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연의(三國演義)’는 서기 184년 황건적(黃巾賊)의 난부터 서기 280년까지 중국 대륙(大陸)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집필한 중국의 대표적 연의(고전역사소설)로 명나라 때 나관중(羅貫中)이 쓴 책이다.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집필한 ‘삼국지(三國志)’와 배송지(裴松之)의 ‘삼국지주(三國志註)’에 수록된 야사(野史)와 잡기(雜記)를 근거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의 줄거리를 취하여 쓴 작품이다. 원래 이름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라 하여 모두 24권 240칙(則)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제갈량과 방통은 모두 ‘삼국연의’의 최고급 모사(謀士)이다. 나란히 일룡일봉(一龍一鳳)으로 불린다. 대은사(大隱士) 사마휘(司馬徽)는 일찍이 이들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복룡(伏龍), 봉추(鳳雛) 두 사람 중 하나를 얻으면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재주와 뜻에는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유비(劉備)는 한 때 용봉(龍鳳)을 둘 다 얻었는데 왜 천하를 안정(安定)시키지 못했을까?
1. 사대모사의 재지에는 시간차, 공간차, 음양차가 존재한다. ‘삼국연의’에는 4명의 비범한 모사(謀士)가 있다. 정욱(程昱), 서서(徐庶), 제갈량(諸葛亮), 방통(龐統)이다. 그들은 모두 수경선생(水鏡先生) 사마휘(司馬徽)와 내왕이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순서대로 재주가 '10배'나 차이가 난다고 스스로 겸손(謙遜)해 했다. 사실 그들은 유비(劉備)의 이성형제(異姓兄弟), 제갈의 동성형제(同姓兄弟), 조조의 동, 이성혼합형제(조, 하후씨 포함), 손씨부자형제, 사마가족과 마찬가지로 동문수학(同門修學)을 한 하나의 집단에 속한다. 그저 그들 간의 관계가 비교적 느슨하고 은형적(隱形的)이고 철학을 신법가(新法家), 신유가(新儒家)에서 다시 유법혼합(儒法混合)의 정신측면으로 갈라져서 추진했을 뿐이다. 그들 간의 소위 "10배"라는 것은 주로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난다. 첫째는 시간차(時間差)이다. 고수들은 왕왕 멀리 보고 참을성이 있어 출도(出道)하는 것이 보다 늦다. 이들 4사람이 출도(出道)한 순서는 정욱(程昱), 서서(徐庶), 제갈량(諸葛亮), 방통(龐統)이다. 둘째는 공간차(空間差)이다. 고수일수록 통제능력이 뛰어나서 관리범위가 넓다. 그리하여 십리지재(十里之才), 백리지재, 천리지재 등의 말이 나온 것이다. 그들의 처음에 세운 공적도 확실히 이와 같다. 정욱(程昱)은 동아현(東阿縣)을 취했고 서서(徐庶)는 번성(樊城)을 취했고 제갈량(諸葛亮)은 형주(荊州)를 취했고 방통(龐統)은 서천(西川)을 취했다.
우리는 알고 있다.정욱(程昱), 제갈량(諸葛亮)의 평생업적이 서서(徐庶), 방통(龐統)의 그것보다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또 무슨 연고인가? 원래 그들은 세 번 째 방면의 차이가 있다. 바로 음양차(陰陽差)이다. 앞의 "10배"라는 것은 모두 표면적인 졸업시험성적이 된다. 우리는 이것을 지모(智謀) 혹은 양모(陽謀)라고 부를 수 있다. 다만 실전에서 어떤 사람들은 충효나 신의를 배신하고, 권모(權謀)나 음모(陰謀)를 쓴다. 4사람 중에서 방통(龐統), 서서(徐庶)는 양모에 능하고 제갈량(諸葛亮), 정욱(程昱)은 음모에 능했다. 그중 제갈량(諸葛亮)은 정욱(程昱)보다 뛰어났다. 양모에 충실한 사람들은 왕왕 충순(忠順)하고 음모에 정통한 사람은 왕왕 역반(逆反)한다. 여기서 설명할 것은 역모(逆謀)라는 것은 통치자에게 있어서는 맹수홍수와 같지만 '민족'이라는 생명체에 있어서는 이것은 불가결의 음양순역(陰陽順逆) 즉 신진대사이다. 그저 합리적이냐 비합리적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외에 병불염사(兵不厭詐, 병법에서는 속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손자(孫子)는 심지어 자기의 양모도 모두 궤계(詭計)로 보았다. 그리하여 음양과 충역은 모두 그 자체로 우열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 핵심은 균형 있게 양자를 장악하고 합리적으로 운용하면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음모는 공심술(攻心術)의 범주에 든다. 그러나 양존음비(陽尊陰卑, 양을 받들고 음을 낮추다)의 봉건사회에서 음모는 스승이나 책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이고 그저 스스로의 깨달음이나 스스로의 노력으로 익혀야 한다. 그러나 일단 보유하게 되면 출기제승(出奇制勝)할 수 있고 자기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정욱(程昱), 제갈량(諸葛亮)은 바로 모략에서 전면적이어서 서열(序列)에서 앞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방통(龐統)은 처음에는 완전히 유비(劉備)에 충성을 다했다. 그는 먼저 동오(東吳)로 가 있었던 것은 제갈량(諸葛亮), 서서(徐庶)와 3군데에서 서로 호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적벽에서 승리하면서 우회적으로 유비(劉備)를 구한다. 그리하여 적벽대전(赤壁大戰)이 끝나자 방통(龐統)은 직접 유비에 투신한다. 유비를 곤란하게 하지 않기 위하여 그는 최하층부터 시작하고 노숙(魯肅)과 제갈량(諸葛亮)의 추천서를 내놓지 않는다. 과연 그는 뢰양(耒陽)에서 자신의 진정한 실력을 보여 주여 유비(劉備)의 마음을 얻는다. 그러자 제갈량(諸葛亮)도 어쩔 수 없이 방통(龐統)이 자신보다 10배가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방통이 만일 누군가의 사람이 되고자 했다면 그는 어쨌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문을 두드려 여는 재주도 없으면서 감히 "봉추(鳳雛)"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당초 조조(曹操)의 수채(水寨)에도 마음대로 드나들었고 동오의 '면접시험'때에는 손권에 부닥쳤는데 이것은 밉보이지 않으면서 몸을 빠져나가기 위한 것이었다.
제갈량(諸葛亮)에 대하여 이미 ‘삼국연의의 삼국오방(三國五方) 구조 파해’ 등 글에서 상세하게 그가 출산하기 전에 이미 반유비, 탈천하의 웅심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이것이 바로 "여러 사람들이 공명(孔明)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으나 그는 그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에 숨은 의미(意味)이다. 다만 그들 4형제가 서로 다른 뜻을 가진 것도 완전히 합리적(合理的)이다. 여기서는 길게 언급하지 않겠다.
2. 제갈량은 먼저 방통을 청하고 나중에 방통을 폐하려고 한다. 제갈량(諸葛亮)은 유비(劉備)를 도와서 형주를 차지했다. 그러나 '백성은 강하고 땅은 험한' 서천에 대하여는 어떻게 손을 써야할 지에 대한 계책도 없었다. 어떻게 인의를 가장하는 유비를 설득시켜 유장으로부터 서천을 빼앗게 해야 할 지도 몰랐고 서천으로 가서 다시 한 번 적벽대전(赤壁大戰)을 벌일 생각도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주유(周瑜)의 조문을 한다는 핑계로 동오(東吳)로 가서 자기보다 한 수 높은 방통(龐統)에게 요청한다. 여기서 제갈량(諸葛亮)의 또 다른 속셈은 유씨 종친들 앞에서 자신은 친소관계(親疏關係)를 따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고 자신이 다른 뜻을 품은 것을 숨기고 충성스러운 이미지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은 하나는 형주를 지키고 하나는 서천을 공격한다. 뒤에 유비의 오른팔, 왼팔이 된다,
방통(龐統)은 확실히 제갈량(諸葛亮)보다 재능이 있었다. 그는 유비(劉備)가 형주를 취할 때는 반드시 인의를 가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왜냐하면 그래야 유장의 호감을 얻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유장(劉璋)이 있는 서천으로 와서는 철저히 안면몰수하고 '압박(壓迫)'해야 했다. 이론적으로 그는 그저 '역취순수(逆取順守)'의 네 글자로 유비를 가볍게 설득한다. 전공에 있어서 그는 그저 황충(黃忠), 위연(魏延)이라는 제갈량(諸葛亮)이 버린 두 명의 말장(末將)을 이용하여 서천을 뚫고 들어간다. 그러나 서천을 얻기 직전에 큰 공을 세우기 직전에 사정이 전혀 다르게 바뀐다. 제갈량은 방통에게 사망협박서신을 보낸다. 이 조치는 정욱(程昱)이 서서를 속인 것과 대동소이하다. 정욱(程昱)은 서서의 효심을 이용하여 먼저 서서(徐庶)의 모친을 데려가고 다시 서서를 항복하도록 유인한다. 제갈량(諸葛亮)은 방통(龐統)의 유비에 대한 충성을 이용한다. 유비는 방통을 아주 아꼈으므로 먼저 유비의 마음을 동요시키고 다시 방통을 없애야 했다. 두 음모가(陰謀家)는 마치 배구선수처럼 먼저 공을 상대방의 두 사람 중간으로 스파이크를 넣어서 그들이 서로 양보할 때 실수가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일의 경과는 이렇다. 광한사람 팽양(彭羕)이 유비(劉備)에게 적측에서 누군가가 부강의 물로 위연(魏延), 황충(黃忠)의 부대를 몰살시키려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강성(罡星)이 서방에 있고 태백이 이 땅에 임하니 불길하다.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이 정보는 유비의 수만 명 생명을 구했을 뿐 아니라 적측의 주모자인 냉포(泠苞)를 참하게 되니 화흉위길(化凶爲吉)의 결과가 되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러한 위기를 불러왔는가? 유비이다. 사천장수 냉포(冷苞)는 이전에 위연(魏延)에게 생포된 바 있다. 다만 유비는 그를 석방했다. 위연(魏延)은 "이 자는 돌려보내선 안 됩니다. 한번 벗어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비는 "나는 인의로 사람을 대한다. 그가 나를 배신(背信)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죽고 나살기식의 전선에서 아직 우세를 확립하지도 못한 시기에 이렇게 상황에 부합하지 않게 함부로 인의(仁義)를 남발하는 것은 정말 가소롭기 그지없는 짓이다. 인의는 모두 인의로 보답한다면, 역취(逆取)라는 것이 있을 이유가 있겠는가? 인의를 인의로 보답한다면 조조(曹操)가 땅 한 조각이라도 가질 수 있었겠는가? 이로써 볼 때 유비(劉備)의 인은 이미 우인(愚仁)의 지경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유씨 집안의 유전병(遺傳病)이 발작한 것이다. 이전에 조조를 대항할 때 진인가의(眞仁假義)를 잘 구분했던 때의 그 유비가 아니었다. 이번에 팽양(彭羕)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방통(龐統)은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을 것이다.
막 위험을 벗어난 후 제갈량(諸葛亮)은 마량(馬良)을 보내어 서신을 전한다. "제갈량(諸葛亮)이 밤에 태을수(太乙數)를 꼽아보니 금년이 계사년(癸巳年)이다. 강성이 서방에 있다. 건상을 보니 태백이 낙성지분에 임해있다. 주장수의 몸에 흉다길소하니, 조심하라." 동일한 성상(星象)에 대하여 제갈량은 두 번 째 해석을 내놓는다. 그러나 방통(龐統)은 제갈량의 선의에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그리고는 나아가서 세 번 째 해석을 내놓는다. "방통(龐統)도 태을수를 뽑아보았는데 강성이 이미 서쪽에 있으니 주공이 서천을 얻을 것이지 주공에게 흉사는 없을 것이다. 방통도 역시 천문을 점쳐보니 태백이 낙성에 임하였는데 먼저 냉포(冷苞)를 참하였으니, 이것은 이미 흉조였다. 주공은 의심하지 말고 병사를 진군시켜야 한다." 하나의 성상에 3가지 해석이다.
3. 방통은 유비를 잘 알았다. 그리하여 죽음으로 현자에게 양보한다. 용봉(龍鳳)의 의견차이로 유비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한편으로 그는 방통(龐統)이라는 능력이 뛰어난 모사를 아끼면서 다른 한편으로 모든 앞일을 신처럼 예측하는 제갈량도 믿는다. 만의 하나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하여 유비는 형주로 물러나기로 결정한다. 다음 날 그는 자기의 꿈을 방통에게 얘기한다. "내가 밤에 한 신인을 만났는데 손에는 쇠몽동이를 쥐고 내 오른쪽 엉덩이를 때렸다. 내 엉덩이가 아직도 아픈 것 같다. 이번에 가는 것이 좋지 않지 않을까?" 이전까지 사도(邪道)를 믿지 않던 방통이 어찌 이런 연약하고 무능한 언행을 참아넘길 수 있겠는가?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장사가 전투에 나섬에 죽거나 다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어찌 꿈을 꾼 일로 의심을 품을 것입니까?" 그리고 또 말한다. "주공(周公)은 제갈량에 미혹되어 있다. 그는 방통(龐統)이 혼자서 큰 공을 세우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부러 이런 말을 해서 주공의 마음을 흐트려 놓은 것이다. 마음에 의심이 드니 꿈도 꾸는 것이다. 무슨 흉할 일이 있는가? 방통(龐統)의 이 말을 진심이다. 주공(周公)은 더 이상은 다른 말을 하지 말고 원래 정한 바대로 진공하자" 얼마나 멋있는 말인가? 첫째는 용감하고 둘째는 충성스러우며 셋째는 유물론적이며, 넷째는 공을 탐하는 소인과 같이 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방통(龐統)이 이렇게 말하는 동시에 그의 유비에 대한 충성심은 급전직하한다. 더 이상 유비를 위하여 힘을 쓰고 싶지 않게 되는 것이다. 유비(劉備)는 우인우의(愚仁愚義)할 뿐 아니라 우신(愚信)하기까지 한다. 어디 하나 쓸모가 없는 자인 것이다.
특히 언급해야 할 일은 ‘삼국연의’에서 여러 번 나오는 점성술(占星術)은 나관중이 보기에 모두 사람을 미혹시키는 방술이거나 공심술(空心術)이다. 팽양(彭羕)은 먼저 부강의 지리를 분석한 후 유비가 믿지 않을까봐 성상을 결합해서 말한 것이다. 방통(龐統)은 성상을 필승의 신념을 주려는 심리적인 암시로 활용했다. 만일 점성술이 진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제갈량과 방통은 왜 부강의 위험을 예측하지 못했는가? 그들 둘이 팽양(彭羕)에 미치지 못한단 말인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삼국연의(三國演義)’의 모사는 맹세를 할 때 "죽음"을 언급하는 경우가 드물다. 일단 이 말을 꺼내면 바로 죽을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곽가(郭嘉)는 북벌 때 조조(曹操)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는 승상의 대은에 감복합니다. 비록 죽더라도 만의 하나를 갚지 못 하겠습니다" 여기서 방통은 곽가와 마찬가지로 내심으로는 주공(周公)에 반대하지만 겉으로는 충의를 가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개인생사와 국가앞날의 사이에서 후자를 택한다. 비록 곽가는 유비가 어떤 사람인지를 몰랐지만 최소한 그의 신유가사상이 조조(曹操)의 신법가사상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알았다. 방통(龐統)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그는 제갈량(諸葛亮)이 나중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줄은 몰랐지만 최소한 그의 "유가법가혼합"이 유비(劉備)의 신유가보다 뛰어나고 미래의 발전공간이 더욱 크다는 것을 알았다.
방통(龐統)이 충의의 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든 속으로든 직접적으로 주공(周公)에 반기를 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도 천하를 차지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제갈량(諸葛亮)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한다. 방통은 체조운동선수처럼 앞으로 나가는 관성이 너무 커서 멈출 수가 없을 때, 임시조치로 절묘한 뒤집기를 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유비에 충성하고 그를 대신하여 죽은 것이지만 실제로는 유비를 차도살인(借刀殺人)하는 것이다. 동작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자신의 남자와 전사로서의 존엄을 유지한다. 전장터에서 죽을지 언정 도망병이 되지는 않는다. 이때의 방통은 물러나서 목숨을 온전히 보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유비처럼 생을 탐하고 죽음을 무서워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2. 자기의 죽음으로 서천정벌의 본질을 바꾸고자 한다. 침략전을 복수전으로. 3. 자기의 죽음의 귀책을 유비에게 돌렸다. 왜 그는 오래 타던 말이 종래 그런 적이 없었는데 돌연 말굽을 잃는가. 그도 의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말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던가? 아니다. 그는 유비(劉備)가 이러한 미신이 있는 것을 알고 그의 방식대로 놀아준 것이다. 그리하여 유비는 그에게 관심을 표하기 위하여 그와 말을 바꾼다. 유비의 말을 타고 죽는 것은 결국 그 책임을 유비에게 돌릴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유비는 제갈량(諸葛亮)에게 잘못을 추궁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꿈에 신인이 엉덩이를 때리는 것을 보았다는 것은 잠재의식 속에서 제갈량을 의심한다는 것이고 제갈량만이 그의 마음속의 신인이라는 것이다. 4. 그는 죽음을 '낙봉파(落鳳坡)'로 선택하는데 이것은 숙명론적인 유비를 안위시키는 것이다. 나의 명은 죽을 때가 되었다. 그러니 당신을 너무 자책할 것이 없다. 5. 방통(龐統)은 왜 반복적으로 제갈량(諸葛亮)의 서신이 질투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혔을까? 왜 나무가 가득한 좁은 길로 군대를 이끌고 갔을까? 그리고 위연(魏延)의 전대(前隊)와 멀리 떨어졌을까. 자신은 닭 모가지 비틀 힘도 없으면서 가장 위험한 후대(後隊)에 남았는데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위연(魏延)에 바싹 붙어서 행군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원래 방통(龐統)은 행군의 모습으로 제갈량(諸葛亮)에게 자신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나는 기꺼이 전공과 자리를 당신에게 양보하겠다. 당신의 손에 죽는 것도 아니고 당신의 험악한 마음씀씀이를 모르는 것도 아니다.
이로써 볼 때 제갈량은 확실히 방통(龐統)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자가 아니다. 만일 거기에 무슨 관련이 있다면 그것은 제갈량(諸葛亮)이 먼저 장거리심리미사일을 발사했다는 것이다. 다만 방통은 이를 정확하게 막아낸다. 미사일의 진정한 작용은 방통으로 하여금 유비(劉備)가 우인우의한 이외에 겁이 많고 멍청하게 믿는다는 것을 깨닫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군에 반항하려는 결심을 굳혔다. 방통(龐統)은 미사일 소리만 듣고 쓰러진 척 한 것이다.
사실상 방통(龐統)과 같이 천군만마를 지휘할 수 있는 초급모사가 자살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를 쓰러뜨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보다 뛰어난 모사라고 하더라도 어려울 것이다. 승리를 취할 수는 없을지라도 자신의 생명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상대방은 무명의 사천장수 장임(張任)이었음에야. 예를 들어 제갈량(諸葛亮)은 그보다 뛰어난 사마의(司馬懿) 앞에서도 항상 도망칠 수는 있었다.
누구든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적의 화살에 가슴을 꿰뚫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일대봉추가 정교하게 계획한 자살방식이었다는 것을. 세간에 이보다 더한 대지약우(大智若愚), 사신취의(捨身取義)의 행위언어가 있을까? 의문의 여지없이 방통(龐統)은 당시 유일하게 사천을 차지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인물이다. 다만 그는 여명이 오기 직전에 의연히 재능은 자기보다 한 단계 아래이지만 지향(志向)은 한 단계 높은 제갈량(諸葛亮)에게 중계식으로 양보하고 만다.
나관중의 수법은 뛰어나다. 표면적으로 보면 성상(星象)의 3가지 해석이 모두 맞는 것으로 되지만 사실상 모두 인위적인 조종에 따른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더 이상 성상을 기이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4. 공명은 마찬가지의 자태로 자기를 회복하고 사마천하를 이루게 한다. 영웅의 견해는 서로 비슷하다. 공명이 동문친구인 방통(龐統)의 뜻과 흉금을 모르겠는가? 그저 그는 눈물을 닦은 후 바로 사천으로 들어간다. 동시에 반유비의 실질적인 발걸음을 내딛는다. 장비(張飛)와 조운(趙雲)을 전출 보내고 관우 혼자만 형주(荊州)를 지키게 한다. 관우(關羽)부터 시작하여 유비와 이성형제의 끈을 잘라낸다. 제갈량은 최종적으로 방통(龐統)의 바람을 헛되이 하지 않는다. 먼저 유장(劉璋), 유비를 멸하고 서천에서 유비 촉한의 인정(仁政)보다 선진적인 유법혼합신정을 펼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제갈량(諸葛亮)이 나중에 똑같은 진퇴양난의 지경에 처했을 때 그는 방통(龐統)을 본받아 이성적으로 현인에게 양보한다. 겉으로는 촉한에 충성하면서 속으로는 사마의(司馬懿)에게 투항한다. 그는 사마의(司馬懿)의 양모는 자기보다 100배가 뛰어나고 음모(陰謀)는 자기보다 10배가 뛰어나다는 것을 안다.
많은 모사들인 곽가(郭嘉)로부터 정욱(程昱)까지, 서서(徐庶)로부터 제갈량(諸葛亮)까지, 방통(龐統)까지, 특기와 가치관(價値觀)은 아마도 각자 달랐을 것이다. 다만 모두 하나같이 사나이들이다. 물러서지 않고 강인한 사람들이다 일생을 후회(後悔) 없이 살고 모조리 불사른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의문을 지녔다. 유비(劉備)는 일용일봉(一龍一鳳)을 얻었는데 왜 천하를 얻지 못했을까? 원래 그는 그저 봉의 털, 용의 뿔만을 만졌을 뿐이다. 진정으로 그들을 얻은 적은 없다. 사마소(司馬昭)만이 승룡가봉(乘龍駕鳳, 용을 타고 봉을 부리다)의 능력을 지녔다. 등애(鄧艾)가 말한 "봉혜봉혜, 고시일봉(鳳兮鳳兮, 故是一鳳)"이라는 말을 기억하는가? 종회(鐘會)가 정군산에서 제갈량의 현신을 감응(感應)한 것을 기억하는가? 이것은 바로 등애(鄧艾)가 방통(龐統)식의 봉이고 종회(鍾會)가 제갈량(諸葛亮)식의 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일충일역(一忠一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