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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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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전기(金笠傳記) 2

 

11. 허구 많은 운자 중에서 하필이면 멱자란 말이오(許多韻字何呼覓)

 

김삿갓은 날이 저물어 다시 산골의 한 서당(書堂)을 찾아가서 하룻밤 유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제법 덩그런 집에서 열여덟 살의 어린 애첩(愛妾)까지 더리고 산다는 70고령의 노훈장(老訓長)은 오만(傲慢)하기 그지없었다.

 

'자네 글을 좀 읽었는가?'

'예, 많이는 못 읽었지만 조금은 배웠습니다.'

'그러면 내가 운()자를 부를 것이니 시()를 한수 지어 보게, 잘 지으면 재워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자고 가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게.'

'예, 선생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김삿갓은 겨우 글방사랑 윗목에 자리를 얻어 앉았고, 훈장(訓長)은 거만하게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자를 한꺼번에 부르지 않고 한 구절을 지을 때마다 한 자씩 따로따로 불러 줄 테니 그리 알게.” 하더니 첫 번째 운자를 찾을 멱()’ 하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이라는 글자는 에서는 좀처럼 쓰지 않는 벽자(僻字)임에도 불구하고 김삿갓을 골탕 먹여 내쫓으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일단 운자를 받은 김삿갓은 자를 본래의 뜻인 동사(動詞)로 써서는 시를 지을 수 없음을 간파하고 명사(名詞)로 바꾸는 재치를 발휘하여 선뜻 이렇게 읊었다.


허구 많은 운자 중에서 하필이면 멱자란 말이오.

許多韻字何呼覓

 

첫 구절은 그것으로 시험을 통과한 셈이었다. 그런데 훈장은 또 다시 하고 똑 같은 글자를 두 번째 운자로 부르는 것이었다. 운자라는 것은 본시 같은 글자를 거듭 쓰는 것이 아니요, 훈장이 그 만한 법칙(法則)을 모를 리 없지만 기어이 골탕을 먹여 보려나 보다.


아까도 멱자가 어려웠는데 또 멱자란 말이오.

彼覓有難況此覓

 

김삿갓은 이번에도 동사(動詞)를 명사(名詞)로 바꾸어 간단히 처리 했고, 그 기발한 발상(發想)과 재치에 놀란 훈장은 그래도 자기의 체면을 세워 보려고 운자가 필요치 않은 세 번째 구절에도 굳이 운자를 달으라면서 다시 하고 부른다.


하룻밤 자는 것이 오직 멱자에 달렸구나.

一夜宿寢懸於覓

 

이쯤 되면 훈장은 당황(唐慌)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허나 세 번을 내리 멱자만 부른 마당에 이제 와서 어찌 하겠는가. 훈장은 또 다시 멱자를 불렀고 김삿갓은 은근히 화가 나서 노골적(露骨的)으로 비난하는 시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산골 훈장이 아는 글자는 오직 멱 자 뿐이구나.

山村訓長但知覓

 

참으로 김삿갓이 아니고서는 해 낼 수 없는 놀라운 재주였다. 이에 놀란 훈장도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벌떡 일어나 김삿갓의 손을 잡고 아랫목으로 내려와 시재(詩才)를 칭찬하면서 저녁에는 애첩(愛妾)에게 술상까지 보아오게 하여 귀한 손님으로서의 대접(待接)을 극진히 하였다.

 

술을 마시면서도 김삿갓은 젊은 여인의 숨겨진 아픔을 엿본 것만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70고령의 영감님과 열여덟 살의 앳된 소실, 아무리 보아도 어울리는 남녀 간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생각하면 여인의 불행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이 재물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문득 성수패설(醒睡稗說)이라는 옛 책에 나오는 노랑유부(老郞幼婦)라는 시가 머리에 떠오른다. 어느 익살꾸러기 시인이 일흔 두 살의 신랑과 열여섯 살의 신부를 배꽃과 해당화에 비유하면서 신방 풍경을 읊은 희시(戱詩)이다.


신부는 열여섯, 신랑은 일흔두 살

파뿌리 흰 머리가 붉은 단장을 만났네.

어느 날 밤 홀연 봄바람이 일더니

배꽃이 날아와 해당화를 누르누나.

 

二八佳人八九節

蕭蕭白髮對紅粧

忽然一夜春風起

吹送梨花壓海棠

 

12. 어디로 가오 어디로 가오(歸何處 歸何處)

 

김삿갓이 산길을 걸어가는데 한 밤중에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대로 지나칠 수 없어 찾아가 보니 젊은 여인이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의 시신을 놓고 통곡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산골에서 갑자기 일을 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기만 하던 여인은 사람을 만나자 염치불구하고 매달려 통사정을 하였고 김삿갓은 어쩔 수 없이 팔자에 없는 남의 초상을 치러 줄 수밖에 없었다.

 

거적에 말아 지게로 저다 묻어 주는 초라한 장사였지만 밤새도록 넋두리하던 청상과부의 애간장을 녹이는 사연들은 그대로 글로 써서 亡人에게 전해 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김삿갓은 붓을 들어 喪主의 치마자락에 輓詞를 쓴다.

 

어디로 가오. 어디로 가오.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자식들

모두 다 버리고 어디로 가오.

 

歸何處 歸何處

三生瑟 五采衣

都棄了 歸何處

 

누가 알리오. 누가 알리오.

칠흑 같이 어둡고 긴긴 밤에

홀로 흐느끼는 이 슬픔을 누가 알리오.

 

有誰知 有誰知

黑漆漆 長夜中

獨啾啾 有誰知

 

어제나 오시려오. 언제나 오시려오.

수많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이 한번 가시면 언제 다시 오시려오.

 

何時來 何時來

千疊山 萬重水

此一去 何時來

 

만장까지 써서 낫도 코도 모르는 사람의 장사를 지내 준 후에 젊은 과부와 어린 아이들을 뒤로 하고 다시 홀로 산길을 걸어오자니 인생이 너무도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불경(佛經)에 나오는 를 입 속으로 외우며 한 조각구름처럼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었다.


인생은 어디로부터 오며

죽어서는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삶이란 한 조각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구름이 사라지는 것

뜬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으니

삶과 죽음도 또한 이와 같으리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

 

13. 서까래는 굽고 처마는 땅에 닿고(曲木爲椽詹着塵)

 

김삿갓이 길을 가다가 이번에는 단칸방 오두막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다. 아들을 셋이나 두었지만 모두 중이 되어 나가고 두 늙은이만 살고 있다는 이 집은 세 사람이 들어앉기도 비좁은 방이지만 주인 내외는 기꺼이 쉬어 갈 것을 허락(許諾)한다.

 

고마운 마음에 허리를 굽히고 방으로 들어 왔지만 처마 끝에 부딪쳐 이마에 혹이 달렸고 지금은 다리를 꼬부리고 누웠지만 잠이 쉽게 오지 않는다. 평소 남에게 허리를 구부리기 싫어하는 그였지만 오늘 밤은 방이 하도 좁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서까래는 굽고 처마는 땅에 닿고

방은 좁고 좁아 겨우 몸을 넣었네.

허리 굽히기를 평생 싫어했건만

이 밤만은 다리조차 펼 수가 없구나.

 

曲木爲椽?着塵

其間如斗僅容身

平生不欲長腰屈

此夜難謀一脚伸

 

익살맞은 시 한 수를 읊조리며 오랫동안 궁싯거리다가 그런 대로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눈을 떠보니 주인은 밖에 나가고 할머니가 부엌에서 아침을 짓는지 쥐구멍으로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쑥대와 띠풀로 엮은 창문은 아침 햇살이 비쳤는데도 어둡기만 하였다. 그래도 할머니가 아침상을 내왔는데 비록 꽁보리밥이지만 할아버지가 일찍 나가 따온 호박으로 국을 끓이고 감자찌개까지 올라있었다.


쥐구멍 연기로 방안은 칠흑 같은데

창문마저 어두워 새벽을 모르겠소.

그래도 비를 피해 옷을 안 적셨기에

떠나는 인사만은 정중히 드리오.

 

鼠穴烟通渾似漆

蓬窓茅隔亦無晨

雖然兎得衣冠濕

臨別慇懃謝主人

 

14. 세상에 누가 훈장을 좋다고 하던가(世上誰云訓長好)

 

가끔 수모를 당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편히 쉬어 갈만 한 곳은 역시 서당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김삿갓은 서당을 찾았다. 초빙(招聘)해 온 훈장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던 이 집 주인은 김삿갓을 만나자 그의 재주를 알아보고 며칠을 환대(歡待)하며 보내 주지 않았다.

 

오랜만에 사람대접을 받으며 쉬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한사코 훈장을 맡아 달라는 데는 딱 질색이었다.

 

자유분방(自由奔放)한 시인에게 훈장이란 가당치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훈장의 고리타분한 신세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세상에 누가 훈장을 좋다고 하던가.

연기 없는 속 불이 저절로 타 오르네

하늘천 따지 하는 동안 청춘은 가고

부다 시다 하다 보면 머리가 세네.

 

世上誰云訓長好

無烟心火自然生

曰天曰地靑春去

云賦云詩白髮成

 

정성껏 가르쳐도 칭찬 듣기 어렵고

자리만 잠시 떠도 비난 받기 일쑤다.

천금 같이 귀한 자식 훈장에게 맡겨 놓고

잘못하면 매질하라는 부탁 진정이런가.

 

雖誠難聞稱道語

暫離易得是非聲

掌中寶玉千金子

請囑撻刑是眞情

 

답답한 심정을 시로써 토해내면서 따분한 감정을 떨쳐 버리기 위하여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내일 아침엔 슬며시 떠나야겠다고 작정을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동산 위에는 완월정(玩月亭)이라는 아담한 정자가 이었다. 날은 이미 저물어 해는 지고 둥근 달이 돋아 오르고 있는데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한 처녀가 홀로 누각(樓閣)에 올라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15. 꽃을 탐하는 미친 나비 한밤에 찾아드니(探花狂蝶半夜行)

 

누각에서 홀로 달을 보고 있는 처녀는 다름 아닌 서당 집 후원초당에 숨어서 글만 읽고 있다는 홍련(紅蓮)이라던 바로 그 규수(閨秀)였다. 김삿갓은 설레는 가슴을 억누르고 말을 걸어 보았지만 대답 없이 달만 바라보고 있는데 달빛 어린 그 눈이 유난히도 아름다워 보였다.

 

다락 위에서 만나 보니 눈이 아름다운데

정이 있어도 말이 없으니 정이 없는 것만 같도다.

 

樓上相逢視目明

有情無語似無情

 

김삿갓은 느낌을 그대로 즉흥시(卽興詩)로 읊으면서 규수가 초당에서 글을 읽는다지만 한시(漢詩)를 알아들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규수(閨秀)는 대번에 알아듣고 즉석에서 화답을 하지 않는가.


꽃은 말이 없어도 꿀을 많이 가지고 있는 법

달은 담장을 넘지 않고도 깊은 방에 찾아 든다오.

 

花無一語多情蜜

月不踰墻問深房

 

즉흥시(卽興詩)로 화답을 한 규수는 말없이 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깜짝 놀란 김삿갓은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저 장난삼아 읊은 시였는데 바로 화답하는 것도 놀랍지만 그의 시는 운향(韻響)조차도 정확하지 않은가.

 

그런데 글재주는 그렇다 치고 달은 담장을 넘지 않고도 깊은 방에 찾아 든다.”는 말은 또 무엇인가. 생면부지 외방남자에게 노골적으로 유혹(誘惑)해 오는 처녀라면 이미 처녀는 아닐 것이고, 그렇게까지 손을 내미는데 모른 체 한다면 이는 장부의 처사가 아닐 것이다.

 

꽃을 탐하는 미친 나비 한밤에 찾아드니

깊은 방에 숨은 꽃은 대답이 없네.

붉은 연꽃 따러 남포에 갔더니

동정호 가을 물결에 조각배 나부끼네.

 

探花狂蝶半夜行

百花深處摠無情

欲探紅蓮南浦去

洞庭秋波小舟驚

 

체면 불고하고 후원으로 스며든 김삿갓은 무작정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홍련은 잠시 당황한 빛을 보이다가 이내 진정하고 선생님은 시인 김삿갓이시지요하고 묻는다.

 

또 한 번 놀란 김삿갓이 어떻게 나를 알아보느냐고 하자 요즘 삿갓 쓴 방랑시인이 다닌다는 말과 그 시를 접하고 흠모(欽慕)하여 마지않았는데 오늘 선생의 시를 듣고 바로 알았노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오랜만에 여체를 가까이 하게 된 김삿갓은 기응포치(飢鷹抱雉)라는 말처럼 굶주린 매가 꿩을 덮치듯 폭풍우를 몰아친 후에 제정신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니 그 농염(濃艶)한 무르익음으로 보아 아무래도 홍련은 숫처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짓궂게도 이렇게 한마디 비아냥거려 보았다.

 

털이 깊고 속이 넓은 걸 보니

필시 다른 사람이 지나갔나 보구나.

 

毛深內闊

必過他人

 

당치 않은 수작이요 주책없는 타박이었다. 공짜로 외도하는 주제에 처녀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단 말인가. 홍련은 발연(勃然)히 노여워하면서 즉석에서 시로써 김삿갓을 호되게 나무랐다.


시냇가 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절로 자라고

뒷동산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절로 터진다오.

 

溪邊楊柳不雨長

後園黃栗無蜂坼

 

기막힌 반격에 김삿갓은 손을 바짝 들었다. 정중(鄭重)히 사과하고 다음날 아침 떠나면서 다시 용서(容恕)를 비는 마음에서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남겼다.

 

어젯밤에 미친 나비 꽃밭에서 잤건만

오늘 아침 훌쩍 떠남을 누구에게 원망하랴.

 

昨夜狂蝶花裡宿

今朝忽飛向誰怨

 

16. 날리는 눈송이는 춘삼월 나비 같고(飛來片片三春蝶)

 

이곳저곳을 방랑하는 사이에 어느덧 세월은 흘러 겨울에 접어들었다. 다행이 이번에도 사람을 알아보는 좋은 주인을 만나 며칠 동안 후한 대접을 받으면서 시문을 즐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간밥에 눈이 얼마나 내렸는지 산천초목(山川草木)이 모두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천황씨가 죽었는가. 인황씨가 죽었는가.

산과 나무가 모두 상복을 입었구나.

해님이 부고 듣고 내일이라도 문상을 오면

집집마다 처마 끝이 눈물을 흘리리라.

 

天皇崩乎人皇崩

萬樹靑山皆被服

明日若使陽來弔

家家簷前淚滴滴

 

혼자 휘갈기는 즉흥시(卽興詩)를 지긋이 내려다보던 주인이 다시 무릎을 친다. 하얀 눈을 상복에 견주고, 앞으로 녹아내릴 낙수를 태양이 조문(弔問)할 제 온 백성이 흘릴 눈물로 표현했으니 그 얼마나 기발(奇拔)한 발상이요 오묘한 비유인가.

 

주인은 다시 술을 내오지만 벌서 여러 날이 지났으니 이제 더는 머무를 염치(廉恥)가 없었다. 날씨가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데 어떻게 길을 떠나겠느냐면서 나그네를 붙잡아 두려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연방 술을 권해 오던 주인의 만류(挽留)를 정중히 사양하고 또 다시 홀로 눈길을 걸어간다.


날리는 눈송이는 춘삼월 나비 같고

내딛는 발밑에서는 오뉴월 개구리 소리

추 워서 못 간다고 눈을 핑계 대며

취중에 행여 머무를까 다시 술잔을 권하네.

 

飛來片片三春蝶

踏去聲聲五月蛙

寒將不去多言雪

醉或以留更進盃

 

나비처럼 날아드는 함박눈을 맞으며 쌓인 눈을 밟고 걸어가는 거름 거름마다 발밑에서 들려오는 뽀도독소리를 운치 있게 들으면서 티 없이 깨끗한 은세계를 걸어가는 김삿갓은 한사코 떠나지 말라고 붙잡던 주인의 후의에 마음 속 깊이 감사를 표했다.

 

17. 웃으며 대답 안 하니 마음 한가롭다(笑而不答心自閑)

 

어느덧 세월이 흘러 겨울이 가고 새봄이 왔다. 죽장망혜(竹杖芒鞋)로 대자연속을 휘적휘적 걸어가는 김삿갓의 가슴은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눈을 들어 사방을 살펴보니 시야를 가로막는 첩첩 태산들은 아직도 아침안개 속에 잠겨 있는데 저 멀리 산골자기에 흘러가는 물소리가 그를 반갑게 맞아 주는 듯 했다.

 

귀를 기우리니 멀고 가까운 산에서 처연하게 울어대는 새소리들이 서로 조화(調和)를 이루어 마치 하나의 교향악(交響樂)처럼 아름답게 들려온다.

 

이렇게 좋은 산수를 내버려 두고 내가 왜 어리석게도 속세에 얽매여 있었더란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불현듯 이태백(李太白)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이라는 시가 머리에 떠올랐다.


나더러 왜 깊은 산 속에 사느냐 묻기에

빙그레 웃고 대답 않으니 마음 절로 한가롭다

흐르는 물 위에 복사꽃 아득히 떠가니

여기가 바로 별천지인가 하노라.

 

問余何事栖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산속에 사는 이태백의 멋들어진 풍류를 속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리라 싶었다. 이태백에게는 산중문답(山中問答)’과 취향을 같이 하는 다음과 같은 시도 있다.


친구와 술을 나누는데 산에는 꽃이 피네

한 잔 한 잔 또 한 잔 술잔을 거듭한다.

내 술에 취해 잠이 오니 그대는 돌아가게

내일 또 오려거든 거문고 안고 오게나.

 

兩人對酌山花開

一盃一盃復一盃

我醉欲眠君且去

明朝有意抱琴來

 

시인과 음악가의 만남이요 꽃과 술의 만남이다. 신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초월하여 산천초목(山川草木)과 호흡을 같이하며 살아가면 그 사람이 바로 신선(神仙)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은 이태백을 시성(詩聖)이니 시선(詩仙)이니 하고 불러 오지 않던가.

 

얼마를 가다 보니 산속에 제법 넓은 연못이 하나 있었다. 연잎은 아직 피어나지 않았으나 연못가에는 어느새 수초가 푸르다. 연못 옆으로 지나노라니 이름 모를 새가 발소리에 놀라 멀리 날아가 버린다.

 

'새야 도망가지 마라. 너를 싫어할 내가 아니로다.' 이렇게 뇌까리며 마냥 걸어가노라니 안개가 자옥하여 마치 가랑비가 오는 것만 같았다. 이에 김삿갓은 고려조의 시인 이전(李瑱)의 산거우제(山居偶題)라는 시가 연상되었다.


텅 빈 산에 넘친 푸른빛 옷깃을 적시고

풀빛 어린 연못에서 흰 새가 난다.

지난 밤 숲 속에 껴 있던 짙은 안개가

한낮에 바람 불어 가랑비 되네.

 

滿空山翠滴人衣

草綠池塘白鳥飛

宿霧夜棲深樹在

午風吹作雨霏霏

 

산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안개는 안개대로 좋고, 가랑비는 가랑비대로 좋았다. 안개는 좀처럼 걷힐 줄을 모른다. 가도 가도 안개뿐인데 안개 저편에 푸른 산이 아득히 솟아올라 보인다.

 

18. 게으른 여자(惰婦)

 

김삿갓이 어느 날 두메산골 오두막집에서 또 하루를 묵었다. 그런데 그 집 주인은 선량(善良)하기 그지없었으나 젊은 아낙은 잠깐 보아도 게으르고 방자(放恣)하여 주부다운 점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아이에게 젖을 물린 채 낮잠을 자고 있는 여인은 빨래를 언제 해 입었는지 옷에서는 땟국이 흐르고 윗목에 놓인 베틀에는 먼지가 뽀얗다.

 

남편의 성화에 마지못해 부엌에 들어간 아낙은 그릇 깨는 소리만 요란하게 내더니 통옥수수 밥에 짠지 몇 쪽을 들이밀고는 건너 마을 굿 구경을 가서 다음날 아침이 되어도 돌아올 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조반은 주인이 직접 지었는데 밥도 밥이려니와 반찬도 어제 저녁보다는 훨씬 좋았다. 아침을 얻어먹고 주인마누라는 만나 보지도 못한 채 길을 나선 김삿갓은 타부(惰婦)라는 이름의 시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

 

병도 근심도 없고 목욕도 빨래도 안하여

십 년 전 시집올 때 옷을 그냥 입고 있네.

어린것 젖 물리고 낮잠 자기가 일이요

속바지 이 잡느라 처마 밑 햇빛만 좋아하네.

 

無病無憂洗浴稀

十年猶着嫁時衣

乳連褓兒謀午睡

手拾裙蝨愛?

 

걸핏하면 부엌에 그릇 깨기 일쑤요

베 짜기가 지겨워 머리를 긁다가도

이웃집 굿하는 소리만 들려오면

사립문 제쳐놓고 나는 듯이 달려가네.

 

動身便碎廚中器

搔首愁看壁上機

忽問隣家神賽慰

柴門半掩走如飛

 

게으른 여인을 소재로 하여 시를 읊조리다 보니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 오는데도 힘든 줄을 몰랐다. 모든 사람들의 생활양태가 제각기 천태만상(千態萬象)이어서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모두가 재미있어 보였다.

 

19. 처첩동방(妻妾同房)

 

이번에는 김삿갓이 운이 좋아서 과객접대(過客接待)를 잘하는 부잣집 사랑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런데 주인은 보이지 않고 객들만 둘러앉아서 질펀한 잡담(雜談)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야기인즉 주인영감은 복이 많아서 그 나이에 젊은 처첩을 거느리는데 치마폭을 떠나지 못해 항상 사랑보다는 안방을 좋아할 뿐 아니라 괴팍한 성미라서 그런지 고대광실(高臺廣室) 그 많은 방들을 다 놔두고 큰 마누라와 작은 마누라를 한 방에 데리고 산단다.

 

묵묵히 이야기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던 김삿갓은 하마터면 폭소(爆笑)를 터뜨릴 번했다. 불현듯 두 마누라를 좌우에 누여 놓고 자는 광경(光景)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즉석에서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단숨에 휘갈겼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이월 좋은 때에

마누라와 첩이 정답게 누워 있네.

원앙 베개에는 머리 셋이 나란히

비단 이불 속에는 팔이 여섯이로다.

 

不熱不寒二月天

一妻一妾最堪憐

鴛鴦枕上三頭竝

翡翠衾中六臂連

 

입을 벌려 웃으면 세 입이 자 같고

몸을 돌려 누우면 세 몸이 자 같으리.

동쪽에서 하던 일 끝나기가 무섭게

서쪽으로 옮겨가 또 한판 해야 하네.

 

開口笑時渾似品

側身臥處恰如川

然忽破東邊事

又被一擧打西邊

 

정음사(正音社)에서 발간한 김립시선(金笠詩選)’에는 이 시가 김삿갓의 시로 되어 있는데 또 일설에는 임란(壬亂)때 명신(名臣)이면서 풍자와 해학을 즐겼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피난길에서 본 어느 대감의 행태를 읊은 희시(戱詩)라고도 한다.

 

20. 숲속의 새소리야 무슨 수로 그릴꼬(其於林下鳥聲何)

 

정처 없이 발길을 옮겼다고는 하지만 북으로북으로 걸음을 거듭한 김삿갓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금강산(金剛山)에 도착하였다. 산수를 좋아했던 옛 선비들이 그토록 황홀(恍惚)해하면서 찬탄(贊嘆)해 마지않았던 바로 그 금강산이다.

 

산길을 걸어가노라니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산과 산, 물과 물, 소나무와 바위뿐이건만 어디를 보아도 절경이 아닌 곳이 없어서 그의 머릿속에서는 저절로 시 한 수가 그려지고 있었다.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바위와 바위를 돌고 도니

물과 물, 산과 산이 한데 어우러져 가는 곳마다 기이하구나

 

松松栢栢岩岩廻

水水山山處處奇

 

옛날의 시인들은 좋은 경치를 만나면 숫제 미쳐 버렸던 모양이지만 그런 점에 있어서는 당시의 시인이라고 해서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김삿갓은 눈앞에 펼쳐지는 경치에 도취(陶醉)하여 자기도 모르게 또 한 수를 내 뿜었다.

 

한 걸음 걷고 두 번 돌아보고 세 걸음에 다시 스네.

푸른 산 흰 바위 사이사이 꽃이로다.

화공을 불러다가 이 경치 그리게 한들

숲 속의 새소리야 무슨 수로 그릴꼬.

 

一步二顧三步立

山靑石白間間花

若使畵工摸此景

其於林下鳥聲何

 

사람들은 좋은 경치(景致)를 보면 한 폭의 그림 같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잘 그린 그림이기로서니 어찌 실경(實景)을 따르겠는가. 설사 실경을 그대로 그려 낸다하더라도 물소리 새 소리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으랴. ‘기어임하조성하(其於林下鳥聲何)’ 과연 명구(名句)라는 생각이 든다악암(岳岩)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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