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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사전 - 한당(韓當)

[삼국지 인물사전 - 한당(韓當)] 


한당(韓當, ? ~ 227년)은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장수로, 자는 의공(義公)이며 유주(幽州) 요서군(遼西郡) 영지현(令支縣) 사람이다.

생애
활쏘기와 말 타기에 뛰어나고 체력(體力)도 있는데다가 병사들을 유난히 아끼고 사랑해서 손견에게 총애(寵愛)를 받고 부하들 역시 한당(韓當)을 믿고 따랐다. 그는 손견(孫堅)을 수행하여 정벌 나가 각지를 다녔다. 자주 위험하고 어려운 곳에 임하여 적을 격파시키고 포로(捕虜)를 잡아 별부사마(別府司馬)로 임명되었다.

손책(孫策)이 강동을 건넜을 때 세군을 토벌하는 데 참가하여 선등교위(先登校尉)로 승진하고 병사 2천명과 기마 50필을 받았다. 그는 유훈을 정벌하는데도 참가했으며 황조를 격파하고 돌아올 때 파양(鄱陽)을 토벌하여 악안현장을 겸임했다. 산월(山越)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복종했다.

한당은 이후에 중랑장(中郞將)의 신분으로 주유(周瑜)와 함께 조조(曹操)에 대항하여 무찔렀고, 또 여몽(呂蒙)과 함께 남군(南郡)을 습격하여 취했다. 편장군(偏將軍)으로 승진했으며, 영창태수(永昌太守)를 겸임했다. 의도의 전역에서는 육손(陸遜) · 주연(朱然) · 반장(潘璋) · 주태(周泰) 등과 함께 탁향에서 촉(蜀)의 군대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시켰으며 이로 인해 위열장군(威烈將軍)으로 승진했고 도정후(都亭侯)로 봉해졌다. 조진(曹眞)이 남군을 공격할 때 한당(韓當)은 동남쪽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밖에서는 장수(將帥)가 되어 부장들과 사졸들을 격려하여 한마음으로 굳게 지키도록 했고 또 상사(上司)를 존경하고 법령을 받들어 준수하였다. 손권(孫權)은 이 때문에 그를 좋아했다.

황무(黃武) 2년(223년), 한당(韓當)은 석성후로 봉해졌고 소무장군으로 승진했으며 관군태수를 겸임하였다. 후에 또 도독(都督)의 칭호를 더했다. 감사군(敢死軍)과 해번병(解煩兵) 1만 명을 인솔하여 단양(丹陽)의 도적들을 토벌하러 가서 무찔렀으나 질병으로 사망했다. 아들 한종(韓綜)이 후작을 계승하여 군대를 통솔(統率)했다.

오(吳)의 장수로 손견(孫堅), 손책(孫策), 손권(孫權)까지 3대에 걸쳐 섬긴 고참장수이다. 양주 침공, 적벽전투, 관우 토벌전, 이릉 전투 등 수많은 싸움에 황개(黃蓋), 정보(程普)등과 함께 참전해 오나라 수군의 일약(一躍)을 담당했다.

손권 휘하의 장수(將帥)로서 요서 영지 사람으로 자는 의공(義公)이다. 유표를 칠때 등성 싸움에서 적장 장호를 한 칼에 베었고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는 격전 중 화살을 맞고 물에 떨어졌던 황개(黃蓋)를 건져내었다.

한당(韓當)은 변방에서 군대 지휘를 맡으면 언제나 부하를 격려(激勵)하고 방심하지 않고 수비를 단단히 했다. 중앙에서 파견된 감찰관(監察官)의 의견에 따라 법령을 준수했기 때문에 손권(孫權)은 그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손견 막하의 용장이며 요서 영지(遼西令支) 사람으로 자는 의공(義公)이다. 유표(劉表)를 칠 때 등성(鄧城) 싸움에서 적장 장호(張虎)를 한 칼에 베었고 적벽 대전에서는 격전 중에 살을 맞고 물에 떨어졌던 황개(黃蓋)를 건져내었다.

유수(濡須) 싸움에서는 주태(周泰)와 함께 거의 조조를 잡을 뻔한 일도 있었으며 육손(陸遜)과 같이 촉한(蜀漢)의 유비 군대를 탁향( 鄕)에서 크게 파했다. 석성후(石城侯)를 봉하고 도독(都督)의 칭호를 받았으며 병으로 죽었다.

후한 말과 삼국시대(三國時代) 오나라의 인물이며 자는 의공(義公)이다. 유주 요서군 영지현 사람으로 오나라 인물(人物)들 중 찾아보기 힘든 최북방 출신이다.

황개, 정보와 함께 손가 3대를 받든 오의 숙장(宿將)으로 셋 중 가장 오래 살았다. 그러나 자식을 잘못 둔 탓에 죽고 나서 위나라 땅에 묻혀버렸다. 생전보다 사후가 더 불행(不幸)한 인물이다.

한당(韓當)은 활쏘기와 말 타기에 능숙하고 힘이 세어 손견에게 신임(信任)을 받았고 정벌에 따라 두루 돌아다녔으며 수차례 위험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적을 무너뜨리고 사로잡아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되었다.

오서에 따르면 한당(韓當)은 근로와 고생함 속에서도 공을 세웠으나 군대의 하인으로서 영웅호걸(英雄豪傑)들에게 분속되었기에 작위를 더해주지 못하고 손견이 세상을 떠날 때 별부사마로 삼은 것이다.

손책이 동으로 장강(長江)을 건너 3군을 토벌하는데 따라가니 선등교위로 승진하여 병사 2천 명과 기병 50필을 받았다. 유훈(遺訓)을 정벌하는데 따라가 황조를 격파하고 돌아와 번양을 토벌(討伐)하며 낙안현장을 맡으니 산월족(山越族)들이 두려워하며 복속(服屬)하였다. 후에 중랑장(中郎將)으로 주유 등과 함께 조조를 막아 격파했다.

 

적벽대전
황개전 주석 오서에 따르면 적벽(赤壁)의 전투 중에 황개는 유시(流矢)에 맞아서 차가운 날씨에 물속에 추락(墜落)하였는데 오나라 군대 사람들에게 구해졌지만 그들은 황개인지 몰라 측간(廁間) 중에 두었다. 황개는 자기 힘으로 큰 소리를 내어 한당(韓當)을 부르니 한당이 이를 듣고 말했다. 이는 공복(黃蓋)의 소리다. 그에게 향해 가서 눈물을 흘리며 그의 옷을 풀어 바꿔 입으니 마침내 살아나게 되었다.

장패전에 따르면 장료가 진란을 토벌(討伐)하던 때에 장패는 별동대로써 환현에 진출하여 오의 장수 한당(韓當)을 격파하여 손권이 진란(陳蘭)을 구원하는 것을 막아냈다. 한당은 병사를 보내어 장패(臧覇)에 대항하였으나 장패는 이들과 봉룡에서 싸웠고 한당이 재차 병력을 보내어 협석에서 장패를 영격(迎擊)하였으나 장패는 더불어 싸워 이를 격파하고 귀환(歸還)하여 서구에 주둔하였다. 또한 여몽과 함께 남군을 습격해 취하니 편장군으로 승진(昇進)하고 영창태수가 되었다.

의도의 전역 때에는 육손, 주연 등과 함께 촉을 공격(攻擊)했다. 탁향에 주둔하며 촉을 대파(大破)하니 위열장군(威烈將軍)으로 승진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

조진이 남군을 공격하자 한당(韓當)이 동남쪽을 막아내었다. 외방에서 사령관으로 있으며 장수와 병사들을 고무(鼓舞)하여 힘쓰게 하여 한마음으로 굳건히 수비하고 또한 감찰관(監察官)을 공경히 바라보고 법령을 받들어 준수(遵守)하니 손권이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오서(吳書) 한당전(韓當傳)’에 따르면 한당은 활쏘기와 말타기에 뛰어나고 힘이 장사라 손견(孫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손견을 따라 정벌(征伐)에 나서 여러 차례 죽을 위기를 겪으면서도 전공을 세워서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임명되었다. 191년 손견(孫堅)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인 손책(孫策)을 수행했으며, 손책이 강동(江東) 정벌에 나섰을 때 회계(會稽)・오(呉)・단양(丹陽) 3개 군(郡) 토벌에 참가하여 선등교위(先登校尉)가 되었다. 손책이 유훈(劉勲) 토벌에 나섰을 때에도 참가해 지원군(支援軍)으로 온 황조(黄祖)를 물리쳤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파양(鄱陽)을 정벌하고 낙안(樂安)의 현장(縣長)을 겸하였는데 소수민족들인 산월(山越)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며 복종(服從)했다고 한다.

그 뒤 중랑장(中郞將)으로 임명된 한당(韓當)은 208년 적벽(赤壁)의 전투에서 주유(周瑜)와 함께 조조(曹操)의 군대를 무찔렀고 219년에는 여몽(呂蒙)과 함께 남군(南郡, 江陵)을 기습하여 점령했다. 그 뒤 편장군(偏將軍)으로 승진한 한당은 영창태수(永昌太守)를 겸했다. 221년, 촉(蜀)나라가 오나라를 침공(侵攻)해왔을 때에는 육손(陸遜)·주연(朱然) 등과 함께 탁향(涿鄉)에서 촉나라 군대에 큰 승리를 거두어 위열장군(威烈將軍)으로 임명되고 도정후(都亭侯)로 봉해졌다. 위(魏)나라의 조진(曹眞)이 남군을 침공해왔을 때에는 성의 동남부를 방어(防禦)를 맡았다.

223년, 한당은 소무장군(昭武將軍)으로 임명되고 석성후(石城侯)로 봉해졌으며 관군태수(冠軍太守)를 겸하였다. 또한 뒤에 도독(都督)의 칭호도 받았다. 단양군(丹陽郡)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1만여 명의 감사군(敢死軍)・해번병(解煩兵)을 거느리고 토벌에 나서 평정(平定)하였다. 하지만 병으로 죽었고 그의 아들인 한종(韓綜)이 한당의 지위를 계승해 병사들을 이끌었다.

그해에 손권은 조비(曹丕)가 죽은 틈을 타서 석양(石陽) 정벌에 나서면서 상중인 한종에게 무창(武昌)을 지키게 하였으나 한종(韓綜)은 근신하지 않고 음란한 행동을 벌였다. 손권(孫權)은 한당의 공을 기려서 한종을 벌하지 않았으나 손권의 처벌을 두려워한 한종은 한당(韓當)의 시신을 싣고 가족과 함께 위나라로 투항했다. 위나라에서 광양후(廣陽侯)로 봉해진 한종은 오나라를 여러 차례 침공했다가 252년 동흥(東興)에서 오나라에 패해 목숨을 잃었다.

“삼국지”에는 한당이 전쟁터에서 장수로서 부하 장병(將兵)들을 격려해 한마음으로 나라를 굳게 지켰으며 조정(朝廷)의 의견을 잘 따르고 법령을 준수하여 손권의 두터운 신임(信任)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한당(韓當)이 황개(黄蓋)·정보(程普)·조무(祖茂)와 함께 장사태수(長沙太守) 손견을 수행해 사수관(汜水關) 공략에 참여했으며 큰 칼을 잘 썼다고 묘사되어 있다.

병들어 죽으니 아들 불한당 한종(韓綜)이 후작을 잇고 병사를 영솔(領率)했다. 이렇게 그의 행적을 보면 오의 훌륭한 충신(忠臣)이지만 아들 교육 하나를 제대로 못한 것 때문에 그의 사후(死後)는 매우 씁쓸하다.

227년 손권(孫權)이 석양 정벌을 떠나면서 그 해 부친상을 당한 한종에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무창(武昌)을 지키도록 하였다. 하지만 한종은 음란(淫亂)하고 법이나 도리를 지키지 아니한 짓을 하였다. 손권은 괘씸했지만 아버지 한당(韓當)을 생각해서 책문(責問)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종(韓綜)은 스스로 잘못을 알고 있어서 속으로 두려운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아버지 한당(韓當)의 관을 싣고 가족과 모친의 집안에 속한 부곡들 남녀 수천 명을 데리고 위나라로 달아났다. 위에서는 그를 장군으로 삼고 광양후에 봉했다. 그 뒤 한종은 수차례 오나라 변경을 침범(侵犯)하고 백성들을 살해하여 손권(孫權)이 항상 이를 갈았다.

후일 동흥제 전투 당시 한종이 위의 선봉으로 오의 정봉과 맞섰다. 하지만 위에 와서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적과 대치(對峙)중인데도 술을 마시고 잔치를 즐기다 결국 패하고 전사(戰死)했다. 제갈각(諸葛恪)은 생전 손권이 그를 증오한 것을 기억해 그 머리를 베어 손권(孫權)의 묘에 가져다바쳤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손견의 휘하 장수로서 큰 칼을 잘 쓰는 용장(勇將)이었다. 동탁 토벌전 때부터 종군(從軍)하여 많은 전공을 올린다. 반동탁 연합군에 참가한 손견이 데려온 사천왕(四天王)으로 황개, 정보, 조무와 함께 첫 등장한다.

손견군이 유표의 양양성을 공격할 때 황조의 부장 장호가 똑같이 대도를 쓰는 걸 보고 일기토를 떠 장호를 죽인다. 이후 거센 바람 때문에 깃발이 부러지자 한당(韓當)은 손견에게 좋은 징조(徵兆)가 아니니 군사를 거두라고 진언했지만 손견은 듣지 않았다. 이후 손견은 황조(黃祖)를 추격하다가 전사한다.

손책(孫策)의 강동 평정에 종군한다. 손책군이 엄백호군(嚴白虎軍)을 공격할 때 한당(韓當)을 보내 엄여와 싸우게 하고 그동안 뒤로 돌아간 장흠과 주태가 엄여를 공격하니 엄여는 패해 성으로 도망쳤다. 이후로도 군의 중핵(中核)으로서 여러 곳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특히 주태(周泰)와 함께 출전한 전투가 많았다.

적벽대전(赤壁大戰) 직전 조조군의 선봉대를 주태와 함께 영격해 초촉을 죽였다. 황개가 적벽에서 조조군의 함선들을 불태우고 화살에 맞아 강에 빠지지만 한당(韓當)이 황개를 구했다.

남군 공방전에서 주유(周瑜)가 죽은 척한 뒤 조인을 유인하여 대파하는데 여기에 한당(韓當)도 참여한 것으로 언급된다. 정사에서 한당은 이 시기에 진란을 구원하러 갔으니 여기에 있을 수가 없다. 한당이 남군을 습격(襲擊)해 취했다는 기록은 여몽이 주도로 나와 있으니 번성공방전(樊城攻防戰) 시기이다.

이릉대전(夷陵大戰)에서 서전에 주장이 되고 주태를 부장으로 삼아 10만 정예병을 이끌고 촉군(蜀軍)과 싸우다가 관흥, 장포, 황충, 사마가 등에게 대패하였다. 한당(韓當)이 손견 또래로서 이미 70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그런 묘사 없이 잘만 싸운다. 이후 대도독(大都督)이 된 육손을 어리다고 깔보고 반목(反目)하다가 육손(陸遜)의 계책에 감복하여 효정산에서 촉군을 크게 물리친다. 정사에서 육손을 갈구는 장수들의 이름들은 나오지 않았는데 단지 한당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악역(惡役)을 떠맡은 것이다.

북쪽인 요서 지방 출신임에도 남방(南方)의 험한 기후에서 꽤 오래 살았다. 오나라의 요절 불운(不運)을 빗겨간 사례 중 하나이다.

초창기부터 직위(職位)를 자세히 보면 그다지 높지가 않다. 뛰어난 경력과 풍부한 연륜(年輪)을 감안하면 의외인 경우이다. 말년에도 역시 활동 기간이 긴 것에 비해서 직위는 생각보다 높지 못하다. 출신지가 동떨어져서 강동(江東)의 호족들에게 출세에서 밀린 것 같기도 하다. 국내 삼덕(三德)들이 종종 불한당(不漢黨)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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