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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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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중과 일부 작가들 호기심과 허구로 만들어낸 초선의 최후에 대한 7가지 판본

图片信息 关公月下斩貂蝉之事的四种说法


초선(貂蟬)에 대하여 많은 페이지를 할애(割愛)했던 나관중(羅貫中)은 장안병변(長安兵變)후의 초선의 행방(行方)에 대하여는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가치(存在價値)가 없어졌으므로 다시 버림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일부 작가들은 여전히 그녀의 최후에 대하여 호기심(好奇心)을 놓치지 않았고 허구(虛構)의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그리고 결말(結末)에 있어서는 "참사(慘死)"와 "선종(善終)"의 두 계열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참사계열(慘死系列)을 보자. 여기는 최소한 4개의 버전이 있다. 첫째 버전: 곤극(昆劇) '참초(斬貂)'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여포(呂布)가 백문루(白門樓)에서 조조(曹操)에게 참수된 후 그의 처인 초선(貂蟬)은 장비(張飛)에 의하여 관우에게 보내어진다. 그러나 관우(關羽)는 이 더럽혀진 미녀를 받아들이기를 거절(拒絶)하면서 그녀가 바람기가 있고 조삼모사(朝三暮四)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죽는 것만이 그녀의 절개(節槪)를 보존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밤에 초선(貂蟬)을 방으로 부른 후에 검을 뽑아 그녀를 등 아래에서 베어버린다.

둘째 버전: 잡극(雜劇) '관공월하참초선(關公月下斬貂蟬)'은 조조가 미색으로 관우를 미혹(迷惑)시켜 자신을 위하여 일하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초선을 보내어 유혹한다. 초선은 혼신(渾身)의 힘을 다하여 유혹(誘惑)하지만 관우는 마음이 돌과 같이 굳어서 그녀를 제거함으로써 후환(後患)을 제거한다. 이것은 특히 명나라 이후에 초선(貂蟬)과 관우의 이미지를 유교(儒敎)의 기준에 맞게 각색하다보니 더욱 유교적인 기준(基準)에 근접하게 된다.

셋째 버전: 명극(明劇) '관공과초선' 극중의 초선은 관우(關羽)에게 내심의 억울함을 모두 호소(呼訴)하며 그녀가 미인계(美人計)를 써서 한황실을 위하여 악적을 제거한 경력(經歷)을 얘기하여 관우의 사랑을 얻는다. 그러나 관우(關羽)는 한 마음으로 한황실의 부흥(復興)을 위하여 헌신(獻身)하고자 결심함에 따라 초선은 할 수 없이 자결(自決)하며 죽음으로써 자신의 정치적인 절개(節槪)를 드러내고자 한다.

넷째 버전: 초선은 관우(關羽)가 도와주어 관우의 비호(庇護) 하에 도망쳐서 삭발(削髮)하고 여승이 된다. 조조(曹操)가 사람을 보내서 추적한다. 초선(貂蟬)은 자신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서로 다치고 상하게 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스스로 검으로 자결하고 만다. 그녀의 혼은 국가대의(國家大義)를 위하여 바쳐진 것이다.

선종계열은 대체로 세 가지이다. 첫째 버전: 초선(貂蟬)은 출가해서 여승이 된 후에 잡극 '금운당암정연환계(錦雲堂暗定連環計)'를 익명으로 쓴다는 것이다. 이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의 정치적인 공헌(貢獻)을 알린 후에 최후로 여승암자에서 천수(天壽)를 다하고 죽는다.

둘째 버전: 관우는 여색(女色)을 좋아하지 않아 초선을 그녀의 고향인 목이촌(木耳村)으로 돌려보낸다. 초선은 평생을 수절(守節)하고 개가하지 않았다. 동네사람들이 그녀를 위하여 묘를 만들고 제사(祭祀)를 지내준다. 초선(貂蟬)은 생활을 위하여 연극반을 만들어 연극을 연출(演出)하였다고 한다. 그녀가 만들었다는 희대(戱臺)는 목이촌의 관광명소이다.

셋째 버전: 초선(貂蟬)은 관우의 소첩(小妾)이 되고 성도로 보내어져서 성도(成都)에 살게 한다. 관우(關羽)는 원래 공을 이룬 후에 천천히 즐기고자 하였으나 전투에서 패하여 사망(死亡)하고 만다. 가련한 초선은 한중지방(漢中地方)으로 가서 적막한 촌부가 된다.

덤으로 초선(貂禪) : 초선(貂蟬)의 아름다움에 달이 숨는다는 폐월(閉月)이라는 말이 생겨난다. 초선(貂蝉)은 한나라 때 궁인으로 중국 4대 미녀 중 한명으로 '삼국연의(三国演义)'에 나오는 인물이며 야사(野史)에 의하면 본래의 성은 곽(霍)으로 산서성(山西省) 흔주(忻州)사람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聰明)하여서 한나라의 궁인으로 뽑힌다. 궁중의 머리장식, 관면(冠冕)을 관리하는 여관이어서 담비를 관리하는 ‘초선관(貂蝉官)’으로 불린다. 이로 인해 십상시란 때 이를 피해 출궁해 사도 왕윤(王允)을 위하여 의녀(義女)가 되기로 한다. 

'삼국연의(三國演義)'에 의하면 그녀는 동탁(董卓)이 권력과 위세를 펼칠 때 역적이던 동탁과 여포(呂布)를 이간질시킨다. 초선은 용감하나 무모한 여포(吕布)를 원수로 만들어 난을 일으키도록 하여 두 사람 사이가 벌어지게 해 여포가 동탁을 죽이고 나중에 여포도 죽이는 임무를 수행(遂行)해낸다. 여포가 죽은 후 조조(曹操)는 초선을 허창(许昌)에 데리고 들어가서 좌승상 부중에 시녀로 둔다. 관우가 토산에 주둔(駐屯)하다 조조에게 항복한 이후에 조조는 관우(關羽)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미녀 10인을 하사(下賜)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그 중에 초선(貂蟬)이 포함되었고 최고의 미인은 초선이었는데 조조가 관우(關羽)와 의형제와의 사이를 벌리기 위하여 초선을 이용(利用)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일생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일설에 조조가 초선을 관우(關羽)에게 보내었는데 초선은 관우에게 은혜(恩惠)를 갚기 위해 출궁(出宮)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그 담대함에 감동하고는 눈을 감고 아무 말 없이 손을 흔들어 나가게 하자 초선은 절개어린 뜻을 전하고 방에서 돌아와 자결하는데 경극으로'봉의정(凤仪亭)'이 있는데 이는 이러한 고사를 말한 것이다. 

전설상 초선(貂蟬)은 인간 세상에 태어나 3년 동안 복숭아 살구꽃이 피고 지는 곳에 사는데 초선은 오시 밤에 달에게 인사를 하자 달 속의 상아(嫦娥)가 스스로 부끄러워서 몰래 달가운데로 숨어버린다. 초선(貂蟬)의 몸 자태는 아리따워 가는  귀에 푸른 옥이요, 걸음 걷는 모습은 버드나무와 같고 글의 운치는 남음이 있고 초선의 미는 웅대한 경관(景觀)이었다. 그런데 초선의 출신과 삶이 나관중(羅貫中)이 삼국지를 꾸미기 위해 만들어 낸 가공의 인물이라는 설에서부터 실제 인물이라는 설이 있는 등 출생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설이 존재한다. 

나관중의 ‘삼국연의三国演义’에는 여포가 백문루(白門樓)에서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데 번인(繁仁)은 초선의 성은 임씨로 자는 홍창(红昌)이며 병주(并州) 오원군(五原郡) 구원현(九原县) 목이촌(木耳村)에서 출생하여 15세 때에 선발(選拔)되어 입궁하였고 조신들이 쓰는 담비(한대 시종관원의 모자장식)관을 관장하여 이름이 초선이 되었다. 한나라 말 궁정(宮廷)에서 풍운이 이는데 사도 왕윤(王允)이 초선을 의녀(义女)로서 거두기 위하여 출궁을 시킨다. 머지않아 동탁이 권력을 전횡하는데 왕윤(王允)은 동탁과 여포가 호색하는 것을 이용하여 초선(貂蟬)으로 하여금 연환계(连环计; 미인계)를 이용해 여포가 동탁을 죽이도록 사주해 공훈을 세운다. 그 후 초선은 여포의 첩이 되어서 백문루(白门楼)에서 여포는 운명은 달리 한다. 조조(曹操)는 초선이 도원형제에게 다시 연환계(連環計)를 쓰도록 하여 도원형제간에 불화를 일으키도록 하나 관우(關羽)가 도망하는 것을 도와주어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초선은 임씨이고 여포의 처이기 때문에 왕윤(王允)이 사용한 연환계는 대단히 비열(鄙劣)한 행위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그리고 초선의 고향에 대해서는 흔주시(忻州市) 동남편에 있는 3공리(三公里) 목지촌(木芝村)은 태원(太原)이나 흔주(忻州)에서 우왕禹王)의 동굴에 가는 도중에 있다. 목지촌은 원래 성할 때에는 목이여서 옛이름은 목이촌(木耳村)이다. 후에는 마을 가운데 느티나무아래에서 1천년이나 된 영지버섯이 발견되어 이를 목지촌(木芝村)이라 바뀌어 부르게 되었다. 전하는 바로는 일찍이 초선(貂蟬)이 출생되기 3년 전부터 마을 안에 복숭아와 살구나무의 꽃이 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초선의 아름다움에 꽃이 부끄러워할 정도의 미모(美貌)이기 때문에 마을가운데평지 거리에는 패루(牌楼)가 있다. 전전(前殿), 후전(后殿), 왕윤가(王允街)、초선 희곡무대(貂蝉戏台)와 초선묘(貂蝉墓)가 있다.  

세월이 가면서 이러한 건축물은 모두 폐허가 되고 묘총은 재난과 잘못 다루어 평지가 되고 유지(遗址)가운데에는 옛비와 돌구조물, 동화폐, 도자기 잔편이 출토되기도 하였는데 모두 초선과 관련된 것이다. 지금 관광경점(觀光景点)은 초선능원(貂蟬陵园)이라고 불리우고 근년에 묘지 원래 터 위에는 향민(鄕民)에 의해 복원된 것이다. 능원(陵園)의 위치는 마을의 서남쪽으로 4천여m이고 사방에는 붉고 누런 기와 파랑식의 용모양의 담장이 쳐져 빛난다.

문 처마에는 ‘초선능원(貂蝉陵园)’이라는 가로 편액이 걸려 있는데 양 옆에는 ‘폐월수화(闭月羞花)’라고 씌어져 있어 남자의 발걸음을 잡는 글 몇 줄이 써 있고 능지역 북쪽 터안에는 배월정(拜月亭)과 봉의정(凤仪亭)이 있다. 뒷부분에는 청석묘대가 있고 대 앞에는 초선(貂蟬)의 상과 비가 있는데 그야말로 초선은 걸음걸이는 한가롭고 단아한 자태(姿態)로 있는데 달도 숨고 꽃도 부끄러운 미모인 ‘폐월수화(闭月羞花)’의 용모라고 한다. 

민간전설(民間傳說)에 의하면 도원삼형제가 득세한 후 초선(貂蟬)은 옛 고향에 돌려보내져 여기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초선은 검으로 자결하여 관우가 이를 알고는 유체를 고향으로 호송(護送)하여 안장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후전각에는 관우의 상이 있고 앞 전각(殿閣)에는 초선을 연출하는 무대가 표시되어 있다. 모두 관우(關羽)가 죽이기를 거절하고 호송한 은혜(恩惠)를 보답하기 위한 것이다. 정양현(定襄县) 동남의 중하촌은 여포(呂布)의 고향인데 곽청천(霍清泉)이 있다. 

“지혜가 적토마를 사로잡았다(智擒赤兔马)”, “찌그러진 부자나무(歪脖子树)”라는 민간전설이 전하는데 여포(呂布)에 관련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속담에 “흔주 (忻州)에는 호녀가 없고 정양(定襄)에는 호남이 없다고 하는데 이는 초선과 여포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흔주(忻州)에는 다시는 멋진 미인이 나지 않고 정양에도 출사(出仕)할 만한 남자가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이외에도 초선(貂蟬)의 고향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는데 임조(临洮), 미지(米脂)라고 하는 설도 있다. 그리고 나관중의 ‘삼국연의(三国演义)’는 극적인 흥미를 위하여 허구로 구성되는데 적토마(赤兔马) 경우 관우가 여포를 쫓아 적토마를 얻을 때 적토마는 이미 성년이 되어 관우(關羽)도 한창 나이가 된다. 관우가 최후에 맥성(麥城)에서 패주해 동오(東吳)에서 죽을 때도 적토마(赤免馬)인데 당시는 50여세이다. 이를 보면 당초 여포가 동탁(董卓)을 쫓아 적토마를 획득(獲得)할 때 적토마(赤兎馬)는 이미 사용되었으니 서기 190년이다. 이때는 동탁(董卓)이 여포(呂布)에게 상으로 말을 주었을 때 이미 10년이 지났을 때로 관우가 맥성(麥城)에 있을 때는 이미 221년이다. 

당초 동탁이 여포(呂布)에게 상으로 막 태어난 말을 주었을 때를 계산하면 관우는 죽을 때 적토마는 31세인데 동물학(動物學) 측면에서 보면 일반적으로 말의 수명은 30∼40년에 불과하다. 적토마(赤免馬)는 당시 죽지는 않았지만 이미 고령이어서 말을 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관중(羅貫中)이 설정한 말 적토마(赤兔马)는 사실 초선이고 양자는 하나로 나관중은 적토마를 써서 초선이 백문루(白門樓) 이후의 신세를 은유적(隱喩的)으로 표현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이름만으로 보더라도 초선의 진짜이름이 임홍창(任红昌)으로 이름의 홍(红)자 하나를 근거삼아 적토(赤兔)의 적赤자 뜻을 새겨 대응시킨 것이다. 그리고 초선이 달을 숭배하였는데 토兔자는 중국민간에서 달을 주관하는 여신(女神) 상아(嫦娥)는 달을 숭배하는 대표적 역할을 하여 왔다. 그녀가 좋아하였던 것이 옥토끼로 생령(生灵)이므로 적토는 바로 초선(貂蟬)이라는 주장이 있고 남방에서는 사람들은 여인을 말(马子)이라고 칭한다.그리고 초선은 관우에 의하여 입교(入敎)되고 관우는 장차 초선(貂蟬)을 출가시켜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설도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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