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道德經) 제3장(第三章)
노자(老子)에 있어서 중요개념(主要槪念)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무위(無爲)’는 개인적인 욕망에 이끌리지 않고 대자연의 원리(原理)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하며, ‘자연(自然)’이란 만물이 변화하고 율동(律動)하는 상태를 말한다.
도덕경(道德經) 제3장(第三章)
[원문]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盜,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不敢爲也. 爲無爲, 則無不治.
[해석] 현자(賢者)를 숭상(崇尙)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투지 않을 것이고, 얻기 어려운 재화(財貨)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백성들이 도적질하지 않을 것이며, 백성들이 욕망(欲望)할 바를 드러내지 않으면 백성들이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을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성인(聖人)의 다스림은 백성들의 마음을 텅 비게 하고 배를 건실하게 하며, 백성들의 뜻을 약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한다.
항상 백성들로 하여금 앎이 없고 바람이 없게 한다. 지혜를 가졌다고 자부(自負)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행동하지 못하게 한다. 무위(無爲)를 실행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卞廷煥 譯)
[주해]
1) 숭상할 상(尙); 높이다, 받들다, 자랑하다.
2) 구체적 사물에 대한 인식을 제거하는 것이다. 노자(老子)는 구체적 사물에 대한 인식은 거리, 명암 그리고 인식자의 심리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한갓 선입견, 고정관념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궁극적 존재인 도(道)를 이해하려면 구체적인 사물에 대한 분별적 인식을 제거해야 한다. 무지(無知)에서의 무(無)는 제거하다, 없애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3) 지나친 물질적, 정신적 욕구를 자제하라는 의미이다. 여기서의 욕(欲)은 기본적인 생리적(生理的) 요구가 아니라 생존과는 상관없는 과도한 욕구를 의미한다. 노자가 긍정(肯定)하는 것은 식(食)과 색(色)이라는 생리적 욕구의 기본적 충족(充足)이다.
[정의] 중국 도가철학의 시조인 노자(老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책.
[서지적 사항] 『노자』 또는 『노자도덕경』이라고도 한다. 약 5,000자, 81장으로 되어 있으며, 상편 37장의 내용을 「도경(道經)」, 하편 44장의 내용을 「덕경(德經)」이라고 한다. 노자가 지었다고 하나 한 사람이 쓴 것이라고는 볼 수 없고, 여러 차례에 걸쳐 편집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기간 동안 많은 변형 과정을 거쳐 기원전 4세기경 지금과 같은 형태로 고정되었다고 여겨진다.
여러 가지 판본이 전해 오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 하상공(河上公)이 주석한 것으로 알려진 하상공본과, 위(魏)나라 왕필(王弼)이 주석하였다는 왕필본의 두 가지가 있다.
그리고 전문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둔황(敦煌)에서 발견된 당사본(唐寫本)과 육조인사본(六朝人寫本)이 있고, 여러 곳에 도덕경비(道德經碑)가 아직도 흩어져 있어 노자의 경문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근년에 후난성(湖南省)창사(長沙)의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백서노자(帛書老子)와 색담사본도덕경(索紞寫本道德經)은 『도덕경』의 옛 형태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원래 『도덕경』은 상·하로만 나누어졌을 뿐이지만, 장구지학(章句之學)이 성행한 한대(漢代)에 들어와서 장·절로 나누어졌다고 보인다.
[개설] 『도덕경』의 구성 체재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였고, 성립 연대 및 실질 저자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는데, 한 사람이 한꺼번에 저술하였다는 관점과 도가학파의 손에 의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당시의 여러 사상을 융합시켜 만들어진 것이라는 관점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한 사람의 전작물임을 주장하는 관점은 노자를 공자(孔子)와 같은 시대의 실존인물로 보아 『도덕경』을 그의 작품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부정하는 관점은 노자가 가공인물이라는 점과, 또한 비록 실존인물이라 하여도 『도덕경』과는 상관이 없다는 관점에서 현존하는 『도덕경』은 여러 사람에 의하여 오랜 기간 동안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경』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많은 문제점과 상반된 처지에도 불구하고, 『도덕경』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기본 사상이 변함없이 계속해서 일관성을 유지해 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도덕경』의 사상은 한마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위는 ‘도는 언제나 무위이지만 하지 않는 일이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의 무위이고, 자연은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天法道道法自然).’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도덕경』의 사상은 모든 거짓됨과 인위적인 것에서 벗어나려는 사상이다.
좋다·나쁘다, 크다·작다, 높다·낮다 등의 판단들은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비교하여 만들어낸 상대적 개념이며, 이런 개념들로는 도(道)를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상대적 개념들의 집합체이므로 『도덕경』에서는 언어에 대한 부정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 점에서 유가사상과 현격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유가사상에서는 인위적 설정이 강조되는 예학(禮學)이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으며 언어에 의한 규정이 강력하게 요청되기 때문이다.
반면, 『도덕경』에서는 규정성의 파기와 언어에 대한 부정을 강조하는데, 유가사상이 중국 북방의 황하유역에서 형성된 것인 반면, 이런 무위자연의 사상은 중국 남방의 양쯔강유역에서 형성되었다는 기질적인 차이로 설명되기도 한다.
즉, 북방은 생존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실적이고 투쟁적이어야 하지만, 남방은 날씨가 온화하고 자연 조건이 순조로워 평화적이고 낭만적이었는데, 이런 분위기의 차이가 사상 형성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유가사상이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덕목을 설정하여 예교(禮敎)를 강조하면서 현실적인 상쟁대립이 전제된 반면, 『도덕경』의 사상은 상쟁의 대립이 인위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생긴다고 보고, 무(無)와 자연의 불상쟁(不相爭) 논리를 펴나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도덕경』의 사상은 학문적인 진리 탐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위·진, 남북조시대처럼 사회가 혼란과 역경에 빠져 있을 때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지혜를 밝혀 주는 수양서로서도 받아 들여졌으며, 민간신앙과 융합되면서 피지배계급에게 호소력을 지닌 사상 및 세계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우리 나라 자료에는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2 근구수왕 즉위년조에 근구수왕이 태자로 있을 때 침입해 온 고구려군을 패퇴시키고 계속 추격하려 하는 순간, 휘하의 장수 막고해(莫古解)가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듣기로는 도가의 말에, 족함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제 얻은 것이 많은데 더 욕심을 내어서 무엇합니까?” 이 말을 듣고 추격이 중지되었다고 하는데, 이 구절은 『도덕경』 제44장에 나오는 말이다.
『도덕경』의 구절이 장수의 입에까지 오를 정도였다면 당시 사회에서는 상당히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졌던 것임에 틀림이 없고, 나중의 일이지만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도 비슷한 내용의 시를 수나라 장수에게 보낸 것이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다.
『삼국유사』 보장봉로조(寶藏奉老條)에는 당나라 고조(高祖)가 고구려인의 오두미교 신봉 이야기를 듣고 624년 천존상과 함께 도사를 보내어 『도덕경』을 강론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듬해 영류왕은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불(佛)·노(老)를 배우고자 하였고, 고조는 이를 허락하였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보장왕이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건의에 따라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배우도록 하였는데, 당나라 태종(太宗)이 도사 8명과 『도덕경』을 보내 주자 왕은 기뻐하며 승사(僧寺)를 지어 도사를 거처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신라에서는 575년 화랑도를 만들고 그 정신을 현묘지도(玄妙之道)라 칭하였는데, ‘현묘’라는 말은 『도덕경』 제1장에 나오는 ‘현지우현 중묘지문(玄之又玄衆妙之門)’을 연상시키는 용어로 도가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한 상황에서 도술연구에 골몰하였던 김가기(金可紀)에 대해서는 홍만종(洪萬宗)의 『해동이적(海東異蹟)』에 나타나 있는데, 그는 『도덕경』을 비롯하여 여러 선경(仙經)을 계속해서 낭송하고 수련을 계속한 끝에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고려 때는 왕 중에서도 도교신앙이 제일 돈독하고 재위 당시 도교가 융성하였던 예종이 청연각(淸燕閣)에서 한안인(韓安仁)에게 명하여 『도덕경』을 강론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유교경전과 대등하게 다루어서 강론시켰을 정도이므로, 당시 『도덕경』을 연구하던 사람의 숫자도 많았고 수준도 높았으리라 짐작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엄격한 주자학적 사상(朱子學的思想)과 그 배타적 성격 때문에 『도덕경』에 대한 연구가 위축되었지만, 유학자들 가운데서 주석서를 펴내어 끊임없는 관심을 보여 주던 사람들이 있었다.
박세당(朴世堂)은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을 저술하였고, 이이(李珥)는 『도덕경』 81장을 40여 장으로 줄여 『순언(醇言)』이라는 주석서를 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도덕경』에 관한 관심은 희박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신 이외는 모든 사상을 이단으로 보는 성리학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덕경』의 기본 흐름은 일찍부터 도교신앙과 접합되어 오면서 민중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혀 기층의 민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