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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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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 삼국지와 역사상 초선(貂蟬)은 실재하지 않고 소설가들이 꾸며낸 이름

图片信息 【貂蝉】 貂蝉,古代四大美人中数她最不可捉摸,因为人们至...


초선(貂蟬)은 서시, 왕소군, 양귀비와 함께 중국의 4대 미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왕윤의 수양딸로 등장해 동탁(董卓)과 여포(呂布)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여포가 동탁의 이름 없는 시녀와 염문(艷聞)을 가졌다는 정사의 기록과 왕윤(王允)이 여포를 부추겨 동탁을 죽이게 했다는 사실을 연의에서 각색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초선(貂蟬)이라고 하면 남녀노소 모르는 사람이 없다. 고전소설 '삼국연의(三國志演義)'에 상세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녀는 삼국시대의 미녀로서, 사도(司徒) 왕윤(王允)의 집안에 있는 가기(歌妓)였는데 왕윤을 도와 동탁을 제거하기 위하여 ‘연환계(連環計)’를 써서 동탁과 여포의 사이를 이간시켰고 여포로 하여금 동탁(董卓)을 제거하게 하였으며 나중에 여포의 처가 된다. 그러나 정사(正史)를 살펴보면 초선은 나오지 않는다. 삼국지의 ‘여포전(呂布傳)'에는 그저 여포가 동탁의 시비(侍婢)와 사통(私通)하였다는 말이 나올 뿐 시비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소설가(小說家)는 정녕 아무 것도 없는데서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란 말인가?

성도(成都) 북쪽교외의 한 문화중심의 대(代)씨 성의 간부에 의하면 1971년에 현지에서 철로지선을 만들 때 일찍이 큰 묘를 파낸 적이 있는데 묘안에 두개의 큰 비가 있었으며 하나는 예서(隸書)로 하나는 전서(篆書)로 되어 있었는데 비문의 기재에 의하면 묘혈(墓穴)의 주인이 바로 초선(貂蟬)이었다고 한다. 68세의 노인인 증흥발(曾興發)의 회고에 의하면 1971년 5월의 어느 날 성도철로국의 어떤 공정대(工程隊)가 이곳에서 철로를 놓았는데 포크레인으로 파다가 길이 약 8미터, 넓이 약 6미터, 깊이 약 4미터의 큰 구멍을 발견하였으며 사방의 벽은 모두 채색벽화(彩色壁畫)로 되어 있었다. 이어서 두 개의 비석을 발굴한다. 증흥발(曾興發)은 예서로 된 비문을 집으로 가져왔는데 비는 약 80센티미터의 네모난 것이었고 두께는 약 6센티미터였으며 청회색이었고 50킬로그램쯤 되었다. 전서비(篆書碑)는 마을의 아이들이 마구 쳐서 부숴버렸고 예서비(隸書碑)는 나중에 다른 사람이 가져가버렸다. 성도시(成都市) 38중학의 은퇴한 역사교사인 임요청(林耀清)은 그가 당시 친히 이 비문을 보았다고 한다. 아마도 초선(貂蟬)의 장녀의 비였다고 한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부인은 초선의 장녀(長女)라 부인을 따라 촉에 들어오고…”라고 되어 있었다고 한다.

왕국유선생(王國維先生)은 지상문헌과 지하문물은 서로 방증이 될 수 있고 하였다. 지금까지 초선(貂蟬)에 관한 역사문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당나라 사람의 기록에서 일찍이 사서에서 조선(刁蟬)에 대하여 기재한 내용을 발견했다. 당나라 '개원점경(開元占經)' 이 책은 현재 남아서 전해져 있고 권33에는 이런 말이 있다. “형혹(熒惑)이 수녀(須女)를 범한다. 점의 주석에서 말하기를 '한서통지(漢書通誌)' “조조(曹操)가 뜻을 얻지 못하여 먼저 동탁(董卓)을 유인하고자 조선(刁蟬)을 바쳐 그를 미혹(迷惑)되게 하였다” 유감스러운 것은 '한서통지'는 지금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저 위의 십여 글자를 가지고 고증(考證)해볼 수밖에 없다.

이 '개원점경(開元占經)'은 당나라 개원연간에 만들어진 일종의 점성학 책이다. 여기서 “형혹(熒惑)”이라는 것은 화성(火星)을 말한다. 화성이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여 사람을 미혹(迷惑)시킨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을 얻었다. “수녀(須女)”라 함은 이십팔수 중 여수(女宿)를 의미한다. 4개의 별이 있는데 위치는 직녀성(織女星)의 남쪽이다. 현대천문학(現代天文學)에서는 물병자리의 네 개 별이다. 여기서 가리키는 바는 화성이 여수로 운행한다는 것을 말한다. '한서통지(漢書通誌)'에서 말하는 것은 조조가 조선(刁蟬)을 바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 희곡에서는 왕윤(王允)이 초선(貂蟬)을 바쳤다는 것이다. 그 목적은 모두 동탁을 처리하려는 것이다. 혹시 조조가 “치세의 능신(能臣)이요 난세의 간웅(奸雄)”이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조조(曹操)가 조선을 바친 것을 왕윤(王胤)이 초선을 바친 것으로 바꾸지는 않았을까?

현재 중요한 문제는 소설가들이 말하는 “초선(貂蟬)”이 이미 실전된 '한서통지'에서 말하는 “조선(刁蟬)”과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 하는 점이다. 이 미녀의 성은 초(貂)이고 이름이 선(蟬)인 것으로 보인다. 이 “초”씨성은 '만성통보(萬姓統譜). 소운(邵芸)'에서 “초발(貂勃), 제나라의 신하. '성원'에 나온다”고 되어 있다. '전국책(戰國策). 제책6'에는 “초발(貂勃)이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는 말이 나온다.

'개원점경(開元占經)'에서 인용한 '한서통지(漢書通誌)'의 “조선(刁蟬)”의 성 “조(刁)”는 '통지.씨족략4'에 “조씨(刁氏). '풍속통의(風俗通儀)' ‘제나라 대부 수조(竪刁)의 후손이다”라고 하여 ‘조씨’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청나라 때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日知錄)' 권23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씨족의 책에서 진한이전을 언급하는 것은 대부분 믿기 어렵다….도(刀, 刁)씨는 '성보'에서 제나라 대부 수도(竪刀, 竪刁)의 후예이다. 호삼성(胡三省)이 말하기를 ‘수도가 어찌 후예가 없겠는가? '한서(漢書). 화식전(貨殖傳)'에 도간(刀間)이 있다. 고서에서는 도(刀)와 초(貂)가 통하고 제상왕(齊上王) 때에 초발(貂勃)이 있다” 황여성이 전씨의 글을 인용한데서는 “도(刀)에는 초(貂)의 발음이 있다. 나중에는 구별하여 조(刁)라고 하였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고대의 성씨 초(貂)는 조(刁)로 쓰기도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소설가가 쓴 왕윤(王允)이 “초선(貂蟬)”을 바쳤다는 내용은 즉 사서 '한서통지(漢書通誌)'에서 언급한 조조가 바쳤다는 바로 그 “조선(刁蟬)”이다. 소설가가 말한 “조선(刁蟬)”은 역사상 확실히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미녀는 일찍이 동탁(董卓)을 처리하는데 조조(曹操)를 도와준 적이 있었던 것인데 나중에 소설에서는 왕윤(王允)으로 바꾸어 썼다.

다시 말해서 초선(貂蟬)은 비록 삼국지 상에서는 가공의 인물이지만 이에 해당되는 실존인물(實存人物)은 있었다. 정사 후한서 여포전(呂布傳)에 의하면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밀통(密通)을 하고 있는데 계속 밀통하다가 동탁(董卓)이 이를 알자 여포에게 수극을 던지며 둘의 연애를 반대했다고 나온다. 이를 이용하여 왕윤(王允)이 여포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결국 동탁을 죽이도록 만든다. 정사 후한서 여포전(呂布傳)에 의하면 여포와 밀애를 한 이 동탁의 시녀는 이름이 알려진 바 없으며 왕윤(王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나관중(罗贯中)은 이 사실에 대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집필할 때 동탁의 시녀 대신 왕윤의 양녀라는 설정으로 변경하고 초선(貂蟬)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초선(貂蟬)은 비록 삼국지 상에서는 가공의 인물이지만 이에 해당되는 실존인물은 있었다. 정사 후한서 여포전(呂布傳)에 의하면 궁중에서는 초선관(貂蝉官)이라는 관(冠)을 관리하는 시녀가 있었는데 이 시녀의 관직 이름이 초선(貂蟬)이였다. 여포는 동탁의 초선관(貂蝉官)을 관리하는 초선과 밀통을 하고 있는데 계속 밀통하다가 동탁이 이를 알자 여포에게 수극을 던지며 둘의 연애를 반대했다고 나온다. 이를 이용하여 왕윤(王允)이 여포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결국 동탁을 죽이도록 만든다. 정사 후한서 여포전(呂布傳)에 의하면 여포와 밀애를 한 이 동탁의 시녀는 직책이 초선이였으며 이름이 알려진 바 없으며 왕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나관중(罗贯中)은 이 사실에 대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집필할 때 동탁(董卓)의 시녀 대신 왕윤(王允)의 양녀라는 설정으로 변경하고 초선(貂蟬)이라는 관직 이름을 이 양녀의 개인 이름으로 고쳐서 묘사했다.

2000년 6월 서천(西川)기차역 근처에서 한나라 시대의 무덤이 발굴(發掘)되었는데 그 안에 사람의 다리뼈와 머리카락 외에 '여인은 초선(貂蟬)의 장녀로 어미를 따라 촉으로 들어갔다는 글과 `초선(貂蟬)은 왕윤의 가기(노래와 연주를 하는 종)로 염제를 따라 촉(蜀)으로 들어왔다'라는 글이 새겨진 묘비(墓碑)가 발굴되었고 고고학자(考古學者)들은 이 무덤이 초선(貂蟬)의 것인지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지만 묘비에 새겨진 글을 통해 사람들은 이 무덤의 주인공은 초선(貂蟬)이며 그녀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초선(貂蟬)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 아니며 그 이전에도 다른 작품에서 등장하였다. 원나라 때의 잡극인 ’연환계‘에서 초선(貂蟬)은 흔주 목이촌 임앙의 딸인 임홍창(林紅昌)으로 영제 때 궁녀로 선발되었다가 정건양(丁建陽)에게 하사되었다고 나온다. 그때 여포(呂布)를 만나 그 아내가 되었고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일어나 헤어졌다가 나중에 왕윤으로 말미암아 여포와 재회한다. 또한 이 잡극에서는 초선(貂蟬)의 뜻을 “담비의 꼬리와 매미의 날개”라고 풀고 있다. 원나라 때의 소설인 ’삼국지평화(三國志平和)‘에서 초선은 본래 임씨이고 어릴 때의 이름이 초선(貂蟬)이며 남편은 여포라고 하였다. 임조부(臨洮府)에 있을 때부터 여포와 떨어지게 되었다고 나온다. 이 소설에서는 왕윤(王允)이 동탁을 청해 초선(貂蟬)을 바치겠다고 한 뒤 여포를 초대하여 부부를 만나게 하여 갈등을 일으킨다. 대체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이전의 작품에서는 초선은 동탁(董卓)이나 왕윤(王允)을 만나기 이전부터 이미 여포(呂布)의 아내였다는 설정이 주류를 이룬다.

초선(貂蟬)과 관련하여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사도(司徒) 왕윤(王允)의 가기이다. 일설에는 양녀라고도 한다. 동탁(童卓)이 폭정을 잡을 당시 왕윤은 조조(曹操)에게 칠성검(七星劍)을 주며 동탁 암살을 꾀했지만 실패를 하였고 초선의 제의로 또는 왕윤(王允)의 명으로 동탁과 여포(呂布)를 이간질시키는 연환계(連環計)를 펼쳐 동탁을 죽인다. 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나타나는 초선(貂蟬)의 모습은 크게 두 모습인데 하나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충의지사(忠義志士)이며 다른 하나는 남편의 앞길을 가로막는 여인 또는 여자의 치마폭에 싸여 대사를 그르치는 남편의 아내라는 모습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초선(貂蟬)은 여포와 정을 통한 동탁의 개인 시녀를 기본 베이스로 만들어진 인물로 나관중은 이 여인에게 초선(貂蟬)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후 동탁(董卓)의 시녀가 아닌 왕윤(王允)의 양녀로 묘사했다.

충의지사인 초선(貂蟬)의 모습에는 유약한 여인이 모습과 마음이 강직한 지사의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다. 왕윤(王允)이 동탁(董卓)을 제거하지 못해 애를 태울 때 “소용이 된다면 만 번 죽어도 사양하지 않겠다”라는 요지의 말을 한다. 왕윤(王允)이 초선의 말에 답하자 초선(貂蟬)은 다시 말하기를 “어찌 대감의 일을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겠느냐?”라는 요지(要旨)의 말을 한다. 동탁(董卓)이 죽은 뒤 여포가 미오성을 공격하고 초선(貂蟬)을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는 이야기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이유가 여포(呂布)에게 작은 칼을 던져 죽이려 했으나 결국 초선(貂蟬)이 죽었다고 한다.

초선(貂蟬)은 남편의 대사를 그르치는 여인으로 등장하는데 이에 대해 초선보다는 여포(呂布)가 여자의 치마폭에 싸여 대사를 그르치는 사람임을 나타내는 문학적 장치라고 해석(解釋)하는 사람이 많다. 한편으로는 초선(貂蟬)이 실존 인물이 아니기에 서로 상반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보기도 한다. 이런 관점(觀點)에서 보면 초선(貂蟬)은 철저히 연약하고 이기적(利己的)인 여자로서 그려진다. 이 때문에 일부 삼국지(三國志)의 저자들은 이 부분의 초선이 여포(呂布)가 동탁(董卓)을 죽일 무렵에 등장한 초선(貂蟬)과 별개의 인물이며 '가짜 초선'이라고 묘사하기까지도 한다.

여포(呂布)가 조조(曹操)의 공격을 받고 성에 고립되었을 때 성을 사수(死守)할 것을 고집하자 진궁(陳宮)이 나서서 고립되면 더욱 위험하니 성 밖에 나가서 지친 조조군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主張)한다. 이 일을 여포가 엄씨와 초선(貂蟬)에게 말하자 초선(貂蟬)이 “우리를 버리고 함부로 군사를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라고 애원한다.

초선(貂蟬)은 가상 인물이기 때문에 여러 작품과 야사(野史)에서 새롭게 다루어지고 있다. 동탁(董卓)이 죽은 직후 곧바로 자살(自殺)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때문에 연의에서는 초선(貂蟬)이라는 이름도, 외모도 똑같은 다른 여인을 여포의 부인으로 다시 나타나게 해야만 했다. 여포 사후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다가 이전에 본 관우(關羽)에게 반하여 관우를 끝까지 모셨다는 얘기도 있다. 관우를 처음 봤을 때 서로 반했다. 고우영(高羽榮) 삼국지에서는 여포(呂布)를 최대한 좋지 않은 쪽으로 몰고 가기 위해 여포(呂布)가 아닌 왕윤과 사랑하는 사이로 묘사되며 자결한 후 그 시체가 여포에 의해 강간당한 것으로 묘사했다. 관우(關羽)의 연인이 되었지만 관우의 손에 죽었다고 하기도 한다.

모 만화 삼국지에서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비슷한 스토리로 전가가 된다. 초선(貂蟬)과 여포가 만나는데 실제로 초선은 여포(呂布)에 마음을 두었고 만나서 서로 대화를 하던 그 도중 이윤이 여포(呂布)를 죽이려고 던진 단검에 맞아 살해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윤(伊尹)은 단검으로 여포를 죽이려다가 초선(貂蟬)이 살해당하고 이윤이 단검을 들어서 "네 이놈 여포야 정원과 동탁(董卓) 두 양부를 죽인 너! 어찌 천벌이 없을 소냐!" 하며 여포(呂布)를 죽이려 하자 오히려 이윤伊尹)이 여포의 칼에 맞아죽는다.

정사 ’삼국지(三國志)‘에는 초선(貂蟬)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고 그저 동탁(董卓)의 “시비(侍婢)”라고만 하고 있다. 원문 ’포승탁시비사통(布與卓侍婢私通)‘의 해석에 의하면 여포(呂布)가 동탁(董卓)의 시비와 사사로이 정(情)을 통했다. 원래 초선(貂蟬)이라는 이름 역시 각색된 나관중(罗贯中) 또는 다른 사람에 의해 전해진 것이고 그 본명(本名)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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