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岳岩漢字屋

甲辰年 새해 하시는 일들이 日就月將하시고 乘勝長驅.하시고 萬事亨通 하세요!!!

반응형

김삿갓 전기(金笠傳記) 5


41. 벼룩(蚤)


시를 읊는 사이에 이란 놈은 옷깃 속으로 기어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장단지가 바늘로 찔리는 듯이 따끔해 온다. 말할 것도 없이 벼룩이란 놈이 쏘아 대고 있는 것이다. 김삿갓은 은근히 화가 동해 이번에는 '벼룩' 이란 제목으로 즉흥시(卽興詩)를 이렇게 읊었다. 


      대추씨 같은 꼴에 날래기는 대단하다

      이하고는 친구요 빈대와는 사촌이라

      낮에는 죽은 듯이 자리 틈에 숨었다가

      밤만 되면 이불 속에서 다리를 물어뜯네.


      貌似棗仁勇絶倫

      半蝨爲友蝎爲隣

      朝從席隙藏身密

      暮向衾中犯脚親


      주둥이가 뾰족하여 물리면 따끔하고

      펄떡펄떡 뛸 때마다 단꿈을 놀래 깬다.

      날이 밝아 살펴보면 온몸이 만신창이

      복사꽃이 만발한 듯 울긋불긋하구나.


      尖嘴嚼時心動索

      赤身躍處夢驚頻

      平明點檢肌膚上

      剩得桃花萬片春


부처님께서는 살생을 하지 말라고 했으니 내 어찌 너를 죽이겠느냐. 나의 피를 마음껏 빨아 먹어라. 그것만이 내가 이 세상에서 너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자비심(慈悲心)일 것이다. 김삿갓은 이와 벼룩에게 시달리는 고달픔을 이렇게 시로써 달래고 있었다.


42. 세월은 영원한 나그네 (光陰者百代之過客) 


며칠 전만해도 산길을 걸으려면 등에 땀이 흘렀다. 그런데 가을이 어느새 산속 깊이 숨어들었는지, "천지는 만물의 여관(旅館)이요, 세월은 영원한 나그네(天地者萬物之逆旅 光陰者百代之過客)"라 했던가. 거침없이 흘러가는 것이 세월인 듯싶었다.


얼마를 걸어오다 보니 40 가량 되어 보이는 사나이가 한 무덤 앞에 엎드려 통곡(痛哭)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정 많은 김삿갓이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그에게 다가가 사연을 물었더니 얼마 전에 자식 놈이 죽었는데 이번에는 또 마누라가 죽었단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위로의 말을 건네 보았지만 지금 그에게 무슨 말을 들려준들 위로가 될 수 있으랴. 슬픈 사람은 그저 마음껏 울게 내버려 두는 것이 최상의 위로(慰勞)일 것 같아 물끄러미 보라보면서 혼자 마음속으로 시 한 수를 읊어 본다. 


      아들이 죽은 후에 또 아내를 묻으니

      찬바람 해거름이 처량하기 그지없네.

      돌아오니 집안은 절간처럼 쓸쓸한데

      찬 이불 움켜 안고 새벽닭을 지새우오.


      哭子靑山又葬妻

      風酸日薄轉凄凄

      忽然歸家如僧舍

      獨擁寒衾坐達鷄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끊임없이 교차(交叉)하는 것이 인생이고 보니 어느 누구인들 슬픈 일이 노상 없을 수 있으랴. 그러나 아들과 아내가 연달아 죽은 것은 슬픈 일 중에서도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43. 누각에 올라 보니 구천 하늘에 닿은 듯하고(人登樓閣臨九天)  


함흥(咸興)은 역사의 고장인지라 그 옛날 이성계(李成桂)가 살았다는 귀주동(歸州洞)의 경흥전(慶興殿)을 비롯하여 근처에 있는 문소루(聞韶樓), 선경루(仙景樓), 관풍정(觀風亭)을 돌아보고 성천강(成川江)을 멀리 눈 아래 굽어보며 성관산(城關山) 언덕 위에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구천각(九天閣)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이 솟았다 하여 구천각이라 했다지만 

저 멀리 굽이굽이 흘러가는 성천 강물도 운치가 있거니와 

성천강에 가로 놓여 있는 萬歲橋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다리의 길이가 무려 150여 간, 그야말로 하늘의 무지개를 연상케 하는 환상의 다리였다. 


험한 산들은 바다로 뻗어 나오다가 발을 멈추며 들을 이루었고 성천강(成川江) 푸른 물 위에는 두어 척의 놀잇배가 떠돌고 있는데 만세교(萬歲橋)의 기나긴 다리 위로는 어떤 풍류객(風流客)이 말을 타고 한가롭게 건너오고 있지 않는가.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風景)을 접한 김삿갓이 어찌 시 한 수가 없었으랴. 


        누각에 올라 보니 구천 하늘에 닿은 듯하고 

        말 타고 긴 다리 건너니 만세를 밟는구나.

        산은 들이 좁을까 하여 멀리 멀리 나누어 섰고

        물은 배가 다닐까두려워하여 얕게얕게 흐르네.


        人登樓閣臨九天 

        馬渡長橋踏萬歲

        山疑野狹遠遠立

        水畏舟行淺淺流


        산세는 용이 서리고 범이 도사린 형국이요

        누각은 난새가 날고 봉황이 나래 편 형세일세.


        山意龍盤虎踞形

        樓閣鸞飛鳳翼勢


이하 두 줄은 탈구(脫句)가 되어 전하지 않는다고 하니 김삿갓 시 중에서도 더욱 돋보이는 듯싶은 이 시가 온전히 전하지 못함을 아쉬워한다.


44. 청송(靑松)은 듬성듬성 입(立)이요


구천각(九天閣)에서 시 한 수를 읊고 내려온 김삿갓은 저 멀리 잔디밭 위에 네 사람의 늙은이가 한 기생을 데리고 술을 마시고 있는 광경(光景)을 발견하고 술 생각이 간절(懇切)하여 염치 불구하고 달려가 술 한 잔을 청했다.


젊은 기생을 희롱(戲弄)하며 술잔을 기울이던 늙은이들은 그의 행색(行色)을 훑어보고는 점잔은 어른들이 시회(詩會)를 하는 자리에 함부로 끼어들어 파흥(破興)을 하느냐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그 일갈(一喝)에 순순히 물러설 김삿갓도 아니었고 그들의 작태(作態)를 보아 선비다운 점을 찾아 볼 수도 없었다.


내 비록 사서삼경(四書三經)은 못 읽었어도 천자문(千字文)은 읽었으니 한문(漢文)으로 못하면 언문(諺文)을 섞어서라도 한 수 짖겠다며 술부터 달라고 너스레를 떤다. 늙은이들은 언문도 글이냐고 일축(一蹴; ① 단번에 거절하거나 물리치다 ② 제안 따위를 단번에 거절하거나 물리침)했지만 기생(妓生)이 재미있다는 듯이 늙은이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술을 거듭 따르며 언문시(諺文詩)를 한번 들어보자고 조른다. 


       靑松은 듬성듬성 立이요

       人間은 여기 저기 有라

       所謂 어뚝삐뚝 客이

       平生 쓰나 다나 酒라


머리가 다 빠진 늙은이들이 시를 짓는답시고 허구한 날 모여서 음담패설(淫談悖說)이나 하고 술이나 퍼 마시는 행태(行態)를 은연중에 비꼬아 준 것이었으나 늙은이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코웃음만 치는데 기생만이 재미있다는 듯이 배꼽을 잡는 것이었다. 


김삿갓이 술이 거나해지긴 했지만 좌중을 둘러봐도 시를 화답(和答)할만한 위인은 없는 듯 하여 짐짓 일어서려 하는데 원생원(元生員)이라는 이가 '술을 얻어먹었으면 술값을 하고 가야지 그까짓 언문시(諺文詩)를 시라고 던져 놓고 가려느냐.' 고 채근하여 어쩔 수 없이 다시 한 수를 내리 갈겼다.


      해가 뜨니 원숭이가 들판에 기어 나고

      고양이가 지나가니 쥐가 모두 죽는다.

      황혼이 되니 모기가 처마 밑에 모이고

      밤이 오니 벼룩이 자리에서 쏘아 대누나.


      日出猿生原(원생원)

      猫過鼠盡死(서진사)

      黃昏蚊簷至(문첨지)

      夜來蚤席射(조석사)


네 명의 늙은이들이 서로 불러대는 별칭(別稱)을 모두 인용하여 원숭이(猿), 쥐(鼠), 모기(蚊), 벼룩(蚤)과 같은 못난이들이라고 비꼬아 준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김삿갓은 시를 써 놓고는 간략한 인사를 남기고 기생의 만류(挽留)를 뿌리치며 유유히 걸어 내려오면서 시를 읽어 보고 노발대발(怒發大發)할 그들의 모습(模襲)을 그려 보며 빙그레 웃었다.


45. 사당마을의 사당이 어디냐고 물으니(祠堂洞裡問祠堂)


관북(關北)의 오지 산골에도 사당동(祠堂洞)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산골 부자가 사당만 덩그렇게 지어놓고 양반행세를 하고 있었나 보다. 주위에서는 조상이 대광보국(大匡輔國)을 지낸 강좌수(姜座首)댁이라고 알려졌는데 대광보국이란 품계는 정일품(正一品)의 가장 높은 지위로서 이 산골에 그런 집안이 있을 리 없지만 김삿갓에게는 그런 것을 따져 볼 계제가 아니었다.


우선, 하루 밤 신세를 지려고 찾아가서 주인을 찾았다. 머리 모양이나 복식(服飾)이 모두 괴이한 젊은이가 나왔다가 얼른 문을 닫고 들어가더니 유건(儒巾)을 쓴 육십객 노인이 나와서 '우리 집에는 잡인을 재울 방이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 보라' 는 한 마디를 남기고 대문을 닫아걸고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문틈으로 이쪽을 살펴보고 있었다. 


       사당마을의 사당이 어디냐고 물으니

       보국대광을 지낸 강씨 가문이라네.

       조상의 유풍은 불교일시 분명한데

       못난 자식은 오랑캐 교육을 받았구나.


       祠堂洞裡問祠堂

       輔國大匡姓氏姜

       先祖遺風依北佛

       子孫愚流學西羌


       주인은 손님 내쫓고 기웃기웃 엿보는데 

       길손은 문 앞에서 석양을 탄식한다.

       좌수별감도 분에 넘친 감투이고

       기병이나 졸개라야 격에 어울릴 것을.


       主窺簷下低冠角

       客立門前歎夕陽

       座首別監分外事

       騎兵步卒可當當


즉흥시(卽興詩) 한 수로서 분풀이를 해주고 나니 그제야 불쾌(不快)한 기분이 한결 가벼워지기는 했지만 이 한 밤의 잠자리가 아득하였다. 그러니 어찌하랴. 발길 닿는 대로 아무 집으로나 찾아 드는 수밖에 없었다.


46. 사람이 무슨 죄겠소, 가난이 죄지요(人間無罪罪有貧) 


사당동 강좌수 집에서 거절을 당한 김삿갓은 발길 닫는 대로 걷다가 길가의 아무 집으로나 찾아 들 수밖에 없었다. 퍽 가난해 보이는 오두막집이었지만 다행하게도 주인은 어서 들어오라고 기꺼이 맞으면서 불편할 잠자리와 입에 맞지 않을 음식만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윽고 저녁상이 나왔는데 밥상 위에 놓인 것은 삶은 감자 한 바가지와 호박찌개 한 그릇이 전부였다. 자기들은 이렇게 감자만 먹고 산지가 퍽 오래 됐다면서 손님에게까지 이렇게 대접해서 미안하다고 무척 민망(憫惘)스러워 하는 기색이었다.


인정이란 마음 쓰기에 달인 것이지, 돈이 있고 없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김삿갓은 이날 더욱 절실(切實)하게 깨달았다. 그러기에 그는 그날 밤 새우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그 집을 떠나면서 주인에게 다음과 같은 위로의 시를 한 수 써 주었다.


         돈이 많으면 신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무슨 죄겠소. 가난이 죄지요.

         빈부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부자와 가난은 돌고 도는 것이라오.


         地上有仙仙見富

         人間無罪罪有貧

         莫道貧富別有種

         貧者還富富還貧


김좌수 집에서 진수성찬(珍羞盛饌)을 얻어먹은 것보다도 이 댁에서 감자를 대접 받은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는 김삿갓은 주인에게 감사와 위로의 말을 누누이 전하고, 전날 구천각(九天閣) 아래에서 만났던 기생 가련(可憐)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만세교(萬歲橋)를 향하여 다시 발길을 옮긴다.


47. 이름이 가련이오 얼굴도 가련한데 (名之可憐色可憐)


기생 가련(可憐)의 집은 만세교(萬歲橋)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기슭에 있었다. 집은 큰 편이 아니었지만 에는 매화가무도 두 세 그루 있어서 매우 아담한 인상이었다. 방안으로 들어오니 문갑 위에는 이태백(李太白)과 왕유(王維)의 시집이 놓여 있고, 벽에는 왕유의 춘계문답(春桂問答)이라는 족자가 걸려 있었다.


      봄 계수나무에게 묻노니

      복사꽃 오얏꽃 한창 향기로워

      가는 곳마다 봄빛이 가득한데

      그대만은 왜 꽃이 없는가.


      問春桂

      桃李正芳菲

      年光隨處滿

      何事獨無花


      계수나무 대답하되 

      봄의 그 꽃들 어찌 오래 갈 건가

      낙엽이 우수수 가을이 되면

      나 홀로 꽃 필 것을 그대 모르는가.


      春桂答

      春花詎幾久

      風霜搖落時

      獨秀君不知

 


김삿갓은 족자를 보고 가련(可憐)의 심성을 대략 짐작(斟酌)할 수 있었다. 그래서 술상을 들고 들어온 가련(可憐)에게 다음과 같은 즉흥시(卽興詩)를 들려주었다.


      이름이 가련이오 얼굴도 가련한데

      가련은 마음조차 또한 가련하구나.


      名之可憐色可憐

      可憐之心亦可憐


가련(可憐)은 자기는 시를 짓지는 못한다면서 왕유(王維)의 송춘사(送春詞)라는 시를 낭랑한 목소리로 읊어 보이고 나서 술을 가득 부어 공손히 권한다.


      사람은 날마다 헛되이 늙어 가는데

      봄은 해마다 어김없이 돌아오누나.

      마음껏 즐기세 단지에 술이 있으니

      꽃이 진다고 아까워해서 무엇하리.


      日日人空老

      年年春再歸

      相歡有尊酒

      不用惜花飛


술과 시와 미색(美色)에 취한 김삿갓은 흥이 도도하여 역시 왕유의 시를 한 수 읊어 화답한다.


      말에서 내려 술을 권하며

      어디로 가느냐고 그대에게 물으니

      세상 일 모두 뜻과 같지 않아

      남산에 돌아가 누우려 한다네.


      下馬勸君酒

      問君何所之

      君言不得意

      歸臥南山睡


이처럼 두 사람은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주거니 받거니 하며 끝없이 마시다가 김삿갓은 마침내 그 자리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48. 젊은 몸에 기생을 품으니 돈도 티끌 같고(靑春抱妓千金芥) 


가련(可憐)의 방에서 술에 취하여 쓰러진 김삿갓은 정신없이 자다가 목이 타올라 깨어나서 원앙금침(鴛鴦衾枕) 속에 누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저으기 놀랐다. 밤이 얼마나 깊었는지 모르지만 한편 구석으로 밀어 놓은 술상 위에서는 아직도 등잔불이 방안을 희미(稀微)하게 비춰주고 있는데 바로 옆에는 가련(可憐)이 짐짓 잠들어 누어있는 것이 아닌가. 


굶주린 매가 꿩을 덮친다(飢鷹抱雉)는 말과 같이 김삿갓인들 오랫동안 금욕생활(禁慾生活)을 해 온 터에 맹렬히 용솟음쳐 오르는 욕망(慾望)이 없을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선비의 체통은 지켜야겠기에 잠시 욕망을 누르고 조용히 가련(可憐)을 품어 안으며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한 수 읊었다.


      젊은 몸에 기생을 품으니 돈도 티끌 같고

      이 밤에 술까지 나누니 만사가 구름 같네.

      날아가는 기러기 물을 따라 내려앉듯

      산속을 지나는 나비 꽃을 피하기 어렵구려.


      靑春抱妓千金芥

      今夜當樽萬事雲

      鴻飛遠天易隨水

      蝶過靑山難避花


짐짓 잠에서 깬 듯 그의 품안으로 파고들던 가련(可憐)은 시를 듣고 나서 퍽이나 감격스러운 듯 '노류장화(路柳墻花)의 몸을 위해 그토록 귀한 시를 읊어 주시니 영광스럽기 그지없다' 고 아뢴다. '내가 시를 읊었으니 자네는 화답이 있어야할게 아니냐.' 고 채근하는 그에게 가련(可憐)은 '저는 시를 좋아는 하지만 지을 줄은 모르니 옛날 기생 소홍(小紅)의 시를 한 수 읊어 올리겠다.' 고 했다.


      찬바람 눈보라가 주렴에 몰아쳐서

      기나긴 밤 잠 못 이루니 안타깝구나.

      이 몸이 무덤 되면 누가 찾아 줄는고

      가엽고도 외로운 한 송이 꽃이라오.


      北風吹雪打簾波

      永夜無眠正若何

      塚上他年人不到

      可憐今世一枝花


김삿갓은 그 시를 듣자 가슴이 찡해 오는 것을 느꼈다. 기녀들은 겉으로는 퍽 화려(華麗)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무척 고독(孤獨)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가련(可憐)은 '어제까지는 저도 외로운 여인이었지만 이제는 누구보다도 행복(幸福)하옵니다.' 하면서 다시 세차게 파고든다. '허어--- 자네가 누구의 간장을 녹이려고 이러는가.' 하고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김삿갓은 가련(可憐)의 가는 허리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49. 그 모습 수줍달가 애교롭달가(半含嬌態半含羞)


가련(可憐)은 김삿갓이 언제 떠나갈지 몰라 불안하므로 그를 오래도록 붙잡아 두기 위하여 날마다 그가 좋아할 만한 경치 좋은 곳을 찾아 관광안내에 나섰다. 가련(可憐)은 기녀(妓女)답지 않게 흥청거리는 사내를 백안시(白眼視)하며 고고하게 살아온 여자다. 그러나 김삿갓만은 그의 시에 반하여 미칠 듯이 좋아하였다. 


김삿갓도 가련(可憐)을 사귀어 볼수록 그에 대한 정이 깊어 갔다. 어느 날 밤에는 마루에 나란히 앉아 달을 바라보며 인생(人生)을 논하고 시를 말하다가 '자네는 나하고 있는 것이 그렇게도 좋은가.' 하고 물었더니 가련(可憐)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웃음 지은 채 비녀만 매만지는 것이었다.


     창가에 마주 앉아 희롱을 하다보니 

     그 모습 수줍달가 애교롭달가

     그토록 좋으냐고 조그맣게 물으니

     금비녀 매만지며 고개만 끄덕이네.


     對月紗窓弄未休

     半含嬌態半含羞

     低聲暗問相思否

     手整金釵笑點頭 


순간적으로 흘러나오는 시였지만 과연 김삿갓이었다. 반함교태반함수(半含嬌態半含羞)라. 동양미인(東洋美人)의 아름다운 자태(姿態)를 이처럼 멋지게 그려 낸 시가 또 다시 있을까. 그 시를 들은 가련(可憐)은 방으로 달려가 지필묵(紙筆墨)을 가지고 나와서 그 시를 바로 써 달라며 자기가 써서 걸었던 춘계문답(春桂問答) 족자를 떼어 버리고 삿갓어른의 시와 친필(親筆)을 걸어 놓고 싶다고 했다.


'이 사람아! 글씨는 자네 글씨가 더 좋은데 그 좋은 족자(簇子)를 왜 떼어 버리겠다는 것인가.' 하고 물으니 '그 족자는 아무 사연도 없는 무의미한 것이옵니다. 삿갓 어른의 친필(親筆)과 시를 두고두고 감상(鑑賞)하고 싶사옵니다.' 하고 대답한다. 


'허허-- 자네가 갈수록 사람의 간장을 녹여내네그려.' 하고 김삿갓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일필휘지(一筆揮之)했으니 그 필적 또한 천하명필(天下名筆)이었다.


50. 하얀 눈가루를 누가 하늘에 흩뿌렸는가(白宵誰飾亂灑天)


김삿갓은 날이 갈수록 가련(可憐)에게 정이 깊어 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기녀에게 몸을 묶어 버릴 생각은 추호(秋毫)도 없어 자기를 스스로 반성해 보기도 했다. 


‘병연(炳淵)아! 너는 조상의 죄와 네가 지은 죄를 모두 속죄하기 위하여 처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온 몸이 아니더냐. 그러한 네가 이제 와서 기녀(妓女)의 품에서 방탕을 일삼고 있다면 너 또한 한낱 무뢰한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김삿갓은 그러한 죄책감(罪責感)을 느끼면서도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세월은 흘러가서 어느덧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었다. 어느 날 새벽에 무심코 창을 열어 보니 산과 들이 온통 흰 눈으로 뒤덮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김삿갓은 길을 떠나야 한다는 충동(衝動)을 느끼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하얀 눈가루를 누가 하늘에 흩뿌렸는가.

      눈이 부시도록 다락 앞이 밝구나.

      모든 골자기에 달빛이 어린 듯하고 

      산들은 옥으로 깎은 듯 그 모습 그윽하다.


      白宵誰飾亂灑天

      雙眸忽爽霽樓前

      鍊鋪萬壑光斜月

      玉削千峰影透烟


      배를 타고 剡溪로 숨은 사람을 찾아가    

      반가운 그 사람과 글 토론이나 할까나

      솜씨 좋은 문장가가 이 좋은 경치보고 나면

      그림 같이 멋들어진 시 백 편은 읊으리라.


      訪隱人應隨剡掉

      懷兄吾亦坐講筵

      文章大手如逢此

      寫景高吟到百篇


      *섬계는 옛날 대문장가 戴逵가 숨어 살던 곳.


뒤미처 잠에서 깨어나 창밖의 은세계를 내다보며 좋아하던 가련(可憐)은 무심코 김삿갓이 쓰고 있는 시를 내려다보다가 가슴이 철렁하였다. 거기에는 김삿갓이 길을 떠나려는 심정이 여실히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악암(岳岩)


.... 다음에 계속 ....

반응형
반응형

공유하기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