 돌이킬 수 없는 죄책감(罪責感),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는 자괴감(自愧感)으로 하여 자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자처했다.

몇 번이고 죽기로 결심했지만 늙은 어머니의 만류를 거역하지 못한 그는 어디 가서 술이라도 퍼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일전의 백일장 길에 만났던 주막의 범상(凡常)치 않은 주인 영감을 머리에 떠 올렸다. 짧은 만남 속에 몇 마디 나눈 대화였지만 그는 분명 예사 노인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었다.

전일보다 한결 반갑게 맞아 주는 주막집 노인은 찾아온 젊은이가 일전에 백일장에서 장원급제한 김병연이라는 시골 선비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변응수(邊應洙)라는 자기 본명을 굳이 숨기고 취옹(醉翁)이라고만 한다는 이 노인은 과거(科擧)를 열 번이나 보아서 모두 낙방하고 세상을 떠돌다가 우연히 젊은 주모를 만나 이곳에 숨어 산다고 했다.

그는 취옹(醉翁)이라는 자기 별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태백(李太白)의 시 한 수로서 설명을 대신했다.

   술 취하면 세상만사를 잊어버리고

   정신없이 외로운 꿈에 잠기네.

   내 몸이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하니

   세상에 이런 즐거움이 어디 있으랴. 

   醉後先天地

   兀然就孤枕

   不知有吾身

   此樂爲最甚

병연과 술자리를 마주한 취옹은 병연의 백일장 ‘詩’를 줄줄 외우면서 참으로 놀랄 만큼 재기(才氣) 넘치는 명시(名詩)라고 칭찬해 대면서도 그 내용은 별로 찬성할 바가 못 된다고 했다. 어떤 점이 그토록 못 마땅하였느냐고 따져 묻는 병연에게 그는 이런 말을 들려준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에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자는 그 뜻을 천하에 펼 수 없다.(樂殺人者 不可鎰志於天下)"고 했는데 그대는 산 사람도 아닌 죽은 사람을 다시 한 번, 그것도 무참히 난도질을 해 놓았으니 그것을 어찌 지각 있는 사람이 찬성할 일 이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만약에 김익순(金益淳)에게 후손이 있어 그대 글을 보았다면 그대를 얼마나 원망하겠느냐."고도 했다. 이 말에 깜짝 놀란 병연은 이 노인이 자기와 조부와의 관계를 훤히 알면서 비웃는 것 같아서 화가 치밀어 거세게 항변(抗辯)했지만 무심중에 자기 비밀만 스스로 폭로한 꼴이 되고 말았다.

70평생을 산 사람으로서 그저 원칙론(原則論)을 폈을 뿐인 취옹은 병연의 처지를 알고 보니 참으로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이라고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찌 하겠는가. 그는 슬쩍 은유적(隱喩的)인 표현과 익살로 그를 위로한다.

죽고 싶다는 병연에게 "어머니가 계신데 그 앞에서 죽는 것은 또 하나의 죄를 짓는 것이라" 하고, 죽지도 못하면 어떡하느냐는 물음에는 "자작지얼불가활(自作之孼不可活)이라는 말과 같이 스스로 저지른 재앙은 돌이킬 수 없는 법이니 그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스스로 지은 죗값을 치르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이라고 했는데 하늘을 어떻게 우러러보며 사느냐고 하니 그는 허허 웃으면서 "상제처럼 삿갓을 쓰면 되지." 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삶이라도 이야기 하는 듯, 모든 욕망을 초월한 기세인(棄世人)이 되면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고 했다.

"취옹의 뜻은 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산수 간을 마음대로 떠도는데 있다.(醉翁之意不在酒 在乎山水之間也)"고 슬쩍 자기의 속내를 내비친 그는 술 한 잔을 다시 들이킨 후에 목청을 돋우어 옛 시 한 수를 읊는다.

   萬事無心一釣竿

   三公不換此江山

술에 취하고 자기가 읊는 시에 취하여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뜬 그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모든 욕망을 깨끗이 버리고 한세상을 산천경개와 더불어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도 매우 운치 있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라." 

5. 삿갓을 눌러 쓰고

취옹(醉翁)과 취담(醉談)을 나누다 돌아온 병연(炳淵)은 여러 날을 잠 못 이루고 뒤척이면서 번민하지만 별 다른 방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취옹이 "하늘을 보기가 부끄럽거든 상제처럼 삿갓을 눌러 쓰고 '기세인(棄世人)'이 되어 산천경개를 즐기면서 되는 대로 한 세상 보내는 것도 운치 있는 일일 것이라." 고 하던 말만이 세차게 머리를 때린다.

노모(老母)에게만 잠시 바람이나 쏘이고 오겠다고 하직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선 병연은 큼직한 삿갓부터 하나 샀다. 비도 안 오는 날에 삿갓을 쓰고 보니 지팡이라도 하나 짚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는 다시 주막에 들러 취옹과 석별의 정을 나눈다.

병연을 맞은 취옹은 술상을 마주하고 빙그레 웃으면서 "자네 참말로 삿갓을 썼네그려. 그래, 어떤 결심이라도 했는가?" 하고 묻는다. 병연은 묵묵히 술만 마시다가 지필묵(紙筆墨)을 청하여 대답대신 ‘詩’ 한 수를 적어 내려간다.

   此竹彼竹化去竹

   風打之竹浪打竹

   飯飯粥粥生此竹

   是是非非付彼竹

   賓客接待家勢竹

   市井賣買歲月竹

   萬事不如吾心竹

   然然然世過然竹

취옹노인은 머리를 갸웃 거리면서 "나는 암만해도 알 길이 없네그려. 형식으로 보아서는 칠언률시(七言律詩) 같네마는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하고 묻는다. 허허 웃으면서 병연은 대답한다.

선생께서 날보고 되는 대로 살라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詩’도 되는대로 쓰는 거지요. 대죽(竹)자 아닙니까? 그러니 ‘竹’자를 <대로>라는 뜻으로 보시면 됩니다. 제가 풀이를 할 테니 한번 들어 보십시오.

   이대로 저대로 되어 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대로 살아가고

   옳다면 옳거니 그르면 그르려니 저대로 두세.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장터에서 사고팔기는 시세 돌아가는 대로

   세상만사 내 마음대로 안 되니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 대로 지내세.

풀이를 다한 병연은 "어떻습니까? 이것이 선생께서 저에게 가르치신 것 아닙니까?"하고 짐짓 너스레를 떤다. 풀이를 들으면서 배꼽을 움켜잡고 너털웃음을 웃고 있던 취옹은 "격에는 맞지 않아도 명시(名詩)임에는 틀림없는 파격시(破格詩)라"고 칭찬한 후에 숙연한 자세로 돌아와 조용히 술잔을 건넨다.

"자네 시를 들으니 이제 작별하면 언제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겠나." "선생님! 부디부디 오래 사십시오."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돌아서는 병연을 취옹은 한사코 산을 내려와 냇가까지 배웅을 한다. 냇가에 서서 차마 보내지 못하고 하늘가에 떠 있는 구름을 바라보던 취옹은 문득 시 한 수를 읊는다.

   그대 가면 이 봄 동산을 뉘와 함께 노닐고

   새 울고 꽃 덜어졌는데 물만 부질없이 흐르네.

   이제 그대를 배웅하며 물가에 섰으니

   뒷날 내 생각나거든 냇가에 와 보게.

   君去春山誰共遊

   鳥啼花落水空流

   如今送別臨淨水

   他日相思來水頭

송별시를 듣고 난 병연은 눈시울이 뜨거워져 취옹노인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선생님 부디 오래오래 사십시오." 그저 그 말뿐,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6. 백년도 못 사는 주제에(生年不滿百)

가슴 속에 쌓였던 세진(世塵)을 깨끗이 떨쳐 버리고 고요한 산 속을 걸으니 마음이 그렇게도 상쾌할 수가 없었다. 무아(無我)의 세계는 바로 나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왜 이제까지 헛된 굴레와 부질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번뇌만 거듭하여 왔는가.

   백년도 다 못 사는 주제에 

   천년의 근심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했던가.

   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던 그 산아요 그 물이건만 비어 있는 마음으로 바라보니 새삼스럽게 아름다워 보였다. 아아, 산과 물이 이렇게도 좋은 것을 이제까지는 왜 모르고 살아 왔던가. 문득 엣 ‘詩’ 한 수가 머리에 떠오른다.   

   물이 푸르러 산이 좋아하고 

   산이 푸르러 물이 좋아라네

   시원스러운 산과 물 사이를 

   한가한 나그네 홀로 걸어가네.

   水綠山無厭

   山淸水自親

   浩然山水裡

   來往一閑人

누군가가 자기를 노래해 준 것 같았다. 산중(山中)에는 오가는 사람조차 없이 흐르는 물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만이 길손의 귀를 사뭇 싱그럽게 해 주고 이었다. 오늘 가다 싫으면 내일 가고, 동으로 가다 싫으면 서로 가면 그만인 무궤도(無軌道)의 여정(旅路), 물가에 털썩 앉아서 목청을 돋우어 엣 시조 한 수를 읊조려 본다.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그 누가 읊은 시조였던가. 자유자재(自由自在)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깊이 산 속으로 들어가면서 다시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이요,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지냈던 선비 선암(仙庵) 유창(劉敞)의 ‘유흥(幽興)‘이라는 제목의 시가 떠오른다.

   한가한 구름 따라 숲속에 들어서니

   솔바람 냇물소리 옷깃을 씻어주네

   뜬 세상에 이 흥취를 아는 사람 그 누구랴

   다만 저 산새만이 내 마음을 알아주리.

   步逐閒雲入翠林

   松風澗水洗塵襟

   悠悠浮世無知己

   只有山禽解我心

앞 사람의 시조(時調)며 뒷사람의 한시(漢詩)며, 모두가 선미(禪味)에 넘치는 시가(詩歌)임에 틀림이 없어 보였다. 가도 가도 보이는 것은 산과 나무와 물 뿐이요, 들리는 것은 새소리와 물소리 바람소리뿐, 좀처럼 인가(人家)는 보이지 않는다. 

7. 사람이 사람 집에 왔건만 사람 대접을 안 하니(人到人家不待人)

물을 건너고 산을 넘어 한 마루턱에 올라서니 산골치고는 제법 어지간한 마을이 내려다 보였다. 윤부자(尹富者)집이 아마도 저 집인가 보다. 안채는 기와를 올렸고 사랑채는 초가인 반 기와집이 마을 한가운데 덩그렇게 자리하고 있어서 그만하면 나그네의 하룻밤을 의탁(依託)할 만해 보였다.

기꺼이 내려가 하루 밤 자고 갈 것을 청하니 60쯤 되어 보이는 주인은 나와 보지도 않고 사랑문을 열고 내려다보면서 손을 휘휘 저으면 일언지하에 거절(拒絶)하는 것이 아닌가.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사람이 사람 집에 왔건만 사람대접을 안 하니

   주인의 인사가 사람답지 못하구나.

   人到人家不待人 

   主人人事難爲人

입 속으로 주인의 비인사(非人事)를 중얼중얼 나물해 보지만 그것으로 잠자리가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김삿갓은 염치 불구하고 다시 한 번 간청(懇請)해 본다. "영감님! 하루 밤만 자고 가게 해 주십시오. 날이 저물었는데 이 댁이 아니면 자고 갈만한 데가 없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안에서 아들인 듯싶은 두 젊은이가 나와 삼부자가 한 패가 되어 손을 내두르면서 냉큼 나가라고 호통을 친다. 어이 없이 발길을 돌려 나오는데 때마침 어디선가 두견새 우는 소리가 구슬피 들려오고 있었다.

   석양 무렵 남의 집 사립문을 두드리니 

   주인은 거듭 손을 내 저으며 어서 가라네.

   두견새도 야박한 인심 알았음인가 

   돌아가는 게 좋으리라고 숲에서 울어 대네.

   斜陽叩立兩柴扉

   三彼主人手却揮

   杜宇亦知風俗薄

   隔林啼送不如歸

"윤(尹)가라, 소축자(丑)에 꼬리를 느린 것이 ’尹‘자렸다. 그래서 옛날부터 윤가를 ’소‘라고 일러 오지 않았던가. 명절 때면 수난(受難)을 당하는 것이 소인데 지난번 단오절에는 무사히 넘겼나 보다마는 돌아오는 추석은 어찌 넘기려느냐." 

윤 부자네 집에서 냉혹하게 쫓겨난 김삿갓은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욕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남에게 악담을 해 본일 없는 김삿갓이건만 윤부자네에 대해서는 악담(惡談)이 절로 나와 소리 높여 다시 즉흥시(卽興詩)를 한수 읊어 댄다.    

   동림산 기슭에 봄 풀이 욱어져

   큰 소 작은 소 긴 꼬리 휘두르네

   오월단오는 근심 속에 넘겼지만 

   추석명절이 또한 두렵지 않느냐.

   東山林下春草綠

   大丑小丑揮長尾

   五月端陽愁裡過

   八月秋夕亦可畏

지독한 악담이었지만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그렇게 풍자(諷刺) 해서라도 달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렇지만 날은 어둡고 배는 고파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20리쯤 가면 서당(書堂)이 있다지만 그 말도 믿을 수가 없었다.  

8. 밥상엔 고기 없어 채소가 판을 치고(盤中無肉權歸菜)

윤부자(尹富者) 집에서 쫓겨난 김삿갓은 다시 고개를 넘어 얼마를 더 걸었지만 이제는 날이 어둡고 다리도 아파서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길가의 오두막집을 찾아가 주인을 불렀다.

잠시 후 백발노인(白髮老人)이 문을 열고 사정을 듣더니 매우 난처한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방이 하나 밖에 없지만 어두운 밤에 어디를 가겠느냐고, 함께 고생하자면서 어서 들어오라고 쾌히 승낙(承諾)을 한다.

노인은 인사를 나누고 나서 부엌을 향하여 '손님이 오셨으니 밥을 한 그릇 더 지으라.' 고 이른다. 그러자 부엌에서는 며느리인 듯싶은 젊은 부인이 알았다면서 '밥은 잡곡(雜穀)이라도 어떻게 나누어 보겠지만 땔감이 부족하다.' 고 아뢴다.

'땔감이 없으면 우선 울타리를 뜯어다 때려무나. 울타리는 내일 생나무를 베어다가 다시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시아버지의 대답이다. 그저 놀랍기만 하다. 이토록 가난할 수가 있으며, 그 가난 속에서 이토록 훈훈 인정(人情)이 배어날 수 있을까.

이 집에서의 하룻밤은 여러 가지를 보고 느끼게 했다. 어제 밤에는 밥그릇이 없어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밥을 바가지에 담아 함께 먹더니 오늘 아침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외출할 옷을 바꾸어 입는다.

   밥상엔 고기 없어 채소가 판을 치고

   부엌엔 땔감 없어 울타리가 녹아난다.

   며느리 시어미는 한 그릇 밥 나눠 먹고 

   나들이엔 부자간에 옷을 바꾸어 입누나.

   盤中無肉權歸菜

   廚中乏薪禍及籬

   朝飯婦姑同器食

   出門父子易行衣

마음속으로 시 한 수를 중얼거린 김삿갓은 한사코 거절하는 노인에게 엽전 몇 닢을 억지로 던져 놓다 시피 하여 감사(感謝)함을 표하고, 다시 산길을 가노라니 높푸른 하늘가에 독수리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유유히 날아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잠깐 사이에 저 산에서 이 산으로 날아오다가 별안간 일직선으로 급강하를 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토끼 한 마리를 움켜잡아 가지고 유유히 저쪽 산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그 광경(光景)을 보고 시 한 수가 없을 수 없었다.  

   넓은 하늘을 지척처럼 날아가며  

   이 산 위에 번쩍 저 산 위에 번쩍

   숲속의 토끼잡이가 어찌나 웅장한지

   오관을 넘나드는 관운장만 같구나.

   萬里天如咫尺間

   俄從某峯又玆山

   平林搏兎何雄壯

   也似關公出五關 

9. 오동잎 하나 떨어져(梧桐一葉落)

오두막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나온 김삿갓은 다시 산길을 걸어간다. 가을이라는 계절(季節)은 오동나무 잎이 떨어지면서부터 시작된다던가. 어떤 시인은 가을을 이렇게 노래했다.     

   오동 나뭇잎 하나 떨어져

   온 누리가 가을임을 안다.

   梧桐一葉落

   天下盡知秋

봄이 소생(蘇生)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조락(凋落)의 계절이요, 조락에는 애상(哀傷)이 따르게 마련임으로 고금을 막론하고 가을을 노래한 시는 한 결 같이 애달픈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가을바람 불어 흰 구름 날아가고 

   나뭇잎 떨어져 기러기 남으로 가네.

   秋風起兮白雲飛

   草木落兮雁南歸

중국의 한무제(漢武帝)는 저 유명한 추풍사(秋風辭)라는 시를 그렇게 애달픈 말로 시작했지만 우리나라의 선조(宣祖) 때 시인 정용(鄭鎔)도 가을의 애달픔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국화꽃은 빗속에 시들어 가고

   가을바람 뜰에 불어 오동잎 진다.

   이아침에 슬픔이 새삼스러워

   지난 밤 꿈속 고향 마냥 그립네.

   菊垂雨中花 

   秋驚庭上梧

   今朝倍惆怅

   昨夜夢江湖

김삿갓이 집을 나올 때는 죽어도 집 생각은 아니할 결심이었다. 그러나 밤이면 공산명월(空山明月)이 유난히 밝은데다가 귀뚜라미는 애간장을 녹여 내려는 듯 구슬피 울어 대니 멀리 떨어져 있는 고향생각이 저절로 간절(懇切)해 왔다.       

   베갯머리에 비친 푸른 달빛이 

   땅 위에 내려앉은 서릿발 같구나

   눈을 들면 먼 산의 달이 바라보이고

   고개 숙이면 고향 생각이 절로 간절하구나.

   牀前看月光

   疑是地上霜

   擧頭望山月

   低頭思故鄕

이것은 가을밤에 고향 그리운 심정을 노래한 이태백(李太白)의 시이거니와 객지로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의 가을은 누구나 마찬가지인 듯 중종(中宗) 때 선비 양사언(楊士彦)에게도 다음과 같은 가을시가 있다.   

   저녁연기 한 줄기 들판에 오르고

   달은 저물어 지평선에 지누나.

   남녘에서 오는 기러기야 말 물어 보자

   고향 집에서 무슨 기별이 없더냐. 

   孤烟生曠野

   殘月下平蕪

   爲問南來雁 

   家書寄我無

산속에도 가을이 깊어 바람이 차갑다. 낙엽은 바람에 휘날리는데 무심한 산새들은 애절히 울고 있어서 산길을 외로이 걸어가는 김삿갓은 오늘따라 고향생각이 유난히 간절하였다.  

10. 내 본디 하늘 위에 사는 새로다(我本天上鳥)

조락(凋落)의 계절인 가을의 애상(哀傷)에 젖어 홀로 산길을 걸어가고 있던 김삿갓이 문득 개울건너를 바라보니 낙엽 쌓인 너럭바위 위에 4,5명의 선비들이 둘러 앉아 술을 마시며 시회(詩會)를 열고 있었다.

술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김삿갓이 아니었다. 염치불구(廉恥不拘)하고 그들에게 닦아가 술 한 잔을 청했고, 선비들은 불청객(不請客)을 쫓으려고 시회를 하는 자리에서는 시를 짓지 않고서는 술을 마실 수 없다고 했다.

김삿갓은 시에 능하지는 못하지만 술을 서너 잔 마시면 시상(詩想)이 떠오르는 버릇이 있으니 먼저 술을 달라했고, 선비들은 먼저 시를 지어야 술을 주겠다고 옥신각신하면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빨리 쫓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좌중의 한 선비가 그러면 술을 먼저 줄 것이니 자신이 있거든 마시고 내 시에 화답해 보라했고, 잠시 후 그는 기발(奇拔)한 시상이라도 떠올랐는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음과 같이 써 내려가고 있었다. 

   돌 위에 풀이 나기 어렵고

   방안에 구름이 일 수 없거늘

   산에 사는 무슨 놈의 잡새가

   봉황의 무리 속에 날아들었는고. 

   石上難生草

   房中不起雲

   山間是何鳥

   飛入鳳凰群

국화주(菊花酒)를 서너 잔 얻어 마신 김삿갓은 선비가 써 내려가는 시를 넌지시 내려다보면서 어이가 없어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자기를 노골적(露骨的)으로 조롱(嘲弄)하는 시였기 때문이다. 

돌 위에 풀이 날 수 없고 방안에 바람이 일 수 없다는 말은 '글을 변변히 배우지도 못했을 너 같은 촌놈이 무슨 놈의 시를 짓겠다는 것이냐.'는 비아냥이었고,

다음 구절은 자기네는 봉황(鳳凰)으로 자처하면서 김삿갓을 잡새로 몰아 붙였으니 그 얼마나 모욕적(侮辱的)인 시란 말인가. 그래도 김삿갓은 역겨움을 참고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지필묵(紙筆墨)을 받자마자 다음과 같이 일필휘지(一筆揮之) 했다. 

   내 본디 하늘 위에 사는 새로서

   항상 오색구름 속에서 노닐었거늘

   오늘따라 비바람이 몹시 사나워

   들새 무리 속에 잘못 끼어들었소.

   我本天上鳥

   常留五彩雲

   今宵風雨惡

   誤落野鳥群

그들이 자기들은 봉황으로, 김삿갓을 잡새로 비유했으니 김삿갓은 역으로 그들을 ‘들새 무리’로, 자신은 ‘오색 구름 하늘 위 새’로 자처하면서 통쾌하게 반박하였다. '이 한 ‘首’면 술값은 족히 될 것이니 소생은 이만 물러갑니다.' 한 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시를 돌려가며 읽어 본 선비들은 모두들 노발대발하면서 김삿갓을 불러댔지만 그는 들은 체도 아니 하고 유유히 걸어갔다. 좋은 국화주(菊花酒)에 얼큰히 취한 후에 시골 선비들을 잔뜩 골려 준 김삿갓은 가슴이 후련하기까지 했다. 

어느새 가을이 완연(完然)하여 소슬바람은 옷깃 사이로 차갑게 스며들고, 하늘가에서는 기러기 떼가 남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시골선비들의 같잖은 ‘詩’에 식상(蝕像)한 김삿갓은 '그래도 시라면 이쯤은 돼야지.' 하면서 불현듯 유우석(劉禹錫)의 추풍인(秋風引)이라는 시를 떠올렸다.   

   가을 바람 어디서 불어오기에 

   기러기 떼를 쓸쓸히 날려 보낼까

   아침부터 나뭇잎 울리는 바람 소리를 

   외로운 나그네가 먼저 듣누나. 

   何處秋風至

   蕭蕭送雁群

   朝來入庭樹

   孤客最先聞  악암(岳岩)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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