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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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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전기(金笠傳記) 7부


61. 닭(鷄)


김삿갓은 오랜만에 아늑한 가정(家庭)의 즐거움을 맛보고 있었다. 따뜻한 아내의 보살핌을 받는 것도 즐거움이려니와 어린 아들과 어울려 시를 지어 보는 것도 처음이요 어려운 서어(詩語)들을 하나하나 이해시키는 것도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었다.


어느 날, 익균(翼均)과 함께 앞마당을 거닐고 있는데 많은 암탉을 거느린 수탉이 날개를 탁탁 치더니 목을 길게 늘이고 ‘꼬끼오’ 하고 울어 대고 있었다. 이것을 본 익균(翼均)이 닭에 대한 시를 한 수 지어 달라고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었다.


     새벽을 알려 줌은 수탉의 특권인가

     붉은 벼슬 푸른 발톱 잘도 생겼구나.

     달빛이 질 때면 자주 자주 놀래다가

     붉은 햇살 비쳐오면 번번이 울어 대네.


     擅主司晨獨擅雄

     絳冠蒼距拔於叢

     頻驚玉兎旋藏白

     每喚金烏卽放紅


     싸우려고 부릅뜨면 눈에서 불이 나고

     울려고 퍼덕일 땐 날개에서 바람난다.

     오덕을 갖췄다고 세상에서 이름 높고

     옛날에는 도도에서 하늘 높이 울었다네.


     欲鬪怒瞋瞳閃火

     將鳴奮鼓翅生風

     名高五德標於世

     逈代桃都響徹空


금방 써 내린 시를 아들에게 내밀며 한참 설명을 하였지만 아들은 이해가 안 되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월(月)자도 일(日)자도 안 들었는데 달이니 해니 하는 설명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반문한다. 어린 아들로서는 당연한 질문이라고 여긴 김삿갓은 시어(詩語)의 유래와 설명을 덧붙인다.


‘예부터 달에는 옥토끼가 살았고 해에는 발이 셋 달린 금까마귀가 살았다는 전설(傳說)이 있어서 달은 옥토(玉兎)라 하고 해에는 금오(金烏)라는 별명이 붙었단다.’ 


설명을 들은 익균(翼均)은 겨우 납득(納得)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에는 닭에 오덕(五德)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수탉의 머리에는 벼슬이 있으니 이는 '文'을 나타냄이요, 

발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있으니 이는 '武'를 나타냄이다. 

적을 만나면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는 '勇'이요, 

먹이를 보면 서로 알려 함께 먹으니 이는 '仁'이며, 

때가 되면 어김없이 알리니 이는 '信'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닭은 '문무용인신(文武勇仁信)' 오덕(五德)을 갖췄다고 하는 것이란다.'  


그러면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도도(桃都)란 곳은 어디냐고 또 묻는다. 김삿갓은 이렇게 대답(對答)한다. 


‘그것도 역시 전설에서 나온 것인데, 예부터 머나먼 동쪽 나라에 도도산(桃都山)이라는 산이 있고, 그 산에는 도도(桃都)라는 나무가 있어서 높이가 하늘에 닿았는데 그 위에 천계(天鷄)가 살면서 새벽이 되면 먼저 울고 지상(地上)의 닭들이 이를 따라 운다고 하는데서 유래(由來)한 것이라.’ 고 ...


62. 소(牛)


익균(翼均)의 머리가 남달리 총명한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날부터는 어린 아들에게 시를 직접 가르쳐 주기까지 하였다. 언젠가는 아들과 함께 시골 길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남의 집 외양간에 늙은 소가 있는 것을 보고 시를 지어 보라기에 다음과 같이 읊었다.


       수척한 뼈 앙상하고 털은 닳아 빠졌는데

       곁엔 늙은 말과 구유 하나 나눠 쓰네.

       거친 들판 달구지 끌던 옛날이 아득하고 

       머슴 따라 청산 노닐던 일도 꿈결 같구나.


       瘦骨稜稜萬禿毛

       傍隨老馬兩分槽

       役車荒野前功遠

       牧竪靑山舊夢高


       무거운 쟁기 끌지 못해 밭머리에 놓였건만

       채찍을 하도 맞아 움직이기 싫구나.

       불상타 네 신세여 달 밝은 긴긴 밤에 

       평생토록 부질없는 수고로움 돌이켜 생각하네.


       健耦常疎閑臥圃    

       苦鞭長閱倦登皐

       可憐明月深深夜

       回憶平生謾積勞  


시를 지어 놓고 아들에게 들려주니 익균翼均은 늙은 소에 대한 묘사가 기막히게 잘되었다고 말하며 크게 기뻐하였다. 소년은 아버지의 풍부한 지식(知識)과 보는 것마다 거침없이 시로 읊어 내는 재주에 놀라며 새삼스럽게 존경(尊敬)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평소에 남의 칭찬이나 비방 같은 것은 전혀 개의치 않고 살아왔었다. 그러나 아들의 칭찬만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어떤 비방(誹謗)을 받아도 좋으나 어린 아들에게만은 좋은 아버지로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63. 제비(燕), 참외(眞瓜) 


김삿갓은 어느 날 마당가를 서성이며 바람을 쏘이다가 때마침 빨랫줄에 제비가 앉아있는 것을 보고 시 한 수를 지었다. 무덥던 여름이 가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일기 시작하자 그의 가슴 속에는 깊이 도사리고 있던 방랑벽(放浪癖)이 다시 머리를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불어오는 동녘바람에 제비가 날아들어

       복숭아나무 아래로 옛집을 찾아오네.

       봄이 가면 너도 또한 멀리 날아가서

       봉숭아 꽃 피는 내년 봄을 기다리리.


       一任東風燕子斜

       桃李樹下訪君家

       君家春盡飛將去

       留待桃李後歲花


익균(翼均)이는 아버지의 심정(心情)은 헤아리지도 못하고 그저 해설(解說)만 들으면서 뛸 듯이 좋아하는데, 마누라가 소쿠리에 참외를 따 가지고 들어오다가 이 광경(光景)을 보고는 ‘네 아버지가 얼마나 잘난 양반(兩班)인지는 모르겠다마는 너 만은 제발 아버지를 닮지 마라.’하고 말한다.


아무리 훌륭한 아버지라도 남편으로서는 원망스럽기만 한 모양이었다. 마누라가 번번이 원성을 늘어놓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훌쩍 집을 나가서 10년이 넘도록 소식도 없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어떤 마누라가 그 남편을 원망(怨望)하지 않을 것인가.


김삿갓은 죄인이라도 된 듯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담담히 참외 하나를 집어 아내에게 권한다. 오래 만에 원망스럽던 남편에게서 따뜻한 정을 느낀 아내는 눈시울을 붉히며 참외를 받아 깎는데, 익균(翼均)이는 깎지도 않은 참외를 정신없이 먹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참외에 대한 시를 지어 달라고 보챈다.


        겉모양은 위장군과 흡사하고

        속마음은 연나라 태자를 닮았구나.

        너는 본시 땅 기운을 받아 태어났는데

        어째서 하늘처럼 둥글게 생겼느냐.



        外貌將軍衛

        中心太子燕

        汝本地氣物

        何事體天團


고사를 인용하여 지은 어렵고도 익살스러운 시였기 때문에 익균(翼均)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꼬치꼬치 캐묻고, 김삿갓은 알아듣기 쉽도록 자세히 설명을 한다.


‘그 옛날 한(漢)나라에 위청(衛靑)이라는 유명한 장수가 있었느니라. 그러기에 나는 참외빛깔이 푸른 것을 푸르다고 직선적으로 말하지 않고, 위장군(衛將軍)과 같다고 푸른 빛깔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란다. 그리고 중국춘추시대에 연(燕)나라 태자(太子) 중에 단(丹)이라는 이름을 쓰는 이가 있었단다. 그래서 참외 속이 붉은 것을 연나라 태자 같다고 간접 표현한 것인데, 이런 것들은 시를 짓는데 있어서 하나의 멋이란다.’


익균(翼均)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다음은 다 알겠다는 듯이 ‘참외는 땅의 기운을 받아 자랐기 때문에 모양새가 땅처럼 평평하게 생겼어야 옳을 것인데, 어째서 하늘처럼 둥글둥글하게 생겼느냐는 표현은 퍽 재미있네요.’하고 웃는다.


김삿갓은 어린 아들의 시 감상력(鑑賞力)에 거듭 놀라고 감격(感激)스러워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가슴 속은 미여지는 것만 같았다. 마누라는 아들이라도 장차 대과(大科)에 나가 장원급제(壯元及第)하기를 바라는 모양(模樣)이지만, 할아버지의 대죄(大罪)를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64. 다시 방랑길에(再走放浪路上)


가을은 시인의 마음을 까닭 없이 산란(散亂)하게 만드는 계절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을 가을이건만 시인에게 있어서는 번민의 계절이요, 애상의 계절인 것이다.  


‘조상에 대한 속죄(贖罪)로 한평생을 방랑객으로 살아가려던 내가 양심(良心)을 속여 가며 가족들과 함께 이렇게 안락(安樂)하게 살아가고 있어도 좋단 말인가.’


김삿갓은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 보며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산에 한번 들어가면 돌아오지 못하고

   벼슬을 좋아하는 사람은 조정에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다.


   山林之士往而不能反

   朝廷之士入而不能出


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산을 좋아할 줄도 모르는 무뢰한(無賴漢)에 불과 하더란 말인가? 이렇게 자탄하고 있을 무렵 오대산(五臺山) 상원암(上院庵)에서 찾아 왔다는 한 스님이 그를 따돌리려는 마누라에게 쪽지 한 장을 건네주고 돌아갔다. 


이를 눈치 챈 김삿갓이 쪽지를 감추려는 마누라를 구슬려서 건네받아 펼쳐 보니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지 않은가.


    물을 평지에 부으면 

    제각기 동서남북으로 흘러가듯이

    인생도 운명이 있는데 

    어이 가면서도 탄식이요 앉아서도 수심인가.  


    瀉水置平地 各自東西南北流

    人生亦有命 安能行歎後坐愁


    술을 마시며 스스로 용서하고 

    잔을 들어 떠나기 어려움을 노래하네.

    마음이 목석이 아닌 바에야 어찌 느낌이 없을쏘냐?

    소리를 삼키고 주저하며 감히 말을 못할 뿐이로다.


    酌酒以自寬 

    擧杯斷絶歌路難

    心非木石豈無感

    呑聲躊躇不敢言 


상원암(上院庵)에서 왔다는 노승(老僧)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는 김삿갓의 행동과 속마음까지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 듯


‘그대는 한평생 방랑의 길을 걸어갈 운명을 타고 났는데 

   무엇 때문에 방안에 들어앉아 홀로 고민하고 있느냐.’


고 꾸짖고, 술을 마셔가며 스스로를 위로해 보려는 그를 신랄(辛辣)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김삿갓은 결연(決然)히 떠날 결심을 하고, 아내에게는 ‘홍성에 가 계시는 어머님을 찾아 뵌 후에 서울로 올라가 형님과 그에게 양자 간 큰 아들 학균(鶴均)이를 만나보고 오겠노라.’고 적당히 둘러대고 다시 돌아올 기약 없는 방랑길에 오른다.


65. 자네가 지네(尺四蚣)


김삿갓이 집을 나섰지만 애초부터 홍성(洪城)으로 가서 어머니를 뵈올 생각은 아니었다. 자식으로서 당연히 어머니를 찾아뵙는 것이 도리이지만 어머니를 뵙고서는 차마 다시 방랑길에 오르지 못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집을 나선 그는 마누라와 자식 놈이 금방이라도 쫓아 올 것만 같아 무작정 산길을 달리다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어 서녘 하늘에 놀이 붉어오고 있었다. 이제부터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강원도(江原道)와 함경도(咸境道)를 구경하였으니 이번에는 발길을 남쪽으로 돌려 충청(忠淸), 전라(全羅), 경상도(慶尙道) 방면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서울을 거쳐 황해(黃海), 평안도(平安道)의 서북쪽으로 갈 것인가를 망설이던 그는 차마 어머니가 계시는 충청도(忠淸道)로 가지 못하고 서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얼마를 가다가 날이 저물어 잘 곳을 찾으려고 하니 비록 푸대접을 받는다 해도 역시 만만한 곳은 글방이었다. 


그래서 찾아 갔지만 예상한 대로 훈장은 오만(傲慢)하였고, 자기가 운자를 부를 것이니 시를 지어 보라고 했다. 시를 잘 지으면 재워 줄 것이고, 잘 못 지으면 벌로 술을 한 동이 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銅), 웅(熊), 공(蚣) 세 글자를 운으로 부른다. 


김삿갓은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이자가 시를 지을 수 없는 글자만 골라서 운자(韻字)를 부르면서 내기를 하자는 것이니 그에 걸맞도록 응수(應酬)를 해주마. 


       主人呼韻太環銅

       我不以音以鳥熊

       濁酒一盆速速來

       今番來期尺四蚣


일필휘지(一筆揮之)해 내밀었지만 훈장은 아무리 읽어 보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는지, 운자는 맞지만 뜻이 통하지 않는 것이 무슨 시냐? 면서 술을 사라고 재촉한다. 김삿갓이 크게 웃고 나서 자기 시를 다음과 같이 풀이해 보였다.


      주인이 부르는 운자가 하도 고리고(環) 구리니(銅)

      나는 시를 음(音)으로 짓지 않고 새김(鳥熊)으로 지으리다. 

      탁주 한 동이 빨리빨리 가져오소

      이번 내기는 자네가(尺四) 지네(蚣)


훈장은 설명을 듣고 나더니 배꼽을 잡고 웃는다.  


‘이것은 패담(悖談)이지, 그런 시가 어디 있단 말이요, 허나 척사(尺四)라고 써 놓고 자네라고 읽고, 공(蚣)자를 지네라고 읽게 만드는 재주는 참으로 대단하오.’하면서 순순히 술을 내온다.


그런데 훈장이 호탕(浩蕩)한 면도 있지만 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김삿갓으로도 당해 낼 수가 없고, 술이 취하자 잡담(雜談)을 늘어놓으면서 지난 날 자기가 가까이 했던 여인이 절세미인(絶世美人) 이었다고 횡설수설(橫說竪說)하고 있었다. 듣기가 지루해진 김삿갓은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지어 보였다.


       목마를 때 한잔은 단 이슬과 같으나

       취한 뒤에 또 마심은 없느니만 못하다.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게 아니고 사람이 스스로 취하고

       계집이 사내를 미치게 하는 게 아니라 사내가 스스로 미친다.


       渴時一滴如甘露

       醉後添盃不如無

       酒不醉人人自醉  

       色不迷人人自迷


훈장에게 경각심(警覺心)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취기(醉氣)가 몽롱(朦朧)한 훈장은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를 한참 드려다 보더니 주불취인인자취(酒不醉人人自醉)요, 색불미인인자미(色不迷人人自迷)라는 구절은 기가 막히게 좋다면서 칭찬(稱讚)까지 하는 것이었다.


66. 훈장을 훈계하다(訓戒訓長) 


훈장(訓長)은 술에는 밑 빠진 독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자기가 좋아했다는 절세미인(絶世美人)을 잊지 못하는 괴로움을 지금까지도 술로 달래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선비로서의 긍지(矜持)만은 대단하여 취중에도 김삿갓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자네가 시조박이나 짓는다고 철없이 거들먹거려대기는 하네만 내가 보기엔 아직도 구상유취(口尙乳臭)야. 암 구상유취구 말구.”


선비다운 점이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는 주제에 오만(傲慢)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횡설수설(橫說竪說)하는 바람에 밤새도록 잠을 설치고 말았다.


날이 밝자마자 붓을 들어 ‘훈계훈장(訓戒訓長)’이란 제목으로 호되게 꾸짖는 시 한수를 써갈겨놓고, 온다간다 소리도 없이 서당(書堂)을 빠져 나와 묵묵히 이슬 길을 걸어가고 있는 김삿갓의 마음은 서글프기 하고 통쾌(痛快)하기도 했다. 


        두메산골 괴팍스러운 훈장은 

        문장대가를 알아보지도 못하네.

        종지 같은 술잔으로 바닷물을 어찌 되며

        쇠귀에 경 읽기니 무엇을 깨달으랴.


        化外頑氓怪習餘

        文章大家不平噓

        蠡盃測海難爲水   

        牛耳頌經豈悟書


        그대는 기장이나 갉아 먹는 산골 쥐요

        나는 붓으로 구름을 일으키는 뛰는 용이로다.

        백 번 죽어 마땅한 네 죄를 잠시 용서하노니

        어른 앞에서 행여 까불지 말지니라. 


        含黍山間奸鼠爾

        凌雲筆下躍龍余

        罪當笞死姑舍已

        敢向尊前語詰詎


67. 왕소군(王昭君)의 고운 뼈도 호지(胡地)의 흙이 되고


김삿갓이 원주(原州)를 거처 한양(漢陽)으로 가려고 얼마를 가다가 날이 저물어 길가의 주막(酒幕)에 들렀다. 목은 컬컬하지만 낭중(囊中)에 무일푼(無一分)이라 술을 청할 생각도 못하고 서산에 기우러지는 석양노을을 바라보며 술청에 걸터앉아 옛 시 한 수를 읊조리고 있었다.


저만치에서 이 모습(模襲)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주모가 슬며시 다가오더니 "손님은 시를 좋아하시나 보죠. 혹시 시인이 아니세요?」하고 묻는다. 김삿갓은 주모의 질문(質問)에 적이 놀라면서 주모는 시를 아는가 하고 물었다.   


“재구삼년능풍월(齋狗三年能風月;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한다)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술장사를 하기 전에 10년 가까이 서당지기로 있었기 때문에 어깨너머로 좀 배웠습니다마는 읽기는 해도 쓸 줄은 모르는 감투글 이랍니다.”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옛날부터 서당에서는 글을 읽을 줄은 알아도 쓸 줄은 모르는 사람을 '감투글'이라고 일러왔다. 주모는 그런 속어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5년 전에 남편이 죽자 서당(書堂)에서도 나와야 했고, 할 수 없이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여기에서 술장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옛 친구라도 만난 듯,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돈이 없는데 하룻밤 자구 갈 수 있겠느냐' 고 어렵게 물었다. 주모는 돈이 대수냐는 듯이 미소를 짓더니 주방(廚房)으로 들어가 우선 술상 보아 오고 이어서 저녁을 지어 내왔다.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시 이야기, 세상 이야기를 나누다가 각각 잠자리에 들었다. 밤이 깊어 오자 베갯머리에서는 귀뚜라미 소리가 소란(騷亂)하고, 창호지에는 달빛이 서릿발처럼 차갑게 비쳐 와서 암만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김삿갓은 오랫동안 전전반측(輾轉反側)하다가 마침내 등잔불을 켜 놓고 다음과 같은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나그네는 시름에 겨워 잠 못 이루는데

      서리 찬 달빛은 나를 비쳐 주고 있네.

      푸른 대 푸른 솔은 천고의 절개지만 

      붉은 복사 흰 배꽃은 잠시 피었다 지는 것을 ...


      客愁蕭條夢不仁

      高天霜月照吾隣

      綠竹蒼松千古節

      紅桃白梨片時春


      왕소군의 고운 벼도 호지의 흙이 되고 

      양귀비의 예쁜 얼굴 마외파의 티끌일세.

      세상 사물의 이치가 모두 그러하거늘 

      오늘 밤 그대 옷 벗기를 아끼지 마오.


      昭君玉骨胡地土

      貴姬花容馬嵬塵

      世間物理皆如此

      莫惜今宵解汝身    

      ※(馬嵬坡; 양귀비가 참수된 곳)

 

왕소군(王昭君)이나 양귀비(楊貴妃) 같은 천하의 절세미인(絶世美人)들도 한번 죽고 나면 모두가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데, 젊은 나이에 무엇 때문에 절개(節槪)를 지키려고 애쓰느냐고 하는 노골적(露骨的)인 유혹의 시였다. 안방에 대고 물 한 그릇 달라고 청하여 주모를 부른 후에 말없이 시를 적은 종이를 건네고 하회를 기다렸다.


68. 넘치는 이 술잔 사양치 말게(滿酌不須辭)


"천하일색 양귀비(楊貴妃)도 한 줌 흙을 남겼을 뿐인데 무엇을 망설이느냐" 는 유혹의 시를 받아 읽고 충격(衝激)을 받아 마음이 흔들렸는지, 주모는 오래도록 망설인 끝에 술상을 다시 보아 들고 김삿갓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으로 결심(決心)한 바가 있었던지 의외의 제안(提案)을 해 오는 것이 아닌가. 


"제가 삿갓 어른을 모시되 이부자리를 펴놓는 것만으로 대신하면 어떻겠습니까?" 이부자리만 펴놓고 살을 섞는 짓만은 하지 말자는 뜻이었다. 김삿갓은 여인의 고고(高高)한 뜻을 알아채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좋도록 하세그려. 자고로 지불가만(志不可滿)이요 낙불가극(樂不可極이라; 뜻을 채워서는 안 되고, 즐거움을 끝까지 해서는 안 된다.) 했으니 이부자리만 폈으면 됐지, 구태여 그 속에 들어가 금수(禽獸)와 같은 짓을 할 것까지야 없지 않겠나." 


옛날의 고사(高士)와 명기(名妓)들은 서로 뜻이 맞으면 이부자리만 펴놓고 실지로 살을 섞지는 않는 일이 더러는 있었기에 김삿갓도 흔쾌히 응낙(應諾)하였던 것이다. 여인은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일어나서 원앙금침(鴛鴦衾枕)을 정성스럽게 펴놓았다.


이 날 밤 두 남녀는 이부자리 옆에 앉아 술만 나누었을 뿐, 이불 속으로 들어갈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애정(愛情)도 없이 살을 섞으면 그것은 단순한 야합(野合)이지 않는가. 


김삿갓은 주모의 망부(亡夫)에 대한 의리(義理)를 높이 평가하고 주모(酒母)는 김삿갓의 인품(人品)을 소중히 여겨 주고 있었다. 


"내가 권주시(勸酒詩)를 한 수 읊어 줄 테니 자네도 한잔 마시게." 김삿갓은 여인에게 술잔을 내밀며 옛 시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그대에게 한잔 술 권하노니

      넘치는 이 술잔 사양치 말게

      꽃이 피면 비바람이 많고

      사람사리에는 이별도 많다네.


      勸君一盃酒

      滿酌不須辭

      花發多風雨

      人生足別離


여인은 술잔을 들고 눈물을 삼키며 "저도 옛 시로써 화답(和答)을 올리겠습니다." 하더니 다음과 같은 시(詩)를 떨리는 목소리로 읊어 보이는 것이었다.


      임도 나와 헤어지며 눈물 지우고

      저 역시 울면서 헤어지려오.

      그리운 눈물이 비가 되어서

      정든 님 옷자락에 뿌려 지이다.


      君垂別妾淚

      妾亦淚含離

      願作陽臺雨

      更灑郎君衣


실로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심야의 이별곡(離別曲)이었다.


69. 원주(原州) 치악산(雉岳山) 


한양(漢陽)을 향하던 김삿갓은 원주(原州) 고을의 진산인 치악산(雉岳山)을 구경하려고 혼자 산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원주(原州)는 형승(形勝)이 뛰어난 곳인지라 산에는 교목(喬木)이 울창(鬱蒼)하고 저 멀리 산 밑으로는 섬강(蟾江)의 푸른 물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 경치가 얼마나 좋았던지 성종 때 영상을 지낸 문신 윤자운(尹子雲; 호; 樂閒齋 1416~1478)은 이곳을 지나다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천 년 옛 나라에는 교목이 남아 있고

       십 리 긴 강은 고을의 성을 둘렀구나.


       千年古國餘喬木

       十里長江繞郡城


원주(原州) 일대에는 산이 많아서 유명한 절들이 많았다. 명봉산(鳴鳳山) 법천사(法泉寺)는 서거정(徐居正), 강효문(康孝文), 한명회(韓明澮) 같은 인물들이 어렸을 때 이곳에서 공부를 했다고 하여  유명하거니와, 치악산(雉岳山) 동쪽에 있는 각림사(覺林寺)는 일찍이 태종이 잠룡(潛龍)시에 이 절에서 글을 읽으며 무술을 연마했다고 하여 유명해진 절이다. 김삿갓은 다른 절은 못 보더라도 각림사(覺林寺)만은 꼭 보고 싶었다. 각림사(覺林寺)에 대해서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변계량(卞季良; 호: 春亭 1369~1430)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놓았기 때문이었다.


      치악은 동해에서 이름난 산이요

      이 산 사찰 중에는 각림이 으뜸이라

      구름 안개 바위 골짜기가 몇 천 년이 되었는고.

      지령의 옹위를 받으며 천룡이 모였구나.


      雉岳爲山名東海

      山之寶刹覺林最

      雲烟巖壑幾千年

      地靈擁衛天龍會


각림사(覺林寺)의 곳곳을 돌아보니 과연 경치가 천하의 명승(名勝)이었다. 김삿갓은 각림사(覺林寺)에서 10여 일을 묵다가 원주(原州) 고을을 거쳐 한양으로 가려고 다시 길을 떠났다.


70. 여주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


원주 각림사(覺林寺)에서 나온 김삿갓은 발길을 여주(驪州)로 돌렸다.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고장은 되도록 피하면서도 명승지(名勝地)만은 골라가며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여주에서 대표적인 명승지는 뭐니 뭐니 해도 신륵사(神勒寺)라 하겠다. 신륵사는 봉미산(鳳尾山) 동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데 바로 눈앞에는 한강의 상류인 여강(驪江)이 유유히 흐르고 있으며, 강가의 바위 위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정자(亭子)까지 서있어서 고려 때 명승 나옹선사(懶翁禪師)의 일화와 함께 산수의 조화미(調和美) 위에 또 하나의 멋을 더하여 가위 금상첨화(錦上添花)라 할 것이다.


그 외에도 벽돌로 쌓아 올린 유명한 전탑(塼塔)이 있어서 속칭 벽돌벽자인 벽사(甓寺)라고도 하는 절이다. 강월헌(江月軒)에는 시인묵객들의 시가 많이 걸려 있는데 고려 말의 큰 선비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다음과 같은 시가 눈길을 끌었다.


        천지는 가이 없어도 인생은 가이 있으니

        호연히 돌아가려 하나 어디로 갈 것인가

        여강의 산은 그림처럼 아름다워

        반은 단청 같고 반은 시와 같구나.


        天地無涯生有涯

        浩然歸志欲何之

        驪江一曲山如畵

        半似丹靑半似詩


유유히 흐르는 여강(驪江)을 굽어보며 자연의 무궁함과 인생의 유한(有限)함을 노래하면서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를 한탄(恨歎)하고 있다. 망국민(亡國民)으로서의 회한(悔恨)일 수도 있겠고 인생무상을 읊조린 것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옆에는 역시 고려(高麗) 말, 조선 초의 문신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시도 걸려 있었다.


       나 여기 와 아름다운 강산을 사랑하며

       진종일 배도 타고 난간에도 기대 본다.

       물 밑에는 절의 그림자 아른거리고

       숲 사이에는 선경이 보이는 듯 마는 듯하구나.


       我來愛此好江山

       終日乘船又倚欄

       水底森羅開佛刹

       林間隱約見仙壇


       신륵사의 종소리 한 밤중에 울려서

       광릉에 돌아갈 길손의 꿈을 깨워 주네

       만약 장계더러 이곳을 구경하라 했다면

       한산만을 유명하게 만들지는 않았으리라.


       甓寺鐘聲夜半鳴      

       廣陵歸客夢初驚

       若敎張繼曾過山

       未心寒山獨擅名


중국 소주(蘇州)에 있는 한산사(寒山寺)의 종소리를 들으며 지었다는 장계(張繼)의 ‘풍교야박(楓橋夜泊)’이라는 시를 인용하면서 신륵사(神勒寺)의 경승(景勝)과 여강(驪江)의 즐거움을 노래했다.  끝까지 절의(節義)를 고수했던 목은(牧隱)과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데 일익(一翼)을 담당했던 양촌(陽村), 다 같은 이 나라의 석학(碩學)이었지만 같은 산하(山河)를 바라보는 느낌은 이처럼 서로 달랐음을 보여 주고 있다. 악암(岳岩)


....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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