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국내에서 ‘홍루몽(紅樓夢)’ 최초의 운명은 매우 굴곡적(屈曲的)이었는바 일부 사람들은 "유행 바이러스"라고도 여겼다.
1793년 11월 23일, "인이호"로 불리는 화물선(貨物船)이 절강의 한 항만에서 출발해 20여 일간의 항해를 거쳐 12월9일 일본 나가사끼항에 도착했다. 당일 화물을 검사할 때 67종의 중국도서(中國圖書)를 발견했는데 그중 이름이 ‘신수전부수상 홍루몽’이고 총 9부 18조로 되여 있었다. 이것이 바로 향후 전 세계를 풍미(風味)한 오늘날의 ‘홍루몽(紅樓夢)’이였으며 그때의 항로가 ‘홍루몽(紅樓夢)’이 해외로 진출한 최초 기록으로 남게 되였다.
19세기 일본, 조선을 풍미 : 문화적 연원(淵源)으로 말미암아 당시 일본의 많은 문인들은 한자(漢字)를 읽고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중문판 ‘홍루몽(紅樓夢)’을 열독함에 있어서 어려움이 존재하지 않았다. ‘홍루몽(紅樓夢)’은 고유의 독특한 예술적 매력으로 일본문인(日本文人)들의 강렬한 주목과 사랑을 받게 되였다. 명조이후 일본의 외국어학교에서 중국어를 가르칠 때 남경 말을 기초로 했지만 ‘홍루몽(紅樓夢)이 전해진 후로 그들은 북경말로 바꿔 가르쳤으며 ’홍루몽(紅樓夢)‘은 학생들의 필수교재로 되였다.
문화적 친연관계로 ’홍루몽(紅樓夢)‘은 이웃나라 조선에 대해서도 고조를 일으켰다. 1800년 전후 이미 중문, 한글 대조번역본(對照飜譯本) ’홍루몽(紅樓夢)‘이 출현했다. 이 번역본은 조정문관(朝廷文官)이 명령을 받고 왕비와 궁녀를 위해 제공한 심심풀이를 위한 독서였다고 한다. ’홍루몽(紅樓夢)‘의 심원한 영향을 받아 조선반도(朝鮮半島)의 문인들은 풍격이 비슷한 작품 ’옥루몽(玉樓夢)‘, ’구운몽(九雲夢) 등을 창작했다.
서방에서 수차례 고조를 일으켜 : 비록 최초 서양인이 소개, 번역한 ‘홍루몽(紅樓夢)’은 중문을 학습하는 교재로 쓰였지만 중국 명작(中國名作)에 대한 인식이 깊어짐에 따라 많은 국가에서는 ‘홍루몽(紅樓夢)’에 관심을 가진 애독자와 연구자들이 나타났다.
1892년, 오문주재 영국 부총령사를 역임했던 큐리는 ‘중국소설(中國小說) 홍루몽(紅樓夢)’을 번역, 발행했는데 이는 영국에서 출판된 최초의 ‘홍루몽(紅樓夢)’ 단행본이며 서방 각국에 전해진 최초의 번역본(飜譯)本이기도 하다. 1910년에 출판한 ‘영국백과전서’에서는 ‘홍루몽(紅樓夢)’은 매우 고급적인 작품이며 줄거리가 복잡하고 독창성(獨創性)이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독일의 한 한학가는 1932년에 독일문 번역본 ‘홍루몽(紅樓夢)’을 출판했다. 이후로 ‘홍루몽(紅樓夢)’은 독일에서 황금시기를 맞이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 기타 국가에도 광범위한 반향(反響)을 일으켜 선후로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어, 포르투갈어, 화란 등 어종의 ‘홍루몽(紅樓夢)’이 나타났다.
러시아에서 ‘홍루몽(紅樓夢)’은 지식인사이에서만 널리 읽혀진 것이 아니라 한학가(漢學家)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에서 19세기 출판된 ‘프랑스대백과전서’ 중에서는 이미 ‘홍루몽(紅樓夢)’을 언급했고 20세기 30년대에 이르러 ‘홍루몽(紅樓夢)’은 프랑스어 번역본이 나타났다. 프랑스어로 된 ‘홍루몽(紅樓夢)’이 정식으로 출판된 후 프랑스 평론계에서는 ‘홍루몽(紅樓夢)’ 작가 조설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도로 찬양했다. 바로 "조설근(曹雪芹)은 브루스터의 예민한 안광, 톨스토이의 동정심, 발자크의 관찰력(觀察力)을 갖고 있으며 사회에서 우로부터 아래에 이르는 각 계층의 능력을 재현했다"는 것이다. 서반아(西班牙; 에스파냐)에서 ‘홍루몽(紅樓夢)’ 번역본은 1988년 9월에 이르러 처음으로 나타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서반아(西班牙)에서 "홍루몽 열풍"을 일으키게 되였다.
오늘날까지 ‘홍루몽(紅樓夢)’은 이미 영국, 프랑스, 일본, 한국, 러시아, 독일, 서반아(西班牙) 등 국가의 20여종 언어로 번역되었다. 200여년 이래 중국 고대문화 결정으로서의 ‘홍루몽(紅樓夢)’은 특유한 매력으로 수많은 독자들을 탄복시켰고 세계 각국의 각 지역에 거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대관원(大觀園) 대관원(大觀園)은 중국의 고전명작 ‘홍루몽(紅樓夢)’에 묘사된 관부원림을 말한다. 1984년에 텔레비전극을 촬영하기 위해 북경시 서남쪽 남채원(南菜園)에 대관원(大觀園)을 만들었다. 전문가와 학자들의 연구와 설계에 근거 하여 고대건축규범과 전통적인 조원예술수법에 따라 벽돌과 목조구조(木造構造) 설계와 시공으로 하였는데 집 형식과 건축자재, 산형태와 수계, 식물배치 와 소품배치 등은 모두‘홍루몽(紅樓夢)’ 원작에서 묘사된 장면과 청나라의 시대적 풍모에 부합되게 하려고 최선을 다 하였다.
전원의 부지면적은 12500m2이다. 대관원은 북경시 서남 선무구역 변두리의 성호반에 위치 해 있다. 원래는 명, 청시기 황실채마전이었다. 부지면적은 13만㎡. 그 중 수면이 2만 4,000㎡. 원내에는 정원, 누각, 정자 수백 칸이 있는데 전형적인 청나라 때의 관가원림이다. 대관원은 북경시 관계부문에서 1980년대 중반에 중국 고전문학(古典文學)의 대표작인 유명한 고전소설 홍루몽(紅樓夢)‘에 묘사된 장면을 현실로 만들었으며 조설근의 예술적 경지를 재현하여 건조한 정원식 공원이다. 원내의 건축물은 중국 고전건축기법(古典建築技法)과 전통적인 원립조성 기예를 채용(採用)하고 원저에 묘사된 시대적 풍격에 충실하며 화초, 수목의 재배, 산형, 수계의설계로부터 실내장식과 인물 조각에 이르기까지 18세기 청나라 귀족가원(貴族家園)의 풍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상해세계박람회 백 년 전에 예견한 사람들 : 한 달 후에 막을 올리게 되는 상해세계박람회(上海世界博覽會)가 백여 년 전에 이미 여러 작가들에 의해 묘사(描寫)되었다고 한다.
1902년 11월, 양계초(梁啓超)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창간된 ’신소설‘잡지에 ’새 중국의 미래‘란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소설에서 그는 상해세계박람회(上海世界博覽會)에 대한 구상을 이렇게 말하였다. "그때면 우리 국민들은 상해지방에서 큰 박람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 박람회는 예사로운 박람회와는 달리 상무나 공예품만이 아닌 각종 학문, 종교가 다 모인 연합대회로 될 것이다" 양계초(梁啓超)는 세계박람강국의 꿈을 소설로 표현했던 것이다. 양계초(梁啓超; 1873~1929): 중국근대의 저명한 정치 활동가, 계몽사상가, 자산계급선전가, 교육가, 사학가와 문학가. ’무술변법(백일유신이라고도 함)‘의 영도자의 한사람으로 문체개량의 ’시혁명‘과 ’소설혁명(小說革命)‘을 창도했다.
1905년 청말 소설가 오견인(吳趼人; 1867~1910)은 ’신홍루몽(新紅樓夢)‘을 발표한다. 소설에는 가보옥(賈寶玉)이 세계박람회(世界博覽會)를 참관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가보옥이 친구에 의해 잠에서 깨여나는데 그때 마침 상해(上海) 포동(浦東)에서 만국박람회(萬國博覽會)가 열리고 있었다. 친구는 이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로서 구경하지 않으면 꼭 후회한다고 말한다.
가장 핍진하게 상해세계박람회(上海世界博覽會)를 묘사한 사람은 그래도 청조 때의 소설가 육사악(陸士諤; 1878~1944)이다. 그의 환상소설 ’새 중국(일명; 립헌 40주년후의 중국)‘에는 상해세계박람회(上海世界博覽會)가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가 꿈속에서 본 상해포동 만국박람회의 장면은 마치 현재의 상해와 흡사하다. 지하철이 건설되고 황포강(黃浦江)에 대교가 가로 놓이고 강 밑으로는 터널이 가로지난다. 그리고 포동은 개발되어 국제금융중심(國際金融中心)으로 되며 인민광장에는 상해대극장(上海大劇場)이 세워지고 길은 넓고 반듯하다.
그가 묘사한 지하철과 대교, 터널이 현재의 남포대교(南浦大桥)와 지하철1호선, 연안동로의 터널과 일치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육사악(陸士諤)의 환상소설 ’새 중국‘은 발표된 지 백년후인 지난 1월에 재판되어 그의 환상(幻想) 속에서 살고 있는 독자(讀者)들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