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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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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전기(金笠傳記) 8부


71. 이천(利川)의 곽봉헌(郭風憲) 영감


여주 신륵사(神勒寺)를 떠난 김삿갓은 서울을 향하여 가다가 이천(利川)의 어느 선비 집에서 며칠을 묵었다. 길에서 한 선비를 만나 따라 갔으나 사랑에는 그의 아버지 84세의 노인이 홀로 앉아 있었다. 방방곡곡(坊坊曲曲)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노인을 만났지만 이토록 장수(長壽)한 노인을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젊어서는 향소직(鄕所職)의 하나인 봉헌(風憲) 벼슬까지 했다는 이 노인은 이제는 다리에 힘이 없어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눈이 어둡고 귀가 멀어 잘 보고 듣지도 못했다. 그러면서도 글을 읽던 버릇만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황제내경(黃帝內經; 중국의 가장 오래된 의학서)을 읽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오히려 처량(凄涼)하게 보였다.


귀가 밝으면 심심풀이로 글 토론(討論)이라도 해 보련만 귀가 절벽이니 담화(談話)도 잘 나누지 못했다. 김삿갓은 저녁을 먹은 후에 호롱불 밑에 혼자 멍하니 앉아 있기가 무료(無聊)하여 까딱까딱 졸고 있는 곽풍헌(郭風憲)영감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즉흥시(卽興詩) 한 수를 지었다.


      여든하고도 네 해가 더 지났으니

      사람도 귀신도 아니요 또한 신선도 아니로구나.

      다리 힘이 없어 걸핏하면 넘어지고   

      눈은 어둡고 정신이 없어 앉으면 졸기만 하네.


      八十年加又四年

      非人非鬼亦非仙

      脚無筋力行常蹶

      眼乏精神坐輒眠


      생각하고 말함이 모두가 망령이여 

      한 가닥 생각만이 간신히 남았구나.

      희로애락마저 모두 흐리멍덩하면서

      때때로 내경편을 읽는 것이 고작이네. 


      思慮言語皆妄靈

      猶將一縷氣之線

      悲哀歡樂總茫然

      時閱黃帝內經篇


다음 날도 젊은 선비가 아버님과 말벗이나 하라면서 붙잡았지만 귀머거리 노인하고 대화(對話)가 통할 리 없었다. 그래서 말 대신 필담(筆談)을 시도해 보았다. 


생존교우다유호(生存交友多有乎; 살아 계시는 친구 분들이 많이 있습니까?) 라고 써서 물어 보았다. 한 참 드려다 보던 노인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다들 가고 혼자만 남았노라고 했다. 나이가 먹으면 먹을 것 생각 밖에 없는지, 금방 숟갈을 놓고서도 무엇인가 또 먹을 것을 찾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는 또 남모르는 고통이 하나 있었으니 그 것은 며느리가 업고 있던 자기 손자를 '아버님 심심하실 테니 같이 노세요.'하면서 갖다 맡기는 것이었다. 이러한 광경(光景)들을 보면서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낀 김삿갓은 다시 시한수를 남기고 휘적휘적 길을 나섰다.


      오복 중에 수가 제일이라고 누가 말했는가.

      장수는 욕이라고 말한 요임금은 신이로구나

      옛 친구는 모두가 세상을 떠나 버리고

      젊은이들은 낯이 설어 담을 쌓았네.


      五福誰云一曰壽

      堯言多辱知如神

      舊交皆是歸山客

      新少無端隔世人


      힘이 없어 움직일 땐 앓는 소리를 하고

      위장이 허약하니 맛있는 음식만 생각하네.

      아이 보기 고되다는 속사정도 모르고

      며느리 걸핏하면 어린아이와 놀라네.


      筋力衰耗聲似痛

      胃腸虛乏味思珍

      內情不識看兒苦

      謂我浪遊抱送頻


72. 봄은 다시 오건만


원주(原州)에서 여주(驪州), 이천(利川)을 거처 광주(廣州) 땅에 이르렀을 때는 어느덧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세상에 속일 수 없는 것이 계절의 감각(感覺)이어서 엊그제까지도 산길을 걷자면 추위를 느꼈건만 입춘(立春)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언덕길을 올라가려면 등골에 땀이 배이기 시작했다. 


산길을 홀로 걷던 김삿갓은 문득 백난천(白樂天)의 봄에 대한 시를 연상(聯想)하였다.


       버들은 힘이 없는 듯해도 가지가 움직이고

       못에는 물결이 일며 어름이 녹아나네.

       이런 날이 다시 올 줄을 그 누가 알았으랴

       봄바람과 봄물이 한꺼번에 오는구나.


       柳無氣力枝先動

       池有波紋氷盡開

       今日不知難計會

       春風春水一時來


산속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가고 오는 세월의 발자취 소리가 귓가에 역력히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감흥(感興)이 그토록 절실하기에 김삿갓은 자신도 한 수의 시가 없을 수 없었다. 


       해마다 해마다 해는 가고 끝없이 가고

       날마다 날마다 날은 오고 끝없이 오네.

       해는 가고 날은 오고 오고 또 가는데

       천시와 인사가 모두 그 속에서 이루어지네.


       年年年去無窮去

       日日日來不盡來

       年去日來來又去

       天時人事此中催


이 시는 스물여덟 자 밖에 안 되지만 그 중에 연(年), 일(日), 거(去), 래(來) 자가 각각 넉 자씩 모두 열여섯 자로 이루어졌으니 똑 같은 글자를 네 번씩이나 반복(反復)해 가면서 천지(天地)의 유전(流轉)을 이토록 간단명료(簡單明瞭)하게 표현한 수법(手法)이 얼마나 놀라운가. 


그처럼 김삿갓은 천지(天地)에 무르익어 오는 봄빛을 마음껏 완상(玩賞)하며 길을 무심히 걸어오다 보니 삼전도(三田渡; 지금의 송파) 길에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는 커다란 비석(碑石)이 눈에 띠었다.


73. 치욕(恥辱)의 남한산성(南漢山城)


김삿갓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淸太宗) 공덕비를 보는 순간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치욕(恥辱)이 번개처럼 머리를 때렸다. 우리의 임금 인조(仁祖)가 세자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소위 수강단(受降壇)이라는 높은 단 위에 오만하게 앉아 내려다보는 저 북녘 오랑캐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했던 바로 그 자리가 아니던가. 


항복(降伏)을 받은 후에 그들은 왕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볼모로 하고 무고한 백성을 50만 명이나 포로(捕虜)라는 이름으로 잡아가면서도 황은(皇恩)이 망극(罔極)함을 감사하라면서 항복을 받았던 그 자리에 소위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세우라고 하여 온 조정(朝廷)과 백성이 울면서 세운 그 비석(碑石)이다.


먼저 비문(碑文)의 초안을 써 받치라고 해서 장유(張維) 등 대신들에게 쓰게 하여 심양(瀋陽)에 보냈으나 그것으로는 미흡(未洽)하다 하여 다시 써 보내게 되었고, 그 때 인조(仁祖)는 문장력이 좋은 이경석(李景奭, 호: 白軒 당시 부제학)에게 명하여 부득이 본의 아니게 치욕의 글을 천추에 남긴 이경석은 한 평생 글 배운 것을 한탄(恨歎)했다고 한다.


글 배운 것을 한탄하기로 하면 김삿갓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글재주가 아니었던들 영월백일장(寧越白日場)에서 자기 할아버지를 매도(罵倒)하는 글로 장원급제(壯元及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저러한 생각을 하면서 남한산성(南漢山城) 문루에 올라서서 사방을 둘러보다가 문득 두보(杜甫)의 시를 연상하였다.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남아 있어

     봄이 오니 산성에 초목이 무성하구나.

     느끼는 바 있어 꽃에 눈물 뿌리고

     이별이 한스러워 새소리에 놀라노라.


     國破山河在

     春城草木深

     感時花?淚

     恨別鳥驚心


나라가 망한다는 것처럼 슬픈 일이 없다. 그는 이곳에서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치욕적인 역사를 새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국호를 청(淸)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 청태종(淸太宗)은 인조 14년(1636, 병자년)에 십만 대군을 이끌고 12월 2일 심양을 출발하여 14일에는 개성(開城)을 점령하고 16일에는 선봉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기 시작했으니 불과 두 이레만의 일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은 지 불과 40년이요, 10년 전 정묘호란 때도 왕이 강화도까지 몽진(蒙塵)하는 곤욕을 치르면서 저들과 굴욕적(屈辱的)인 강화조약(江華條約)을 맺지 않았던가. 그 동안 전쟁위협(戰爭威脅)을 수 없이 받았고 그들의 침공(侵攻)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는데 조야(朝野)는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당시 남한산성(南漢山城)에는 13,000 명의 군사와 50일분의 식량이 있었다. 명나라에 급사(急使)를 보내어 구원병(救援兵)을 청하고 8도에 근왕병(勤王兵; 임금에게 충성을 받치는 군사)을 모집하는 격문(檄文)을 붙였으나, 제 코가 석자나 빠진 명나라가 구원병(救援兵)을 보낼 리 없었고 적의 포위망(包圍網)을 뚫고 달려오는 용맹(勇猛)한 근왕병도 없었다.


45일이 지나면서 성 안에서는 현실을 직시(直視)하고 항복하자는 주화론(主和論)과 다 함께 죽을지언정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척화론(斥和論)이 대립하여 입씨름만 하고 있을 뿐, 10만대군의 포위 속에 고립(孤立)된 조정은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다. 


생각이 이에 미친 김삿갓은 한숨을 푸-푸- 쉬면서 무거운 발 거름으로 산성(山城)을 돌아보았다. 김삿갓이 오늘의 우리현실을 보았으면 무어라고 했을까. 전쟁위협(戰爭威脅)은 그 때와 다를 바 없는데 한미공조(韓美共助)냐 민족공조(民族共助)냐 하고 공론(公論)만 분분한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74. 서울 목멱산(木覓山) 


남한산성(南漢山城)을 떠난 김삿갓은 왕십리(往十里)를 거처 머릿속으로만 상상해 보던 서울 장안(長安)으로 들어섰다. 예상했던 대로 서울거리는 화려(華麗)하기 이를 데 없었다. 거리거리 마다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오고 가는 사람들이 분주한 시장판에는 오만가지 물건들을 늘어놓고 제각기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이것저것을 구경하다보니 어느새 날은 저물어 하룻밤의 잠자리를 구해야 했지만 절간이나 서당이 어디 있는지는 알 길이 없고, 부득이 여염(閭閻)집 신세를 저야 할까본데 집이라는 집은 모두 대낮부터 대문을 겹겹이 닫아걸고 있지 않는가.


문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관문(關門)이 아니던가. 그런데 낮에도 대문을 걸어놓고 산다는 것은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밥 한 그릇도 주지 않겠다는 심보일 것이니 서울의 인심(人心)이 이렇게도 고약하더란 말인가. 김삿갓은 서울이라는 고장에 당장 정나미가 뚝 덜어졌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밥도 먹고 잠도 자야 하겠기에 이집 저집 대문을 두드려보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밤이 깊어지면서 거리의 그 많던 사람들도 모두 어디론가 가버리고, 인정(人定)을 알리는 종소리가 스물여덟 번이나 들려 왔지만 김삿갓이 서울장안에 통행금지시간(通行禁止時間)이 있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통행금지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대감이니 영감이니 하는 큰 도둑들이 좀도둑을 막는답시고 인정(人定; 통금시작)이니 파루(罷漏; 통금해제)니 하는 것을 만들어 가지고 백성들만 하늘이 준 땅조차 맘대로 밟지 못하도록 괴롭히는 것이 아니던가.


인정이 지나도록 거리를 배회(徘徊)하다가 순라군에 잡혀 광교 다리 밑의 거지 움막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지만 그래도 움막 속의 인정은 훈훈했다. 나름대로 손님대접을 하는 그들의 인간성만은 대문을 겹겹이 닫아걸고 사는 양반님 네들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따뜻했다.


서울의 운종가(雲從街; 종로)는 아침부터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다. 구경을 하자면 구경거리가 너무도 많았지만 인정머리 없는 거리라고 생각하니 서울을 속히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이왕 왔으니 서울장안의 풍경을 한번은 굽어보아야 할 것이어서 남산에 올랐다.


과연 남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장안의 풍경은 글자 그대로 장관(壯觀)이었다. 인심과는 달리 만호장안(萬戶長安)이라는 표현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서울이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산수(山水)는 아무리 보아도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북쪽에는 삼각산(三角山), 북악산(北嶽山), 인왕산(仁王山)이 병풍처럼 둘러서서 천혜(天惠)의 방벽을 이루었고, 장안을 성큼 뛰어넘은 남쪽에는 목멱산(木覓山; 남산)이 얌전하게 솟아 있으며, 그 밑으로는 한강(漢江)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어서 그야말로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금성천부(金城天府)인 것이다.


그래서 예전부터 시인 묵객(墨客)들이 서울의 산수를 예찬(禮讚)하고 국운만세(國運萬歲)를 빌었나보다. 김삿갓은 문득 옛 시인 오순(吳洵)의 시를 떠올렸다.


        공중에 높이 솟은 세 송이 푸른 부용

        아득한 구름 속에 겹겹이 서렸구나.

        누대에 올라갔던 옛일을 생각하며

        해거름에 절간의 종소리를 듣노라


        聳空三朶碧芙蓉

        縹渺烟霞幾萬重 

        却憶當年倚樓處

        日沒簫寺數聲鐘


또한 서산대사(西山大師)는 일찍이 남산에 올라 장안(長安)을 굽어보며 국운만세를 다음과 같이 빌었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러

       이 큰 서울은 천읍을 거느렸네.

       하늘은 낳고 땅은 키우니

       크나큰 성인은 모든 것을 기르시네.

       하늘은 높고 땅은 두터우니

       이 땅 조선은 만수를 누리오리


       天其玄兮地其黃兮

       維此大都統千邑兮

       天其生兮地其遂兮

       維此大聖囿萬類兮    

       天其高兮地其厚兮

       維此朝鮮齊萬壽兮

   

이토록 아름다운 장안에 사는 양반님 네들의 인심은 왜 그 모양일까. 아무래도 서운한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김삿갓은 문득 뒤가 마려워 바위 사이에 쪼그리고 앉았다. 고래 등 같은 기와집 군상(群像)들을 내려다보면서 뒤를 봄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쾌함이었다. 그래서 그는 짤막한 즉흥시 한 수로서 그의 심사를 뒤틀리게 했던 서울을 이별(離別)했다.


       남산에 똥을 누니 방귀가 먼저 나와

       향기로운 그 냄새 온 장안에 진동한다.


       放糞南山第一聲

       香震長安億萬家


75. 무악재(母岳斋)의 봄(春)


서울을 벗어난 김삿갓은 발길을 무악재(母岳斋)로 돌렸다. 파주(坡州), 장단(長湍) 등지를 거처 고려500년의 망국지한(亡國之恨)이 서려있는 개성(松都)로 가보려는 것이었다. 무악재(母岳斋)에 올라서니 넓은 산야가 한눈에 내려다 보여 우울하던 가슴이 탁 트여오는 것만 같았다.


때는 봄인지라 산에는 군데군데 진달래꽃이 만발해 있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초가집 울타리에 노랗게 피어난 것은 개나리꽃이 분명하리라. 어느새 버들가지는 실실이 늘어져 있었다.


      봄 성에는 가는 곳마다 꽃잎 날리고

      한식 봄바람에 버들가지가 휘늘어졌네.


      春城無處不飛花

      寒食東風御柳斜


옛 시의 한 구절을 읊조리며 멀고 가까운 곳에 있는 꽃들을 구경하고 있노라니 또다시 봄을 읊은 우량사(于良史)의 시가 머리에 떠오른다.


      봄 산에는 좋은 일이 하도 많아

      즐기느라 밤이 와도 돌아갈 줄 모르네.

      물을 옴켜 뜨니 달이 손 안에 있고

      꽃을 희롱하니 옷에 향기가 진동하네.


      春山多勝事

      賞玩夜忘歸

      掬水月在手  

      弄花香滿衣


얼마나 멋들어진 자연과의 동화인가. 옛날 사람들은 그와 같은 풍류(風流)가 있었고 운치가 있었다. 그러나 서울사람들에게는 배타적(排他的)이고 이해타산(利害打算)만이 있을 뿐, 운치(韻致)가 없지 않던가. 그래서 김삿갓은 서울이 싫었던 것이다.


76. 말 위에서 한식을 만나다(馬上逢寒食)


이산 저산에 모두가 꽃이었다. 삿갓을 제겨 쓰고 꽃구경을 하며 마냥 한가롭게 거닐고 있노라니까 저만큼 풀밭에서 여남은 살 먹어 보이는 머슴아이가 조랑말을 끌고 다니며 풀을 뜯기고 있었다. 


김삿갓은 말을 보자 옛날 절구(絶句) 한 수가 머리에 떠올랐다. 

    

       말 위에서 한식을 만났는데

       오다 보니 어느새 봄이 저무네.


       馬上逢寒食

       途中送暮春


말을 타고 봄을 즐기며 구십춘광(九十春光)을 마상(馬上)에서 보낸다는 소리다. 옛날 사람들은 나들이 할 때에는 흔히 말을 타고 다녔다. 그러기에 김삿갓 자신도 말을 타고 봄을 즐겨 보고 싶었다. 


주머니를 뒤져 보니 돈 두 냥이 들어 있다. 머슴아이를 불러 돈 두 냥을 쥐어 주고 말을 좀 타 보자고 했다. 돈은 선비의 마음도 검게 한다고 했던가(黃金黑士心). 돈을 본 아이는 김삿갓을 얼른 말 위에 올라타게 하고는 고삐를 단단히 잡고 곁에 달라붙는다.


돈은 받았지만 말을 타고 달아날까 봐 겁이 났던 모양이다. 그러나 김삿갓으로서는 자동적으로 견마(牽馬)까지 잡힌 격이 되었다. 말을 처음 타 보는 그는 마냥 즐겁기만 했고, 마상에서 바라보는 봄 풍경은 또 다른 운치(韻致)가 있었다.


      느린 말이 산수 보기에는 더욱 좋아

      채찍은 숫제 쓰지도 안했네.

      바위 사이 오솔길을 가까스로 지나오니

      연기 나는 곳에 초가집이 두세 채


      倦馬看山好

      停鞭故不加

      岩邊纔一路 

      烟處或三家


      꽃이 피었으니 봄은 분명한데

      냇가의 물소리는 비가 온 탓이런가.

      돌아갈 길 까맣게 잊고 있는데

      해가 저문다고 아이가 일러 주네.


      花色春來矣

      溪聲雨過耶

      渾忘吾歸去

      奴曰夕陽斜


말을 빌려 탄 덕에 시 한 수를 절로 얻었다. 이윽고 김삿갓은 말을 아이에게 돌려주고 날이 저물었으니 어디선가 하룻밤 자고 갈만 곳을 아이에게 물었다.


77. 벽제관(碧蹄館)을 지나 임진((臨津)나루로 


말을 빌려 탔던 아이에게서 조금만 더 가면 벽제관(碧蹄館)이라는 말을 들은 김삿갓은 불현듯 임진왜란(壬辰倭亂)의 고사가 머리에 떠올랐다. 선조(宣祖)는 의주까지 피난하면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였고, 구원병을 몰고 온 이여송(李如松)은 평양과 송도를 차례로 탈환(奪還)했으나 벽제에서 패하였다.


승승장구하던 이여송이 벽제에서 혼이 나자 송도로 물러나서 좀처럼 싸우려 하지 않았다. 지혜롭기로 유명했던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여러 차례 나가 싸우기를 권유하다가 화가 나서 이여송의 방에 둘려 있는 적벽도(赤壁圖) 병풍에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써 갈겼다.


      승부란 한 판의 바둑과 같은 것

      병가에서 가장 꺼림은 꾸물거림이오. 

      알건대 적벽싸움의 전에 없던 공적은 

      손 장군이 책상을 찍던 그 때부터요.


      勝負分明一局碁

      兵家最忌是遲疑

      須知赤壁無前績

      只在將軍斫案時


삼국지에 나오는 고사를 빗대어 지은 시였다. 손권(孫權)이 조조(曹操)에게 패하여 장병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자 모두들 항복하자고 하였으나 주유(周瑜)와 노숙(魯肅)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고 이에 용기를 얻은 손권이 분연히 일어나 책상을 칼로 찍으면서 결전을 선언함으로서 적벽(赤壁)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여송은 이 시를 읽고 크게 깨달은 바 있어 육전(陸戰)을 재개하여 서울을 탈환하였고, 멀리 남해에서는 이순신장군(李舜臣將軍)이 적의 함대를 섬멸(殲滅)함으로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승리로 이끌었으니 이덕형의 이 한 편의 시가 그토록 위대한 공헌을 한 셈이었다.


그러저러한 회억(回憶)에 잠기면서 벽제관에서 일박한 김삿갓은 임진나루를 향하여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저만큼 산기슭에서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는가. 눈을 들어 살펴보니 소복을 한 젊은 아낙이 한 무덤 앞에서 곡을 하고 있는데 때가 봄인 탓인지 그 울음소리가 마치 노래처럼 구성지게 들려 왔다. 


      십리 모래밭 가 언덕은 잔디인데

      소복 입은 과부의 곡소리 노래 같이 들리네.

      가엽다 지금 무덤 앞에 부어 놓은 저 술은 

      낭군이 지어 놓은 곡식으로 빚은 술이리.


      十里平沙岸山莎

      素衣靑女哭如歌

      可憐今日墳前酒

      釀道阿郞手種禾


여인의 곡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즉석에서 읊은 즉흥시(卽興詩)이다. 남편이 지어 놓은 곡식으로 다정한 밥상을 같이 하지 못하고 술을 빚어 무덤에 뿌려야 할 줄을 누가 알았으랴. 인생의 생로병사(生老病死)가 하도 허무하게 느껴져서 읊은 시었다.


78. 황진이(黃眞伊) 묻혔다는 장단(長湍)고을 


임진나루를 건너 얼마를 더 가니 거기부터는 장단(長湍) 땅이라고 한다. 장단이라면 송도명기(松都名妓) 황진이(黃眞伊)가 묻혀 있다는 그 곳이 아니던가. 일직이 선조(宣祖) 때 풍류시인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평안도평사(平安道評事)가 되어 부임(赴任) 해 가다가 찾았다는 바로 그 무덤이다.


어찌 그 장단(長湍)고을을 지나면서 황진이(黃眞伊) 무덤을 찾지 않을 수 있으랴. 나도 백호(白湖)처럼 그의 무덤에 술 한 잔 부어 놓고 시 한 수 읊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고 유유히 걸으면서 백호가 읊었다는 시조창(時調唱)을 길게 뽑아 본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었는다.

        홍안은 어디 가고 백골만 묻혔는가.

        잔 잡고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황진이(黃眞伊), 그는 기생으로서 가무(歌舞)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후세에까지 문명(文名)을 날린 유명한 시인이었다. 그러기에 신사임당(申師任堂), 허난설헌(許蘭雪軒)과 더불어 여류삼절(女流三絶)이라고도 하고, 서경덕(徐敬德),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일러 왔지 않는가. 그는 불후(不朽)의 명시조(名時調)들을 많이 남겼을 뿐 아니라 한시(漢詩)도 여러 수의 명작(名作)들이 남아 있다.


        그 누가 곤륜산의 옥을 찍어 내어

        직녀에게 얼레빗을 만들어 주었던고

        그리운 견우님 떠나가신 뒤

        서러워 허공에 던져 버렸네.


        誰斷崑崙玉

        裁成織女梳

        牽牛離別後

        愁擲碧空虛


하늘가에 떠 있는 반달을 <얼레빗>에 비유하여 견우(牽牛)와 직녀(織女)의 슬픔 사랑을 그리면서 직녀가 허공에 내던진 얼레빗이라고 노래한 그 수법도 절묘(絶妙)하거니와, 고려조(高麗朝)의 망국(亡國)을 슬퍼한 다음과 같은 시도 명작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눈 속에 옛 나라 빛이 새로운데

        종이 울려 亡國恨이 더욱 쓸쓸하구나.

        시름에 겨워 다락에 홀로 기대섰으니

        옛 성터에는 저녁연기만 그윽하다.


        雪中前朝色

        寒鐘故國聲

        南樓愁獨立

        殘廓暮烟香


그는 기생으로 살았으면서도 성리학(性理學)의 석학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비롯하여 풍류객(風流客)으로 이름 높은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대감과 음률계(音律系)의 대가였던 이사종(李士宗) 같은 당대 최고의 인물들하고만 교유(交遊)하였다지 않던가. 


그러면서도 죽을 때에는 많은 남성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을 크게 뉘우쳐 “자기시체를 한길 가에 묻어 많은 사람들이 맘대로 밟고 지나가게 해 달라”고 유언(遺言)까지 했다고 하니 그가 바로 성녀(聖女)라는 생각이 들어 김삿갓은 더욱 그 무덤을 찾아보고 싶었다.


79. 황진이(黃眞伊) 무덤(墓)은 찾을 길 없고


그로부터 2,3일 동안 김삿갓은 장단(長湍) 땅을 샅샅이 뒤지고 돌아다녔지만 황진이(黃眞伊)무덤은 찾을 수 없었다. 하찮은 벼슬아치들의 무덤들은 잘도 알면서 천하명기(天下名妓) 황진이(黃眞伊)의 무덤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아, 이렇게까지 애를 써도 황진이(黃眞伊)의 무덤은 찾을 길이 없으니 아마도 황진이(黃眞伊)와 나와는 전혀 인연(因緣)이 없는가 보구나. 


김삿갓은 마침내 황진이(黃眞伊)의 무덤에 술 한 잔 부어놓고 그 넋을 위로(慰勞)하려던 뜻을 단념(斷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처량(凄涼)한 생각이 들어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데 문득 눈을 들어 바라보니 저 멀리 산골자기에는 매화꽃(梅花)이 곱게 피어 있고, 개울가에는 버드나무숲속에서 꾀꼴새가 영절(英節)스럽게 울어 대고 있었다.


김삿갓의 눈에는 그러한 모든 풍경이 마치 황진이(黃眞伊)의 환상처럼 보였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다음과 같은 시를 읊고 있었다.


     술을 들며 노래하고 싶어도 옛 사람은 없고 

     꾀꼴새 울음소리만 마음을 괴롭히네.

     강 건너 버들가지는 마냥 싱그럽고

     산골자기 들어서니 매화 향기 봄 같구나.


     對酒欲歌無故人

     日聲黃鳥獨傷神

     過江柳絮晴獨雷

     入峽梅花香如春


     이곳은 關河여서 오고 가는 길목이라

     날마다 말 수레의 티끌에 부대끼네.

     임진나루 북쪽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나그네의 시름이 갖가지로 새롭구나.


     地接關河來往路

     日添車馬迎送塵

     臨津關外萋萋草

     管得覇愁百種新


황진이(黃眞伊)는 생전에 많은 남성들을 희롱(戲弄)해 온 일이 무척 뉘우쳐 져서 "내가 죽거든 많은 사람들이 나의 백골(白骨)을 마음대로 밟고 지날 수 있도록 길가에 묻어 다라." 는 유언(遺言)을 남겼다기에 김삿갓은 그 일을 생각하며 이러한 시를 읊은 것이었다.


80. 요강(尿綱)


황진이(黃眞伊) 무덤 찾기를 단념한 김삿갓은 고려의 도읍지 송도(松都)로 가던 길에 철쭉꽃(躑躅花)이 많기로 유명한 진봉산(進鳳山)에 올라 지금 한창 제철을 만나 흠뻑 피어 있을 철쭉꽃을 보기로 했다. 자고로 봉산척촉(鳳山躑躅)이라 하여 송도팔경(松都八景)의 하나라더니 과연 허언(虛言)이 아니었다.

 


꽃에 취한 김삿갓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헌화가(獻花歌)에 나오는 고사처럼 수로부인(水路夫人)에게라도 받치려는 듯 벼랑에 핀 꽃을 겪으려다가 그만 실족하여 발목을 심하게 삐고 말았다. 아픈 다리를 끌고 내려오다가 다행히 한 스님을 만나 천석사(泉石寺)라는 산사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이 절의 주지 범어(梵魚)스님은 김삿갓을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작년에 금강산(金剛山)에 갔다가 공허(空虛)스님으로부터 삿갓선생의 이야기를 들었노라며 글짓기 내기를 청하기도 하고 시문답을 하기도 하면서 각별한 대접(待接)을 하였다. 밤이 되면 불편한 다리를 염려하여 방에 요강(尿綱)까지 들여 주었다.


김삿갓은 지금까지 요강(尿綱) 같은 것에 대해서는 관심(關心)조차 가져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다리를 다치고 보니 요강(尿綱)처럼 요긴한 물건도 없고, 범어(梵魚)스님의 친절이 하도 고마워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음과 같은 익살스러운 시 한 편을 지었다.


      네 덕분에 한밤중에 드나들지 않게 되고

      누운 곳 가까이에 이웃해 친근하구나.

      취객은 너를 끌어당겨 단정히 무릎을 꿇고

      어여쁜 아가씨 타고 앉아 옷 젖을까 벌이누나.


      賴渠深夜不煩扉

      令作團隣臥處圍

      醉客持來端膝?       

      態娥挾坐惜衣收


      단단하게 생긴 모습 구리 산 형국이요

      오줌 눌 때 그 소리는 폭포수 같도다.

      가장 요긴한 때는 비바람 치는 새벽녘이니

      느긋한 성품 길러 사람을 살지게 하는구나.


      堅剛做體銅山局

      灑落傳聲練瀑飛

      最是功多風雨曉

      偸閑養性使人肥 악암(岳岩)


....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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